접대했던 가정의 지체들과 함께..
의정부집회소에서....
10년 혹은 그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에
해후한 형제님과 함께...
(누군가의 머리칼이 더 많이 남았을까?)
주일집회후 떠나기 전...
공식적인 단체사진..
의정부교회는 국내의 교회들의 방문보다는
외국에서 온 지체들의 방문이 많다고...
아마도 비무장지대나 판문점등과 가까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약 170명정도의 성도들의 연합집회와 다음세대(청소년, 청년)들과의
연합집회와 서울교회의 방문등으로 집회소는 거의 꽉찬....
주일집회는 먼저 다음세대의 청년들이 먼저하도록 안배된 후에
특별한 순서없이 부담을 따라 교통하였습니다.
서울교회형제님의 교통...
사실 이렇게 신언들 하시는 모습을 찍은 것은 기록을 남기고자함도 있었지만
전날 ..장소가 바뀐 관계로 잠을 충분히 못잔 나의 눈꺼플을 다스리고자 함도...-,-
어디나..무게있는 형제님들이 있다는 것은 참 격려가 되는 일
사실 교회의 모든 봉사와 운영은 이분들의 중심잡음으로 인해 유지되고 있기에...
중년훈련을 받고 있는 형제님을 따라 니,리 형제님의 사역의 발자취를 따라
중국에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고 온 자매님의 교통...
어제저녁의 프로그램을 주관했던 형제님..지난 번 보다 향상된
프로그램이었다는 평을 드리며...^^
늘 신실한 형제님은 우리의 위로와 든든함.
아직 회복되지 못한 자녀들에 대한 부담을 토로한 자매님,
하지만
주의 회복의 이세들 혹은 자녀들이 모두 교회안으로 사역안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안으로 돌이키는 것은 시간문제~
우리가 간증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한~!!!!
얼마전 어머니가 주님품으로 가신 후 위로가 필요했던 자매님
한면 자신의 남은 날을 돌이켜보고 재고할 기회?
같은 방에서 밤을 지낸? 자매님..
사랑스럽고? 순수한 자매님...
의정부교회 형제님.
연수를 보낸만큼 성장해야한다고 부담을 토했던...
좀은 ..피곤하고 힘들어도 결코 찡얼대거나 떼를 쓰지 않는 너무나
대견한 가희.
예전에 한 소그룹에 있던 형제님이 여기에 계시다닝~~
반가웠음.
그동안 아들도 낳으시고....
우리가 숙박했던 가정의 형제님.
알고보니 서양화를 전공하신...
사실 몇분 교회안에 있다고 들었지만
같은 전공자를 가까이 보기는 첨~!
기회를 잡아서
아들녀석의 취업문제를 상의하여 귀한 소견을 들을 수 있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으니
세심한 주님의 배려에 감사~!!!
너무도 자연스럽게 부엌의 일을 도우시는 손길이 인상깊었던...
접대에 감사드립니다^^
병규형제를 여기서 보다니
예전 중고등부에서 참 의젓하고 의전한 인상그대로
그리고 한층 잘 생겨진 형제를 보게 되어..
이또한 교회생활하면서 얻게 되는 잔잔한 보상.
의정부교회로의 일박이일 방문 첫날은
바지락 칼국수를 먹고
수락산으로 고고~
연세드신 자매님들도 계시고...해서
30분 올라갔다가
30분 내려오는 사이의
간단한 산책이었지만 모두들 참 즐거워들~~~~
볼링치러가자는 말이 언제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집회후 애찬먹으면서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하다가...
실내운동..하다가
아마도....
사실...
집에와서 고민했음
한번도 안했는데 공잡고 그냥 엎어져서...오훗..하면 으쩌나
미리 인터넷으로 볼링공잡는 법과 기본스텝은 찾아보고 갔는데
다행히..자매들 대부분은 첨이라 했으니...
형제님들은 대부분 폼 멋지고 실력괜찮고..
자매들도 대부분 스트라이크 한번정도는 ^^
다들...몸살나지 않았으려나..
그 다음날 종일 꾸벅꾸벅 졸았었는데 ..전...
전에는 이렇게...이분법의 공식으로 구별하였다.
소위 기독교계의 종파는 종교이고
만약 내가
회복안에 있으면 일단은 종교가 아닌 실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라는...
하지만
단지 위치적으로 회복안에서 교회생활하기 때문에
나와 종교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다.
종교는 훨씬 더 개별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종교란 하나님이란 존재가 더 이상 실재적이지 않은 외적인 교리가 되어버린 믿음이다.
많은 말씀을 들어도 읽고 추구해도
그것이 빛이 되지 않고 씻는 물이 되지 않고
내적인 존재의 만져짐이 없다면 나는 종교안에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사람이 근본적으로 망쳐지게 되고 인간적인 면을 상실하게 되는 첩경은
망상에 빠지는 것이란 것도 이즘 발견한다.
제일 참담한 결과는 종교적 망상에 빠지는 것이란 것도 발견한다
하지만
갖가지 망상이란 큰 범주안에
종교적 망상이란 그저 한 작은 범주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망상들이 있는가
국가적으로 혹은 이념적으로 종교적으로 저질러지는 온갖범죄는
국가의 이익, 이념의 관철, 종교적인 정당방위로 인한 것으로
망상에 빠진 국가지도자, 종교권력자들은 양심의 가책은 커녕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그러니 망상에 빠진 사람들에겐 어떤 말도 어떤 권면도 소용없다는 결론이다.
이 세상과 기독교는 그렇게 가도록 놔두라.
다만 주의 회복의 간증은
종교가 아닌 실재로서
스스로 문제가 없다하는 망상이 아닌 참된 빛가운데서 돌이킴으로
각 지방교회의 지체들이 깨어있을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종교적 망상이나
혹 영적 권력을 꿈꾸는 망상을 가진 사람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맑은 물을 유지하는 첩경일 것이다.
인간적으로 직시해야하고 받아들여야하는 상황은
태어날 때 동행하는 이가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을 떠날때 역시 홀로의 진입이라는 것.
믿는 이나 믿지 않은 이나...
즉
구원받은 사람도 구원받지 않은 사람도...
인간적인 끈들, 물질적인 것들, 세상의 모든 것들에서
분리되는 순간인
죽음이
철저히 개별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태어난 시가 다르고
주님이 정한 연한이 각각 다르다는 외적인 상황도 있지만
이땅에서
각각 도달한 영적인 진보,
즉
영적 생명의 각각 성숙한 대로
내세에 진입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후에 하나님에 의해
어떤 종류의 상이던지
또는 어쩔 수 없이 기본적인 구원을 얻되 마치 불가운데 얻는 것 같은
벌을 통과하던지
각각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것 역시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겠지요...
주님은 제자들을 떠나면서
목자없는 양처럼
혹은 집없는 고아처럼 떠돌 그들을 위해
아버지의 집에
처소를 예비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십니다.
이것은
오순절날 그들이 받게 되는 영적세례로 인해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되게 함으로 실제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머리이신 그분에 연결된 단체적인 몸안에서의
지체의 위치를 갖게 됨으로
밖으로는 교회이나
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집안에서의 거처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싯점에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집안에 거하는 실제에 있는가,
주님의 집안에서 나의 약속된 처소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상고해봐야할 것은,
이땅에서 외적인 요소인 교회의 틀이 있지만
즉,
교회모임에 나가고 이런 저런 일과 봉사에 함께 하는
교회의 멤버가 될 수는 있지만
내적인 실제가 없다면
우린 하나님의 집에 있는 거처의 실제를 갖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내세의 보상과 연결되는 것인데
현재의 실제의 어떠함에 따라
내세에
주님이 약속하신대로
거할 처소를
아버지의 집에 갖게 될 것이며,
이 아버지의 집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랑인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영적인 새 예루살렘으로서
현재의 교회의 완결로서의
영적인 의미에서의 거할 단체적인
우리의 처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사실
물질적인 한계와 틀안에 있는 우리로선
현재의 영적인 실제가 어느정도 있더라도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한들
내세에 거하게될 아버지집이
어떠하리란 것을
상상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 약속된 처소가 내세에 있다는 소망이며
죽음...은 단지
그 처소로 진입하기 위한 정거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점점 더 살갑게 다가오는 육신의 죽음의 문제에 대해
자신이 얼마큼 담대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싯점에서....
...............
회복은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한몸의 간증을 위해 일어서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간증일 뿐 아니라 내적으로 모든 믿는 이들에게 열려있는
하나라는 인식으로서
어떻게 보면 쉽고 어떻게 보면 어렵기도 한 이 시대적인 간증이
한국사람들에게는 그다지 감당하기 어려운 미션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한국사람처럼 하나되는 것을 좋아하는? 민족은 없어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한 열명가까운 한국사람들이 중국집에 밥먹으러 간다고 할 때, 거개의 주문시 풍경은
아 모두 짜장면으로 통일하지? 라고 누가 나서면 감히 누구도
아니 나는 다른 거 먹고 싶은데?라고 말하는 이가 ?없는 것이 일반적 풍경입니다.
사실
속으로는 짜장면대신 매운 짬뽕이나 울면이나 등등을 먹고 싶지만 그냥 짜장면을 웃으며 먹으면서
통일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으로 과연 사람들이 서로 융화되었고 느낄 것인가??라는 의문을 뒤로하고....
세상에서뿐 아니라 어쩌면 교회안에서도 하나라는 것을 외적인 통일의 모습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한 지방교회의 성도가 다른 지방교회의 모임에 출석해서 우린 하나라는 것을 강하게 인상받는 것 중의 하나가
그날 교통되는 메시지의 주제가 같은 오늘의 양식을 교통하고 있고 같은 어휘나 용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나
어떤 나라나 어떤 지방의 집회소도 비슷한 실내디자인과 비슷한 형식의 집회순서를 따르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익숙한 편한 분위기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지방에 이주를 했는데, 그 지방의 교회가 만약 오늘의 양식대신 다른 메시지를 추구하거나,
집회소의 실내장식이 좀 다르거나 할 때 즉각적으로 오잉? 이건 뭠닝?하는 의문부호를 몇개쯤 머릿속에 그릴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여긴 좀 분위기가 다른데?주의 회복안의 교회가 맞어?하는 느낌의...
그러나,
진정한 하나란 무엇인가
그리고 진정한 하나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는
모든 나라의 모든 지방의 교회들이 긍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안에서 그리스도의 유기적인 몸을 건축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일 때입니다.
어떤 지방교회가 그 지방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이나 분위기를 교회모임에 가져와 타 지방교회와 차별화된 분위기를 형성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것만은 분명하지만,
밖의 모든 것이 다른 지방의 일반적 형식과 집회분위기와 똑같다고 해도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그 지방만의 교회건축이나 어떤 특정한 사역자의 사역의 구축이라면
그 지방의 교회는 다른 지방의 교회들과 진정한 하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라는 개념이 자기가 속한 지방교회나 지역의 지체들과의 하나라는 관점에만 제한되어 있다면
그 지방의 성도들은 부지불식간에 분리된 하나의 실행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갈망을 위하는 단일한 마음만 있다면 하나를 지키고 간증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수도
있고 많은 외적인 차이들이 문제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안의 복잡한 계산이 깔려있다면, 그리고 그런 복잡함을 가리우고 하나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많은 외적인 제한과 장치를 위해 이런 저런 모색이 있게 되고
말도 많고 탓도 많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갈망과 그의 이상과 그의 한몸의 간증을 위해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사역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유익만을 위해 설 수 있길...............
이즘은 이렇게 대지역별로 여름섞임집회를 가는 것이 서울교회의 대세인듯? 싶습니다.
6대지역은 예전부터 이렇게 여름수련회 스타일로 가는 것이 전례이긴 했지만...
전에 없이 무더운 여름을 보내야했던 2012년엔...에어컨 빵빵한 대강당에서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였습니다.
게다가 황토방으로 용감한 몇팀은 등산으로
아이들은 물놀이로...중간여가도 가졌고..
전라도 쪽 남부지방의 몇몇교회도 동참하였으니
나름 한국의 몇몇지방교회와의 섞임도 되었습니다.
.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또래집단을 형성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이 썰렁한 세상에서
자기나라가 없는 민족은 어딜가나 불이익과 구박을 받기 일쑤이고
가족이 없다는 것은 등대고 비빌 언덕조차 없음을 의미하는 걸
결국 솔로인 사람들은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 하나님의 돌보심을 잃어버린 후에
타락한 사람에게 생긴 생존본능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본능때문일까
교회안에서도 어떤 소지역으로 또는 어떤 지방교회로 이주하면
가장 긴밀히 연결되는 지체...를 만들어야
비로소 그 지역에 안착이 되었다는 느낌을 갖기도 하고
때로는 누구는 누구와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지체란
말을 자연스럽게 쓰게도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이상에 대해 더욱 분명한 분들은
이런 지체와의 연결에 있어 조심스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안에서 어떤 지체와 긴밀히 연결되는 건 필요하나
천연적으로 친밀하지는 말것
특정한 지체와의 깊은 연결대신 균형잡힌 연결을 가질 것
몇몇사람들과 특정한 동그라미를 만들어 닫혀진 그룹을 형성하지 말 것 등등...
영적으로 인간적으로 친밀하면서도
결코 천연적인 끈끈한 맥을 형성하지는 말라는 권면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안에서 지체와 지체간의 건축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묘사입니다.
교회안의 모든 성도들간의 관계는
순수한 동기로 인해 모든 적극적인 것을 공급하되
최종 목적은 신성한 생명을 공급하고 공급받으려는 것이어야합니다.
신성한 생명은 그저 하늘에서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안에서 변화되고 성숙된 지체들의
변화된 인성으로 말미암은 따뜻하고 섬세한 공급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안에서 지체와 지체간의 연결은 결코
가볍게 다루어지거나 부주의한 연결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성도들간의 연결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이루려는 갈망과 이상안에서
제한받고 지지받아야하는 이유도
합당한 공급은
합당한 연결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그의 경륜을 귀히여기고 그의 마음의 갈망과 합한 자들은
마땅히 그의 몸안에서
지체로서의 자신의 위치에서
다른 지체들과 균형잡힌 연결을 가지도록 권면을 받는 것이
절대로 큰 요구나 제한이 아니라
마땅히 스스로 더 조심하고 더 주의하고 더 진지하게 추구해야할
연결인 것입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 얻는 복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물질적인 것을 의미한다면 인간적으로는
꽤나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것이지만 글쎄요~
주님이 승천하신 후 그분을 육신의 눈으로 본 사람이 있을까?는
좀 의심스러운 부분일지....
하지만 주님이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란 말씀은
확실히 영적인 의미였을 것입니다만....
천사들이 하나님을 보는 것은 부하직원이 상사를 보는 것처럼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일일 것이고,
심지어는 사탄조차도 하나님의 보좌에 나아가 믿는 이를 송사하는 일이 허용되는등
영적인 존재들에게는 하나님을 보는 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육신을 입은 사람들, 타락에 타락을 더한 유전자를 물려받고 물려주는
인류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특별한 일인 것을 떠나 괜찮은 일일까요?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요??
구약에서, 구원의 길이 닫혀있는 그런 상황에서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사람에게 복이 아닌 재앙이었습니다.
타락한 사람이 피를 바르지 않고 즉 임시방편으로나마 죄를 덮지않고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자는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물질적인 몸을 입고 작은 사람으로 오신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본다고 하는 것이
재앙이 아닌 복이 되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냥 작고 볼품없게 생긴 목수를 보는 봄을 말하는 것이 아닌
안에 감춰진 하나님을 내적인 시야로 보는 것을 의미하는...
성경에 기록된 한 예로서 베드로의 경우.
베드로가 어느날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그리고 주관적으로 확실하게 본 순간
납죽 엎드려 자기도 모르게 토한 말은..
나는 죄인이로소이다..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빛가운데 사람이 맨먼저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타락함 ,자신의 오염됨, 감히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것을
감당치 못할 죄인인 자신의 처지.
그러나 하나님은 정죄하는 분이 아닌 죄인임을 시인하는 자들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에서 대신 피를 흘리실 작정을 하시고 오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신약의 참된 믿는 이들, 참되게 구원받은 이들은
마음이 순수한 자들로서
이런 순수함이 하나님을 내적인 시야로 볼 수 있었던
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하나님을 보는 복을 계속 가질 수 있음도
다른 것이 아닌
마음이 순수함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을 세상과 타자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존재로 자각하는 시기인 소위 사춘기시절에
가장 먼저 자각하는 건 죽음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할 혹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세계에 대한 의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로 부터 현대까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소망은 영원한 삶과 함께 병들거나 시들지 않는 생명입니다.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고대로 부터 모든 권세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내세를 위한 거대한 무덤, 아니 거대한 집을 건축하고 그안에 쓸 물건들을
자신과 함께 묻었습니다.
이 세상 사람은 갖자 자신의 관념과 바람대로 무덤을 만들고
구약에서도 아브라함은 무덤만큼은 안정된 제대로 된 굴을 사서
내세로 가는 정거장으로 예비한 것처럼,
신약의 믿는 이들 역시 각각 물질적으로 나름의 무덤을 예비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갖고 나름대로의 믿음으로 그 내세를 위한 준비를 하듯,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들 역시 내세, 영원한 성, 더 좋은 본향을 소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현세보다도 내세에 더 무게를 두고 살 뿐 아니라 내세를 위해 현세를 희생하며...
가장 극단적인 본으로서 사도바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 당시의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출세의 길도 열리고 안락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이단의 괴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며
그의 십자가에서의죽음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는 하나님의 구원이었음을 전파하며
험한 여행길과 핍박자들의 공격을 피하여 도망하는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은.....
현세가 아닌 내세,
혼과 영과 몸이 부활의 과정을 거쳐
주님과 똑같이 되는 영광스러운 그 날을 소망삼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만약 내세가 없다면 자신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끔찍한 참수를 당했으며 죽고나서도 좋은 무덤에 안치되지는 못했을 그는
믿는 이가 내세를 위해 어떤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본입니다..........
그외에 제대로 된 묘비나 묻힌 장소도 알려진바없이 순교를 당한
많은 믿는이들을 생각할 때 물질적인 의미에서 좋은 무덤이란
신약시대에 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땅에서는 마침점을 찍는 것이며 내세로 가는
관문이기도 한 영적인 의미로서 좋은 무덤을 준비하는 것의
의미와 의의는 무엇일까?
믿는이에게 있어 무덤이란 끝이 아니라 시작,
그것도 찬란한 신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정거장입니다.
사도바울은 뛰어난 부활을 통해
주님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을 덧입고자하는 갈망이
너무나 커서 차라리 육신의 낮은 몸을 벗는 죽음을 빨리 통과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땅에 살고 있는 사람 모두에게 죽음 그자체는 얼마나 견디기힘든 두려움의 관문인지..하지만
사도바울은 그가 본 이상, 단지 믿음이 아닌
비몽사몽중에 본 삼층천의 광경으로 말미암아 확고한 믿음과 소망을 가졌습니다.
과연 우리 믿는이도 동일하게 담대한 소망으로 육신의 죽음을 통과할 수 있을까요?
비록 우리가 몸안에서인지 아니면 몸 밖에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중에 본 환상이 없다하더라도
믿음과 그로인한 소망으로 무덤저편너머 뛰어난 부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을 하면서 전세계의 교회들을 돌보는 위치에 있는 분들의 교통을 들어보면
실제로 각 교회의 상황도 알게 되고 각 나라의 영적 상황에 대해서도 간파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안에서 주님이 어떻게 움직이고 계시는가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갖고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가끔 문득 아 그렇구나 하고 발견하게 되는 것은
외국에 계신 분들이 한국이란 나라를 볼 때는 그저 남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북한까지도 한국이라는 범주안에 넣고 있으면서
특히 북한에 영원한 복음이 전해지는 것에
큰 관심과 갈망을 갖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집 학교 혹은 직장이라는 쳇바퀴를 돌며 사는 성도들 대부분은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이란 것에 대해서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더
알기 어렵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시야는 자기가
속해 있는 지방교회
혹은 대지역 혹은 소지역에서
제한되어 대부분의 교회생활을 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활반경이 좁은 데서 오는 한계로 인한
미처 고려하지 못함, 이를테면 북한을 자주 아니 거의 고려하지 못한다던가,
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보지 못한 것이라던가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이상이 없다던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만일 좀더 넓은 조망을 가진 분이 한국의 지방교회들을 향해
주님이 북한의 문을 여실 때 여러분들이 복음을 들고
나아갈 수 있도록
예비하고 있길 권면할 때
(남한이 북한과 가장 가깝게 있는 지역적인 안배로 인해 당연히)
아멘으로 진지하게 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조망과
이상에 대해 열려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먄약 북한이 우리와 대치되고 있는 적국이 아닌가? 심지어는 빨갱이들이지 않은가?라는
세상의 관념을 갖고 있다던가(어떤 정치적인 관점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는 것이 사실)
북한의 영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하는가라는 귀찮은 무게를 느낀다면
부정할 수 없이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몸,
모든 인종적 국가적 사회적 차이를 넘어선 믿음의 하나의 간증에 대한 이상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가끔 개인주의를 경계하는 말씀을 주시는데
그런 교통을 들을 때 어떤 생각들을 하시는지
어떻게들 받아들이는지
심지어는
주일에 그런 교통을 하는 분들이 어떤 의미로 말을 하는지
주의깊게 들어보면
치우쳐 있거나 제한된 관점을 갖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요....
흔히 개인주의를 그저 다른 사람들의 제한을 받지 않고
혼자 결정하고 혼자서 행동하길 좋아한다는 개념으로 정의하거나 ,
심지어는 혼자있길 좋아하는 기호의 문제로 정의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인 듯 싶습니다.
이런 면에서 개인주의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정의할 필요가 있음을 느낍니다.
개인주의란 개인의 범주를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그저 나라는 한 개인일 수도 있고
자기의 소그룹 또는 소지역이 될 수도 있고 좀 더 크게는 대지역이 될 수도 있고
한 나라조차도 그 나라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우주적인 몸의 관점에서 볼 때
역시 개인주의 한계의 범주에 들아간다는 것에 대해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우주적인 한 몸이고
한 개인이던 한 소지역이던 한 대지역이던 한 지방교회이던 한 나라의 움직임이던
어떤 일을 실행하거나 어떤 것을 교통할 때
다른 교회들이 어떻게 느낄 것인가를 고려하지 않는다던가
우주적인 몸의 간증의 관점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개인주의의 덫에 걸려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
.
.
몽골에 가볼 기회가 있었더 것은 너무나 고마운 ...
다시 경험하기 힘든 ..귀한 체험이었습니다.
먼 십대시절, 정말 알싸하니 가슴져미게 읽었던 소설 속의 광대한 몽골초원과 그 척박한 환경속에서
말똥을 연료삼아 태워서 음식을 익혀먹던
강인한 사람들에 대한 상상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이었기에.........
얼핏 잡아본 몽골여인의 손목에서 전해지는 그 강인함이 아직도 생생하기만한데..
타고난 강인함~
얼마나 부러운 것인지....
수십대를 걸쳐 내려오면서 필요에 따라 점점 더 유전적으로 발전해 물려받은
단단하고 묵직한 뼈대를 가진 사람들.
아마도 가나안 족속이 그런 민족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앞에 파르르 날아다니는 메뚜기같이 연약하게 여겨질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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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볼 때 적어도
다들 나보다 강건해 보이고
상대적으로 자신은 바람에 쓰러지는 갈대처럼 힘없이 느끼는 건
이 세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동시대인의 솔직한 고백일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얼굴 두꺼운 사람들도 많고....
정말 욕심 사나운 사람들도 많고....
정말 뚝심하나는 알아줄만한 사람들도 많지만
결국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은 메이저들의 세상이고
상대적으로 박탈감과 열등감을 느끼는
대다수?의 마이너들이
자격지심으로 살고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세상에서도 성공과 실패의 차이 ,메이저와 마이너는 분명 있습니다.
가장 극렬한 것은 이기는 자와 낙오자의 가름일
것이고
기독교안의 평신도와 성직자들의 차이
혹은 자칭 장로와 책임 봉사자들과 일반 성도들의 차이
많은 봉사와 섬김으로 앞장서는
사람들과 단지 혜택을 누리는 자들
헌신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영적으로 성숙한 자와 영적으로 어린아이들.......
이렇게 외면적으로 나타나는 상황이 고정적인 것도 아니고 사람이 판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기는 자가 있고 실패하는 자가 드러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룰을 잘 알아야 성공할 수 있듯이
영적인 세상에서도 성공하려면 그 룰을 잘
알아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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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의 물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고 각종 이적과 기사를 체험하는 광야에서의 대 장정이 끝나고
별것같이 보이지 않는 폭이 좁은 요단강을 건너 이제 약속된 땅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약속된 땅에 다 들어간 것처럼 안심하고 마음이 느긋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돌발상황이 벌어집니다.
가나안 땅에 거하는 족속은 다 거인같고 장사같고 자신들은 메뚜기같다는 염탐군의 보고가 있었죠.
도저히 그들을 물리치고 땅을 차지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증상같은...공황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가나안 족속의 거대함도 보고 그땅의 비옥함도 본 염탐군중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하나님이 약속대로 이루시리라는 말씀을 믿고 담대하라고 그들을 권면합니다.
이런 구약의 그림은 정말 드라마틱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오늘날 우리도 살면서 이런 상황에 부딪히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의 상황이 절망스럽고
교회의 상황도 별로 안좋고
전혀 길이 없고 막막한 벽에 부딪히게 될 때
미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 것인가 눈 앞의 상황을 볼 것인가하는.......
사람이 이땅에 사는 건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살 힘과 그 생명을 유지하는 모든 것을 때에 따라 공급하시고
붙들고 계신 주님에
의한 것임을 결코 잊지 않고 그로 말이암아 끝까지 믿고 따름의
영적인 룰이 있으며 그것은 끝까지 우리를 시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중 약속된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들이 어떤 시험과 교훈의 과정을 거쳤는지 돌아볼 때
오늘날 신약시대에도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직 당신이 하실 수 있는 것을 보이며
그 뜻을 보이시길 보길 원하는 자세로
서 있으며
하늘에 속한 상과 주신 달란트대로 갚음받기를 바라며 인내한다면
한걸음씩 인도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것외에
자신이 거인처럼 능한
자라고 여기던
메뚜기처럼 약하다고 여기건 그런 판단은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도움도
또 어떤 영향도 미치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림은 사람안의 가장 내적이고도 가장 은밀한 정서와 느낌을 갖고 있고 그것으로 사람과의 소통을 하는 매개물입니다.
사람들이 그림을 통해 볼 수 있고 또 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로트렉의 그림에서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고 보고 파악한 적나나한 시선이 얼마나 솔직한지,
아름답기는 커녕 약간 불쾌하게 느껴지지만 , 그의 그림에 나타난 그의 시선의 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흐의 그림은 눈앞에 보이는 평범한 사물들에 숨겨져있는 색채를 끄집어 내는 그의 진지한 탐구와
그 색채의 재배치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대에서 세상엔 많은 표현들이 있고 그 모든 것을 다 예술이라고 하는 범주에 속할 수 있는지도 불분명하지만
적나나한 동물적 본능, 사악하고 파괴적인 본능을 가능한한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노출하는 것을 허용하는 이 세대에서는
표현의 행위에 참여하는 사람이던
그 표현을 감상하는 사람이던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또는 무엇을 선택하여 공감하는지에
어떻게 변치않는 중심을 잡고 있을 수 있는지....
하지만
시대와 사물의 차이, 사람과 문명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람에게 공통으로 호소하는 것,
또한 어떤 그림이 그림으로서의 존재의 가치가 있는가를 좌우하는 것은
자신이 대하는 모든 것들을 대하는 진실성과 진지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진실하면 그 진실함은 기묘하게도 다른 기릴만한 덕목들을 줄줄이 엮어 가지고 오는 데
이를테면 정직함이라던가 순수함이라던가 섬세함이라던가 선함이라던가하는 덕목들입니다.
사람이 진실하면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이 세상이 얼마나 거짓과 위선과 악으로 오염되어 있는지에 대해
통렬하게 꿰뚫어보게 되며 동시에 그의 삶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아파하고 참된 것을 찾고자하는 열망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덕목은 모든 영역에 있어 그것의 결과를 좌우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결혼과 가정에 대해 진지하면 결국 모든 난관을 넘어서 그의 결혼은 의미있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의 일에 대해 진지하면 또 그에 걸맞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고..등등....
물론 진지하게 임해도 사람은 실패할 수 있고 모든 일이 허무하게 무너져버릴 수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그가 영적인 영역에 연관되어 있다면 어떤 것도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없을 것이란 것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 사람이 가진 소망일 것입니다.
회복안에서 교통되어지는 말씀들이 상당히 수준이 높은 개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
특히 젊은 청년들은 가능한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수준의 교육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만약 높은 수준의 교육이
외면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여지면
가능한한 높은 단계의 학벌과
좋은 학교의 졸업장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내면적인 상황으로 볼 때의
그러나
높은 수준의 교육의 유익은 무엇인가?
높은 수준의 교육은 깊이 있는 사고의 능력과 사람과 역사에 대한 이해,
언어의 개념에 대한 인식을 통해 영적 언어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즉 이것은 우리의 영이 아닌 혼안에서의 말씀의 인식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좀 더 수준높은 교육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울과 베드로의 그릇됨의 차이로 설명되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에게 충직한 베드로가 있었지만(나중에 그는 또 그의 인간적 약함으로 인해 유대인들 앞에서 외식하는 일도 있었고..)
주님에게는 구약의 그림들을 통해 신약의 경륜의 이상을 볼 수 있는 그릇으로서
그 당시의 최고의 교육을 받은 바울이 필요했습니다.
그렇지만 단지 지적인 수준과 박식한 성경적인 지식만으로 바울이 쓰임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여깁니다.
그 당시에도 성경에 박식한 학자들이 얼마든 있었을 것이지만,
그의 하나님을 추구하는 열정과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순수함,
옳다고 여기는 것, 하늘에서 보인 이상을 실행하기위해선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절대적임 등등..이
하나님의 눈에는 그를 특별한 그릇으로 쓰려고 택하신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고
말씀을 조리있게 풀어내는 은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조건들이 갖춰져있지 않다면
그 언변은 영적인 지식의 나열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야심마저 있다면 그의 모든 높은 수준의 학식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은
그 말씀을 이해하는 지적인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실제를 체험하고 그 이상을 순수히 본 사람의 깨달음에 있음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집회중에 영적인 지식의 프리젠테이션같은 언변보다는
깨달은 한두마디의 말씀과 그가 본 이상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언어로 선포하는 것이
듣는 사람에게 더 유익함은 우리의 체험으로 이미 증명된 바입니다.
말씀의 수준은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깊이 들어가고 체험했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세가지 거짓말이 있다면,
노인이 죽고싶다고 말하는 것.
노처녀가 시집가기 싫다고 하는 것.
믿는 이가 나는 정말 어리고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
(이 마지막 말은 지어낸 것이지만..)
만약
고지식한 어떤 사람이 그 말을 고지곧대로 믿고
예, 평안히 곧 빨리 돌아가셔야지요라고 한다던가
그래? 앞으로는 네게 아무도 소개하지 않을께라고 한다던가
그래 너는 정말 어리고 아무것도 몰라하고 응수한다면
만약 애초에 말을 꺼낸 사람이 진심이 아닌 말을 했다면
결과는 참담..............
해서 상대방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다면 (사실 진심을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현명한 대처?법일지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정말 이 모든 말들을 진심일 수 있다는 것을 가설로
첫째 어떤 사람, 믿는 이가 빨리 이 땅을 떠나고 싶다는 것은
단지 한가지 상황이 아닌
여러 상황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사도바울처럼 정말로 이 땅, 특히 그를 옭죈 감옥같은 낮은 몸을 벗어버리고
주님과 같은 영광스런 몸을 덧 입으려는 최상의 영적 성취와 체험가운데 도달한 후의 영적인 갈망으로 인한 것.
둘째, 이땅의 모든 것들에 더 이상 재미도 없고 성취하려는 갈망도 또 가능성도 없이
지루한 하루하루에 지쳐가고 있기에 차라리 이땅의 삶을 끝내려는 소박한 포기.
즉 가장 적극적인 상황과 가장 소극적인 상황의 양극단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일 것입니다.
같은 상황으로
어떤 노처녀가 시집가고 싶지 않다는 것도
정말 적극적인 상황 본인이 하려고하는 일을 하기 위한 좀 더 단순한 삶이 필요해서 결혼이라는 복잡한 상황을 피한 것일수도 있지만
괜찮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포기하려는 서글픈 자각에서 나온 반어법의 표헌일 수도 있을 겁니다.
또
나는 어리고 아는 것이 없어는...주님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자신이 알았다고 생각한 모든 것, 자신은 이렇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나중에 보면 너무나 적은 앎일 뿐만아니라 제한된 관점이었고, 또한
얼마든 생각이 다르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 수도 있지만,
정말 어떤 것을 알아가는데 진전이 없는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고 포기한 심정에서 토한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물론 우리의 , 나의 상황이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생각을 하던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상황가운데 있길 바라는 마음은
다 똑같겠지요...
컵라면에 어울리는 젓가락은 나무 젓가락 그것도 일회용 젓가락~!
하지만 컵라면에 은저분?은 어울리진 않지만 뭐 나쁘진 않겠죠..
이와같이
어울리지 않는 어울림에 대한 말들이 성경에 있습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이야기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는 이야기.
우선 질그릇같은 부서지기 쉽고 먼지같이 흔하고 상대적으로 값어치 없는 우리 안에
보석같은 하나님의 영원하고 신성한 생명을 담는 행위는
우리와 하나님의 부조화의 상징적 비유로서 ,
우리가 얻은 은혜가 우리로선 결코 바라지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어떤 경이로움인가를
충분히 상상하게 만들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진흙에 뒹굴면서 먹는 것이나 찾아 꿀꿀거리고 돌아다니는 돼지에게 진주같은 아름다운 결정체와의
부조화의 비유는 심각하게 부정적인 상황으로서
모든 사람이 충분히 귀중한 것을 담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모두는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모두가 다 돼지는 아닙니다.
만약 내가 돼지라면 돼지로서는 스스로 비참한 것도 모르겠지만
정말 비참한 상황일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모든 것이 존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있기에 다른 존재가 있고
만물이 내게 인지될 때 비로소 만물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즉
인지하는 내가 없다면 만물이 있건 없건 내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창조주에 대해서도 ...
만일 내가 잠시 이땅에 살았다 없어져 버리는 유한한 생명에 불과하다면
본질적으로
창조주의 존재가 있건 없건 그가 나를 만들었건 아니건 .........뭐 어쨌다는 것인가.
뭐 아는 척이라도 해야할 이유가 있는가...
라는 몰멘 반감을 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거창한 주제인 하나님의 경륜과 그분의 창조의 목적에 대하여....
내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면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의 경륜이나
그분의 창조의 목적이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에 대해 상관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자격도 주어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
하지만 만약에 내가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존재라면 어떻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이 세상의 최고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당신이 가진 모든 재물과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얻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
답은 하나입니다.
영원한 생명.
기쁜 소식. 복음은
바로
영원한 생명.
놀랍고도 간단명료한 해답.
(그 옛날 진시황제가 그토록 원하고 갈망하던 그것)
,
.
좋은 것이 좋은 것이다?
가능한한 눈밖에 나지 말 것
어떻게 하든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란 처세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불의한 것들 부당한 것들이 이 땅에서 행해지는 것일까.
이 땅의 부당함은 어떤 나라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그렇게 자신의 안일을 유지하려는 소심군중으로 인해
신기하게도 거의 그 구조와 계층이 달라지지 않는
이중 대결구도로 정착됩니다.
가진자와 가지지 못한 자
성경에서 비유로 언급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이렇게.
그동안의 그리스도인의 역사안에서도
혹은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도
진작에...
부당한 것들,
말씀에 어긋난 것들에 대해
좋은 게 좋은 것이다는 기치아래 넘어가지 않았다면
하나님을믿는 것이 조직화되지도
성직자와 평신도로 계급화되지도
오늘날 같이 종교적으로 황폐화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 믿는 이들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지
믿는 이들은 그들이 속한 교단의 상태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는지를 알면서도
혹 그나마 구원의 갈망을 이룰 곳이 예배당외에 이 세상어디에도 없기에
그냥 그대로...교회라고 이름하는 곳에 적을 두고 다니고 있습니다.
,
오늘이라고 하는 이 싯점에서 주의 회복안에서
앞서가며,
주님의 인도하심에 더 민감한 보다 성숙한 믿는 이들이
어린 믿는 이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밖의 많은 일들이 아니라
오늘이라고 하는 이 싯점에
"주님의 회복안에서 종교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시대적인 조정 혹은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여기며
또한 회복안의 작은 지체로서
마음안에서 영안에서 이러한 권면에 전적으로 아멘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볼 때 어떤 부흥 어떤 주님의 움직임도
종교화되는 타락의 과정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은
그 원인이
밖의 일이 감소되거나 증가되거나 하는 것에 좌우되기 보다는,
주님을 주관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체험함이 없이
주님의 일을 사람의 타고난 것으로 만지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대한 종교권력이 되어버린 카톨릭과 일부 거대한 종교조직이 되어버린
어떤 교파들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분의 몸된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까?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 예배당과 그 예배당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목사들을
내 기뻐하는 종이라고 충실된 믿는 이로 보상하시리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never~
아무리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라도 양심상 감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믿는 이는 처음부터 말씀을 제대로 듣지도 않았고 주님을 아는 믿는 이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
만약 회복안에서도
어느 때 어떤 성도가 다른 믿는 이를 대할 때
특히 자신은 앞서간다고 생각하는 성도가 다른 성도에 대해 생각할 때
그 성도가 개인적이고 주관적으로 주님을 접촉하고 생명을 실제로 누리고 있는가를 관심하는 것보다
형제는 혹은 자매는 왜 이런 저런 봉사를 하지 않는가
왜 이런 저런 집회에 자신과 함께 출석하지 않는가의 외적상황으로 판단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정죄하고 심지어는 비난하려 한다면
그는 외식과 종교적인 관념안에 갇혀 있을 뿐 아니라
동료믿는 이를 때리고 구박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합니다.
많은 때 우리는 한 성도가 다른 성도의 권면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지만
자신을 포함하여 다른 성도가 주님을 거슬르는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기 쉽습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주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내적이며 주관적이며 개인적이기 때문에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다수와 다르게 돌출되거나, 다수의 움직임과 동일한 행보로 나가지 않는 것은 눈에 확띄이기 쉽습니다.
그러다보면 내적인 상황보다는 밖으로 드러나는 상황에 더 신경을 쓰게 되며
원치 않는 위선과 외식을 하는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내적인 주님의 음성을 듣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판단과 그들의 평에 더욱 민감하게 되는
결정적 오류를 범하게 합니다.
자신의 상황과는 상관없이 행보를 맞추려 하다보니
이번주 우리가 다루고 있는 말씀에도 나와있듯이
우리가 가장 자주 범하는 죄, 가장 위중한 죄는 외적이고 보이는 것이 아니며
그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느낌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다른 사람이 어떻다 저떻다 라는 모든 관심을 접고
먼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주님께 순종하고 개인적으로 주님을 생명으로 주관적으로 체험하는가에 더 관심을 갖고
그것을 먼저 추구한다면,
다른 사람과 자신의 기호와 성겪과 기질과 타고난 모든 외적인 많은 차이들이
긍휼과 은혜와 그리고 무엇보다 큰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질 것이며
각각의 상황과 각각 체험하고 헌신한 그대로 주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봉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믿는 이들이 통상 최고의 영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상태일까?
외면적으로는 사람에게나 사탄에게 송사받을 것이 없이 말이나 행동에 있어 조신하여 흠잡힐 것이 없으며
내적으로는 항상 주님과의 교통가운데서 그 영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영안에서 사는 사람?...
거기다 교회안에서 많은 봉사와 집회를 빠짐없이 참석하고 신언또한 훌륭하고 공급이 넘치는 성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커피위에 살짝 얹는 우유거품같이 빠져서는 결코 카푸치노가 될 수 없게 하는 것같은
특히 형제들에게 있어 최고의 영성을 증명하는 것이 있다면??
어느날 멧시지개요의 한마디가 눈에 들어왔는데,
아내를 진실되게 사랑할 수 있음!!! 이란 구절.
돌이켜보면 어떤 형제님에게서도 감히? 나는 내 아내를 진실되게!!!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확언하는 교통을 듣지 못했는데,
그냥 사랑한다가 아닌 진실되게 라는 수식어를 붙였기에 더욱 더 고백하기 껄끄러워지지 않을까 싶네요.
진실되게는 ,,가식없이 , 특별한느낌으로, 마음 속에서부터
그리고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내몸으로 여겨서 등등의
최고의 수식어를 포함하는 말이기 때문이죠.
아마도 베드로가 그럼 누가 믿을 수 있겠삽나이까?라고 탄식하며 한숨을 푹 쉰 것처럼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타락한 성향을 가진 남자들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아마도
몇십년을 갈리지 않고 사는 지루하고 맹숭한 아내를
진실되게 사랑하는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타락한 남성성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나
하나님을 주관적으로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구원받았는지를 알며
그분의 긍휼과 은혜의 귀함을 알기에
참되게 낮아지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작고 큰 모든 공급과 은혜를 감사함으로 취할줄 알기에
자신에게 주신 돕는 베필이 얼마나 귀한지를 참되게 아는 사람이 고백할 수 있는 말이기에...
그냥 이런 저런 말을 떠나서...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말씀을 적용하고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가(自家)? 시금석이
형제인 나는 과연 내 돕는 베필을 참되게 사랑하고 있는가 혹은...이 될 수 밖에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