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사는게 전쟁이라고도 하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인지하고는 있지만
과연 정말 사는 것,존재하는 것 자체가 전쟁이라는 것을 얼마나 뼈져리게 알고 있는지...
사람끼리 부대끼는 모든 것,
모든 계층간의, 나라간의, 인종간의, 종교간의 갈등과 다틈도 있지만
사실 육신의 몸도 조화로움의 현재형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 이순간,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순간에도 내 안에서는
나쁜 바이러스와 싸우는 백혈구들이 치열하게 싸움을 하는 중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그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유독 약한 체력을 타고난 저같은 사람은 한 순간에
극심한 고통의 맛,
온몸의 세포가 치받아 싸워 지끈거려 산산조각날 것 같은 고통의 두려움이 엄습하는
비참한 맛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건,
이 세상조직안에서 사람사이의 차별과 부당함에 대해 아무리 성토하고
싸음을 벌여도 달라지는 것은 없고
우리의 물질적인 몸안에서의 전쟁도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결국 언젠가 우리는 이 땅에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결코 이길 수도 없는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가 악인이 득세하고 잘나가는 세상의 상황을 보고 절망하였듯
이 세대를 사는 우리 또한 그 어떤 의로움과 공평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이 세상사람 누구도 질병과 사망의 독에서 비껴나간 사람이 없었으니
누구나의 운명은 죽기로 작정된 것에서 조금 시간이 더 주어진 것 뿐입니다.
.
그러나 놀랍고도 기이한 것은 모든 싸움중에 가장 큰 전쟁은 바로 영적인 전쟁인데
그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
즉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의 모든 문제, 이세상의 모든 갈등 부조리가 바로 이 영적인 싸움,
신의 영역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니
영적 전쟁에서 이긴다면 다른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결론.
그리고 그 해답은 시편의 결론으로서
승리하는 비결은 찬양~~!!!!
이 찬양은 모든 조건, 모든 기릴만한 축하할만한 기뻐할만한 감사할만한 상황뿐 아니라
비참하고 실패하고 어두운 모든 상황에 대해 ...찬양하는 것.
사실 잘 나갈 때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과연 극심한 고통과 혼란가운데 찬양할 수 있는가라는 과제가 남습니다.
불치의 병으로 인해 오늘 낼의 삶이 보장받지 못하는 순간
아이들의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참기어려운 모욕과 실패가운데 처했을 때
무엇보다 극심한 고통가운데 식은 땀으로 범벅된 그 순간에도..
과연 ..주님 당신으로 인해,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미 당신이 이루신 일들로 인해
나타날 영광으로 인해...
나의 상황을 보지 않고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 인해
그동안의 모든 돌보심과 은혜로 인해
감사함으로 그리고 결국 주님이 승리할 것으로 인해
주님을 찬양함으로 ..
현재의 상황의 약함을 승리로 바꿀 것인가...는 과제가...
.
사실 김포는 서울에서도 비교적 가까운 곳이거니와 특히 저희 소지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이지만
그냥 집회로 함께 모이는 것만이 아닌 가정에 안배되어서
식사와 다과를 함께 먹으며 교통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은
보다 실제적인 몸의 지체로서의 생명의 흐름을 갖는 기회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러면서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지체들과 해후를 하기도 하고
새롭게 연결된 분들의 기능과 생명의 분량을 감상하고
영적인 공급과 함께 정성스런 애찬의 공급받기도 하면서
참 곳곳에 귀한 지체들이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면서 힘을 얻게 됩니다....
아주 어린아이라도...
어른이 입벌려 떠먹여주는 이유식이 맛이 없으면 ,
멋모르고 몇숫갈을 받아먹을 지라도
곧 도리질을 하거나
기왕 입속에 들어간 것이라도 삐죽이 내뱉기 마련입니다.
만약 계속해서 억지로 입을 벌려 먹일라치면
급기야는 아~~앙~~
목젖이 다 보이게 힘껏 울어제껴
먹기싫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합니다.
,
그런데
예를 들어 같은 상황을 비유로 빗대어 말을 하자면,
만약 누군가 먹을 것을 떠먹여주는데
그 사람이 만약 대통령이나? 혹은 군대에서 참모총장?쯤 되는
어렵고도 권세있는 막강한 사람이 주는데
문제는 맛이 없는 경우,
어른들은 약 세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어서 이 고문이? 끝나길 기도하면서 너끔너끔 받아먹는다.
거절하고 난뒤의 뒷감당이 안되니까 꾹 참고서....
둘째, 입을 반쯤 벌리고 일부는 먹고 일부는 실수로 흘린 것처럼 하여
가능한한 적게 먹으려고 한다. 지금 꾀를 부리고 있는 것을
상대방이 모르길 바라면서......
셋째, 한번먹고났는데 , 맛이 없으면
맛이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거절한다.
,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떠먹여주는 입장이면
첫번째 의 경우 억지로 먹고나서 별탈이 없으면 계속 먹일 것이고
후에 탈이 나거나 문제가 생겨도
상대방의 위장에 문제가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두번째의 경우 흘리고 먹는다고 칠칠맞다고 야단을 치고나선
입을 더 벌리게 할 것입니다.
세번째의 경우 맛이 없다고? 그렇다면 왜 맛이 없을까
생각하고 고민해서 다음번에는 정말 맛있게 만들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
이건 비유지만....
받아먹는 사람으로서
혹은
떠먹여주는 사람으로서
,
나는
혹은
당신은
어떤 부류의 사람입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기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억압받고 물질적인 혜택을 받느니
차라리 가난하더라도 자유로이 지내는 쪽이 낫다고 여길 것이고
어떤 사람은 물질적인 것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단체의 일원이 되어 소속감을 느끼는 쪽에
오히려 만족할 수도 있을 겁니다.
또한 진부하고 습관적인 것을 지루해하고 새로운 시도들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환경이 바뀌거나 낯선 것들에 대해 불안해 하며
오히려 습관적이고 익숙한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겠죠.
.
반면에
본능은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서 그 중에는 선한 본능도 있고 악한 본능도 있어
사람에 따라 어떤 사람은 선한 본능이 강하고 어떤 사람은 악한 본능이 강할 수도 있으나
명실공히 누구에게나 가장 강한 것은 생존본능입니다.
생존본능은 사람이 가진 가장 막강한 자각으로
만약 생존에 위협을 느낀다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기호가 바뀌거나
혹은 의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기호대로가 아닌 생존에 도움이 되는 쪽을 택하기도 합니다.
기호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등의 취향으로
생존이라는 절박한 문제가 해결되고 난 후에 여유를 갖고 난 후에야 찾게 될 것입니다.
.
.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의 본성,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이들이 모여서 서로 교통을 나누는 일에 있어서도
기호의 문제 이전에 신성한 생명의 본성으로 모이는 것이 먼저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생활하는 것이
불교대신 기독교를 택한 것이고
또 천주교의 미사가 아닌 기독교의 예배방식을 택한 것이거나
더 나아가
기존의 기독교의 예배방식대신
나에게도 말할 기회가 주어지는 신언의 방식을 취했다고 하는
이것이 단지 기호의 문제로 보여지기 쉽습니다만,
기록된 성경에도 있듯이
신성한 생명의 본성은 각각 그영의 인도를 따라 말을 해내는 신언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언이야말로 이 땅에서 신성한 생명이 공급을 얻고 공급을하는 젖줄기 같은 것이기에
이것이 말살되거나 제한받게 되면 신성한 생명의 생존본능에 위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역사를 보건데 악한 자는 이런 신성한 생명의 기능을 말살하고
한 사람의 연사를 의존하는 방식을 채택하도록 뒤에서 조정해 왔습니다.
믿는 이들의 모임이
한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는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을 창출하는 종교조직인 한은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되는 실재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안에 신성한 생명이 있고 영적인 기름부음의 느낌이 있고
그것을 확증할만한 기록된 성경과 그안의 하나님의 경륜을 해석한 멧시지들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누구에게든 추구할만한 마음과 시간이 있다면 충분한 양식이 곳간에 쌓여있는 행복한 농부와 같이
얼마든 꺼내어 요리해 먹을 수 있을 만큼의 ...............
그러므로 우린 우리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기 위해 요리를 해서 밥상에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한사람이 아닌 여러사람이 말을 해내는 모임때
그 영의 인도를 받아서 즉 신성한 생명의 본성의 느낌에 따라 신언하느냐 ,
아니면 천연적으로 말을 하느냐에 따라
성도들의 집회에 대한 기호가
한사람씩 신언하는 집회에 대해 취향을 확실히 갖게 하던지
차라리 말빨이 좋고 언변도 좋고 조리있게 말하는 연사에 의존하는 쪽으로 기우냐의
차이를 가져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길게 독점하다시피하여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여러사람위에 군림하길 좋아하는 기호가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가능하면 나서는 쪽을 경계하고 잠잠히 있는 편을 선호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기호들은 신성한 생명의 본성에 따라 좌우되고 달라져야만 하는 이유가
우리의 모임이 한사람씩 신언하여 몸을 건축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 입니다.
너무도 당연하지만
믿는 이들은 마땅히 그들의 타고난 천연적인 기호나 취향을 부인하고
신성한 생명의 본성에 따라
어떤 나서기 좋아하고 회중을 지휘하고 군림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호를 내려놓고,
어떤 숨기 좋아하고 분요한 것을 피하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역시 자신의 기호를 내려놓고,
그 영의 인도를 따라 신언하길 배우고 실행하길 힘써야하는 건
우리가 받은 신성한 생명의 본성을 따라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심각하게 어떤 순간 생각해보지 않을까요?
과연 이 세상이 망하는 날이 올 것인가??
성경의 말씀을 믿는 이가 아니더라도
딱히 확실한 증거가 보인 것은 없지만
이 세상이 언젠가 큰 혼란에 빠질 거 같은 위기감을 느끼면서 사람들은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면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라는
적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는 오지 않길 바라는 막연한 바람? 속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러나 성경에서는 예언하길...
그날은 누구에게나 정말 못견디게 괴롭고 고통스런 재앙의 날들이 될 것인데,
이 땅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임신한 여자가 아이를 낳는 것외엔 그 해산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비껴갈 수 없는 두려운 날들로 임박할 것이라고....
그리고
그 대환란의 날들을 피할 유일한 방법은 그전에 미리 데려감 즉 휴거를 당하는 몇몇 택함받는 사람들 안에 속하는 것입니다.
휴거라..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 정말 대기권의 그 엄청난 중력을 뚫고 사람이 삼층천으로 들림받는 믿기 어려운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정말 눈앞에서 또는 안보는 사이에 내가 알던 어떤 특별한 한 사람이 사라져버린후
두렵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절대자에 돌이켜 시험을 무사히 통과하길 간절히 바랄 수 밖에 없는 그런 날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 ...
혹은 그 다음세대에라도.....
성경은 참 재미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둘러싼 사람들의 해석이 재미있습니다.
한동안 스스로 아주 영적인 사람들은
성경자체에 신기(神氣)를 부여해
어느날 성경을 탁~!@ 폈더니 얏~ @하고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에서 부터...
기록된 성경말씀은 전적으로 성령에 의한 것이며
기록된 모든 말씀에 해석이나 이의를 제기함 없이
다만 모든 말씀에 아멘으로 받아야한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록한 사람의 어떠함에 영향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야고보서의 경우
유대교적인 구약의 관념을 가진 저자로 인해
율법적인 관념으로, 믿는이들에게 율법을 지키길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그리스도의 신약의 사역을 뒤로 돌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사람의 영에 말씀을 하시고 그것을 사람의 생각으로 깨달아
사람의 언어로 쓰여졌다는 것 , 그러므로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사람의 어떠함이
포함된 말씀이라는 것, 즉 성육신된 말씀이란 것을 전제로
말씀에 접근하는 것이 가장 합당할 것입니다.
심지어 성경은 그 필요에 따라 사람의 실패와 실수 그리고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까지도 기록해 놓습니다.
성경에서 한번쯤 상고해볼만한 아주 흥미로운 사건중의 하나가
율법을 지키길 강조하는 예루살렘교회에 담판을 지으러 갔다가
외려 나실인의 서원을 지키는 결례를 유대성전에서 행하려 한 일로 인한 소동이 난 사건입니다.
모든 이에게 같은 모습으로 친근하게 다가가길 원했던 사도바울이
유대의 믿는 이들에게 나도 유대인중의 하나임을 보여주려 했던 그 시도가 외려 유대교도들의 분노를 야기시키고 말았습니다.
분명 심각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문득 중동지방의 이슬람교도들의 그 절대적인 추종과 광분, 죽기를 각오한 그 저항을 떠올려 봅니다.
비슷한 그런 유대인들의 광기어린 분노로 인해
사도바울은 맞아죽기 직전의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골방에서 하나님께 기도만?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자신이 로마시민임을 내세워 가이샤에게 호소하노라~ 즉 로마시민으로서 가이사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신청합니다.
그러자 그렇게 광분하던 유대인들은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움찔 뒤로 물러납니다.
그당시의 교통사정 통신사정 등등으로 보아 한쪽 구석에서 처형하고 쉬쉬덮어버려도 아무도 모르고 지나갈 것 같은데도
로마인들이 식민국가에 세운 법과 질서의 통치체계가 얼마나 견고히 잘 잡혀있는지를 충분히 상상하게 합니다.
물론 호송의 길목에서 테러를 가하리란 정보때문에 도망을 다녀야했지만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돌팔매질을 당할 상황에서 빠져나와
무사히 로마에 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각 지방교회에 서신서를 쓰는 시간을 얻게 되고 오늘날 그것이 우리에게
사도바울이 하나님께 계시를 받은 그 모든 것을 유산으로 남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선택은 과연 옳았을까요?
옳았다고 봅니다.
유대교도들에 의해 돌팔매질을 당해 순교함도 귀한 일이나
만약 바울이 쓴 서신서가 남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을 마땅히 알아야하는 그대로
아니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으로 이땅에 오신 그분의 목적 그분의 경륜 을 아지 못했을테니까...
그리고 하나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과연
감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보게되는 기도를 하는 때와
가이사에게 호소하는 실제적인 방편을 세우는 때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어떤 지체의 댓글:
"아멘. 분명히 하나남이 세우신 시스템 안에 있는 절차를 밟아야할 경우가 있다고 봅니다.
비록 인간의 정부 역시 부패하지만말입니다.
요건은 우리가 주님이 어떤 길을 여시는가를 주의하고 앎으로서 시간에 합당한 조처를 취하는 지혜에 있다고 봅니다.
심중에서 그분의 권익을 구하면 알게되지않을꺼요?
마치 다니엘이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행동을 취한다고 한것처럼요.. 제 상황도 이렀습니다. "
그리고 저의 답글:
"가이사에 호소하는 것이 권력아래 두어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전부겠지요.
때로 가이사란 공중앞에서 큰 소리로 변호하는 것도 되고,
법이란 공정한 잣대에 호소하는 것도 되고,
때론 인터넷이란 매체에서 다수의 판단에 맡기는 것도 되고...등등...
주님시대에 많은 율법학자들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교도들을 걸려 넘어지게하는 시험의 관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유대 지식인들,내노라하는 관리들 성직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들과 구약시대의 규례들을 외적으로 지키는 율법으로 만들어
심지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이라도 허무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옳다 스스로 의롭다 스스로 율법에 흠이 없다는 종교인들의 패역함 목이 곧음, 방자함은
그들의 잘못됨을 지적하는 하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죄지음이 심각한 문제인가, 율법에 매임이 심각한 상황인가에 대한 답은 이미 나온 거 같습니다.
.
그러나 이것이 단지 구약의 문제일 뿐일까요
오늘날에도 우리는 동일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동료 믿는이들에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죄지음이 심각한 문제인가, 규례에 매임이 심각한 상황인가
죄지음은 물론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죄지음은 감지하기가 쉽습니다.
스스로도 감지하기 쉬우며, 다른 사람이 지적하여도 잘못없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죄가 죄로 드러날 때 돌이키며 빛가운데서 주님께 나아가 자백하고 용서함을 구할 때
죄의 문제는 신속히 자취도 없이 기억조차 남지 않게 깨끗하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규례에 매여있는 것이 죄지음보다 심각한 문제인 것은
스스로도 감지하기 힘들뿐 아니라
누군가 당신은 규례에 묶여서 스스로 옳다 혹은 그르다하는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라고
말하여도 받아들이기가 쉽지않음 때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성육신되어 수많은 기적들과 표징으로 증명하였어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오늘날 피차 같은 사람이 말하면 참람하다를 넘어서 뭇매를 맞기 십상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율법이냐 생명이냐를 놓고 유대인들에게 도전했을 때 핍박을 당했고
역대의 참되게 믿는 이들도 이미 종교가 되어버린 천주교와 기독교에 의해 반대를 당했으며
동시대를 살았던
웟치만니와 윗트니스 리 형제님도 항상 포대를 기독교로 향하여 설치하고 수없이 그들의 종교성과 외식을 폭로하였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반대와 질시와 공격이었고 여전히 지금도 그렇습니다.
..............................
시간이 흘러
남은 길을 걷는 동안
어쩌면 이제는 밖의 기독교를 향한 경고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상황을 점검하며 주의하며 가야할 시기가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밖으로 지켜야하는 성문법이 되었는가
그래서 믿는 이들을 객관적으로 우수와 불량으로 가를 수 있는 잣대가 되었는가
아니면 각자 안에서 말씀하시는 생명의 율이 되어
각각 도달한 만큼 처리받고 나타나고 표현되는 유기적인 것이 되었는가
그래서 자신을 판단할 근거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 자신이 어디만큼 도달하였는가를 스스로 첵크할 수 있는 내적인 율이 되었는가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실패하거나 실수하거나 심지어는 다른 사람과 부딪히거나 하는
밖으로 드러나는 일을 두려워하고 신경쓰고 조심합니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지켜야하는 조심하여 행하는 규칙들을 만듭니다.
그러나 혹 스스로 조심하거나
한번 고착되어 밖의 법이 된 것의 폐해는
사람의 내적인 부분들을 만지거나 처리받게 하지 못한 채
또는 영적인 생명이 자라지 않은채
어떤 모임 어떤 실행들을 의례적이고 습관적인 것으로 행하면서
그것을 행하는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스스로 속이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죄지음과 실패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외적 규례에 매임은 더 심각한 문제일지 모릅니다.
우리 자신은 얼마나 많은 약함에 둘러싸여 있는가.
강한 척 쿨한 척 하지만 소싯적에 받은 상처를 평생 떨치지 못하는 마음의 약함에서부터
조금만 추워도 조금만 에너지가 부족해도 비실비실한 체력에서부터
불치의 병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생노병사라는 프로는 중년이후에게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하죠.
어제 소그룹에서 읽은 자료중에서의 한 대목.
아브라함의 텐트에 기근이 들자 결국 먹을 것이 풍부한 남방으로 내려가면서
아내인 사라를 여동생으로 속여 바로왕에게 바치고 음식물과 가측을 얻는 그의 실패에 대해
아브라함을 비웃지말라..라는 대목에서 그야말로 빵 터져버렸습니다.
아 정말, 이 멧시지를 전한 형제님의 말할 때의 그 모습이 떠올라서....
약간 실눈을 뜨고 방실방실 의미심장한 미소를 한가득 머금으며 ......
이 멧시지를 전하셨을 때 어떻게 말씀하셨을까하는..상상에.
형제들이여, 아브라함을 비웃지 말라.
광야한가운데서 식솔을 줄줄이 매단 가장으로서의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았다고
입술을 비죽이며 비웃는 너희 형제들중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아브람과 같이 하지않을 자가 몇명이나있을까...
라는...
사실 내 자신이 그 당시의 아브라함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해 봅시다.
애굽의 도움을 받기는 해야 되겠는데 아내의 아릿다움때문에
(군주는 남의 아내를 맘대로 뺏어도 되는?)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는 없으니
그가 생각해낸 묘수는 아내를 동생으로 속일 수 밖에 없었을 터.
사는 건 참으로 징한 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는 평소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도 저지르는 법.
그러나 아브라함의 기릴만한 점은..그는 결코 세상을 만지지 않았다는 그 대목이었습니다.
그저 한 사람으로의 많은 두려움과 많은 고려와 많은 염려가 있었지만
결코 세상의 향락과 자랑과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는 바로 그점입니다.
믿음의 시험을 받아 실패하고 사람의 방법을 취해 위기를 묘면해 보려는 수
(사실 우리가 잘 쓰는 숫법)를 쓸 수는 있지만
그 안에 사악함도 없고 분수를 넘어서는 욕심이나 명성에 대한 야망이 없는
순수가장 아브람은 충분히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
이 세상은 긍휼이 없는 세상입니다.
남과 남 사이도 그렇고
혈육간에도 그렇고
가만 보면 ...긍휼히여김이 부족합니다.
다 자기의 어떠함을 기준으로하여
그 기준에 다른 사람이 따라오길 바랄 때
특히 더 그러합니다.
그 자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하찮게 여기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또는 무턱대고 시샘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을 다루는 것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교회모임을 다 참석하는 사람은
이런 저런 집회를 오지 않은 사람보다 자신을 더 영적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봉사와 드림에 충성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재정적인 배경을 갖고 있음에도
이런 저런 교회의 필요에 나몰라라하는 하는 사람들을 두고
인색하다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혼은 너무나 민감하고 약하여
자신의 약한 모습을 많은 사람들앞에 노출하는 것을 감당치 못함을
어떤 씩씩하고 당찬 성격의 사람은 박차고 나오라며 답답해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체력이 좋은 사람은 하루에 몇탕씩 모임을 갖고도
그 다음날 아침 너끈히 일어날 수 있음으로
한두번 모이고 난 뒤 다음날 피곤하여 지치는 약한 체력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
그러나
우리 중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로 한다면
세상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의 자녀중 망대아래 깔리지 않을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할 수 없음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함과 두려움으로 소심해질 수 밖에 없음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도 생각합니다.
이 험악한 세상에 누구하나 손벌려 도움을 청할 수 없을 때 오로지
물질이 필요를 채워주는 현실로 말미암아
그걸 내려놓을 수 없는 믿음이 부족함을 또한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은혜가 부족할 때 결코 참된 헌신이 없다는 것도 알기에
결코 억지로 요구하시지않는 것도
긍휼히 여기심일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알므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을 때까지
인내로 기다리시는 것도
긍휼히 여기심으로 가능한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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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갈수록 험하고 믿음의 시험을 받고
재난의 소식이 도처에서 들려올 때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판단하고 야단치기 보다는
더 많은 사랑과 긍휼히 여김으로 각각 받은 분량과 영적 노정대로 갈 수 있도록
충분히 더 긍휼히 서로를 보듬어주는
그런 실재적인 사랑이 우리 가운데 더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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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건 잊고
잊지 말고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건 잊지 않고 사는게
사는 정석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에의 그리고 다시올 주님의 나라를 꿈꾸는 우리는
..아비집,,으로 상징되는
땅에 속한 옛창조에 속한 모든 것들을 잊길 권고받습니다.
옛창조에 속한 것 뿐아니라
심지어는 과거의 영적인 소중한 체험까지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옛날에 삼층천에 있는 것 같은 그런 주님의 임재가 충만했던 그리고 빛이 충만했던 집회에의 추억도
막 구원받고 발이 땅에 닿지않는 듯한 꿈결같았던 기쁨이 넘쳤던 주님에의 첫사랑의 추억도.....
그런 것들이 오늘날과 비교되어
긍정적인 격려가 되던지 혹은
발목을 잡는 회한이 되던.....
전진하기 위해선 앞의 푯대만을 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코 잊지 말고 와신상담으로 그
쓴맛을 유지해야하는 항목이 있다면
우리가 오늘날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그분의 만물을 다스리도록 위임받은 우리가 당해야 하는
오늘날의 수치와 모욕이
누구에게서 왔나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우리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영적인 영역안에 있는 싸움이지만
우리를 속이고 우리로 약하게 하고 의심하게 하고 지치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이
결코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사단의 속임수요 그의 괴롭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고 지루해서
때로는 그냥 일상의 습관적인 반복으로
무뎌져 버리는 속에서 문득문득
와신상담으로 잊지 말고
원수갚을 그날을 위해 칼을?가는 무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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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집 고슴도치 율이는 이즘 육회로 식사를 하더니 (그동안은 고양이사료를 먹다가)
에너지가 펄펄 넘치는데다
눈치도 구단이 되어서
제가 부엌근처에 얼쩡 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자다말고 벌떡 일어나 먹을 걸 주나하고 졸졸~~ 통안을 맴맴도는데.....
귀찮기도 하지만, 사실 사람들이 그 맛에 애완동물을 키우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누군가에게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된다는 건
상당히 기분을 업시키는 만족감을 줍니다.
사람은 어쩌면 생래적으로 이런 전지전능함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누군가는 한줌밖에 안되는 애완동물이나
자신의 집을 통제하고 그안의 구성원을 돌보고 공급하는 권위로 인해 만족하고...
누군가는 세계를 다스리는 대국의 정치적 인물이나
같은 정도의 경제적 혹은 군사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인물이고자하는 야망을 이루겠죠...
모든 것을 선한 동기와 합당안 웅지로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의 역량에 따라 행하면
지구는 지금보다 훨씬 살기좋은 곳이 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화평하게 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의 악한 본성으로인해 좀 더 권세를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압제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 권세를 사용하기에
2000년전이나 지금이나, 이땅의 살아가는 모양은 그저 비슷한 혼돈일 수 밖에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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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지만 교회생활안에서도 여전히 믿는 이들을 시험하는 것은
이왕이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인정받고 높임받고
그 위에 서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권위를 갖고자하는
즉 머리가 되고자하는 욕망인 듯 싶습니다.
솔직히 이런 일에 온전히 순수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판단하는 내자신 각각 우리들은 과연 어떤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모든 일에 사람의 판단과 선택이 아니라
주님이 영광받고 드러나는가를 주의하여 의견을 고하고 행동하며
배우고 체험하고 변화받고 시험을 통과하면서......
언젠가
이땅의 주인인 주님이 그 권위를 온전히 회복하는 날이 올 때
마땅히 그의 권위에 동참할 자격이 되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믿는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들중의 하나가 함께 모여서 교통하는 것인데
이 모임들이
해야하는 것인가
하고 싶은 것인가
해서 기쁜 것인가
...........................................세가지의 상태로 분류해 본다면
만약 일주일에 한번이던 서너번이던
교회모임에 가는 것을 단지 의무적으로 하고 있다면
이런 상황을 보시고 나서 주님은 뭐라고 하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너는 집회나오는 것을 너의 율법으로 만들었구나
내가 너를 모든 율법에서 자유케 하였는데 ....
라고 하시지 않을까요.
만약 집회를 가되, 가고 싶어서..라는 동기부여가 되어있다면
비교적 아니 아주 양호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런 상태는
집회에 참석한 후 확실히 얻는 것이 있는 경우에 해당할 것입니다.
친하거나 관심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안부를 묻고 또는 이런 저런 이바구를 하는 재미?도 포함되고
하다못해 간식이나 과일이나 혹은 밥을 먹는 즐거움도 포함되고
함께 찬송하고 말씀을 읽고 그리고 깨닫고 체험한 것을 교통하는 즐거움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집회를 가는 것이 기쁜 경우, 더하여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기쁨이 되는 경우는
최상의 바람직한 상태일 것입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이런 경우가 되어야 정상이겠죠.
삼층천에 이미 앉아있는 듯한 모든 것을 초월하여 주님의 임재에 있으며
땅에 속한 어떤 매임 , 땅에 속한 장래, 물질, 한계에 더 이상 치이지 않는
참된 자유와 안식안에 있는 상태를 맛보고
그것이 계속 유지되는 상태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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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임은 어떤 상태일까
적어도 나는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일까
더욱 순수하게 주님만을 추구하고 영적인 것을 더욱 추구하는 갈망안에 사는 사람들이 모인다면
모든 모임은 세번째 단계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고 그것이 간증이 되어
주님을 추구하는 참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더 증가하게 되지 않을까.............
멸치볶음을 맛있게 하려면 중요한 팁이 멸치를 바싹 말려야 합니다.
그래야 볶음을 만든 후에도 바삭한 식감이 내내 유지되고 비린내도 나질 않죠.
그래서 마른 후라이펜에 멸치를 살살 볶아서 물기를 날려보낸 다음 기름과 매실액 간마늘 후추 깨 등으로 볶습니다.
역시 고구마도 물기 없게 먹는게 제일 맛있는 거 같습니다.
고구마를 맛있게 먹으려면,
고구마를 어느 정도 찐 다음엔
오븐에 넣어 물기를 말리고 고구마 껍질이 노릇노릇하게 될 정도로 구우면
별로 맛없는 고구마래도(이번 건 정말 잘못 속아서 산...)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먹는 일을 생각해 보면....
나를 먹는 사람은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아주 직설적으로 자신을 사람이 먹을 참된 음식으로 천거하신 그분의 뜻을 헤아리게 됩니다.
아무리 우매한 사람이라도 먹는 것이 어떻게 사람에게 힘과 에너지를 주는지 알기에
말초적인 생생한 영적 느낌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체험됩니다.
하지만 우리도 역시 하나님에겐 힘이 되고 위안이 되는 맛잇는 먹거리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배고프고 목말라 사마리아 우물가에 앉아 있는 동안
한 여인이 회심한 일로 인해 주님은 힘을 얻으셨습니다.
그후로 주님은 그분의 잃은 양들을 이곳저곳에서 얻고 계십니다.
때로는 한국식으로 달콤하면서도 짭쪼롬하면서도 바삭바삭 씹히는 멸치볶음으로
보슬보슬 부스러지며 달큰한 노란 군고구마의 따끈한 속살로도.....
이렇게 맛있는 별미가 되려면
우리 안의 맛을 떨어뜨리는 물들을 말려야 합니다.
변화되지 못한 우리의 타고난 냄새나는 물들을....
말려지기 위해 불에 달궈지는 고통이 따르지만 그 과정이 끝난 뒤에 완성될 맛을 생각해 보면
피하여 갈 수 없는 조리과정입니다.
살아가는 일들이 그렇게 물을 말리는 과정이었음도 다시 돌이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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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햇빛가득한 곳.에서 집단 성폭행사건이 터졌습니다.
경찰관이나 주민이나 내식구 내 이웃의 죄, 감싸주는 분위기에서 가해자들 적당히 다 풀려났습니다.
그지방 고위층 자제들이란 인맥도 작용했습니다.
성폭행범 친구들이란 것들도 피해자 우롱하는 말 서슴치 않았습니다.
집단이기주의의 극한 형태, 똥인지 된장인지 구별안되는 양심마비의 증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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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기독교든 뭐든 소위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선택된 백성이요, 불신자들은 사탄마귀의 자녀다라는 편가르기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식구니깐 무조건 도와줘야하고 국회의원당선표도 몰아줘야하고 등등...
하긴 하나님이 없는 사탄에 팔린 우리들..사탄의 자녀였고 그의 노예였습니다.
말은 맞습니다. 주님도 사탄의 자녀라고 이스라엘 성직자들의 외식과 불신을 질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꼴이 한심하고 애통해서였지 결코 질시하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같은 말을 하는데도 질시하고 무시하는 마음으로 불신자를 향해 사탄의 자녀라고 말한다면
도리어 주님께 꾸중들을 것입니다.
말은 같은데 그 말을 하는 사람의 내면적 동기와 상태에 따라 말이 가진 뜻은 달라집니다.
너 안믿으면 지옥갈꺼야~라는 말조차도 웬지 협박같고 조롱같아서 거부감들게 여겨진 적이 없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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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주님이 이천년전 이땅에 오셨던 것이 이스라엘의 자녀만?을 위한 것이고 그 밖의 백성은 내 알바 아니다라는
좁은 이기주의를 가지고 계셨다면 우린 얼마나 비참한 이방족속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약속된 메시야를 거절하자
주님은 그래? 그럼...즉시 그 발걸음을 이방땅으로 향해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셨으니
열려있는 마음에다 쿨한 행동까지~~
참 괜찮은 창조주입니다...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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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주님은 결코 한번도 작아지지 않으셨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그들의 관념과 이기심으로 자꾸 하나님을 기독교를 위한 하나님으로 좁게 만드는 일이 많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도
너로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모든 피조된 사람을 향한 사랑을 보이셨고
주님을 믿지 않고 거절한 고을에 대해서도
괘씸타~ 고 하지도 않으셨는데 정작 아무것도 아닌
제자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확 불살라버릴까요?하고 자기들이 뭐라고 주제넘게 노를 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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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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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히 아무 상관없는 문화유적지를 우상이라고 마구 파괴하고
성전을 탈환한다는 핑게로 살인 방화 약탈을 일삼고
천주교야말로 가장 큰 사탄의 소굴로 참되게 믿는 이를 박해하고
...그간의 인간역사를 돌이켜보면
주님을 위해 득을 행한 일보다 하나님을 욕먹게 하고 등을 돌리게 만드는 일을 많이 한 것이
집단을 이루고 집단이기주의에 빠진 믿는 이들이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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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는 서너명
또는 몇십명
또는 막강한 힘을 가진 큰 조직이 될 수 있는 기독교의 집단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모든 참되게 믿는이들에게 열려있으면서도
참된 믿는 이들이 가질 수 있는 우주안의 유일한 몸의 간증안에 있길 사모하며
주님에 대해 잘못 간증함이 없도록
모든 길에 주의하며 갈 수 있길....
제 블러그의 포스트 아래에는
(다른 블러그에는 있는)
페이스북 기타 다른 사이트에 링크 시키는 난이 보이지 않네요.
일시적인 장애입니까?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건가요?
사람이 몸이 아플 때 순간적으로 얼마나 무기력해지는지,
고통에 얼마나 쉽게 몸이 무너져내리는지
중병이든 그저 지나가는 독감이던 일단 아파보면
정말 적나나하게 실감하게 됩니다.
그나마 타고난 체력이 강한 사람은
약물의 혜택을 받아서 심한 고통을 당하지도 않고
쉽게 낫기도 하지만,
약을 먹으면 약에 취하게 되고
약한 위벽이 손상을 입어 제대로 영양섭취를 못해서
외려 더 고생을 하게 되는 경우는
현대의약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나마 건강하게 살려면 건강식을 섭취해야하는데
그런데 건강식이란 것이 대개 맛이 없거나
건강을 위해서 먹어야한다면 공연히 더 입맛이 떨어지는 경우는 또 어떤 경우인지...
오히려 위가 튼튼해서 식욕이 좋은 사람이
몸에 좋다는 강한 동기로 인해 입맛이 동해
건강식을 맛잇게 먹는 것도 같습니다.
,,,
하지만
이땅에 얼마큼 연명하고 살는지는 그 연한을 정하신 분의 뜻이고
그 사는동안 어떤 과정을 겪어야하는지도 스스로 정한 것이 하나도 없고
타고난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니
억지로 타고난 것을 사람의 힘으로 바꾸려고 할 때
자만하거나 쉽게 원망하는 시험의 문을 열어놓게 되는 건 아닐까.
건강식이라고 하는 것을 가능하면 먹고
운동도 하고,
건강검진이란 것도 귀찮지만? 받아야하겠지만
...............
.
이 세상은 남자들이 지배하고 있고 남자들은 여자들이 지배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즘 대부분의 아내들이 통장을 관리하고
하다못해 여자들의 지갑에 신용카드라도 하나씩 갖고 있는 시대에서는
여심이 어디로 쏠리느냐에 따라
재물이 왔다갔다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업들 산업들 하다못해 정치조차도 여심을 잡아야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교회가 하늘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닌한
사역의 일을 하고자 할때 이땅의 물질이 필요하고
재물의 드림이 있어야 가능한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죠.
이성적이고 계산적인 형제들은 지갑을 열 때 주판알을 튕기지만
감성적인 자매들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옥합을 깨뜨리는 마리아의 헌신으로 이어집니다.
주님도 이 땅에서의 사역에서
당시의 돈많은 귀부인들이 뒤를 따라다니며 필요한 것을 공급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도
물질적인 여유가 있는 자매들의 봉사가 주님의 사역에 뒷받침이 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우리 목사님 최고야!라는 말을 여신도들에게 듣는 목회자의 목회는 반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속된 의미에서 목회자들은 그들의 목회활동에서 많은 부분 여심을 사로잡으려 한다고 말해도 헛다리 집는 것은 아닐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그 복잡미묘한 여자의 마음,
감정적이고 섬세하며 상처받기도 쉬우나
반면에 웬만해선 굴복하기 힘든 자존심을 가진 여심의 속을
제대로 파악하거나 맞추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같은 여자일지라도 맞추기 쉽지 않은 여자의 마음을..)
그것도 과연 남자들에게 가능한 일일까??라는 의문을 갖습니다.
예전에 아주 오래전에
어떤 형제님이 자매들에게 주시는 말씀중에서
형제들(남자들)은 여자의 마음을 상처주는 일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아무튼
이런 뜻으로 말씀을 주신 적이 있는데
살아가면서 이 말씀이 맞다는 것을 재차 재차 확인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사모할 만한 가치와 내 맘을 다 아는 주님이 있다는 것은 자매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아무튼
무엇을 해도 , 무엇을 하지 않아도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있어 상처를 줄 수 밖에 없는 천연적으로는 너무나 거칠게 만들어진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면전에서 제대로 배운 봉사자들은
이렇게 복잡한 자매들을 어떻게 다룰지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매들 앞에서 교통을 하거나 말씀을 전할 때 아주 두려움으로 주님을 의지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거나 어떤 영향을 받거나 어떤 도움을 받는 것을 피하려 할 것이라 믿습니다.
다만
주님의 긍휼로
아무 사심없이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리아들이 많기를...
그런 마리아들을
수고하여 접대하는 마르다들을
두렙돈을 기꺼이 헌금함에 넣는 과부들을
주님이 얻으시도록....
이 세상에 먹는 일 가지고 차별당하는 것보다 서럽고 치사한 일이 있을까요?
고린도 교회에선 그런 일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모임때 부자들은 먹을 것을 풍성하게 싸가지고 와서
아마 나눠먹기 싫어서? 자기들 것을 먼저 먹는 바람에
가난한 자들은 배를 곯거나 부족하게 되는 일이 있었고...
이에 사도는 먹는 일에 대해 의연하게 되길 권합니다.
먹는 문제 있어
먹어도 풍성함이 없고
먹지 않아도 부족함이 없는...정도가 되라고...
즉 맛있는 것을 풍성하게 먹는 일을 탐하지 말고
혹 적게 먹어도 그것에 대해 불평불만하지 말고 마음상하지 말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식탐과는 상관없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단지 필요를 넘어서 맛있는 것의 쾌락에 대해 초연하게 되는 일은
사람의 타고난 성정으로 보건데,
영적 내공이 상당히 쌓이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먹고 점점 더
영적 내공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욕심과 탐하는 것들에서 자유롭게 된다면
나이가 먹어도 서럽지 않고
사는 것이 참 유쾌하게 되리란 생각이 듭니다.
...................
많은 사람들이 종교활동? 혹은 교회생활을 하면서 얻는 것 중의 하나가
동일한 목적을 가진 또래집단안의 소속감이 주는
서로를 지지해주고 서로를 부축하고 서로 돕는 든든함이라는 것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주님이 이땅에 사람으로서 오실 때
그는 여호와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나셨고
하나님을 신실히 믿는 부모밑에서 태어났으며
또 많은 형제자매들 가운데 있었으니
외롭지 않은 환경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편 102편에서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
지붕위에 홀로 올라앉은 참새같이 외롭고 쓸쓸한 분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믿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뜻에 신실히 따르던 그렇지 않던
이런 쓸쓸함 외로움을 감수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각양각색의 상황과 배경에서 출발한 이유뿐만 아니라
거듭난 이후 생명의 성숙과 체험의 정도도 다르고
그 마음에 품은 동기에 따라 본 이상과 말씀에 신실한 정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결국 지붕위의 참새처럼...그렇게 외로운 것이라면,
이왕이면 최고의 것 최상의 것, 하늘에 속한 이상으로 인한 극한의 갈망과 열망으로 인해
외롭게 되는 것이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