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납고 두려운 꿈에서 피하여 눈이 떠졌을 때
따뜻하고 안온한 엄마품에 안긴 아가처럼
나 주님품에 안기어 있음 발견했네
아 얼마나 안전한가
아침마다 주의 긍휼 새롭고 여전함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나도 모르게 콧노래 흥흥하니
아 얼마나 달콤한가
떠오르는 태양 붉고 찬란한 빛 만큼이나
아름답고 신실하고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
그 품에서 새롭게 발견하네
아 주 얼마나 날 사랑하는지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
모든 긍정적인 것
모든 초월적인 것
모든 것들을 밟고 서있는 승리에 속한 것이
이미 우리의 것이 되었다는...것을
믿음으로 취하는 문제이기에
그것을 우리 안에서 느낌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얼마큼 실재가 되는가는
여전히 안에서 서로 부딪히고
해결이 안되고 있는 문제임을 고백합니다.
초기의 교회시대에 그노시즘이라는 영지주의 자들은
물질은 악한 것이며
심지어는 허상이라고 까지 규정했기에
주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믿는 이의 죽음을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으로 받아들여
죽음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역시 육체에 대한 관념은
내안의 생명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되었습니다.
즉 언젠가 이땅을 떠날때 벗어버리고 떠날 옷같은 존재로
타락하며 말썽많고 게다가 약하기 까지 하니
주님이 허락하신 연수를 채울 그 날까지
그저 좀 잘 살살 달래서 보존해야하겠거니..
언젠가 이땅에서 맞게 될지 모르는 육신의 죽음은
문자그대로 하나의 사망이며 고통이며
어쩔 수 없는 죄의 결과이며 벌거벗는 것과 같은 수치이며
아직 온전히 해방받지 못한
사탄의 영역안에 있다고 말입니다.
즉 물질의 영역이나
물질적인 체험이 갖고 있는 것을 경시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뒤 그분의 존재를 안에서 느끼는 것이
결코 물질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안에 차오르는 기쁨이라던가 평강이라던가
고요한 안식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여전히 인지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럴때 우리 의 몸에 미치는 활력된 에너지로 생명을 줌을 봅니다.
또한 몸을 합당하게 거룩하게 보존하지 못할 때
그것이 우리의 영과 마음에 소극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죽을 몸까지도 생명이리라는 말씀이 응하도록
그것이 믿음이던
그래서 따라오는 실재적인 체험이던...........................
또는 그 반대가 되었던.................................................
그것을 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만 모든 영역을 통하여
몸과 혼과 영의 각부분이
주님의 모든 것을 극렬히 체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얼마나 사모할 만한 일인지........................................
.
언젠가 가족여행을 할 때
사람들 손이 타지 않은
시골마을 소로언덕길을 탄적이 있었습니다.
고만고만한 정다운 집터들
작은 학교의 담밑의 또랑
그리고 나즈막한 산들
마침 석양무렵이었는데
하늘의 노을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노랗고 붉고 그리고 점점 보라색으로
그리고
짙은 푸른 어두움으로 익어가는
그 모든 순간을
놓칠새라
눈에 가득 담아두면서..
입으로는 연방 아~~~ 너무 좋다..!!
한숨같은
탄성에....
동행한 가족의
실소를 자아내게 하며...
그림자같은 지나가는
이땅에서의 아름다운 순간들도
.....영적인 절정의 어떠함을
생각해 보게 합니다.
언제나
......왜 아름다운 절정은 계속 될 수가 없는지...
왜 사람은..이땅에서..가던 차를 멈추고
문득 머무는 여유의 시간을
갖지 못할 만큼
제한된 가운데 살아야하는지..
.
과연 살아가면서
이렇게 뇌리에 박히는 절정의 순간은
순간뿐인지...
그러면서 마음은 다시
영원한.......
가장 아름다운 주님에게로
달려가게 합니다.
그림자가 저리 아름다울진데...
마음에 사모하는
영원한 것
아름다운 것
순수하고
절대적인
완벽한
모든 것의 실제인
주님은 또 어떤 분인가
그리고
우리가 주님과 함께 영원시대에 맛보게 되는
그 날들은 ...어떤 날들일까요...
다만
길고 지루한 일상의 시간의 연속이 아닐 것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기쁘고
가장 행복하고
영원과 통했던 절정의 순간의 연속일 것입니다.
인생으로 따지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혼인식날의 기쁨의 절정처럼...
그리고 그것은
비록 순간일 뿐이나마
그런 절정의 순간을
먼저 선험해온
사람들에게 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지체들과 누렸던 뇌성같은 자기를 잃은 찬양속에서
제해짐의 남모르는 눈물속의 쓰라림중에 있던 그분
또는..
늘 품었던 의문에 대한 응답속의 그분의 살아있음.
모든 것이 등을 돌렸지만 기약없는 기다림속의 불안한 믿음.
그모든 것이 모여서...
상은 아마 그런 것일 것입니다.
선험척인 체험의 재체험....
절정의 순간의 끊임없는 연속...
천년은 그래서
모든 절정의 순간이
시간도
공간도
없는 듯
완벽한 환희이듯이..
혼인식의 천년의 기간은
이 땅의 천년의 시간의 개념이 아닌
단 하룻밤의 절정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아! 이런 날을 사모하며 기다려도 되는지...
그런 자격이 주어질지...
다만...
이 순간 돌이켜 상 주실 것을 바라는
확신하는이가 아닌
그저...
바라는 이에게 나타나신다는 그 말씀...대로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늘
마음속에 바랬던
모든 것의 실제인
당신을 바란다고...
그분이 당신이라고...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을 본다고...
사도바울의 서신은 열네개나 되었습니다.
신약 27권에서 복음서 네권과 사도행전을 빼고난
22권에서 엘넷이면 ...
.
.
그러나 사도시대의 당시 사도바울은 큰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도 모든 사도들의 가장 작은 말째의 사도요..
큰 소리치며 제대로 바로 잡겠다하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나
빽세고 소리크고 기득권을 가진 사도들의 입김에 밀려
이방믿는 이들에게 주는 몇가지 율법을 감사히 물려받고
뒷걸음질로 종용히 물러나야했고
.
고생고생하며 이방땅에 복음을 전해 교회를 세우고 돌아와보니
예루살렘은 저절로 성도가 불어
몇만이나 되었고 모두가 똘똘뭉쳐 사도바울을 대적하고 맙니다.
.
그당시 바울은 이단아요 그저 잘난척 날뛰는 요상한 인물로 낙인찍혔던 배반자였습니다.
사도바울의 사역은 실패한 듯 보였습니다.
그토록 모든 것을 쏟았던 아시아의 대부분의 믿는 이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
그러나 그가 뿌린 씨앗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많은 순수한 진지한 믿는 이들이 로마제국의 박해속에
더욱 성하게 됩니다.
.
그 이후에
정형화된 로마교회를 대항해
바울파라는
믿는 이들이 일어납니다.
이 말은 바울이 전했던 복음 그대로가 가장 합당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것을 표명하는 것입니다.
.
지역이 재 편성되면서 아주~~ 가족적인 단위가 되었습니다.
지역전체가 엠티?를 가는 것이 가능해진 좋은 점을 십분 활용하여
일박이일로
양평쪽으로 엠티를 갔었습니다.
초겨울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야외바베큐하기엔 외려 적절한 기온이었죠.
자녀들이 지역전체의 돌봄으로 맡겨지면서
아이들과 함께한 게임, 찬송,
깜깜한 밤중에 총총한 별 바라보기(이건 저와 다른 자매가 한 일이었지만)
열린 이런 저런 교통들.....
...........
모닥불 앞에놓고 ....저물어가는 산골의 저녁
..............
"샬롬"은 "평화"(peace)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샬렘"(완전하다, 건전하다)이라는 말의 명사형입니다.
성경에서 "샬롬"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평화, 또는 성장과 번영(172회 사용)
2) 전쟁이 없는 평안한 상태(5-60회 사용: 예) 왕상 4:25)
3) 만날 때나 헤어질 때 축복을 비는 인사말(삿 19:20, 삼상 25:6,35).
4)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언약을 통해 주시는 축복(안녕과 평화)(민 25:12, 사 54:10 등)
5) 성경은 그리스도를 인류에 샬롬(평화)을 가져다 줄 "평화의 왕"이라고 부른다(엡 2:14).
아이들을 키울 때 부모가 제일 많이 신경쓰는 부분이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감이란 인생이라는 항해를 해갈 때
꼭 필요한 연료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감이란 그저 일종의 자존감이나 얕은 의미의 알량한 자존심같은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더 깊고 더 강한
삶이란 것을 더욱 풍부하고 다이나믹하게 해주는
원동력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감을 결여되면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끌어주길 기대합니다.
더 나아가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서 살아주길 기대합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인생을 양도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좌우하도록 합니다.
만약 그 양도받은 사람이 다행히 모든 것을 제대로 한다면
그런데로 나쁜 결론은 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스스로 맺어야하는 긍정적인 열매를 얻기 힘든다는 결론이 납니다.
그저 외적인 좋은 환경이어서
그저 모든 필요한 것들을 항상 줄것에 대한 안심뿐이라면
그건 사람을 더욱 나약하고 더욱 의존적인 것으로 만들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감은 주변의 어떤 상황에서든
그것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그 상황에 맞게 적극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모든 것은 어디서 올까요?
다만 교만이라면 이런 저런 외적 타격을 받을 때 너무도 쉽게 무너질테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할 수 있는 일들이 자신과 주변의 세계에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앎에서 오는 확신이라면
외적인 태클과 신체적 물리적 물질적 어려움이 올 때
그것을 어떻게 딛고 올라설지 뚫고 나갈지 해결책을 모색하는
적극성을 띨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형제님이 니형제님에게 대하여
형제님이 비록 회복의 길을 가지 않아도 저는 회복의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 기백을 갖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교만은 상대적인 우월감으로 쓰잘데 없는 허풍같은 것이어서
자신보다 더 잘나고 나은 것을 올 때 신기루같이 무너지지만
자신감은 그 근거와 힘이 자신에게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지향하고 있는 것의 가치와 그 고귀감에 근거를 둔 것이기에
영속적인 동기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
마찬가지로 자아와 자의식도 그런 관계를 갖습니다.
자아란 자신의 기호 자신의 기준에 고착되어 자신의 잣대를 갖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자아는 대부분 유연성이 없이 경직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외부적인 환경의 변화가 올 때
이 자아는 몹시 불쾌감을 갖을 뿐 아니라 불안해 하고
심지어는 튕겨져 나가기도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 돌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의식은 참다운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자기가 놓인 상황 가운데에 적절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유연성은 교회생활가운데서도 너무나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테면 이즘 서울교회의 실행이 이삼십명 정도의 지역실행으로 바뀔 때
그 모든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적응하고
그것의 원인과 과정과 유익에 대해 이해하고 합력하는 태도를 갖을 때
교회생활은 비젼이 있게 됩니다.
이 세상은 겉보기에 어떻게 좋은 모양을 하고 있던
공의와 상식대로 마땅히 고려되어야할 양식대로 서있는 것이 아닌
술수와 음모와 계략에 의해
끼리끼리 상호간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마저도 결국에는 자신의 유익만을 관심하는
뒤죽박죽 파멸의 무더기일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택한 곳은 아니라 할지라도 태어난 이상
이곳의 법칙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것 또한
파멸의 무더기속의 사람의
슬픈 현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파멸의 무더기에서 벗어나고자
세상의 어떤 제도나 관계속에서 이탈하여 자연인으로 살기도하지만
한쪽에서 보면 이탈자요 부적응아요 패배자일 수 밖에 없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또한
삶은 파멸의 무더기안에 있는 한
그 꼭대기위에 밟고 올라서든 맨 밑바닥에서 허우적거리며 빌빌 기던
결국 마찬가지일 뿐입니다.
한쪽에 이런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 있으나....
파멸의 무더기에 함께 휩쓸려 파뭍히는 것이
우리의 운명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 속에서 아웅다웅 꼭대기에 올라서는 것이
삶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온 땅은 가장 합당한 질서가운데
생명의 율대로
약육강식이 아닌
모든 생명이 평화로운 가운데
어우러지는 삶의 회복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식물은 식물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언젠가 우리는 창조주의 원래의 목적대로
온 땅이 평강가운데
원래의 생명의 율대로
아름다운 조화를 갖는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창조주의 머리되심아래
모든 창조물의 질서를 회복하는 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압제나 조직이나 게급에 의한 밖의 통치가 아닌
원래 그래야했던
타고난 생명의 내적 질서로 인한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새하늘 새땅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 내적질서를 회복하는 날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우스개 소리로 가끔 하는 얘기지만...
그럴 기회나 능력이 있어도 결코 되지 않을 직업이
의사라는 직업일 거라는 생각을 또 하게 됩니다.
우선은 능력이 안되어서....
그것이 단지 숫자적인 또는 지능적인 능력외에도
인류애적인 넓은 포용력을 가질만한 정신적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체력적인 능력이 받쳐주지도 못할 뿐더러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
힘겨움을 느끼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일정기간의 수료기간이 끝나고
자기의 전공진료과목에 대한 이론과
어느 정도의 임상체험이 있고 난 뒤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다지 부대낄만한 상황에 접하는 거 없이
의사라는 직업은 전지전능의 싯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특권을 누리는 직업인지 모르겠습니다.
그와함께 두둑한 수입과 함께...
그래서 이나라의 모든 수능일등급의 최고점에 오른
대다수의 학생들은 거의 어김없이
모든 서울과 지방의 의대에 원서제출을 주저하지 않는 것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자녀나 친척중에 어떻게든 의사가 있다면
덕을 볼 일이 있고보면 ...
아무튼 확실히 병원은 제 체질이 아닌건 분명한 일입니다.
병실안에서 병원안의 닫힌 탁한 공기와 소독약
그리고 반찬냄새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각종 냄새들로 인해
머릿속이 너무나 지끈거리고
온 몸이 으슬으슬 아프기 시작하니까요....
현실감각이란 것이 어떤 것인가..라는 얘길 하려다가....
현실감각이란 단지 현세계의 어떤 사태를 파악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현실을 이겨나가고 그에 적응하여
뭔가를 얻어내고 이득을 챙기는 능력이 더한 것을 말하는 것............
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떤 사람은 세상의 어떠함에 대해 잘 파악은 하지만
소위 잔머리를 잘 굴리지 못한다고 해야하나
또는 그 안에 끼어들기를 싫어하는 타입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세상의 어떠함에 대해 잘 파악을 하지도 못하면서도
잔머리의 대왕이어서 어떻게 하든 끼어들기도 잘하고
요리조리 요령도 잘 피워
소위 어디가든 밥굶지는 않겠다는 소릴 듣는 타입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현실감각이 강한 것이 살아가는 힘이 되는 것일까
아니 힘이 되어야하는 것일까에 대해
그건 아니라는 분명한 생각은 있었지만
삶에 대한 연륜이 쌓이기까지
그 증거를 들이댈 것이 별루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솔직히 교회생활이란 것이 어느정도는
사람간의 그것도 별로 변화가 되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인간관계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므로
역시 인간적인 어떤 것들이 여전히 끼어들 여지가 있으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얘기가 흘러갈 수 밖에 없지만
적어도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가 의뢰할 것은 현실감각이 뛰어난 자신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들을 당할 때마다 어쩌면
꾀많고 현실감각이 뛰어날 수도 있는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려야하는 것 역시
너무 자명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이런 것이 없이 시간이 간다면
그건 가장 중한 것을 얻지 못하며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현실을 직시하며 파악하는 안목은 있으나
현실을 헤쳐나가는 감각이 전혀 없는 것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혀 제로의 현실감각으로
이땅에서 참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즉 참된 믿음의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믿음의 세계의 현실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의 원칙은
여전히 자신에게 적용되지 못하는 이상적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교과서에 기록된 특별한 예가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참다운 의미에서 현실감각이 없는 것,
이것은 무지하다거나 무책임하다거나
방임의 의미가 아닌
전적으로 주님과의 긴밀하고 친밀한 연결가운데서 오는
초월하는 담대함으로 사는 사람이 됨을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전혀 통쾌하지 않습니다.
그런 담대함이 없다면
세상적인 약삭빠름이 허용되지 않는 어정쩡한 무능함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을 위축되게 할 것입니다.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결코...............
한번은 아니
남은 모든 시간은 결단코
통쾌하게 살아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공립학교 교사가 현 이나라의 대통령을 맹박이 또는 땅박이라고 칭하며 글을 썼다고
(물론 비난하는 글이겟죠) 벌금을 무는 판결을 받았다고,
공공기관신문의 만화에 은근 알아보지못하게 마치 길가 담장에 누구뭐시기하면서 욕을 쓰듯
그런 치기어린 발상으로 욕을 써논 만화가도 아마..벌금이나 기타등등 구속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은적 적이 있는데...아무튼....
공직자 윤리법에 어긋난다고 하네요.
해서 새삼 그 법을 대충 읽어보았습니다.
대개는...공직자의 재산 등록, 선물 신고, 퇴직 공직자의 취업 제한 따위를 정하여 놓은 법률.
공직자의 부정행위를 방지하고 공무 집행의 공정성을 확보하여 깨끗한 공직 사회를 구현하며,
공직자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그 책임을 다할 수 있게 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이라고 합니다.(사전에서 발췌)
세세한 법조문 어디쯤인가에 공직자로서는 자신의 상관?내지 대통령에 대해
험담하는 말을 하면 처벌을 받는다는 근거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그가 썼다는 용어 맹박이 땅박이에 대해..
맹박이는 마치 걔말야 누구 있잖아 하고 막역하나 하대쯤할 수 있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쓸 수 있는 말이고
땅박이라고 하는 말 역시 그가 가진 재산이 툭 불거져나와
걔말야 투기해서 땅 불린 애 있잖아하고 없는데서 별명쯤으로 쓸 수 있는 말이나
존경보다는 비꼼과 경멸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가는 말임에는 틀림없기는 합니다만.
..............................................................................................
................그런데 사람에 대한 명예훼손에 관한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일반적인것은 예수에 관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어로 jesus 또는 jesus christ 는 소위 기독교국가라는 미국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우리 식으로 말하면 제기랄..이라고 내뱉는 것이죠...
재수없는 일 만날 때 기분더러울 때 툭.....................
이런 뜻의 욕중에 충청도식으로 니미~~라는 욕이 있는데
어렸을 때 욕은 커녕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한번 한 적 없으실 거 같았던
외할머니입에서 이 니미~~라는 욕이 툭 튀어나와서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머니를 쳐다봤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런데 그 기억이 그 어떤 기억보다 참으로 인간적으로 기억나는
할머니의 모습인지 모르겠습니다...
할머니도 그 마음안에 더럽고 치사한 세상에 대해
구역이 나는 표현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기억으로...........
.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하필 하고 많은 단어중에 여호와 나의 구원자라는 뜻을 가진 예수의 이름을
그런 저속한 뜻을 가진 의미로 사용함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십계명의 하나를 범하는 죄를 상용 짓는 것인지 ...........
정말 알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입니다만..........
사도요한이 젊었던 시절 복음을 받지 않고 예수를 배격하는 어떤 마을에 분을 품어
예수님에게 간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 마을을 몽땅 태울깝쇼?
아마 이 시대에 예수 믿는 자중에 사도요한같은 걸한 성미의 사람이 있었다면
아마도 예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컽는 저 사람들의 입을
불로 지져버릴까요? 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때 주님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혹간 쓰는 말중에 어이없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때
하나님 맙소사라고 내뱉기도 하는데
문자그대로 하나님 그리하지 마십시오라는 만류의 뜻입니다.
이건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하겠다는 예수의 말에 베드로가
그러면 안됩니다라고 만류했던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라고 반격합니다.
어찌보면 이건 더 단수높게 주님을 훼방하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데 하나님 이건 하지 마십시오라고 주제넘게 나선단 말입니까.
이렇게 우리 사람은 알게 모르게 장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를 참견하는 주제넘은 죄를 짓지만 그로 인해
즉각적으로 보복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하나님은 존재하지도 않는듯이
또는 귀가 먹은 것인지
또는 그런 모욕쯤은 상관없다고 마음이 널널하신 것인지...
그중 하나로 밖에 생각이 안될 정도이니.
.........................................
상관에 대한 공직자윤리를 범하였다고 법이 그렇다면 그것을 수용할 수 밖에 없겠지만
좀은 지나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빙자한
국민 길들이기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네요.
문득 제 고딩때 , 그 시절엔 말 한마디 글 한줄 잘못써도 쥐도 새도 모르게 붙잡혀가
곤욕을 치르던 시절,
세종문화회관에서 육여사가 저격을 당한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
대강당에서 입시를 앞두고 사회과 총정리를 해주던 시간,
갑자기 사회과 선생님이 강의를 하다말고 장난기가 발동해
단상아래 몸을 바싹 숨기더니 씩 웃으며 일어나
누가?? 그때 이렇게 숨었었지?..안그래 ? ㅋㅋㅋ 썰렁한 개그한마당......딩딩딩.
동글동글 개구장이같기도하고 당돌 똘똘해 보이던 자그마한 체격의 까만안경...
그뒤 무사하셨는지 모르겠넹.
.
.
손주가 신종풀루에 걸렸을 것이 거의 확실시 되어
혹 다른 사람들에게 옮길까바...한 부부가 소그룹에 불참했다...
신종풀루는 주로 아이들이 집단으로 생활하는 학교에서 급속도로 퍼지고
그 아이들은 집에 가서 옮기고....
그렇게 해서 하루에 수천명씩 환자가 발생되는걸까....
......
.
앞으로 이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 얼마나 많아질 것인가
그 어느 때에 어떤 일을 만나
우리가 이땅을 떠날 때라도....삶은 여한이 없어야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여한이 없다라는 말은 참...많은 것을 포함한 말이다.
고통이던 사랑이던 증오이던 미움이던 행복이던 불행이던 너무나 충분하다 못해
지긋지긋할 만큼 지루해져서 더 이상 애착이나 미련이 없는 것도 여한이 없는 것일 것이고......
추구하고 목표로 했던 것을 도달하고 성취하고 이뤄내었기에
더 이상 이땅에 존재하지 않아도 됨이 또한 여한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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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람은 여한이 없을 때까지 질기게 오래 삶을 연장해야만하고 또
그렇게 살려는 욕망을 가지는지 모른다
누가 그의 책에서 말한 것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옳다는 외침을 듣는 것이다.
온갖 깊은 통찰을 통해
살아있음의 생생한 의미의 소리를 그 내면에서 들으며
스스로의 결론을 찾아가는 보다 가치있는 소위 수준높은 삶이건 ,
단지 살아있다는 원초적 느낌에 매달려 있는 말초적 삶이건,
여한이 있다면
여힌이 있다면
삶은 참 ...징하게 된다
그런 열망을 인정하고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수는 있지만
역시 징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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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역시 바람직한 마지막 모습은 아니다.
토지라는 소설에서 한 남자는 한 여자를 사랑하지만
얼킨 상황속에서 힘겹게 서로의 관계를 이어가야만했다.
산다는 거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것에 있어서는 피차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에
여자는 눈을 감는 순간에....여한이 없다...는 말로 마감을 한다.
사람이 이땅에서 살면서 그 삶이 불꽃같이 타오르다 한 순간에 사그라져 버리는
짧으나 열정적인 것이었든,
삭막한 사막 길 같은 일없이 평탄하고 지루하고 밋밋하게 보이는 것이었든
삶은 나름대로 여한이 없이 마감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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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여한이 없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한때 외국에서 살다온 김광석유족?들이 돌아와보니
그의 남편의 노래가 그의 아빠의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을 떠날 때는 남편이 자살을 한 충격으로 훌쩍 떠나버린 외국행이었으리라..)
왜 사람들이 공짜로 아빠노래를 듣는가,
그래서 그 딸래매가 권한을 주장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공유?하는 것을 좀 뜨끔해했다.
(만약 김광석이 이걸 알았다면 뭐라 말했을까.....
얘야 나의 노래는 너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소유란다(나의 상상))
만약 그녀들이 밥을 굶고 있다면 좀 얘기가 틀려졌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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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나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죽어나가고 배고파 쓰러지던 시절
할 줄 아는 건 그림밖에 없는 거 같아
너무 속편하게 살아온 것 같아
마냥 죄스러워
여관의 앞뜰을 열심히 비로 쓰는 것으로 세상에 기여하려고 했던
이중섭은
후에 바란 것은
일본으로 보낸 가족과 재결합을 위해
그의 그림이 잘 팔리길 바랬고
화가로 인정받아 자랑스러운 가장이 되고 싶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조선인 아버지의 그림이 유명한 것을 알고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가짜 그림을 만들어내어 팔아먹으려 했다.
(만약 이중섭을 이것을 알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저 그가 그린 소처럼 헤벌쭉~~씩 웃으며 돌아섰을지..(내 상상))
이것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즘 새삼 다시 조금씩 그림을 그리면서 주변 식구들의 반응을 보면
별반 관심이 없다.
만약 가정생활의 초년에 이런 일을 겪었다면 (이미 인생 초년에 한면 겪었던 일이지만)
섭섭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결국 자신만을 위하여
자신의 유익과 번영을 관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는 것이
(비록 가족간이라 할지라도)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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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기의 형이 비범한 능력을 가진 것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
형인 예수에게
세상밖으로 나가 인정을 받으라는 인간동생들의 권면의 이면에 있는
속셈에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아리송한 말을 남겼을 뿐...
그리고 후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동네사람들에게 막무가내로 무시당함을 당연히 여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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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하고 또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방식이라면 하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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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의 무엇인가를 세상에서 얻길 원한다면
많은 시험과 타락의 문전을 이미 넘어선 것이 될 것이다.
사람은 각각 다 자기 잘난 맛에 살기도 하고
각각 다 변명이 있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거나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지만,
나중에는 스스로의 어떠함에 고착되거나 내성이 생기게 되어
다른 것을 시도한다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고
결국 선택한 그 길을
고수하게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또는 주변에 이미 벌여논 일들과 인간관계에 얷매이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만,
그런 면에서 전혀 가둬놓아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 면에서 가장 후리하고 요즘말로 스스로에게 쿨한 사람은
조각가 로뎅이 아닌가 싶다.
그의 많은 여성편력, 그에따른 섬세하고 풍부한 미적 감흥은
그대로 그의 조각작품에 반영이 된다.
그의 타고난 역량과 사람을 끄는 마력은
많은 사람들을 흡수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숭배자들 여자들 그리고 남자들..
그리고 그의 탐욕과 명예욕과 이기심은
주변의 사람들을 희행시켰을 것이다.
그에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돌아보라던가
상처입은 여인의 심정을 고려해 보라든가하는 것은
콧방귀를 뀔 일 것이다.
어짜피 희생이란 따를 수 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라며
어깨라도 으쓱거렸을지도....
그에 비하면 부르델은 견고한 심지를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진지하고 탐구적인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그의 작품을 연대별로 다 보고 다른 스케치를 좀 더 눈으로 볼 기회가 있다면
그의 생을 더 잘 들여다 보았을테지만....
총체적인 느낌은 일단 그렇다.
두사람은 어울리지 않았기에 부르델은 결국 로뎅의 곁을 떠나
독자적인 작업을 하게 된다.
즉 로뎅이라는 거대한 산맥의 그늘을 벗어난 것이다.
그것이 당시에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이었을까.....
대부분의 다른 조각가들은 로뎅의 카리스마와 그의 뛰어남과
그의 거대함에 눌려 있었을 밖에.
우리 대부분의 인생은 얼핏 보기에 자신의 길을 스스로 택한 거 같지만,
타고난 것에 더하기 자라나온 환경과 또 주입받은
그 시대의 가치관의 잣대를 가지게 된다.
각각의 인생을 돌아보면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거기다 나름대로 스스로 옳다하는 잣대가 있어 그것으로 사물을 재게 된다.
사람이 모여살면 참 문제가 많게 된다.
보다 술수가 많고 보다 탐욕스럽고 보다 자만심이 크고
양심의 가책을 덜 받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희생시키기도 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훌륭하고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도 살기도 한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도력이란 건
타락한 사람이 갖을 수 있는 온갖 못된 기질을 다 갖고 있는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너무 냉소적인 시각일까.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면 그런 힘에 줄을 서야한다.
만약 할 수 없이 인생길을 가야만하고 살아내야 한다면
선택할 수 있는 이탈의 몇길이 있다.
예술가가 되는 것과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그리고 자연인으로 사는 것
예술가로 이름을 날리려면 어느 정도 이 땅의 실세에 빌붙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외적으로 활발히 활동해 후대에 이름을 남긴
일제시대때 친일적인 행각을 벌인 예술가를 정죄한다면
아마도 이름을 남긴자중에
그 잣대를 벗어날 인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예술가에게는 국경이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을 남기는 일에 연연하지 않고 예술가로서 살기로 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자연인으로 사는 건 어떤가
이것은 정말 뛰어난 능력을 필요로 한다.
굉장한 체력과 능력과 재능이 있어 스스로를 책임져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은 타고난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일 것이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는 ....
그리스도인이 되는 건 어떤가.
기독교라는 종교적 체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는 이미 세상속으로 함몰되었기 때문이다.
또는 어떤 교단에 속해서 그곳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떤 교리적인
어떤 신학적인
또는 이론적인 차이를 가지고
서로 나누면서 스스로 굉장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정말 문자 그대로 이 땅을 창조한 창조주로서
그리고 우리가 각각 자신이라고 부르는 죄와 죄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로 삼은 그리스도인으로 출발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의 어떠함을 추구하는 것외에
다른 것을 구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써 사는 것처럼 오늘날 살기 힘든 것이 없다.
너무나 많은 옳다하는 기준들이 있기 때문이다.
밖에서 요구하는 많은 규례들과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종교심으로 울타리가 있다.
솔직히(이말을 너무 자주 쓰는데 사람들이 솔직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주님의 가르침과 그분이 요구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아주 단순한데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복잡하게 만든다.
그것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소위 선생이 되고자하는 야심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싶어하고 차별화하고 싶어하는
타락한 사람의 속성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 위에 올라서면 뭐든 다 어렵게 만든다
단순한 것보다는 복잡한 것을 좋아하고
쉬운 것 보다는 어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속성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열심내게 한다.
그래서 그것으로 경쟁을 부쳐 사람들을 종으로 삼는다.
................
그러나 주님의 말씀하심을 보라
사는 건 너무나 단순한 일이다.
정상적인 사람의 삶을 살면 된다.
각각 주어진 길과 받은 은헤대로...
주님은 이땅에서 사람들이 만든
모든 지위 지식 인종 성별의 차이를 없애버리셨다.
선생이나 아비가 있지만 결코 지배개념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하셨다.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다.
모든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와 권세는
사람이 참으로 돌이켰는가하는 것이다.
참으로 돌이킨다면 그후에
어떤 변화와 달라진 점들이 있게 될 것이다.
스스로에 대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그리하여 그 결과 점점 모든 양심적 질서아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길 바라셨다.
네 이웃을 해치지 말라고 하셨다.
모든 인생길이 평강의 길이 되도록.
이런 모든 길은 각각 주님앞에서 받은 빛과 말씀하심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다를 것이고
각각 서고 앉고 가는 길이 주님에게 달린 것이기에
자신의 모양과 좀은 다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대신
각각 자기의 소위를 살피면 될 것이다.
오직 순수치 못한 목적을 가진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을 자기가 생각한 옳다하는 기준에 가둬놓지 못해 안달이다.
주님앞에 서는 대신 자신의 입지와 자신의 세력과
우리라는 성을 쌓는데 관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오늘날 주님을 믿는 것
흔히 사람들이 너무나 배타적이라고 느끼는 기독교라는 거대한 담벼락은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쌓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이 아성이라고......
그래서 그 벽안에 들어가야만 뭐가 된다고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제일 먼저 제일 큰 해를 받는 피해자는
맨먼저 그 성안에 갇혀 버린 믿는 이 자신이 된다.
그 논리아래 그 체제안에 그 이론과 교리안에 갇혀서
그 잣대로 모든 사람들을 재고 남아지는 것은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님이 명하지 않은 모든 것을 가지고
새로운 기독교를 만들어 내어서
기독교라는 종교적 체제와 교리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때문에
그 잣대에서 자유로이 그리고 담대하게
정말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남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세상의 법보다 더 위에 속해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법이라고 했던가요.
살다보면
법이냐 위법이냐를 가지고 논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다만
세상을 보는 것과 일을 대하는 것은 각각 다른 관점이 있기에 설왕설래가 있게 되겠죠...
군대를 가는 것은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4대 의무중의 하나로서
마땅히 감수해야할 의무라고 보는 방면이 있는가 하면
과연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람을 죽이는 연습을 하며
또한 사람을 죽이는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하여
군대에 갈 수 없다는 양심선언으로 범법자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소그룹에서 ....
같은 사업장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있는 형제간이 있는데
형대신 동생이 대신 예비군 훈련을 가는 것이
가하냐 불가하냐에 대한 얘기가 나왔었던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갈 수가 없다는 입장의 동생은
어쨌든 이것은 양심을 속이는 일이 아니냐는 것이었고,
사업의 장으로서 불가피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야하는 상사의 상황을 대신해서
부하직원으로서 대신 갈 수도 있는게 아닌가라는 관점도 있었습니다.
더 큰 범위로 넘어가보면,
한 나라의 대통령이 잘못된 정책을 펴고 있어
도무지 국민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으로 몰아갈 때,
모든 권세는 하늘이 준 것이며 위에 있는 권위에게 순복하며
모든 것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마땅할 것인지
또는 아닌 것은 아니다 잘못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한 입장표명이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이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각각 다 자기의 옳다하는 바대로
즉 자신의 가치관의 어떠함으로 행하게 되겠죠
그러나
유한한 생명이 가진 시간적 그리고 영역적 제한 속에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주변적 그리고 시대적 영향은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리고 조선왕조에 태어났다면
그리고 현시대에 태어났다면...
각각 그 시대의 가치관속에서 그안에 함몰되고 영향받고 몸부림치기도하고...
그렇게 자신의 인생길을 모색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한 사람의 전반적인 혹은 일부분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 한 사람의 오류일 수도 있고
그 세대전체의 오류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히틀러에 열광했던 독일의 어떤 한 세대처럼..)
우리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우매한 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역사는 보이는 일면이 있는가 하면
보이지 않은 부분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를 쓰는 사람은,
등장인물이 바뀌면서 쓰여지는 같은 어리섞은 오류의 반복이 아니라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참된 것과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좇는 사람들에 씌여진 부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다음세대 또 그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 등불이 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의 삶이던 참된 것에 자신을 바친다면...
그 열매의 적고 많음이 아닌 그 질에 의해서 인정받는...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도 이와같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다운 믿는 이라면
어떤 역사를 개인적으로 또는 단체적으로 써나가야할는지를
각자의 양심의 법에 따라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어떤 법보다도 격이 높은 법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사는 실재적인 길이겠죠...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
분별되기 전엔
캄캄한 암흑속에서
떴으나 감은 자였습니다.
분별된 후엔
밝은 빛 가운데서
감았으나 뜬 자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주님이 무얼하고 계신지
어딜 향해 계신지.....
주님...
그 방향에 나의 뜬 눈이
변함없이
끝까지
고정되게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