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이 압박받고 차별받고 고생뿐인 길인데
그 상황가운데서 도대체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계급제도하에 꽁꽁 묶여 있다면 어떤 마음이 들 것인가.
어떤 반란도 어떤 뒤집어 엎음도 거의 일어나지 않은 채
수백년이고 천년이고 유지된
그런 닫힌 세상에서 아무리 기를 쓰고 애써도
자신은 여전히 하층민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거기다 빈곤하기까지 하다면
삶은 얼마나 피폐하고 막막한 절망일 뿐일까.
높은 교육을 받고 보수가 좋은 직장에 삶은 풍요로와도
자신의 신분은 여전히 하층민이라는 압박감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런 굴욕감을 벗어날 것인가
인도사람들은 지금도 그런 계급제도하에 살고 있으며
꼭대기층의 사람들만이 그 세계에서 군림하며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축복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못한 하층민은 이 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장래 올 내세에 귀의하는 소망으로
스스로 고난을 받으며 고행을 하며 고통을 자초함으로 마음의 압박과 굴레를 벗어나는
득도의 길을 택하게 되는 걸까.
인도라는 나라가 강대국이 될만한 좋은 조건을 갖고 있음에도 그 발전속도가 늦었던 것은
그런 닫힌 마음들이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조선말부터 육이오 전쟁의 과정을 겪으며
기존의 사회적 신분이나 부의 세습이 엎어지고 모두 불타 없어지고 뒤집어지면서
부와 권력과 그에 따른 모든 것을 새로이 획득할 수 있는
균등한 기회를 갖게된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지금은 새로운 신분계급이 형성되고
그것을 세습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거기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남자들처럼 세상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여자들에게 주어진
많은 기회들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동등한 교육의 기회.
그래서 동등한 사고를 갖을 수 있는 기회.
동등한 인식과 안목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프랑스혁명보다도 더 위대한 전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지난 세대의 아픔과 희생은 후대인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일이 아니었다고 믿는다.
인간세상에서도 온 나라가 한번 뒤집어지는 전환은
때로는 신선한 바뀜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그런 아픔과 혼란 뒤에 오늘날 우리가 취한
그리고 깨우친 시야는 그 보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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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물론 영적인 세계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크고 작은 고난이 있기 마련이다.
고정된 관념과 고루한 편견과 타고난 고약한 성정등등에
신선한 충격을 가해 부서지고 뒤엎어지고 깨어지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땅에 어떤 사람도 타고난 타락한 옛사람을 갖고 있는 한
스스로 알아서 신선해지고 열려지는 사람은 없기때문이다.
고난은 필요하기에 어떤 사람에게는 때로는 자근자근 길고 지루하게 평생을 따라다니고
때로 어떤 사람에게는
벼락이 치는 것처럼 정신없이 몰아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고난은 우리의 영적인 노정에 필수적인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안배한 것은 주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누구 것이 더 큰가 비교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고난을 부여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유익한지 알고 계시기에
각각 안성맞춤으로 안배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고난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나라를 특별히 축복하고 인도를 망하게 하시길 바랬을까?
주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길 원하셨기에
하나님이 편애를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그렇다고 말 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을 받고 통과하는 사람에 따라서 그것이 참으로 유익하기도 하고
얻은 것도 없이 쓸데없는 고통만 당한 것일 수도 있다.
이번 주에 교통한 부분처럼 열린 그릇이 되어야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앞에 열려있는 그릇이 된다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계획하고 안배한 모든 것이 효력을 얻는 길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일생이 보람있고 가치있는 것은 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 열려있는 그릇이 되길....사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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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과 앎은 마치
얕은 턱을 가운데 둔 두개의 방과 같다고 할까.
어떤 원칙과 일에 대해 알게 되면
얕은 턱을 넘어 판단의 방으로 옮겨가게 된다.
아는 것은 그러나 항상 유쾌한 일은 아니다.
어떤 사람의 상황에 대해
어떤 사물과 일들의 상황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는 때가 있다.
그리하여 차라리 어떤 일들과 사람의 상황에 대해
아지 못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그래서 모두가 다 좋고 모두가 너무나 놀랍고
모든 일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렇게 조용하고 좋기만 하고 문제가 없이 살 수가 없다.
어떤 상황이 부딪혀 올 때
합당하게 판단하고 합당하게 대처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분별없이 되어 사탄의 꼬임에 빠져 허탄한 것을 좇게 된다.
누군들 사람의 교묘한 말에 귀가 얇게 되어
자신의 꼬라지가 우습게 되는 그런 상황을 바라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단의 궤괘에 대해 분명히 알고
숨겨진 의도을 분별하여 드러내어
악한 자를 부끄럽게 하길 바랄 것이다.
오히려 정확한 판단은 필요하다.
분별있는 합당하고 분명한 앎이 그 기초가 된.
(제목에 괄호로 부제를 넣었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의 번역중에
판단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거기서의 판단은 형제를 평가하여 점수를 매기지 말라는 뜻으로 쓴 것이라 사료됨)
세상 사람 모두가 내 깊은 속 아지 못해도 |
어제 주일에는 물질에 대한 헌신의 문제를 특별히 다루었습니다.
교통을 듣고 또한 말하면서
제 마음속에는 두가지 상황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물질과 함께 함께 자신을 주님에게 향유로 쏟아부은 마리아의 드림,
또 하나는
자신의 모든 물질을 내어주고 심지어는 자신을 불살라 내어주는 헌신이 있을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판정받은 드림(고전 13)
똑같은 전폭적인 드림이었지만 하나는 주님에 의해 인정을 받았고(마리아의 예)
하나는 사도 바울에 의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판정받았습니다.(고전13장)
사람은 어떤 사람이 헌신인가 아닌가를 판정할 때 그 물질의 양과 쏟아부음의 정도를 볼 것입니다.
또한 헌금의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을 대쳐하는 자신의 태도와 저울질을 가지고 자신의 헌신의 정도를
측정하여 안심하기도 하고 또는 자책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문제를 대할 때 마다 돌이켜 보아야 하고
중심을 잡아야 하는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것에 있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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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연보궤에 돈을 넣을 때
사람은 그 금액을 보고 측정하지만
주님은 보이지않는 그 사람의 내적 동기를 보시는 것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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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마리아의 쏟아부음의 양을 보고 그녀의 드림을 접수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계시와 사랑을 보셨기에 그의 헌신을 기꺼이 받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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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어떤 믿는 이의 많은 구제와 믿음을 증거하는 극단적인 헌신 증거가 있을지라도
내적인 동기에 신성한 사랑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판결을 사도는 내리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과연 그 차이를 얼마나 우리 속에서 실재적으로 알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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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람은 주님의 눈에 마치 사탕을 손에 쥐고 있는 어린아이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어린아이에게 사탕한개를 달라고 하면서 그 어린아이의 고민하는 표정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아이는 정말 심각한 결정의 과정을 거쳐 사탕을 내어주기도 하고 더 꼭 쥐기도 합니다.
그 사탕을 달라고 하는 짖꿎은 어른의 주머니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사탕이 있고
사탕한개를 아이가 내어주면 언제든 그보다 훨씬 많은 사탕 한 웅큼을 내어줄 채비가 되어있지만
그걸 모르는 아이로서는 여간 고민스러운 상황이 아니겠죠.
우리는 그런 어린아이를 보면서 재미있다고 킬킬 웃을지 모르지만
만유의 주가 우리 사람을 볼 때 그와 같은 상황이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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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손에 쥐고 있으면 내것이요
손을 펴서 주님에게 내어드리면 주님의 것이라고 우린 물질을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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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님은 물질 뿐만 아니라
언제든 우리의 코에서 호흡을 가져가실 수 있는 분임을 다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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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한번
물질은 우리 자신을 드러내는 실재적인 척도임을 다시 보게 됩니다.
물질에 대해서 사람이 언제든 불의하고
불의할 수 있는 시험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오직 이런 물질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주님에 대한 순수하고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뿐임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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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땅에 있는 동안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날들동안
주님이 주신 모든 것들
물질을 포함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
모든 상쾌한 것들
모든 기릴만한 것들을
감사히 여기며 평안한 날들을 보낼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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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있는 말씀으로 볼 때에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그분의 몸이다.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내재적으로는 내 인격 내 생명이며
물질적으로는 신체적인 나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대표하는 것은 누구인가
내 팔이나 내 다리나 내 얼굴인가
아니다
나의 인격과 의지와 느낌은 즉 나의 존재는 내 머리안에 있다.
어디에 있는지 물질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머리안에 있다.
머리는 내 자신이다.
느끼고 판단하고 규정하고 그리고 마침내 방향을 잡는 모든 것은 머리안에 있다
나라는 존재가 밖의 사물과 상황과 사람들에 대해 분명해질 때
그뒤에 비로소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할 필요가 있을 때
나의 느낌 즉 머리안의 내 존재의 결정은 즉시 각 지체에게 동일하게 전달되고
몸은 즉시 그 머리에 따라 행하고 움직이고 말하고 표현하고 전달한다.
몸의 각 지체들이 각각 자기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나와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내 존재의 연장이며 바로 내 자신이기 때문에 나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대적하거나 따로 행하지 않는다.
머리인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의 관계가 그러하다.
이런 이상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러나
교회안에서 어떤 일을 결정해야할 때 각각의 느낌이 조금씩 다를 때가 있다.
아주 작은 문제에서도 그렇고 큰 결정을 결정해야할 때도 그렇다
세상에서는 이런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고 할 때는
몸의 지체로서 느낌이 각각 다른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시사하고 있는 것은
분명 머리로 부터 오는 정상적인 전달이 있을 텐데
어떤 부분에서 어떤 지체가 감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안의 어떤 상황들은 각각의 다른 의견들 때문에
결론이 나지 않고 공중에 매달려 있게 된다.
어떻게 해결해야할 것인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할 때
한 극단적인 방법은 독재체채로 만들어 누군가 결정하고 다른 모든 사람은 그에 따르는 것이며
혹은 보다 안전한 쪽을 찾기 위해
다수결의 원칙으로 결정하는 둘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우리가 인정하다시피 두가지 다 해결방법이 아니다.
오직 유일한 해결책은
머리로 부터 오는 느낌을 확실히 아무 막힘 없이 전달받기 위해서
그래서 해피하고 건강한 지체가 되기 위해서
가로 막고 있는 모든 장애들을 제거하는 길이다.
몸의 지체들이 머리와 긴밀히 연결되기 위해서
예민한 신경체계와 핏줄안에 찌거기가 없이 막힘없는 혈류가 필요한 것처럼
즉
의과적인 지식은 아주 복잡하지만 결국 건강한 몸을 갖는 원칙은 아주 간단한 것처럼
많은 성경지식과 이런 저런 말씀이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기본 조건은 머리가 말씀하시는 것을 제대로 감지할 수 있는
주님을 향해 청명한 하늘을 갖는 것이며
깨끗하고 정직하고 순수하고 가난한 영과 마음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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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의 개인의 여정에 전환이 되는 시기가 있다면
단체적으로 즉 교회, 좀 더 내재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에도 전환의 때가 있습니다.
최근의 많은 사역집회가 있었지만
말씀하는 이와 말씀을 듣는 이가 영 안에서 진지함으로 또한 참됨으로 말씀을 전하고 받는 가운데 있었다고 느껴지는 집회였습니다.
이제 외형적인 교회의 틀에서
신부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되고 몸의 실재에 대한
긴급한 필요에 대해 갈급함으로 돌이키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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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현재적으로는 이주의 필요성이 있는 지방의 소개를 볼 때
하나같이...참으로 그 땅이 아름답고 매력있게 여겨지네요....
가장 자연스럽고 가정적인 소그룹모임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것도 손에 들지 않고 오직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만을 따라서
열린 대화 열린 교통 또는 친밀한 교통과 목양 등등 어떤 수식을 붙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완전히 그렇게 영의 흐름을 따라 말하는 것이 현재로는 시스템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의 양식이라는 주어진 텍스트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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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희 소지역에서 공식적인 모임이 아닌 자유스럽게 형편에 따라
토요일마다 가족이나 개인이 모여 이산 저산으로 가는 실행은 여러모로 유익합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건강에 그리고 실재적으로 친밀해지는 과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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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주일모임에 그 영향은 아주 고무적인 것이 됩니다.
말할 필요도 없겠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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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안에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되었을 때
우린 그분의 생명 본성 갖게 되었네
우리의 자녀됨 우리안의 그 영 증언하시니
담대히 때를 따라 돕는 은혜 누릴 수 있네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아들로 자라도록
자동적이며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내적인 생명의 느낌과 그영의 인도함받아
몸안에 장성한 분량의 지체로 건축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유업이을 온전한 아들의 자격갖출 때
우린 그리스도와 공동상속자들이 돼
그 영광 어떠한지 지금은 짐작할 수 없으나
다만 고난 통과할 때 우리 온존재 변화되리
만일 네가 네 죄를 자백하면....너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는
요한 일서의 말씀은
사람이 득죄하여 하나님과 담이 생기고
교통이 끊어졌을 때
그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그 죄의 추악함을 깨닫고 돌이켜
그 죄를 하나님앞에 고할 때
주님은 그의 보혈로 그의 죄를 용서하며
또한 죄인이 그 보혈로 정결케 됨을 입어
하나님과 다시 교통하고
그분의 빛가운데 설 수 있는 싸이클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죄를 지은 사람이 자백과 씻김을 통해
하나님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을 다시 열기는 했으나
그저 하나님과의 교통을 회복하였을 뿐
계시록에서 보여진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청명한 하늘과 같은
하나님과의 그런 푸르고 맑은 상태를 갖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사람이 보좌에 앉은 하나님을 향해 맑고 투명한 그대로를 유지하며
더욱 팽창하는
실재가운데 있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보좌아래서 팽창하는
수정처럼 맑아서 두려워지기 까지 하는 투명함을 유지하는 것은
단지 돌이키고 용서함받고 하는 기초적인 관계를
반복하여 회복하는 것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결케 된 양심이 다시 더럽혀지지 않은 채
보다 항시적이고 지속적인 맑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씀하는듯 합니다.
새로운 이주한 지역은 그 나름대로의 여러가지 실행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는 집회들 외에 낮의 자매들 모임과 그리고, 가까운 몇대학 학생들을 위한 홈미팅...
늘 그렇지만
일반 기독교의 조직체계와는 달리 재량껏 그리고 분량껏 그리고 마음안의 부담을 따라
집회참석이나 봉사를 하다보니
어떤 분들은 널널하고
어떤 분들은 다른 사람보다 많은 짐을 지게 되는 편중된 현상을 보게 됩니다.
교회안의 일을 하는 것은 소위 민주주의적 공평성과는 거리가 있게 되죠.
이럴 때 형평성을 고려해서 객관적인 평가기준과 능력?을 점수를 매겨서
일을 분담하고 이런 저런 봉사를 맡기는 원칙을 요구한다면
그건 더 이상 생명과 그 생명의 요구를 따른 그리고 영안의 느낌과 누린 은혜에 대한 흘러보냄의 원칙이 아니라
조직과 그 조직체계에 따른 교회사업이 되겠죠.
그러므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으로 받은 큰 은혜로 인해 자원하여 힘에 겨웁게 짐을 지는 위임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자원한 수고하면 감사한 일이지만
그 일을 감당하고 해내고 수고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수고를 누리고 아 먹고 마시는 교회생활을 찬양하며 노는 사람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비난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늘 주님앞에서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일은 열매를 맺지도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유기적인 건축을 해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을 시작한지 연수가 꽤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고를 하는 부담은 지지 않고
계속 누리고 즐기는 것만을 하는 지체를 바라보는 마음이
주님의 큰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한 화답으로 인한 헌신과 사랑의 드림을 체험하지 못하는 지체를 향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부족하다면
그 자신 역시 주님의 은혜가 아닌 천연적인 봉사와 열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디 주님의 몸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을 머리 삼음으로 인한
자연스럽고 자동적이고 그리고 분량에 따른 자발적인 것이 되길 ...............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밖으로 그럴 듯하게 보이는 행사와 일들과 실행들이
오히려 주님의 몸의 건축을 막는 방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성년이 되어 자기의 몫을 해내는 날이 오기까지 오랜동안 수고하는 부모의 인내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다른 모든 몸의 지체들을 향한 목양과 인내의 날들을
끝까지 견디게 되길..............
아이들이 한참 어렸을 때 길거리에서 샀었던 이 발명품이 ...아직도
시중에서 팔리고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합니다.
이즘은 지퍼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 많지만 아침에 미역봉지를 새로 뜯고 나서 그 부분을
이 것을 이용해 다시 봉합시키니 참 편하네요.
(건전지로 열선을 뜨겁게 해서 열선이 닿은 비닐끼리 녹아서 서로 붙게 함)
아주 단순하면서도 유용한 이 비닐봉합기?를 발명한 사람은 이것으로 인해
돈을 좀 벌었을까??
만약 돈을 별로 벌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이 발명한 발명품이 오랜동안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발명의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뭔가 오래 사용하며 사랑받을 물건을 생산해 내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즘
오래 건강히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이즘 사람들의 관심이 크지만
그보다 보람되게 존재한다는 것이 더 큰 과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기의 몫이 크던 작던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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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교회안에서 그리고 실재적으로는 몸안에서
존재하며 자신의 기능을 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가치의 척도도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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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능이 크던 작던
모든 일에 주의하여 살펴보며
자기의 몫이라 여길 작은 부분에 있어 유용하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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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첫날.
등산을 하자는 저의 제의에 별로 반응이 없었는데^^
예전에 땀을 비질 흘리면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소싯적 일을 생각하면
그닥 놀라운일도 아닐지도.............^^
집에 와서 저녁을 같이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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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제사장으로 그분은 섬김은
구원받은 백성의 분깃이니
우리자신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져
점점 더 변화되고 새롭게 되어
단체적인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하나님과 자유로이 왕래하며 교통하여
점점 더 성숙하게 됨에 따라
당신 뜻 자연스럽게 알게되며
우리 마음 늘 열려있어 공급받고 흘러넘쳐
빛이신 당신을 반사하게 하소서
스스로 어떤 판정도 내리지 않음으로
혼을 처리하고 혼을 제어하여
사탄이 우리의 경배 받지 못하게 해
영안에서 또한 몸안에서 참되게
주님을 경배함 이루게 하소서
특기한 사항으로는 60대에 들어선 부부까지 참여한 점입니다.
두 형제자매님은 매일 뒷산오르기를 시작해서 마침내 매주토요일 등반을 시작한 것은
정말 고무적인 일이었습니다.
함께 오르면서 이런 저런 교통을 나누는 것은
일반적인 집회에서 커버할 수 없는 ..우리가 말하는 바 목양의 실재와 세밀한 건축
그리고 친밀한 교통까지...............어쩌면 교회생활의 실재를 맛볼 수 있는................
그리스도를 살 때 첫번째 두 표현은..
오래참음과 염려없음이라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그러나
오래참음은 얼마나 어렵고도 긴 여정인지요.
눈 앞에 아무 달라진 것이 없어도
심지어는 자신의 어떠함에 지쳐가더라도..
자신을 포함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오래 참으려 합니다.
또 우리를 늘 사로잡아가는 두려움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너무나 약한 우리가 늘 빠지는 함정
한치앞을 못보는 인생의 여정에서 늘 사탄이 불러일으키는 의심
내일 ..내년..노년의 긴 날들에의 ..혹은 갑자기 닥칠 병..위험.
물질에의 결핍에 대한 두려움 등등...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라는 주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
그리고
주관적인 주님에의 체험만이 우리로 안식안에 들어가게하며
어떤 염려에서도 해방되게 합니다...
그리하여 오래참음과 염려없음은
믿는 이들의
차별화된 미덕으로 남을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승리와 기쁨이 되어 달라는 기도와
주님이 나의 승리와 기쁨인 것을 감사하며
누리며
찬양하는 기도의
놀라운 차이를 봅니다.
믿음은 이미 받은 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
|
새로이 이주한 지역에서는 토요일마다
원하는 지체는 함께 모여서
산행을 하더군요.
어쩐지 그래서 그런지 소그룹분위기가 좋은 듯......
함께 격려하며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함께 헉헉?(이건 주로 제가 그랬지만^^)
한 세시간의 산행을 하고
틈틈히 과일을 나눠먹고
김밥도 먹고 컵라면도 먹고
산에서 내려와
점심도 같이 먹고 하면서.....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돈독해지는 몸의 생활의 실제에
들어가게 되는지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