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은 언제나 새로운 것입니다.
만약 자신의 영적 상태가 낡아있고 뒤로 물러나 있다면
일상에서 오늘이 내일같고 내일이 또 오늘이나 마찬가지인 순간이지만
때로는 새해나 새달이나 새로운 한주의 꼬리표가 새롭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이정표에도
새롭게 부흥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이 세대의 모든 상황이 점점 그렇게 마지막으로 치닫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는 부흥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는 주님이 오실 때가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에
이 세대의 부흥은 마지막 부흥이 될 것입니다.
아 이즘은 모든 말씀들이
마치 주님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너무나 간결하고 너무나 단순하게 말씀하셨듯이
모두가 정곡을 찌르는 그런 말씀들입니다.
마치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들어라라고 외쳐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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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되기 위해
첫째 하나님-사람의 생활을 살아야합니다.
이것은 결코 교리나 일이나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거나 집회를 참석하는 것이거나 이런 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의 내면적인 모든 상태를 자연스럽게 그런 삶을 살도록 그렇게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쉬운 일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기도 합니다.
사단은 이런 하나님의 갈망과 경륜을 두려워함으로
온 우주와 온 세상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사회 경제 그 모든 외적 상황을 총동원하여 이런 생활을 하지못하도록 방해할 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처리받지 못하고 굴복되지 못한 우리의 인격적인 문제들로 인해
우리로 이런 삶을 살지 못하도록 좌절시키고 실패하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이런 문제들을 처리해야합니다.
우리의 외적 상황들, 직업, 인간관계들을 다시 정비하여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외적요소들을 처리해야하고
드러나지 않은 각각의 내적인 복잡한 문제들 역시 처리해야합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있다고 했던가요.
우리 혼자만의 힘이나 갈망만으로는 역부족이나 그 영의 도우심과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로 말미암아
능히 이기게 하는 도움이 있을 때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잇기 때문에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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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하기 위한 또하나의 길은
교회안에서 목양의 본을 피차간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목양의 본의 첫번째는 주님자신이었습니다.
그분이 왕으로서가 아닌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오신 것은 너무나 사랑스런 선택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도 영적인 큰 업적과 칭송을 높임을 받길 원하는 대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에게 걸림돌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멋진 가운을 입고 높고 고귀하게 보이길 탐하는 소위 카톨릭과 개신교의 지도자들에게
양심안에서 찔리도록 하는 걸림돌입니다.
기꺼이 낮고 천한 상태로 머물고 가난하고 병든사람의 친구가 되지 않으려는 봉사자는 다 주님보다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양무리의 본이 되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하라 지시하고 명령하고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 역시 주님보다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만약 소위 기독교에든 카톨릭이던 또는 회복안에서조차
자신들의 가운을 집어던지고 높고 근사한 강대상에서 내려와서
혹은 유창하고 지식있고 존경받고 존중받는 좋은 말씀전하는 이가 되는 것에 치중하기 보다
실제적인 목양의 길을 걷는 것에 있어 본이 되고
그들을 눈물로 권고하고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 담대하고 견고하도록 목양한다면
이 시대의 새로운..주님의 다시오심을 가져오는 마지막 부흥을 일으키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주 사소한 일일 수도 있고..
세월이 지나면서 아 그렇구나 .. 삶은 참 공평한 것이구나를 알게 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건 악인이 번영하는 세상의 상황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부조리함에 대해 대처하는 것이 다 다르지만
믿는이로서는 어떻게 답을 얻어야할 것인가
어떤 합당한 관점과 인식을 갖을 것인가.
한탄을 하는 것도 맞써 싸우는 것도 믿는 이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며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가
유일한 답이라면 어떻겠는가...............
오히려 세상의 상황과 사람들의 상황에서 거듭 실망하고 거듭 강탈당하고 거듭 거절당하는 환경을
허락하시는 목적이
오직 하나님외에는 사모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면 어떻게하겠는가......
이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유일한 반응이 하나님 당신의 뜻이 높고 선합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때
참된 안식과 특별한 안식이 비로소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면..........................
마침내
성소와 지성소에 거하기까지.
신약에서 말하는 새사람, 혹 마음에 숨긴 사람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의 영과 하나님의 영이 만나 생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미 우리는 타고난 사람의 생명이 있으나
우리의 영안에 새사람으로 거듭났으니
이론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우리는 이중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죠..
이중의 생명이라니...
이건 무슨 뜻인가..새삼스럽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만약
믿는 이안의 이중의 생명이
(잘못 인식할 때)분리된 두 인격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믿는 이가 된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이중인격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오해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이가 된다는 것은 이중의 인격의 생명을 갖고 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닙니다.
타락한 사람의 인격은 그 지위를 상실하고 죄있는 생명의 본성으로 남아있고
우리의 인격은 거듭난 새사람
성경에 기록된 바 마음에 감췬 숨은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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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의 인격안에서 최대한 도덕적으로 살려고 한다던가 인격을 수양한다던가 도를 닦아서
선하고 고고하게 살아보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영역안에서 거듭나
새로이 태어나 새로운 출발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낡고 오염된 타락한 본성이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기억상실증과같은 상황이 아니라)
낡고 타락한 본성은 유기적인 변화와 같이 점차로 건강해지고 변화되어 새롭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거듭남으로 우리의 인격이 된
새사람으로 살때만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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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소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많은 가식적인 표현과 이중적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고
스스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헤메었던 일들은
타락한 생명으로 새사람의 인격을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이나 가식의 한계때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영적인 상황을 제대로 아는 것은 발의 등불과 같아서 그길을 비춰주는 빛입니다.
사람이 이땅에서 기껏 살아야 한백년도 못산다는 것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제한을 받는다는 것은
한면 다행한 일이나
한면 다행치 않는 일이기도 한 것은
사람이 한 수고들이 쉽게 잊혀지기도 하고 왜곡되어도
수정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람의 제한된 수명으로 말미암아
악도 제한을 받지만
모든 기릴만한 수고들도 잊혀지고 시들해질 수 있다는 점이죠..
그런 점에서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 첫째로 중대한 일이고
그 말씀을 상고하여 깨달은 말씀이 기록되어 남아있다는 것 역시 중대한 일입니다.
회복의 사역이 장래가 있는 것 역시
많은 성경의 해석들이 일회성으로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라
인쇄된 책으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시대의 추구하는 믿는 이들에게뿐 아니라
언제까지 일지 모르지만
다음 세대, 어쩌면 그 다음세대의 믿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책의 내용들 역시
진리의 중심노선과 함께
교회생활의 실행
믿는 이 개인의 생활의 어떠함까지도 다룬
총체적인 지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문득
어쩌면 사람들은 변하고 혹 약하여질 수도 있지만
이 사역은 계속 남아있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
중세에 그려진 것 치고는
원색의 대비효과도 좋고 사람들의 표정과 역사적? 고증도 충실하게 재현되었다고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주님이 우릴 위해 피 흘리신 그 고통을 생생히 느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을 그린 화가도
주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위에서 피흘리셨음을 생생히 보여줌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회개하는 마음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기록하기를...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자
물과 피가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지 피만이 아닌
피와 물~!
피는 밖의 죄의 행위의 문제를 해결하지만
물은 생명을 공급하므로 죄의 본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무적인 메시지인지요.
만약 단지 피였다면 우리의 죄의 행위들을 회개하고 씻김받는 것만으로 그칠 뿐,
우리의 죄의 본성은 그대로 남아있는채
끊임없이 좌절하는 것에서 해방받지는 못할 것입니다.
완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피뿐만이 아니라 물을 쏟아내는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대속하기 위한 돌아가셨을 뿐 아니라
주님안의 생명을 해방하고 분배하시기위해 죽음을 거쳐 부활하셨을 뿐아니라
그 모든 실재를 우리에게
계속 공급하심으로
밖의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문제도 해결하고 계신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임한 완전한 복음의 소식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모자란 것이 많아~ 라고 말은 하지만 내심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반대로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그래도~ 이런 저런 보다 뛰어난 점이 있어..라고 내심 자위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니까 다 제 잘난맛에 사는 거야..라는 말이 있는 거겠죠.
그러나 살다보면 정말 어느 싯점에 불현듯 적나나하게
난 정말 지극히 평범한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싯점에 오게 됩니다.
더하여 언제 부숴질지 모르는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아 그안에 제한을 받는 순간이야말로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 일인가를 알게 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사람들이 주는 칭찬과 명예와 욕심에 의해 사람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도에 지나치게 자기를 학대하고 다른 사람들을 못살게 굴게 됩니다.
뭐야~ 무슨 얘기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열심히 추구하고 일하지 않으면 영적 장래와 보상을 어떻게 받겠어?라고 누군가는 반박할지도 모르겠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람이 해내는 모든 위대해 보이는 영적인 업적도
그분의 눈에는 작은 일에 충성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일을 맡기겠다..는 말씀의 뜻은
사람에겐 큰 일도 하나님의 눈에 작은 일이란 뜻도 되겠으나
큰 일을 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의 역량에 맡는 일에 충성하면 된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사실 영적인 영역에 있어 문제가 되고 해를 끼치는 일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큰 일을 해내려는
스스로 잘났다고
스스로 크다고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야기된 일임을 알게 됩니다.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모임도 많고
이런 저런 추구해야할 말씀도 많고
또 거들어야할 봉사들도 많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가장 보기에 합리적인 방법으로
감당할 일을 공평하게 나누거나
그러기 위해
누군가에의해 지시를 받는 것은 세상의 체계이고
교회안에서는 어떤 일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는
하나님앞에서 스스로 정하면 됩니다.
설사..
약간 과장되지만
하나님앞에서 스스로 정하라는 원칙을 너무도 잘 이해한
교회안의 어떤 성도가
처음 교회생활할때는 새신자라고 섬김받고
조금 자란 뒤에는 바쁘다고 , 애기가 있다고, 이런 저런 벌이를 해야하므로
영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차려논 밥상에 앉아 먹고
나이 먹어서는 노인이니까 공경을 받아야하겠다고 한들...
어쩌겠습니까...
^^:::
아무튼...
교회의 모든 상황은
좀더 부담을 받은 성도들에 의해 유지될 것입니다.
어느때는 좀 부족하기도 하고
또 어느때는 풍성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이 모든 것 뒤에
얼마큼 자기의 작은 일에 충성하였는지는 나중에 저울에 달아지고
각각에게 알맞는 보상이 있을 것이니
............................
이 세상은 긍휼이 없는 세상입니다.
남과 남 사이도 그렇고
혈육간에도 그렇고
가만 보면 ...긍휼히여김이 부족합니다.
다 자기의 어떠함을 기준으로하여
그 기준에 다른 사람이 따라오길 바랄 때
특히 더 그러합니다.
그 자기라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하찮게 여기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또는 무턱대고 시샘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을 다루는 것에도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교회모임을 다 참석하는 사람은
이런 저런 집회를 오지 않은 사람보다 자신을 더 영적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봉사와 드림에 충성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재정적인 배경을 갖고 있음에도
이런 저런 교회의 필요에 나몰라라하는 하는 사람들을 두고
인색하다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혼은 너무나 민감하고 약하여
자신의 약한 모습을 많은 사람들앞에 노출하는 것을 감당치 못함을
어떤 씩씩하고 당찬 성격의 사람은 박차고 나오라며 답답해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체력이 좋은 사람은 하루에 몇탕씩 모임을 갖고도
그 다음날 아침 너끈히 일어날 수 있음으로
한두번 모이고 난 뒤 다음날 피곤하여 지치는 약한 체력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
그러나
우리 중 그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하나님이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로 한다면
세상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분의 자녀중 망대아래 깔리지 않을 사람이 몇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할 수 없음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무기력함과 두려움으로 소심해질 수 밖에 없음을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도 생각합니다.
이 험악한 세상에 누구하나 손벌려 도움을 청할 수 없을 때 오로지
물질이 필요를 채워주는 현실로 말미암아
그걸 내려놓을 수 없는 믿음이 부족함을 또한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은혜가 부족할 때 결코 참된 헌신이 없다는 것도 알기에
결코 억지로 요구하시지않는 것도
긍휼히 여기심일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을 알므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을 때까지
인내로 기다리시는 것도
긍휼히 여기심으로 가능한 것이겠죠.
.
세상은 갈수록 험하고 믿음의 시험을 받고
재난의 소식이 도처에서 들려올 때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판단하고 야단치기 보다는
더 많은 사랑과 긍휼히 여김으로 각각 받은 분량과 영적 노정대로 갈 수 있도록
충분히 더 긍휼히 서로를 보듬어주는
그런 실재적인 사랑이 우리 가운데 더 있길....
.
어제 읽은 교회소식지에서...진정한 습관
그래서 자신의 일부분으로 어떤 것이 정착화되기까진
10년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성공한 한 가지 습관은
매일 스트레칭하는 시간을 갖는 것인데
돌이켜 보니 정말 십여년의 시간동안 천천히 형성되어서
최근에서야 비로소 매일 하는 것으로 정착되었으니까요
매년 무엇인가 올해는 꾸준히 해야겠다고 하는 목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정말로 정착이 되기까지
한두번 혹은 서너번 성공하다가 또 빼먹기도 하고 그러면서
안되나 보다 하고 포기하게 되기가 쉽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대부분의 믿는 이들이 고백하듯이
옛사람에게 제일 낯선 것이 새로운 사람의 새로운 습관인데
그중 제일 어려운 것이
주님을 영안에서 접촉하는 것,
그리고 그것의 실제는
바로 참된 의미에서 주님앞에 나아가는 시간
즉 기도하는 시간이지만
그것을 매일 습관적으로 꾸준히 하기가 어렵다는 것.
,
지금 제 나이에서 조금더 먹으면
흔히 말하듯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노년층...
교회모임중에 요한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는 나이가 될 때
주님앞에 매일 나아가
주님과 교통하며 지성소안에 머무는 참된 기쁨을
실제적으로 체험하고
체질화하여 노년을 맞을 수 있다면
그보다 의미있는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
올해부터 혹 중간중간 실패하더라도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10년쯤 걸려
주님앞에 나가는 습관을 들일까 합니다.
자 오늘부터 시작!!
사도바울처럼
하늘에 속한 이상을 직접 보고
성경을 꿰뚫어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대한
분명한 진리를 깨달은 그 였지만
역시
환경가운데
낙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가 체험한 낙심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큰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구원과
그분의 능함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강한 의지를 가진 바울이라 하더라도
역시 사람이니까
아픔과 죽음과 고통에 처한
출구가 없어 보이는 막막한 상황에 맞닥뜨린
그런 때....
당연하게
그의 솔직한 반응은 낙심이었습니다
.
하지만
보통사람들은
아무런 일이 없는
평범한 일상이라 하더라도
목표를 세우거나
요구받은 일이 있어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약한 의지로 인해
좌절하고
거기다
스스로는 보양되거나 채울 수 없는 정서적인 갈증의 문제로 인해
허덕이게 됩니다.
.
하물며
상처받기 쉽고 마음이 약한데다
소위 예술적 성향을 가진 사람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예민한 감정
거기다
싫고 좋은 감정을 그대로 온몸 전체로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성향이라면....
살아남는다는 일은 참 녹녹치 않은 일입니다.
.
오늘은 그래서 제 스스로에게 말을 하려합니다.
낙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그건 일상사이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참 대단한 일이라고.................
.
흔히들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성품들을 논할 때
강한 의지도 필요하고
균형잡힌 감정과
명료한 생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성품을 갖길 원하고
갖추려합니다.
그러나 그런 바람이 심한 압박으로 다가오고 또 그래서 낙심하게 됩니다.
.
그런데 이 세상엔 그런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
우린 결점 투성이의 사람일 수 밖에 없기에...
다만 그렇게 되길 바랄 뿐이죠.
.
하지만
미래에
언젠가
우리의 혼이 구원받을 때는 그렇게 될 수 있을진 모르지만
.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과 끝까지 같이 하는데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성품은
솔직히
오로지
착하고 양심적인 성품이 아닐까요.
교회안에 모든 성도들이
착하고
양심적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을텐데 말입니다.
야심은 웅지와 비슷해 보이지만 동기와 목표가 다릅니다.
야심은 그 중심과 목표가 자신이지만
웅지는 높고 고결한 뜻을 이루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심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병으로서
야심으로 인해 화와는 선악과를 따먹어 하나님처럼 눈이 밝게 되고 싶어했죠.
야심은 확실히 인류의 공통된 딱 걸려넘어지게 되어있는 시험입니다.
.
보통은 한국사람들이 유독 야심이 강하고 누가 큰가하고 잘 싸운다는 평을 듣는데
그건 아마도 한국사람의 기질상 터놓고 야심을 드러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야심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한 가운데 킁킁 상대를 재기 때문에 사실은 더 음흉한 면이 있습니다.
음흉하기로 말하면 소위 신사라고 하는 영국사람만큼 할까요
아무리 오랫동안 같이 하여도 결코 속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 속을 알 수 없다고 하네요.
미국사람들은 자신들을 이미 세상의 중심에 선 슈퍼영웅이라는 착각속에
타 인종이 자신들 위에 서는 꼴을 보지도 인정하지도 못합니다.
(이러다 민족간 싸움날라~)
.
요컨데 야심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이런 것을 인정하고 들어가야하겠지요.
야심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습니다.
.
유일한 문제해결은
야심을 웅지로 바꾸어
우리의 성품이 하나님의 고결한 성품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뜻의 위대함으로 인해
자신의 천한 목표를 자발적으로 내려놓게 되는 것뿐인 듯 싶습니다.
.
웅지는 서로 격려하고
야심은 말려 죽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
야심을 어떻게 말려죽일 수 있는가
.
만약 어떤 사람이 교회안에서 이런 저런 수고를 하고 희생을 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칭찬도 안하고
띄워주지도 않아도
마땅히 해야할 바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웅지일 것입니다.
그 반대로 별로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거 같아 맥이 빠져
더 이상 수고와 희생을 하고 싶지 않다...그러면
그 동기는야심일 것입니다.
.
우리는 혹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바라지 않음으로
우리의 야심에 물을 주지도 말아야하겠지만
돈 드는거 아니라고
다른 사람들의 수고에 대해 마구마구 칭찬 멘트를 날리는
경솔함을 저지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 지체를 망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물론 다른 사람의 수고에 대해
당연하게 여기고
감사함이 없다면
인간성에 문제가 있는 거겠죠만....
지체들의 모든 수고에
감사함을 가지고 감상하며 격려하되
그 사람의 야심을 부추기는 일은 하지 맙시다.
1 어떤 한 사람만이 최고결정권을 가진 대표권위가 되지 않기
윗트니스 리 형제님이후 교회안의 봉사는 한무리의 봉사자들이
함께 건축되어 단체적으로 섬기는 것으로 바뀌었다..면
그리고 이것이 유기적인 섬김의 실재적인 모델이 되었다면
이하..
지방교회안의 대지역, 소지역, 하다못해 소그룹안에서도
모든 섬김은 복수의 책임자가 있어
어떤 한 사람만이 대표권위로 드러나 결정권을 가지지 않는 것이 합당한 것이겠죠.
2. 연합으로 모일 때 어떤 한 사람만이 고정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기
일반 기독교의 모든 예배는 목사가 혼자서 예배를 주관합니다.
그러나
회복의 모든 모임은(특별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말씀전달집회인 경우외엔)
상호적이고 유기적인 교통을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우리는 집회에 연설을 듣거나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접 찬송을 부르고 주님을 찬양하는 소릴 발하고 선포하기 위해
즉 게임에 참여하기 위해 운동장에 가는 선수와 같습니다.
기독교의 모임과 같이 특정한 누군가의 설교를 듣기 시작하는 분위기가 될 때
우린 모두 서로를 향해...옐로우 카드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3.교회안의 각종 봉사를 유기적으로 하기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많은 섬김의 필요가 있습니다.
영적 분량과 생명의 성장의 정도에 따라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짐을 더 감당하고 더 많이 봉사하기도하고
어떤 사람은 그저 집회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마치 큰 일을 한 듯합니다
(모든 사람이 조금씩이라도 거드는 것이 정상적인 분위기이지만..)
때로는
상황이 다들 바쁘거나 다른 일들 때문에
섬기는 일에 차질이 생기기도 합니다.
해서
생각다 못해
원활한 봉사를 위해 조를 짜거나 해서 일을 분담합니다.
해서
별로 부담이 없는 일을 할 수 없이 하기도 하고
상황이 허락되지 않는 데 힘들게 일을 떠맡기도 합니다.
슬슬 맘이 걸리고 당황스럽고 짜증이 나기 시작하면...
달콤하고 사랑스럽고 기꺼워야할 집회가 쓴맛이 나기 시작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당장 일은 해결될지 모르지만,
더 중요한 것을 잃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4 주인의식 갖기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또한 모든 성도들의 교회입니다.
(사도의 교회도 아니고
장로형제들이나 책임형제의 교회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머리고
우린 그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이시고 우린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교회의 모든 상황이 우리의 상황입니다.
남의 집 구경꾼이나 말씀을 얻어먹기 위해서 온 손님이 아닌
주인집 자녀로서 당당히 권리를 취하고
또 마땅히 집안의 일도 나눠서 해야 주인이라고 할 수 있겠죠.
흔히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이름이나 가족관계나 주변상황을 잘 기억해내면
어떤 사람이 그 다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외면적인 상황을 잘 꿰고 있는 것과
사람자체에 대해 참된 관심과 이해를 갖는 것은 별개의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외면적인 상황들
이름 전화번호 학력 가족관계 친분관계등과 같은 것을 잘 기억하는 것은
그사람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쩌면 필요에 따라 발달시킨)
그 사람의 관계성을 기억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표정 ,내면 이나 됨됨이 ,마음 생각 아픔 관심사 등등에 더 관심을 두고
그것을 더 기억할 것이고
그가 가진 외면적인 상황들은
그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보조적 상황이거나 별 큰 관심사가 아니기에
어쩌면 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점들은 종종 사람에 대한 무관심으로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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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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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형제가 있는데
그가
좋은 기억력을 갖고 있고
논리적인 사고와
설득력을 갖춘 좋은 언변이 있다면
한마디로
좋은 연설가라면
그가 집회중에서
성경안의 내용들
신학적인 지식들을 가지고
말씀을 잘 풀어낼 수 있을 것이지만
과연 그가 그만큼
하나님을 참되게 아는 것인가는
또다른
별개의 문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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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많은 믿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평가할 때
말씀을 많이 공부하고
듣기에 매끄럽게 유창한 언변을 가진
가르침에 은사를 지닌 것이
참된 영적 분량을 가진 것으로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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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때때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
말씀을 유창하게 풀어내기는 하는데
추구하는 것과 행동은 그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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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 경우에
주님은
바리새인의 말은 듣되 그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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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아마도 가장 현명한 대처방법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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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와 반대로
별로 언변이 좋지 못하고
(사실 바울조차도 고린도성도들로부터 말에 힘이 없다는 평을 들었었죠)
음성도 어눌하지만
깊이 있게 체험된
그리고 참된 말씀을 해내는 형제가 있다면
우리가 가진 관념으로 인해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으로 부터
마땅히 받아야하고
빛비춤받아야할 영적 공급을 놓친다면
지체로서의 개인은 물론이고
몸된 교회에 있어
어떤 큰 손실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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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늘 매번
교회안의
모든 상황에
우리의 관념으로부터 새로워지길 ................
자유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이 세대에서
그리고
이 나이먹도록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얻어야할 건
참된 자유뿐 입니다.
이 자유는
사소한 것에서 부터의 ..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에서 자유로워지기까지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자유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얻을 수 없는 자유이나
사람이 갈망하는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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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들어보니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졌다죠.
지폐가 사방에 날리고
사람들은 한푼이라도 더 주우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그때
어떤 사람은 주운 돈을 돌려주라고 전달했다죠.
(저라면 얼마간 주운돈을 호주머니에 넣었거나
어짜피 갖을 것도 아니면 귀차니즘땜에 그냥 지나갔겟죠
아님 이 무슨 광경인가하면서 사진이나 찍어대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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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티비를 보면 이즘은 왜 이렇게 먹는 그리고 탐스럽게 먹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지..
그렇게 먹어대면서 기름진 얼굴이 짓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며
..동시에 먹을 것이 모자라 총알을 맞을 것을 각오하면서 탈출을 하는 뉴스를 볼 수 있는
그런 세상에 살면서
잘먹는 것도 좋고 먹을 기회가 있을 때 맛있게 먹는 것도 좋지만
먹을 게 별로 없어도 서운해 하지 않을 여유가 없다면
우린....
먹는 쾌락에 길들여져 사로잡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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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건강염려
노후염려
등등...
사람들이 마땅히 하는 염려들
그러나 참된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면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염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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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에 참되게 자유로울 수 없다면
나는
정말
세상에서 악착같이 잘 살아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사탄에게 비웃음당하는
불쌍한 믿는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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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매님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만약
소지역에서 그 가정이 빠진다면? 큰 손실일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만약 내가 혹 우리 가정이 딴 곳으로 간다할 때
그래요? 하고는 무덤덤하다면
아마도 엄청 무안하고 당황하게 되겠죠...........
아이고 가시만 안됩니다~하고 정말로 만류를 한다면
(그렇다고 해서 갈 길을 안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헛? 교회생활을 하지는 않았구나는 흐믓한 미소를 짓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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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든
자신의 빈자리와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확인받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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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빠져도
내 집이 차지했던 빈자리가 뚫려도
다시 물이 들어와 그 자릴 메우는 것처럼
그렇게 메워져야
그래야..
내가 속한 교회모임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상태라는
뜻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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휼륭한 임금은 자신의 존재를 백성이 의식하지 않게 하고
훌륭한 부모는 자녀가 우뚝 서서 혼자 살아나가게 하고
훌륭한 영적 지도자는 자기가 빠져도 정상적인 교회생활이 되게 하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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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그런 본을 따라 그렇게 살아야할 것입니다.
정말 내 그림이구나.. 하는
정말 표현하고 싶은 딱 그대로 그려지는 그런 순간이 언젠가는 오겠지만
아직은 여전히...
사물을 표현하는데 맘대로 되지 않는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부분부분 형태의 표현이 맘대로 되지 않는다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생각하는 건
시기상조라는 생각에서
사물을 부담감없이 표현해내는데 여전히
중점이 맞춰져 있는
거북이 걸음같은 훈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죠.............
특히 인체의 전신표현같은.....
그것도 다른 거 다 하고 남은 시간에................
위안이 쫌 되는 것은
최근엔
전보다는 그림 선에 확신이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소싯적부터 계속 그림을 그렸다면
지금의 제 나이쯤은 자신의 그림표현방식과 주제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할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살아온 세월이
그림방면쪽에서 볼 때 헛세월일 수는 없습니다.
모든 문화활동이
그 사람의 내면과 사고의 깊이와 상관관계가 있듯이
그림은 단지 기교와 정서만으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오면서
구축되어온 삶의 편린과 반응과 체험과
다 연관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만약 환경이 허락된다면
어떤 싯점에서
꽤 괜찮은 작품을 낼 수도 있을지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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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손이 그리고 내면의 모든 정서가 모두 하나로 협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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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기까지는 물론 타고난
소위 소질도 있어야하겠지만
그리고 걸작을 만들어내려면 천재성이라는 것도 있어야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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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모색과 인내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을 보는
(풍경과 사람과 그 모든 것을 아우러서)
정직한 시선과 살아잇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마음이 있어야할 것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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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하나 그려내는 것도 온 일생을 걸쳐
한 사람이 살아온 모든 것이 집중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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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하물며....
.
진지하지 않다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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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반고흐는 불행한 사람이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에겐 그를 지지해주고 돌봐주던 테오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하나 끝까지 갖질 못하고..............
모든 동기엔 은밀한 남모를 계산이 깔려있고
필요에 의한 인간관계,
필요에 의한 호의 지만
그나마도 유지하고 받을 수 있다면
나름 인생성공?......................................
하지만 기껏 그 정도를 바란다면
그 정도로 만족한다면
사는게 참 치사스러워집니다.
엿같이
역겨운 일이죠(헉)...........드드득(민망할까봐 달아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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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성도들끼리는 이러지 않고 싶습니다.
느낀대로 말하고
솔직하게 드러내고
깨지고 마음아픈 일이어도
좋게 말하고 넘어가는 것보다 나을지 모릅니다.
차마 말하지 않는 게 낫다 싶으면
그냥 잊어버리고
잘 모르겠다 싶으면
그냥 말하지 않는게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좋게 보이고 옳게 보이고자 할 때
그나마
할 수 잇는 한 순수한 목적은 다 달아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조직하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 조직에 잘 끼어맞춰져 돌아가야 소외감을 느끼지 않고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저 같이 그 조직이란 것에 알레르기? 증상을 일으키는 사람의 경우
이미
싫던좋던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거대한 국가조직 거기에 사회조직에 할 수 없이 낑겨있는 것 외에
교회라는 곳이 , 그 무엇보다도 졸업이 없는?ㅋㅋ (이거야말로 정말 끔찍한 일이죠)
튼튼한 조직망이라고 한다면
결코 가입?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교회가 조직이 아니라고? 외려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조직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 안에 버텨야하는 또는 버티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 문제를 거론할 필요도 없을지 모르지만....
교회는 조직이 아니고 유기체라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아주 작은 예를 들자면 주일날 반찬을 해가는 일 같은 경우,
조직이라면 누군가는 메뉴를 짜고 누구는 무엇을 해오고 등등을 정해야할 것입니다.
(이것도 때로는 필요하다구요? 경우에 따라선??)
하지만 미리 정하는 것 없이 각자 알아서 반찬을 가져옵니다.
(경우에 따라선 슬쩍 그냥 와도 됩니다^^)
만약 대부분 그냥 빈손으로 와버리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르죠..
왜요? 그런 믿음도 없이 믿음생활을 한다 말입니까.
이런 모임이라면 매번 모일때마다 입으로 들어가는 물질적인 양식과 더불어
영적 양식마저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누가 어떤 말씀을 어떻게 내놓을지 미리 정하지 않게 되면 말입니다.
(저희 소지역은 제가 느끼기에 지난 주 이런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사실 맨처음 말씀을 여는 분이 순번으로 정해져 있었긴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맘에 들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순번을 정하는지 ...................
아무튼 말씀을 여는 분의 말씀의 공력이 적었습니다.?
몇마디 하지도 못했지만 약간의 횡설수설....ㅋㅋ...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가족끼리 모였는데 말씀을 잘 풀고 못 풀고가 대수입니까.
괜찮아요..뭐 이렇게 넘어갔습니다.
솔직히 ..유려한 말솜씨로 완벽한 말씀을 그것도 장시간 걸쳐 풀어내었다면
다른 사람들은 기가죽어서? 말꺼내기가 쉽지 않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조금씩 말씀들을 내 놓고나서 우리는 피차 정말 큰 공급을 얻었습니다
부족한 곳에 주님의 은혜가 더하는 것 같네요..)
만약 조직이라면 가장 큰 폐해는
책임을 맡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권력을 갖게 되고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이 명령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해라
저걸 해라
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고 말을 내게 됩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라는 곳(교파)의 폐해는 바로 이것에서 비롯된다는 것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평양감사도 지하기 시르면 못하는것이 폐쇄된 신분사회의 조선시대도 가능한 일이었는데
교회지체들보고 왜 이런 저런 집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곤장을 때리거나
벌금을 물겠는지요
왜 이 좋은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겠습니까
그 좋은 것을 누리는 정말 누리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향해 마음이 안타까울 수는 있겠죠만...
이를테면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칩시다
그 여행에 동행하지 않은 사람을 생각하면 화가납니까 아님 미안하거나 안타깝겠습니까.
또는 정말 환상적인 음식맛을 보았다고 칩시다
그걸 먹지 못하는 사람에게 왜 나만 먹냐 할 수 없이 먹어서 화나고 억울하다고 여기겠습니까
아니면 ............쫌 미안하겠는지요.
자신이 참여하는 모든 교회모임이 환상적인 풍경을 가진 여행이거나 맛좋은 음식과 같지 않다면
만약 습관적으로 행하는 또는 할 수 없이 코낑겨 참석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다면 왜 화를 내야하는지..)
심각하게 주님앞에 서봐야하는게 아니겠는지요
사실 교회안에는 이런 저런 명칭을 가진 집회가 있습니다만
(모든 집회는 주님을 나누고 먹고 함께 누리는 점에서 모두 같은 집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는 모든 집회를 다 참석하고
누구는 상황과 필요에 따라 선택을 하여 참석을 하겠죠
어떻게 하든 강제성은 없습니다
또 강제성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혹
만약 자신과 같이 하지 않는
그렇게 하지 않는 지체들을 향해 정죄를 하는 분들이 있다면
자신이 혹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조직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자신이 교회에 해를 끼치고 있는 존재는 아닌지
오히려 경고를 받아야할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조직이 아니고 유기체입니다.
그 지체에게 동기부여를 주는 분이 그 누구도 아니고 주님자신입니다.
어렸을 적의 국민학교 1학년(그때는 교과서가 동화책처럼 여겨졌던 시절이었던지..)
교과서안의 분홍 연두의 삽화처럼
적어도 내가 생존하는 시대에선 절대로 바래거나 낡아지거나 하지 않을 듯 했던
미국의 경제가 그리고 미국의 정신가치가 점점 무너져내리는 것을 보는 것...
그래서 이땅의 어떤 문명이나 문화도 결코 (인간들의 바램과 염원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은 없다는 명제를 새삼 확인하는 이즘...........................
커다란 철학적 명제를 떠올려 인류의 문제를 논할 능력이 안되는
범부라 할지라도 발견하게 되는
인간의 문명의 흥망성쇠를 문득 생각하게 되는 이즘............
아마도 아 가을!.....이런 느낌
문득 옥탑방 베란다에는
이름이 생각안나는 화초가 새삼(가을에 피는 것 맞나?) 맑고 하얀 꽃을 피우고
석류나무는 몇개의 빨간 석류를 익혀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건 어떤 변화도 새로울 것이 없지만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생명의 신선함과 강인함은
영원에의 우리의 소망이 얼마나 믿을만하고 견고한 것인가를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13세기라는 몽골민속촌에서 활쏘기하는 중......
게르숙소앞에서........
몽골문자로 one new man...(참 글씨체가 아름다운...)
부산 광주 용인 서울 대전 등등에서 22명의 .......
모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