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는 새삼스럽게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마치 사계절이 그렇게 반복되듯이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면서 반복되어 씌여지는 인류의 역사가 있고
조금씩 모습을 바뀌어 더 발전해나가는 듯하는 문명이 있으나
그에 대한 댓가로 조금씩 더 황폐해져가는 자연이 신음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어느 싯점에 감춰진 비밀이 그분의 택한 성도들에게 드러났는데
그분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진 것이나 우리 이방인들에겐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그들이 보지 못한 것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 그들이 영접지 못한 것을
우리는 보고 체험하고 소망삼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아직은 어느 정도 비밀한 이 영광이
하늘아래
땅위에
유일한
새로운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해 논하는 것보다
실제 죽음안에 사는 것이 더 관건이고
부활에 관한 많은 이론을 논하는 것보다
부활안에 사는 실재가 더 관건이겠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인정을 받는가보다
스스로에게 얼마나 진실한가에
더 촛점을 맞춰 살았는가에 좌우되겠죠.
이 땅에서의 삶에 마침점을 찍을 무렵에
육신의 사망앞에서 마치 잠을 청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안식할 수 있을 만큼
담대해질 수 있다면,
이모저모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영적 체험과
분별할 수 있는 말씀에의 지식의 근거로 인해
부활에의 소망이 큰 확신가운데 분명하다면,
이 땅의 삶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을 겁니다
이즘 모 성악과 교수가 학생들에게 가한 각종 모욕적인 다룸이 항간에 폭로되면서
그동안 속에 숨켜져 있던 고질적인 예술계통 대학의 교수의 권력남용?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왜 하필이면 예능계통인가?
아무래도
그림이던 음악이던 혹은 무용이던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이기 때문일 것이기에
그교수에 의해
그 어떤 평가가 주어지더라도
당사자이던 혹은 다른 사람이던 반박할 객관적 근거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평가하는 교수의 한마디이면 예술가로서 앞으로 나아갈 수 도 있고
또는 중도에서 도태될 수도 있기 때문일테죠.
그러고 보니 예능계통의 교수 그것도 어쨌든 권위를 인정받는 위치의 교수의 평가란
정말 ... 놀라운 권력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 권위를 갖은 사람의 평가가 늘 객관적으로 정확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은 차치하고서라도
거기에 사사로운 이해관계가 끼어들 여지는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타락한 사람은
자신이 권력 그것도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한 그것을 남용할 유혹에서 자유로워지기가 힘들다는 것.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모든 평가에 두세사람 혹은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에 의해 동일한 조건을 갖고
평가를 받는다면 그런 폐단은 최소한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절대로 결코 결정권을 나눠갖지 않습니다.
그 권력의 맛을 알기 때문이죠.
함으로
교회의 모든 다스리는 제도 즉 장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가 되어야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다스림도 그러하거니와
비록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육을 갖고 있는 한 권력남용에
모든 것을 홀로 좌지우지하려는 절대권력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방의 교회들에서
모든 대지역들에서
모든 소지역에서
심지어는 소그룹에서 조차..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두분 이상의 형제들이 함께 교통하는 것을 택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은 거의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럴 뿐 아니라 청하지 않은 것까지도 배려하고 나서야 마음이 편합니다.
또 다른 사람이 고마워하거나,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보답의 말을 듣는 것에 보람을 느낍니다.
착한 사마리아인 증후군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이땅에 사는 보통사람(영적으로는 타락한 죄인일 수 밖에 없는)이 완전 이타적인 것이 가능할까요?
항간에 완전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던 어떤 신부님에 대해선 그냥 특수한 예
..그의 직업이자 삶자체가 온통 이타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불가침 영역으로 넘어가기로 하고.............
아무튼 평범한 그리고 그 역량과 능력과 체력에 있어 일정 한계가 있는 보통사람이
착한 사마리아인으로 일정 시간 살고 난 뒤에는
본연의 무방비한 상태가 될 수 밖에 없고
이럴 때 나타나는 현상이
흔히 말하는
밖에서의 태도가 다르고 집에서의 태도가 다르다라는 이중성을 지닐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쌓인 스트레스 또는 긴장감에서 풀려나지 않으면
사람은 몸과 마음이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으니깐.
.
하지만
주님은 타고난 섬세쟁이입니다.
그분의 선함 그분의 사람에 대한 불쌍히 여김 그분의 다정함 그분의 겸손함 등등
어느 것하나 일부러 연기한 것이 아닙니다.
아 나는 주님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탁월한 사람의 미덕을 갖춘 사람이고 싶다는 바람과
현재의 나의 도달한 처한 상태의 차이를 인정할 수가 없다 혹은
빨리 메우고 싶다는 바람은
종종 우리자신을
종교쟁이 그리고 가식쟁이로 만들고 맙니다.
.
만약 우리가 종교쟁이라면
몇시간동안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간
그리고 뒤돌아섰을 때 전보다 더 좋지 않은 상태로 몰락하고 맙니다.
잘못하면
정말 잘못하면
이런 자신의 극과 극의 상태에 누가 걸릴 것도 없이 스스로 먼저 떨어져 나가던지
아니면 자신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학대해 주님이 허락한 연한보다 훨 짧은 연수를 살아가던지
둘중의 하나가 되고 말 것입니다.
.
우리가 우리를 참으로 위한다면
그리고 우리를 보고 있는 자녀들과 주변의 사람들을 위한다면
종교쟁이가 되지 말고
그냥 믿는쟁이가 됩니다.
.
종교쟁이가 되다보면 스스로 빠지는 가장 큰 올무가
착한 사마리안 증후군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스스로 자신의 증상을 모르는...
그래서 모든 사람에 대해 좋다 좋다 말하는 판단이 없는 착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안에서는 자신도 아지 못하는 사이에 누군가에게인지는 모르지만 불분명한 분노가 쌓여갑니다.
그 분노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심리적인 어떤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독은
자기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독을 주입하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에게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종교인들은 싫다
실은 너 종교쟁이 때문에 하나님도 싫어진다는 소릴 들어야겠습니까.
.
우리는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
가하면 가하다 받아주고
불가하면 불가하다고 거절하고
예이면 예라고 말하고
아닌 것 같으면 아니다라고 솔직히 말하고
화가나는 상황에 앞에서 웃고 뒤에 가서 뒷말하지 말고
왜 잘못되었는지 말하기로 하지요...
우리 자신에 대해 정직하고 이런 자신을 주님앞에 나아가 고침받기로 하지요.
앞으로는..................
그동안 교회생활하면서 여러 형태의 모임들을 가졌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어떻게 하면 가장 이상적인 모임이 될 것인가
즉 어떻게 하면 모든 성도들이 집회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사람이 가장 만족할 수 있는가를
부지런히 살펴서 모색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땅에 믿는 이들이 모이는 형태는 여러가지가 있겠죠
하지만 최근에 회복안에서 갖는 모임의 형태는
인도하시는 분들이 그 모색하는 과정에서 마침내 추출해낸 결정체같은 것들입니다.
때로는 하나의 간증을 위해 대 규모로 모이고
때로는 사역의 말씀을 듣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이고
그리고
한 사람씩 한사람씩 영의 느낌을 따라 말할 수 있는 소지역의 형태로 모이고
그리고 보다 친밀한 교통을 위해 성도의 집에서 소그룹으로 모이는 모임이 있고
성경을 추구하는 세사람정도의 성경읽기 모임과 기도모임
그리고 두 사람이 말씀을 읽고 교통하는(대부분 전화로 하는) 아침부흥
덧붙이자면 주님임재앞에서 홀로 같는 시간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모든 모임의 구성에는 여러가지 상황과 형태 조건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모이는 숫자부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장소만 문제가 없다면 대규모로 모이는 것은 가능한한 많이 모이면 정말 좋을 거 같습니다.
전세계안의 주의 회복안의 성도들이 거대한 들판에 함께 모여보면 얼마나 근사할까하는....
통과.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교통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는 소규모로 모이는 집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숫자는 얼마가 될 것인가.
최근에 교회에서 실행하는 소지역 모임은 그런 면에서 정말로 이상적인 숫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약 이십명에서 삽십명의 숫자입니다.
한 사람씩 느낌을 따라 교통을 할 때 약 한시간에서 한시간 20분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는데
누구든 말해낼 부담이 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성도의 수와 시간의 길이입니다.
만약 이 숫자에서 배 이상이 불어난다면
(최근에 세군데 소지역이 모여서 한동안 모임을 가져보았는데)
어떤 성도들은 매 주 그냥 편하게 구경꾼의 자세를 하고 앉아있는 것이 습관화 되는 상황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모이는 소그룹 모임은
숫자는 많아야 8명 그 이내여야한다는 느낌입니다.
그 이상이 되면 약간 산만해지고 친밀성이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동그랗게 모여앉아서 누구의 이야기든 경청하고 들을 수 있고 문득 그것에 반응할 수 있는 친밀감의 강도로 볼 때.
한 열명이상쯤 되면 예쁜 동그라미가 아니라 길게 잡아늘여진 타원형이 되거나 두군데로 동그라미가 나뉩니다.
경험으로 볼 때
그 쯤되면 말 소리가 각각 분산되어 소란스럽고
서로 방해가 될 뿐입니다.
시간은 가고 그래서 어찌하다가 집중시켜놓고
몇사람정도 연사?가 되어 교통하고 헤어지게 되는 일이 반복됩니다.
가장 중요한 일.
모일 때 영적 양식을 충분히 공급받았고
보양을 받았으며
친밀히 돌봄과 위안을 얻었다는 실재적인 요구가 채워졌는가하는 것에
촛점을 맞춰 생각할 때 그렇더군요.,,,,,,
교회안의 모든 모임들에 대해 생각할 때
모든 사람들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오직 외적으로 승인받은 한 두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그저 듣기만하는 그런 모임이 아닌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저의 소지역집회소의 전경입니다. 썰렁~~하지요. 오늘 날씨 좀 추웠는데 실내온도 영상 11도. 두꺼운 파카입고 버텼습니다.
앞의 꼬마친구는 어른들 오후에 디비디보는 동안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착하게도...게다가 그림 그리는 실력도 대단합니다)
오늘 롼형제님은 생활, 교회생활중의 실재상황에 대해 솔직담백한 말씀들을 털어놓으셔서
마음을 아주 유쾌하게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은 문득 어떤 상황에 대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느낌에 있어
몸안의 특히 영적 분량에 있어 신뢰할만한? 지체로 부터 동일한 확인을 하게 되어
어떤 확신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으로 어떤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방향키를 잡게 합니다.
영어로 말씀하는 것을 동시통역을 하는 것만 들었기에 과연 얼마큼 그 뉴앙스가 전달되었는가에 대해
개인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빼뜨렸지만 그냥 들은 그대로 옮겨보자면,
이즘 우리의 상황중엔
대표권위라는 관념에 쩔어 있는 것이 .......있다고 .........
즉 이즘 우리에겐
두 극단적인 문화가 있는데
하나는 대표권위의 말만 듣는 문화가 있고
또 하나는 불법 무질서의 문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즘 아침마다 같이 교통하는 자매가
누구로?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상황에 대해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그저 몸안에 잘 붙어있어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나보다 분량이 큰 형제님이 알아서 판단하고 방향을 잡아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흠...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한 교통을 해 줄 수 있는지...............
하나님의 형상과 생명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인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자신의 인생과 선택과 판단과 나아감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권리와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없으므로
우리는 조심해서 과연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여기시는지
말씀에서는 어떻게 계시를 하고 계신지
잘 살피고 영안에서 판단하고 그리고 몸안의 지체들과 참된 교통을 통해
방향을 잡는 유연성을 가져야 합니다.
.
디비디를 본 뒤에 교통을 나눌 때
같은 자리에서 동시에 말씀을 들었는데도
완고한 영과 생각을 가진 어떤 분은 자신의 관념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기도 하면서....
아 영적인 분별력을 갖는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니구나를 새삼 확인하게도 됩니다.
나이를 먹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나이를 먹었다는 것으로
자기 나이보다 어린 사람들을 경시하거나
나름 살아온 경험대로
판단의 잣대와 철학과 그 시야대로
관념이 형성되어 굳어져 버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두려워해야할는지
어떤 것에 대해 담대해야할는지
늘 조심스럽게 판단하여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
영적인 싸움에 무척 민감해야한다고 앞선 선진들은 그들의 체험에서 늘 그렇게 권면을 합니다.
그러나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믿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세계에 대해 인식도 지식도 또 체험도 상당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겠죠.
저는 방언같은 성경에 기록된 기본 증거조차 받은 것도 없습니다.
최근에 교회안에 들어온 자매님도 그렇고 어떤 분도 예전에 방언을 했다는 말을 듣고 저로선 무척 신기했었습니다.
전혀 그런 방언을 한번 해보고 싶다던가 하는 바람은 없습니다...만.
다만 교회생활안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것도 많은 기독교의 폐단을 거절하고 그에 대한 반간증에 선 교회안에서 생활하고 나서도
여전히 사탄의 방해나 그의 간교한 계략에 속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온땅의 믿는 이들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한 일인지
이것이 얼마나 사단에 대한 크나큰 반 간증이 되는 것인지
우리는 주님이 그렇게 갈망하듯 그렇게 중대하게 여겨야 합니다.
온 땅의 믿는 이들이 그들의 피부색이나 국가나 신분이나 빈부의 모든 차이를 넘어설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지엽적인 해석의 차이나 실행의 차이조차도 넘어서
그가 참되게 거듭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라면 우주적인 주님의 한몸안의 지체로서 서로를 받아들여야합니다.
적어도 회복안의 믿는 이들은 어떤 종파의 믿는 이들을 대할 때 기본적으로 그런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또하나 사단이 정말 싫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제각각 그 기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몸은 유기적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의 성직자가 있어 그들이 군림하여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결코 몸이 아니라 조직일 뿐이며 그것은 살아잇는 몸이 아니라 마른 막대처럼 죽은 뼈들의 무더기일 뿐입니다.
이것이 이미 성경에서 주님이 보이신 사실입니다.
더구나
몸안에서 큰 몫을 하는 지체가 있다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몸을 위한 것이며
다만 각각 몸에 주어진 위치대로 자신의 기능을 다하여 다른 지체들을 섬기는 것 뿐입니다.
여기에 그 지체가 받을 영광이 따로 있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사람은 그 본성자체에 어떻게 하든 남들보다 자신을 크게 보이도록 또 그렇게 하고픈 야심이 있지만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반대로 큰 사람은 다른 사람들 섬기며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숨기움이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만약 회복이 이런데서 변질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회복이 아닐 것이며
만약 아직도 이 표준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면
우리가 오로지 이 세대의 마지막에 추구해야할 것은 이것뿐일 것입니다.
남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남보다 더 크게 보이려는 욕심이
서로 싸워 화평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물러남은
화평을 사랑함이 아니라
비겁한 자기변명에 불과한 곳이
바로 세상의 법칙.
그러나
주님의 몸인 교회안에서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임재를 원한다면,
말씀마다 계시가 있기를 원한다면,
사단을 발로 밟고 서기를 원한다면,
참된 화평을 누리기 원한다면,
날마다 주님앞에서
더 좋은 이것들을 구하리.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지
주님을 가장 위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여 봅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는 것
그렇게 여깁니다.
당신의 마음의 갈망으로 인해 감동받아
당신의 뜻 다시 되뇌어 이뤄지길
구하여 봅니다.
다른 모든 분요한 일들에서 떨어져나와
매일 그렇게 대화하며
당신과 오롯이 있습니다.
이땅떠나 당신과 얼굴로 마주하는 날
오랫동안 사모하던 연인이
함께하는 날을 기다립니다.
얼마전 부산집회에 참석겸 한국교회들 방문을 위해 외국에서 오셨던 분들 중
뉴저지에 있는 교회들의 성도들이 서울교회 6대지역에 하룻저녁 방문을 오셨었습니다.
대부분의 분들이 한국에 처음 오신 것.
소감으로는 이렇게 한국에 성도들이 많을 줄이야
그리고 교회들이 많을 줄이야..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
반가운 피터첸 형제님은 여전한 모습이시고......
.
제가 속한 소지역에서 주로 많이 섬기시는 임환빈 형제님이
6대지역에서 가장 성공적인? 형제님들 성경읽기모임에 대해
교통을 하였습니다.
.
많이 만나고 많이 웃고 그리고 같이 밥을 먹고..
비결은 이것이었습니다.
.
가장 인간적인 가운데 신성한 교통을 자연스럽게 할 때
모이기는 것 자체가 즐겁고
그러는 가운데 어느덧 한권한권 그렇게 신약읽기가 되어가고
그러는 가운데 형제님들이 교회안에 견고히 세워져 간다는...
,
주의 회복이 주의 회복이기 위한 차별화된 특성이 있다면
주님에 대한 진보된 인식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인 말씀에 대한 지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보다 탁월한 성경과 주님에 대한 지식으로 전진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주님과 말씀에 대한 내적이고 실재적인 참된 인식을 가지며
주님에 대한 실재적인 체험으로 연결되는 것이야말로
주의 회복이 여전히 이땅에서 전진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며 이유이며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꽤 오래전에 서울이 아닌 타지방에서 교회생활을 할 때
주님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추구하는
봉사자를 만난 덕분에
마치 대학원에서 세미나 수업을 하듯이
그렇게 메시지를 추구하고
리포트?를 작성하고 발표하는 등
말씀과 그에 관련된 멧시지에 대해 강도가 센 훈련을 일정한 기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 형제님이 이 글을 보실는지는 모르겠지만 감사함을 전해 드리며...)
이즘 훈련센타에서 일정기간 그런 훈련을 받는 코스(전시간훈련이나 중년훈련같은?)가 있는데
그와 유사한 그런 코스가 아니었을까...............
이번 주 메시지에서 그런 말씀이 있던 것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그리스도에 대한 탁월한 지식을 얻은 후에 온다는 것은
하나의 원칙입니다.
또는 그 반대로 자신이 체험한 것을 확증하고 증명해주는 말씀이 있다면
하나의 체험은 더욱 견고하게 되며 강화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 더 깊게 알면 알 수록 그분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감상하고 더욱 귀하게 여기며
그분의 모든 행정과 계획에 대하여 동의하며 주님에 대해 더욱 절대적이며
그 어떤 비난과 유혹과 핍박과 속임에도 눈이 흐려지지 않게 될 것이며
확고한 앎과 인식으로 주님과 하나로 주님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마침 이즘 교회모임에서도 이사야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제 개인적으로는 여로모로 참 위로가 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아름 다운 자연이 오염되어가고 파괴가 되어가는 것이 더욱 더 마음이 아픈 이즈음
무엇보다도 주님이 다시오실 때
지금 육신의 눈으로 보는 자연이 창조의 원래의 상태대로 복원된다는 약속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인식이 부족한 위정자들이 자연을 갈아엎고 오용하고 마구 파괴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연을 그 푸르름과 그 정다움과 그 평화의 상태로 회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창조의 원래의 상태대로 그냥 갑자기 기적처럼 복원되지 않기 때문이죠...
실패한 믿는 이는 실패한 그대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구원받지 못한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창조의 상태로 순수 그 자체로 복원되지는 않으나 한가지 복원되는 것이 있다면
주님이 다시오시고 천년왕국이 세워질 때는 백세가 되어서 죽는 이는
어린아이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통 어린아이라고 말하는 연수가 열살정도라고 한다면 적어도 사람의 수명이 7~800세가 된다는 얘기겠죠....
지금 이 시대에서는 사람이 강건하여 제 수명을 다 채우는 정도를 80세로 보고 있다면 그것의 열배를 산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연수의 10배를 산다고 하면 어떨거 같은지요....
누군가의 시에 이런 구절들이 있었죠.
만약 내가 다시 그때를 산다면..이.렇게 할 것이다라는 뒤늦은 깨달음에서 나온 제안이라고 할까요.
그럴 되돌이킴을 10번정도는 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복락이 어떤 것인지 정말 누릴 것을 다 누리고 감사함과 평강과 화해를 누리고
눈을 감을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지금 사람의 삶의 많은 고비들에서
많은 후회와 많은 시행착오와 많은 실패들을 돌이켜보고 새로이 조정하여 시작하려하여도 그다지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음을
그리고 여력이 남아있는 시간이 충분치 않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지 않을까요.
즉 현재의 대부분의 평범한 우리에게 허락된 이땅에서의 연수는
선한 일을 하기에도 그 열매를 충분히 맺는 것을 보기에도 너무도 짧습니다.
.
다행히 악한 일에도 종말이 그다지 멀지 않다는 것이 위로가 됩니다만......
믿는 이로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성숙한 단계로 들어서기엔
우리가 우리의 상황을 정직한 시선으로 또 정직하게 말한다면
도저히 하나님이 정한 기준에 미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갖고 있는 죄의 본성의 문제에 있어 기질적 성분적인 것에서 자격미달일 뿐 아니라
어떤 긍정적인 것 어떤 기릴만한 것을 실험하고 성취하고 열매를 맺기에는
충분한 시행착오를 하기에도 그리고 그 아픔과 좌절을 딛고 힘을 얻고 다시 출발하기에도
우리의 힘과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오 놀랍도다 오 영광스럽다 어떤 특권인가 라고 감탄한 것이 아니라
좌절과 두려움과 자신의 어떠함에 대해 통탄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니다.
우리에게 의가 있는가 심지어는 거룩의 어떤 조각이라도 있는가하는 자문에 대해서...그리고
그 정도의 수준을 성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대에 대해서 우리의 정직한 대답은
그 것을 일절 명백히 보기에도 그리고 우리의 봄이 전진하기에도
또한 많은 환경과 일들과 사람들을 대하여 실패하며 배우며 새로이 출발하며
나아가며 그것을 조금씩 성취되기에도
우리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고 여겨집니다.
한때 자신이 옳다 분명히 그것이다라고 여겼던 그것이
시간이 지난 후에 작은 한계요
근시안적인 판결이었음을 보게 되었을 때
한면 그 봄이 새로운 전환이 된 것은 기쁜 일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런 작은 한계안에 살면서 시행착오를 하며
육신의 약함으로 할 수 없는 일들에 좌절을 하며
낭비하는 시간들을 생각해 볼때 말입니다.
완전하다는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받은 성령조차도
보증으로 즉 미리 맛봄으로 주어진 것이며
우리가 오늘날 희미하게 보는 것을 언젠가는 얼굴을 마주 대하며 명명백백히 볼 날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이땅에서의 짧은 시간은 영원미래를 시간을 마주대하여 볼 때
그저 워밍업을 하는 순간에 지나지 않을까.........
그래서 메시지를 전하는 분들의 말씀이 그러하였듯...
주님앞에서 자신을 보는 한결같은 소감은
자신을 혐오하며 티끌을 뒤집어 쓰고 회개하는 통회하는 심정일 뿐이지 않을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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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유스타운에서 삼박사일하는 서울교회 6대지역 온가족 섞임집회에
사정상 이박삼일동안 다녀왔습니다.
속리가 속세를 떠난다는 뜻이라면 그 뜻에 걸맞게 속리산 근처를 들어서면서
범상치 않은 산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뭐..수련장이란 데가 늘 그렇듯 무사히 탈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정도만 되어서 감사하지만
그런 것을 감수할만큼 그동안 함께 할 수 없었던 교회안의 지체들과 이렇게 저렇게 이바구를 나누며
또는 깊이있는 영안의 교통을 나누며
생활의 이런 저런 상황들도 함께 교통하면서
전에 보다 더욱 성숙한 지체들을 감상하는 맛은 특별하였습니다.
같은 소그룹의 지체들과 낮에 짬을 내어서 화양계곡으로 물놀이를 갈 여유도 있었고..........
한 이십여명 수련장앞의 개울에서 침례를 주는 행사도 있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연수는 저의 작은 아이 나이만큼 되었으니 20년도 넘은 것입니다.
다시 들어와 살기로 하고
리모델링을 하면서 부속품들도 바꾸고 칠도 다시 하고
살면서 커텐도 달고 블라인드도 달고 하면서 조금씩 더 꾸며가면서도
이 낡은 인터폰은 바꾸지 못한건지 안한건지...........
아마
밖에서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르면 새삼 이 인터폰을 쓸 것도 없는 작은 집이기에
불편할 것도 없이 지내서였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젠 이 집엔 더이상
아이들이 기고 걷고 자박자박 뛰어다녔던 옛날 분위기는 남아있지 않지만
옛날 사진과 이 낡은 인터폰이 이 집의 나이와 역사를 증거?하는 유일한 물건이 된 거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과거의 자취가 남아있는 것이 하나쯤은 남아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이 인터폰은 바꾸지 않고 남겨두기로 했네요.
원래 리모델링을 하면 꾸지한 옛날 것을 남기지 않고 완전 새집으로 바꾸는게 정석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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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의 삶의 궤적을 남기려하고 다녀간 흔적을 남기는 것은 새삼 사람의 취미만은 아닌 듯 싶네요.
믿는 이로서의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최초의 구속을 받고 살아가면서 긴 구원의 과정을 겪는 동안
사람에게 여전히 조금씩 남아있는 육과 그 약함과 낡음의 한계들은
때로는아직도~라는 탄식으로 우릴 절망시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떠한 데서 구원을 얻었는지
우리가 어떠한 위험과 한계안에 있는지
잊지 않도록 하며
또한
자고하며 교만하지 않도록
그래서 교만하여 타락했던 과거의 누구의 행적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여전히 끝까지 남겨둘 필요가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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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온전히 이루었다고 말할 만큼의 누가 있다고 하더라도
썩어질 몸의 한계를 여전히 느끼는 한
그는 겸손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미루어 짐작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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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어쩌면 새 예루살렘에도 과거의 행적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품하나쯤은 남아있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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