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주는 의미는 다 다릅니다.
제게 있어
궂이 꼭 찾아가 보고 싶게 만드는 곳이 있다면
가능한한 아직 관광개발자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창조주가 만든 그대로의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에 가 있어 보는 것입니다.
갖가지 사전정보가 제공되는 이즘은
사진으로 상상한 것보다 실제로는 실망스런 곳들이 많습니다.
하와이의 오하우섬하면 그저 와이키키 해변을 떠올리지만
그섬의 북쪽 끄트머리에는 길조차 닦여있지 않은
원래 그대로의 해변이 펼쳐져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확실히 이땅에서의 자신의 입지 부귀영화 이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땅의 임금이 주도하는 세상에서 득세하는 것과
하나님의 왕국에 충성하는 것과는 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세상과 영합한 타락한 기독교는 이에 해당되지 않지만
적어도 대쪽같이 하나님의 경륜을 쫓는 주의 회복안에서는
이런 간증을 가진 지체들이 많을 거라 봅니다.
그러나 이미 이 세상에서는 별로 얻을 것도 도달할 것도 없는 사람은
희생이란 말에 좀은 머쓱해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어찌보면 저도 그와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소싯적 꿈은 이미 세상과 등을 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굴레 어떤 관습 어떤 규례와 상관없이
배낭에 스케치북과 연필하나 꼽고 한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삶이었기 때문이죠.......
자유...그러나 이 세상은 참다운 자유를 줄 수 없는 거대한 감옥이란 것.
그럼 어찌해야겠습니까
어떻게 이 감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느 정도 회복안에서 세월을 보내고 난 후의 결론은
오로지 하나님의 왕국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안에 참여하는 수준에 이르렀을 때 입니다.
즉 오로지 참되게 이기는 자만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란 것이지요....
자신만 자유로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자유롭게 하는 것이 그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공동왕으로서 다스리는 것은
결코 다른 사람을 압제하거나 명령하거나 겁주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왕으로 다스리는 것은
사람들을 신성한 생명의 공급으로 소생시키며 풍요하게 하고
하늘에 속한 내적인 빛으로 어두움과 두려움을 내어 쫓으며
더이상 슬픔과 억울함과 헤어짐과 부당함이 없도록
의와 공의로 판결하게 될 것입니다.
새삼....
나의 소식적 꿈과 주님의 뜻은 같은 것이었단 발견을 하게 됩니다.
우리 나이 사람들은 많은 내적 외적 변화가 있게 됩니다.
타고난 올빼미과인 저도 예외없이 새벽에 일찍 눈이 떠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흑^^
또 하나는 퇴직이라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
그럼으로 인해 본인과 같이 사는 가족이
퇴직전과는 다른 형태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퇴직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미리 미리 준비해야할듯 위기감을 조성합니다
그럼 믿는 우리는 어떨까요?
아침을 먹다가 우연히
목사로 교회에 헌신하다가 은퇴하게 된 전직가수가 다시 가수로 복귀한다는
인사를 하는 티비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첫번째로 느낀 건 엉? 교파에는 목사가 퇴직하는 제도가 있네?
그런데 회복은 왜 그런게 없지?라는 지극히 천연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회복에는 명문화된 제도가 없다는 걸 확인하게 됩니다.
소위 책임형제님들의 봉사에의 연한은 언제까지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외적인 답은 없다는 거죠
단지 거슬러올라가 보면 그런 예는 있습니다.
1980년대 윗트니스 리 형제님은 미국에서 대만으로 건너가셔서
새길에의 실행을 권유하셨는데,
대집회가 아닌 소그룹으로 모이는 것
그리고 집회소에서 부흥회를 하는 것보다
한집한집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주는 주님이 보이신 길을 따라가는등의 실행을 실험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책임형제의 위치를 가져왔던 나이든 봉사자들이 보다 젊은
동역자들에게 봉사를 물려주도록 권유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만의 교회들은 신선해지고 새로운 간증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참 대단한 일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왜 리형제님은 미국이 아닌 대만으로 가서 이런 본과 이런 실험을 세우셨을까는
소위 대만교회들의 책임형제들이 리형제님의 권유에 따라
선선히 책임형제라는 직함?을 내려놓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만교회와 리형제님과의 관계는
마치 사도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처럼
아비가 아들에게 꺼림없이 이런 저런 권유를 하고
아들은 아비를 존경하며 그 뜻을 순종을 하는 관계처럼
친밀하고 절대적인 신뢰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형제들이 은퇴?를 한다고 해서
마치 교파의 전직 목사가 다시 가수질을 하는
전격적인 변화의 삶을 갖게 된다는 것은 아니고
또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전직목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분이 목사로서 어떤 삶과 어떤 헌신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그분의 목사직은 그저 직업에 불과하였다는 한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회복안에서는 어쩌면 책임형제의 존재감은 시간이 갈 수록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의 무게와 간증에 있는 것이고 그런 것이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결론적으로 현재 누군가가 책임형제인지 아닌지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이겠죠
따라서 교회안에 어떤 답답한 고인물이 느껴져도
교파처럼 책임봉사의 연한을 정한다면 회복은 종교로 타락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보다 선명한 생명에의 단계가 보이는 간증이 더 드러나길 갈망합니다
이 세상의 가장 큰 빽은 한시적인 권력보다는 돈 즉 물질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이 많이 벌려고 애쓰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왜 상상도 안갈만큼의 부를 쌓은 재벌들은 족하게 여길줄 모르고
더 많은 돈을 끌어모르려 혈안이 될까 의문이 듭니다.
옛말에 부자가 3대를 못간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3대쯤 되면 부하게 자란 손자녀석이 뭘 모르고 온 재산을
다 탕진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재산이 너무너무 많으면 손자가 한동안 탕진을 할지라도 남은 재산이 여전히 많고
그 다음대에 원상복귀를 할 테니 결코 망하지 않을 거란 계산이 나옵니다.
그래서 앞으로 재벌은 결코 망하지 않고 점점 더 부를 쌓으며 결국 세상을 손아귀에 넣게 될 거라는
가정이 성립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다시오셔 쓸어버릴 때까지 재력의 고공행진은 계속될 거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은 다른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거나 혹은 점점 더 가난하고 착취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믿는 이들은 어떻게 이런 세상사를 헤치고 나가야할지요...
주님이 성육신되셨을 때 그는 목수의 아들이셨습니다.
사실 목수라는 직업이 오늘날에는 그다지 고급직업이 아니지만 그 당시는 어쩌면 어느 정도 먹고살만한
직업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결코 부자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하여
주님이 물질에 대해서 특히 부자들의 탐욕에 대해 많이 경계하셨기에
상당히 금욕적으로 사셨을 거란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주님의 옷을 군사들이 3쪽으로 나누어 가졌는데 남이 입던 옷을
그것도 로마의 군사들이 쪼개 가질만큼 그들이 월급이 형편없었을까요?
어쩌면 주님을 따르던 귀부인들이 주님에게 쓸 것을 공급하였던 바 최고급의 재질로 된 긴 천, 그 당시의
남자들이 두르던 , 그런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주님은 사양하지 않고 개의치 않고 최고급의 천으로 된 속옷과 겉옷을 입으셨을 것입니다.
와이키키해변은 단지 해변뿐만이 아니라 해변안쪽의 고급물건을 파는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딱 눈길한번만으로도 흠 멋있군 무엇보다도 너무나 잘 맷치가 되게 진열한 솜씨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여자들이 여길 쇼핑의 천국이라 부르는구나
그럴 재력만 된다면 그냥 콕 집어서 들고 나오고 싶게 할 만큼 유혹적입니다.
요즘 부러우면 지는거다라는 말이 유행어라고 합니다.
흠 멋지네 디자인이 좋구나, 재단이 훌륭하구나 거기에다 나한테 잘 어울리겠는데?라는 수순으로 생각이 미칩니다. 뭐 그다지 나쁜 상상은 아닙니다. 입어서 멋지게 보일 거란 상상은 즐거운거죠.
적어도 그런 걸 볼 줄 아는 안목?과 소화시킬만한 능력이 있다는 확인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걸 가지지 못해 슬프다 비참한 생각이 든다라면 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지는 것이고 사탄에 지는 것이겠죠
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을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주님도
사도 바울도
그리고 그후의 많은 선진들도....
공평한 민주주의가 잘 발달한 나라라 할지라도
여전히 빽이란 것이 존재합니다.
사실
2014년 대한민국은 오직 빽있는 자들만이 잘나가는
빽나라라는 걸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 이런 빽있는 자들이 부럽다고 생각하십니까?
혹 이런 것이 주어진다면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사실 이런 유혹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믿는 자라 할지라도
내가 혹은 우리 집 가장이 공직?에 나가지 않는 한
그래서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는 한
누군가의 빽으로 내 자신이나 자녀들이 득을 보는 일을
과연 마다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저라면 뿌리칠 어떤 명분을 스스로 찾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것이 불법인 것이 분명하지 않는 한.......
혹은 주님이 안에서 아니다라는 느낌을 주시지 않는 한.....
.
하지만
우리 믿는 이들은 세상의 그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그 위에 있는 빽이 있다는 사실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빽이 있음에도 그 빽을 누릴 줄 모른다면 잃은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이 빽을 제대로 누리는 방법을 모르기에 빽이 있으나 사용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헌데 이 빽은 세상의 빽과는 다릅니다.
때로 아주 미련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빽의 위력을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세상 권력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 미련한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용감할 수 있는 것은
위에 있는 빽을 믿어서 입니다.
.
이 세상사람이 보기에 가장 큰 어리섞음은 주님을 정직히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뿐인 기독교는 회복의 길을 비웃을지 모릅니다.
당장 걷는 것이 급하고 당장 병나음이 문제이지만
주님은 죄사함이 먼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취하면 주님이 병나음과 치유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을지라도 죄사함이 더 중한 것입니다.
지방교회안에 돈 있고 빽있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고 행위도 완벽하고 선한 멋진 사람들 대신에
그저 구원받은 죄인들, 돈없고 빽없는 사람들만 득실거린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의인을 위하여 오지 않으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안에 돈 있고 빽있는 사람들이 오는 것을 너무 좋아하거나 높이는 경향이 있지
않길 바랍니다.
대신에 주님이 절실히 필요한 죄인들 그래서 구원받음을 인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
찬양하길 바랍니다.
교회생활중에 어떤 분들은 지극히 종교적인 경향으로 발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제어하고 다른 사람들을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각각 자신이 가진 잣대로 누구는 너무나 금욕적이다
누구는 너무나 제한이 없다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것이 죄가 아닌이상 그것이 세상이 아닌이상 각각의 잣대를 내려놓고
그 사람이 주님안에서 주님을 기뻐하고 삶을 즐기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에 있어 자유하다면
그를 누가 감히 정죄하겠는지요......
사실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 주님이 있는 한
그런 주님의 지지와 인정을 받고 있는 한
우리는 가장 큰 든든한 빽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영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이냐에 대한 답은....
영으로 산다는 것은 영으로 사는 것이다
라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영적 생명의 성숙이란 어떤 상태인가라는 물음은
그 자체가 우문일 수 밖에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아이가 어른을 보고 어떻게 그렇게 어른이 되었어요?라고 묻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떻게 성숙한 어른이 되는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을 수는 없다하더라도
다 큰 어른들의 어떠함을 보고 흠모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안에서 이런 모델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산 야곱과 요셉일 것입니다.
엄마의 태에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는 악바리같은 탐욕과 모사로 똘똘뭉친 야곱이
모든 것을 가진 오직 옥쇄외에는 파라오와 같은 권력을 가진
아들요셉을 만나러 가는 담담한 그의 뒷모습으로 바뀐 것에서
우리는 성숙한 자의 어떠함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으로 부러울 것이 없이 귀하게 자랄 뿐 아니라
형제와 아비 어미조차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는 꿈까지 하나님으로 부터 하사받은 그래서
기고만장했던 꿈쟁이 요셉이
자기를 노예상한테 팔아먹은 형제들이 자기앞에 조아리고 섰을 때
결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 벌을 주거나 조롱하거나 으스대거나하는 반응을 보이는 대신
그 모든 것뒤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환경을 이해하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서
성숙한 자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안배에의 이해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때 교파에서 회복으로 돌아온 분들이 하는 회복에 대한 평가는
말씀도 너무 좋고 진리도 너무나 높은 반면에
실재는 너무나 부족한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현재의 대부분의 우리의 실상입니다.
사실
만약 회복의 이상에 대해 우리가 절대적이라면
현재 대부분의 우리가 영위하는 느슨하고도 무기력한 생활을
결코 유지할 수 없을 것임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우리의 학교생활 사회생활 결혼생활을 포함하는 우리의 전 존재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을 위한 것이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로지 교회의 건축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감히 예스라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때
내 자신에 대해 무지하고 자신의 실재에 대해 스스로 과대평가한데다
모든 것을 주님과 교회에 다 헌신할 것이라고 스스로 믿었을 때는
문제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모든 곡식단들이 나를 향해 절하고 해와 달도 내게 절하였도다~ 하면서
감격에 겨워하는 약속된 꿈을 가진 작은 꿈쟁이 요셉처럼 말입니다.
다만 주님이 보여주신 이상이 있고 그것을 보고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당장이라도
주님의 몸은 완성되고 주님은 곧 다시 오실 것 같았던 감격에 겨웠던 것은
단지 출발선에 선 것에 불과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요셉의 경우
누가 그에게 너는 많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해주었을까요?
혹은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위로를 했을까요?
아무튼
신기하며 놀라운 것은 여전히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므로 감옥에 여전히 갇혀 있는 죄수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특별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비록 우리의 신분과 상황과 처지와 현재의 모양새는 형편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뭔가 좀 특별한 것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특별한 것을 담대히 그리고 자신있게 드러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본 이상을 여전히 선포할 수 있을까요?..
고슴도치 율이가 죽은 후
더 이상 애완동물 볼 일은 없을 거다 했는데...
가끔씩 애보개가 아닌 개보개를 며칠동안 하게 되었네요.
라니라는 이름의 갈색푸들!
아직은 태어난지 몇달 안되는 애기지만 눈치가 거의 구단.
아마도 서너살쯤 되는 아이의 지적 수준을 갖고 있는 거 같아요.
뒤를 보는 장소를 가리는 거는 기본
출입금지를 시키면 제한도 받고
앉아와 손내밀기도 훈련시키면 알아듣는 ...
고슴도치 율이를 보면서 반응을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했던 그대로 반응이 너무 예민해서
신경이 그만큼 쓰이지만 좀더 존재감이 분명한 ..
이 녀석은 며칠동안
이 집에서는 누가 댓방인가?를 확실히 파악한 뒤
가기전에 기념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어린아이처럼 확실히 품에 안기며
애교작렬.............
사랑하는 라헬을 잃은 야곱에겐 그나마 위로가 되는 건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구름이 산꼭대기에 걸려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는 이 구름이 산 아래로 내려와
펜션 주변이 온통 안개에 잠겨 있다가
쨍하니 맑아진 환상적인 아침풍경이 되었음
하긴 이런 짜증을 이즘 길거리 경찰들향해 내었다면 아마도? 구속될지도 모르겠네요
이상하게 사람이 없기에 웬일일까 했더니 다들 시청앞광장 모인 날...............
< deviant art muro로 작업 >
야곱이 세겜땅에 잠시 머물렀을때 그의 딸 디나가 강간당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야곱은 그 일에 대해 홀로 반응하지 않고 들에 일나간 아들들이 돌아올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야곱이 아닌? 그의 아들들이 결정하였습니다.
좀 특이하죠? 그전에는 주로 야곱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 데 아마도 세겜땅에 정착하고 나서는
점점 더 이들의 입김이 세어졌는지도...........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땅의 원주민들에게 너무나 강도가 쎈 보복을 감행합니다.
한면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의 땅에 들어와 사는 주제에 웬만하면 되었다~ 하면서 기죽어 살 거 같은데도....
아마도 이런 강한 유전자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남아있지는 않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즘도 이스라엘 민족들은 자신들이 당한 피해에 열배 스무배를 얹어서 보복하고
어떤 경우에도 경제적 이득을 취하여 돈을 끌어모으는지 모릅니다.
더하여 자기가 어떤 국적이던지 자신들의 민족에 대해서는
선악간의 어떤 객관적 판단도 유보하고 무조건 편을 드는 강한 민족적 유대감을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민족적 유대감이 강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은 애국심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즘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태들을 보면
국가와 국민은 따로 분리된 개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더 이상 자국인을 보호하는 보호막이 아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더하여 민중은 국가와 관계가 없는 다수의 약자그룹일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민중은 국가와 싸워 이겨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즘은 끼리끼리 뭉쳐서 자신들의 이득을 최대한도로 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소위 교회라는 곳도 더 이상 평신도의 교회가 아니라 교회재벌의 소유로 전락하여
마침내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은 교인의 자격을 주지 않겠다는 발상을 지도계층에서 발표합니다.
정말 이정도로 까지 타락했나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에 반해 회복은 어떤 간증을 가져야하겠는지요....
아니 회복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겠는지요...
국가가 민중을 위하지 않는다고해도 믿는 이들은 그다지 크게 요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나라안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의 실재인 지방교회안에서
소위 책임형제라는 분들이 막강한 거스를 수 없는 하늘로 받은 위임과 대리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양들을 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갈 데가 없고
소망도 없을 것입니다.
더하여
아마도 이스라엘에게서 뭔가를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강점과 약점
그들의 실패와 성공에서.........
무엇보다 자신이 봉사하는 크고 작은 그룹들 지역들에서
자신의 기득권과 자신의 세를 위해 살지말고
전체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의 간증을 위해.........
전세계의 회복안의 성도들과 한 몸의 간증로서의 강한 유대감을 갖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저 몇십명의 세를 유지하는 갈갈이 찢긴 가족모임으로 전락되고 말 것입니다.
<artrage로 작업="">
어른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이 복잡해집니다.
무엇이 내게 유익인가하는 너무 많은 고려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눈은 뭔가 꿍꿍이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