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2009>
얼마전엔 건국 이래 이 땅에서 나라안의 모든 사람이
복권당첨이나 또는 벼락맞는 확률과 같은 확률로
광우병에 걸릴 가능성 속에 던져지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거미줄같은 쳐진 가능성에서
그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가능한 한 안 사먹으면 확률이 적어질까?
(잘나가는 친척집에 고기선물이 들어온 것 중 일부를 우리에게 넘겨? 주었다
선물한 고기라는 것이 참...말하기 뭣하게 하질이지만 그것보다는 그 고기의 원산지가
찜찜하였지만, 먹을 것을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 강해 갈비를 해서
끝까지 다 먹고 말았지만...)
평생 벼락맞을 만한 환경이 아닌 곳에서 줄창 살다가
어쩌다 비오는 날 길거리에서
누전된 전기를 통해
마치 벼락맞은 것과 같이 타서 죽을 수도 있는 걸 생각하면
조심해서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광우병같은 숨은 복병의 가능성은 아무 것도 아닌
신종풀루라는 보다 현실적이고 즉각적인 재난이 우리에게 떨어졌다.
과연 신종플루에 걸릴 확율은 얼마큼이나 될 것인가.
아직은 시작단계에 들어서지도 않은지 모르며 아마도
그에 대한 불안감은 갈 수록 더해질 것이다.
새로 태어난 아가를 축하해주러 가는 것이 실례가 될 것이며
미국에서 오랜만에 한국에 온 자매를 만나도 될 것인가라는 생각이
오늘 온 메일을 열어보면서...문득 들었다.
(우리 집 구성원은 모두가 신체적으로 연약하며 특히 폐에 노란 불이 들어온 형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의 자녀들을 지키실 것이라는 바람이
믿는 이들 사이에 은연중 지배되는 소원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현대 흑사병에 걸릴 확률은 몽땅 이방인에게 덮여질 재앙이란 얘기다.
만약 어떤 목회자라도 이런 말을 낸다면 그야말로 광장에서 돌을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믿는 이가 어쩌다 유행병에 걸린다면.........................
그가 어떤 잘못을 했기에........?라고
제자들이 그날 주님에게 달려가 물었던 것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결국 죄가 있어 벌을 받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이런 것인가????
.
내가 아는 어떤 형제님은.
자신에게 있는 돈을 가장 많이 쓰는 품목이
유기농 식품을 구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달란트가 큰 그리스도인이었다.
하나님의 자신의 백성을 , 아니 귀하게 쓰는 그릇인 자신을 모든 병에서 구원하시리라는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움때문에 그리하였을까?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권고의 말씀은
도무지 처음부터 염려라는 것을 하지 않는 맘편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눈가리고 귀막고 그냥 살라는 말인가?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염려할 만한 상황은 끊임없이 불어닥친다.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은 무지함으로 인한 무방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염려는 즉시 즉시 처리되어야 한다.
만약 할 수 있는 조처가 있다면 취해야 한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염려라면, 막연한 소원으로 눌러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넘기고 자신은 그 염려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모든 염려속으로 내동이쳐진 상태에서..................
염려를 하나 염려하지 않는 모순같은 믿음의 시험속에서.......................
.
구원받은 사람은 초기의 긍휼은 얻었으나 가야할 구원의 완성의 길은 멀고도 먼
순례자의 길에 입문한 정도 이니 그에 더하여 자긍할 그 무엇도 없을 뿐이며,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언제든 마음을 돌이켜 자신을 하나님에게 의탁한다면
비록 숨을 거두는 순간이어도
건짐을 얻어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낄 수 있다는 점에서,
종이 한장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구원을 얻었다고 믿는
(정말 얻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실 일이지만) 이들이
굉장한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
구원받지 않은 자와의 사이의 거대한 벽을 쌓아놓음으로 발생하는 소통부재이다.
이 소통의 막힘의 원인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믿지 않는 이들은 사탄의 자녀라고
금을 그어버리는 오만방자한 무지와 편협함은 도대체
어떤 근거인가.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장이 그리스도인이라 자천하며
십자군의 흉내를 내어 십자가가 그려진 군장을 들고 이 나라를 침략하였는데
그런 왜장은 하나님으로 부터 사명을 받은 일꾼이요,
이 나라를 지킨 장군은 졸지에 하나님의 자녀를 핍박하고
그일을 방해한 원수사탄마귀라고 규정한다면,
이런 이나라의 소위 믿는 이들은 어떻게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게 아닌가 .............
구원받은 이들이 , 참되게 구원받은 이들이 어떻게 이런 사고를 가질 수 있는가
라고 되묻고 싶어진다.
왜장이 정말 구원받은 믿는 이라고 믿을 수 있는가
믿는 사람은 남의 나라에 들어와 무고한 양민을 마구 학살하고 약탈해도 잘못이 없단 말인가?
양심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일단 믿는 이가 되었다하면 상식과 양심과 기본질서마저도 바꿔버리는
잔인한 윤리로 바뀐단 말인가
그래서 일단 그리스도인인 대통령이 무엇을 하던
그것은 하나님의 비호를 받으며 그것을 반대하는 양민은
사탄의 조종아래 있는 사탄마귀의 화신이란 말인가
이런 편협과 무지함은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 사이에 담을 쌓아버려
스스로 높아지고 자긍하며 특권의식에 빠질 뿐 아니라
......
믿는 이와 믿는 이 사이에서도
각각 그들만이 그들 종파만이 ,
그들 단체만이
말씀에 입각한 정통이고
그들만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고
그들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믿는 이들이 서로 에 대해 담을 쌓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아닌가
.
.
.
그리고 소위 구원받아 믿는 이가 되었다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새삼스럽게 이렇게 소위 믿는 이라고 하는 우리들 모두에게 진지하게 묻고 싶다.
당신은 정말 구원을 받았는가? 그 시작은 언제인가
누가 내게 묻는다면............
아주 어렸을 때 , 아마도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외할머니 보호내지 동반자겸
겨울방학때만 집 근처 예배당에 출석을 했었다
(겨울에만 외할머니는 시골에서 서울로 겨울나기를 오셨기 때문에....)
아무튼 나는 그때 알건 모르건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들었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었다.
분명히 믿었다.
기억하기론 예수님이 태어났다고 하는 크리스마스때
사람들이 흥청망청 술먹고 노는 것이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내 방에서 혼자 촛불을 켜놓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난다.
예수님이 태어난 이 거룩한 날에
왜 사람들은 이렇게 놀고 하나님을 마음아프게 하는 것일까요
어리지만 나름 아픈마음을 주님께 토로했던 기도였던 거 같다.
그때 당시 이 작은 아이는 구원을 이미 받은 것일까???
그런 모든 교회의 출석은 띄엄띄엄, 어떤 때는 친구따라 소위 부흥회에 갔다가
모두 눈을 감고 주님을 믿기로 작정?한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을 때 들었고
그리고 일어나서 영접하는 기도를
새삼스럽게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하라는대로 했지만 나름 진지하였다.
그럼 나는 그때 구원을 확실히? 받은 것일까???????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소위 복음집회에 가서 복음을 새로 듣고
또 영접하는 기도를 또 했었다.
아주 새삼스럽게.............................
그렇다면 나의 구원받은 싯점은 언제란 말인가.
만약 다만 복음을 듣고 믿고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받았다는 것을 싯점으로 한다면
얼마큼이나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여러번 새삼 영접하는 기도를 했지만..........
도대체 구원받은 것일까 여전히 확신이 없었다.
누가 말하듯, 소위 믿음이 더하여 지지 않아서였을지 모르겠지만,
교회생활한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당신은 구원받았읍니까?하고 누가 물어주었다.
내 대답은 잘 모르겠습니다.....였다.
그러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중에 들은바 다른 사람에게
그는 내가 구원을 받지 않은 거 같다라고 했다고 한다
푸하하....그는 무슨 근거로 그랬을까
만약 내가 나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영접했습니다 라고 말했다면
그는 뭐라고 했을 것인가
구원받았다고 했을 것인가
아니면 내적 구원의 확신의 체험이 필요하다고 했을 것인가
도대체 기준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사람의 판단이란 하나님보다 앞서가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
아마도 구원의 주관적인 체험이 뒤따르지 않았다면
여전히 구원받았는가의 문제는 내게 유보적인 과제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로 사탄마귀가 눈 앞에 나타나 너는 구원받지 않았다고 하여도
아니 나는 구원받았어!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구원의 체험의 과정이 있었기에 이 과정은 넘어갈 수 있었다
그 순간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건 단지 구원을 받은 것 이상의 하나님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이었다
,
,
,
이렇게 생각을 해보고 나니 멸망에서 구원받은 것과 받지 않은 것은
종이한장차이에 불과한 것이지만,
얼마나 놀라운 은혜와 긍휼인가를 새삼 본다.
다른 사람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한 인간에게 발생한
기적과 같은 일...........................
그러나
결코 자긍할 수 없는 일...............................
.
.
.
,
이땅의 모든 자연물이
창조주의 솜씨와 품성과 마음과 원함과 속성의 어떠함을 반영할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굴곡들과 체험속의 기쁨과 슬픔
마음의 좌절과 환희와 증오와 미움과 사랑등등이
절대자를 주관적으로 알게 하는 과정임을 문득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는 그렇게
우리의 각각의 삶속에 나름 점점 그 체험의 경지를 넓혀 갑니다.
일부러 그분의 사랑과 긍휼과 불쌍히 여김을 알고자
나락에 빠지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며
또는 어리섞은 일이겠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저 안일무사한 만사형통한 길이라면
어리섞고 어린 사람의 영혼이
불못에서 구제받은 것이어서
할렐루야이긴 하나
하나님은 그 인생에게서
하나도 얻은 것이 없게 되겠지요.
그러나
어느 때
어느 시
사람이 어떤 한계안에서
하나님, 당신은 내게서 무엇을 얻길 원하십니까
하고 묻는 순간이 올 때
하나님은
또 다른 전진된 단계로
그분의 지경을 우리안에서 넓히시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면전에서
정직하게 토하게 될 때
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때야 비로소
진리의 바닷가에서
작은 조약돌을 가지고 물 수제비를 뜨거나 공깃돌을 하면서
니것이 크니 내것이 더 예쁘니 하고
진리의 언어로 장난치는 것에서 벗어나
더 성숙한 단계로 접어들게 되는 걸까요....
아
나는 언제나 그분의 어떠함
그분의 자람
그분의 성숙으로의 이끔에 충분히 반응할 수 있을지요.
아
나는 언제나 먼 산과 먼 곳을 바라보는 넓은 시야로
그분의 부름에
장막을 거두어 언제든 따라 나설 수 있게 될지요.
예전에 시어머니가 계신 병원에 가서 혹 의사를 만나면
의사의 표정이 영..싸늘 냉담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엔 아마도 의사들 일반이 갖는 고압 도도의 태도이려니 했죠.
그러나 시간이 갈 수록 이것이
자기 엄마를 끔찍하게 위하는 작은 아들이
이런 저런 진료에 있어서 문제가 있으면
병원을 뒤집어놓는 연유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병원측에서는 이런 환자의 보호자들이야말로 끔찍한 고객들이겠죠.
거기다 하필 옆 침대에 어떤 할머니가 역시 장기입원하고 있는데
대부분 그렇듯 또래의 사람들은 어떤 의미로든 경쟁심리가 있기 마련.
아마도 매일 자식들이 번갈아가면서 병실에 들르고
작은 아들은 와서 절대적으로 자기 엄마 비위맞추고 재롱까지 마다않으니
아마도 옆에서 보는 또래 할머니 맘이 편치 않았던 모양
해서
그걸 드러내 표시는 못하고 그냥 침대에서 맴돌이를 하는거아닌가 그런 짐작이 들더군요
이런...병이 치료되는 것이 아니고 외려 악화되는 건 아닌지....
어떤 공동체이던지 간에 그 안의 구성원들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이
이렇게 서로 비교되고 서로 차이가 나는 데서 오는 희노애락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소위 명절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는 누구집 아들은 왔느니 안왔느니
무엇을 갖고 왔느니 서울서 어떻게 살고 있다느니하는 후유증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남들에게 기죽기 싫어서
시골에 사는 노부모님들은 자식들이 오느니 안오느니 하는 것을 더 신경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뭐니뭐니해도
이 나라의 가장 큰 겨루기는 자식농사가 아닌가 싶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몸무게가 몇이니 키가 어떻느니 생긴 것이 어떻느니 서부터
언제부터 걸었고 언제부터 말을 하기 시작하고 등등에서부터
성적이 어떻고 하는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어떤 대학에 들어가고 어떤 데에 취직을 하고 또 어떤 배우자와 결혼을 했느니....
그리고 그 자녀들이 어떻게 성공을 하고 어떻게 효를 하느니.........................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같은 순환으로.
이즘 큰 아이는 취직을 하기 위해서 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는 과정을 거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입시보다 더 큰 경쟁이란 데 문제가 있죠.
그래서 인서울의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것처럼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회사에 입사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 되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얼마되지 않은 숫자를 뽑는데 면접을 보도록 뽑힌 사람이 몇천명이 된다면
입사원서는 도대체 얼마의 숫자가 집어넣었다는 말인지............
그러니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취직이 된다면
부모로서는 안도감이 드는 일이겠죠.
그러나 취직이 안된다면 그 다음은 또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
단지 어려움만이 아니라 또 대외적인 체면과 위신의 문제까지 기다라고 있는 건 아닌지
이렇게 되풀이 되는 이땅의 희노애락속에서...
.
우리가 혼을 부인하고 혼을 누리는 것을 부인한다는 항목에서 가장 큰 것이
이런 경쟁, 어떤 외적이고 세상적인 잣대와 표준으로 재어보아
어떤 면에서 또래의 평균보다 놓아서 은근히 우월감과 자부심을
상대적으로 느끼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며
또는 상대적으로 어떤 기준보다 못미쳐
패배감과 자괴심으로 우울해지는 것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
모든 사람의 인생은 그 나름대로 자신만의 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땅히 존중받을 만한....
하물며 그리스도안의 사람이야
각각의 빛깔과 향과 모양을 가진 완성물이 될 자격과 역량이 주어진 것입니다..
.
천국에 들어가는 것
더 자세히 말하면
천년왕국의 잔치에 들어가는 것은
각각 주어진 달란트대로
주관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몸안의 어떤 지체라도 서로 경쟁인 관계는 하나도 없으며
오직 서로 격려하고 서로을 부추기며
도움을 입음으로 완성될 수 있는 여정입니다.
<영흥도옆에 붙은 측도..썰물때에 길이 열려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음>
믿는 이들의 생활은 사실 단순합니다.
일상에서 주어진 것들 간단한 음식 옷 그리고 계절의 변화와 그에 따른 경이들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해야하는 사람들 ...등등등...
감사할 모든 것에 감사하고.....
<시화호 를 가로지르는 길...시화도는 썩어가고 있다>
그것을 감상하고 누리고 느끼면 됩니다. 모든 것을 통해 절대자를....
다만 이렇게 자연을 파괴하고 바꾸고 인간들 자신이 신인양 마음대로 주물르면 안됩니다.
그러면 그 댓가로 사람이 누릴 모든 것들이 썩어갑니다.
<영흥도 바닷가에서 사륜구동을 타는 사람들>
사람들은 늘 모든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을 소박하게 함께 나누고
그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필요이상으로 욕심을 내지 않음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득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기에는 멋져보이지만 바닷가에 결국 오염물질을 방사하는 행위를 멋대로 해서는 안되겠죠....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하나님 믿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하나님믿는 것을 어렵게 만들려니 신학을 만들고
하나님믿는 것을 어렵게 만들려니 사람들을 제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렵게 여기게 합니다.
더하여 하나님을 친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두려운 존재로 부각시킵니다.
그래야..
하나님 믿는 자기들이 굉장히 근사하고 특별하게 보이게함으로
그들의 영적 허영심을 만족시킬 뿐 아니라
그들의 두려움을 이용해 그 두려움을 영적권위를 가진 이들에게 경외심을 갖도록
유도함으로 실재적인 권세를 취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받아야할 경외심을 훔친 것이죠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소위 하나님을 경건하게 믿는 자들이
조직적으로 하나의 왕국을 건설한 후
그 권력을 이용해
참되게 그리고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죽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단순한 믿음과 단순한 삶을
많은 규례와 많은 일들과 많은 모임들을 만들어
사람들을 아무 생각할 염도 갖지 못하게 하여
오직 복종하게 만들어 종으로 삼으려 하는 술수에서부터
그들의 탐욕으로 인해 눈이 멀어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의 양들인 믿는이들을
귀히 여기지 않고 함부로 대하는 모든 죄악들까지..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주의 회복안에서
단순한 믿음과 단순한 삶 그것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은혜보다 더 깊다는
사랑안으로
진리보다 더 깊다는
빛안으로
그분을
뵙고
그안에
거하길
사모했지만...
이제 내가 아는 것은
난 이미
빛이며
사랑이었네...........
그분이 그렇듯.
<2009 추석 보름달>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연유는.... 무슨 유달은 사랑스러운 것이 더욱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사랑하려는 마음보다 사랑하기로 작정한 마음이 당신의 내게 대한 마음이기에... 그러므로 빗속에서도 어두운 밤 으슥한 길목에서도 그 사랑이 언제나 견고히 곁에 있기에.... 행복함으로 안식할 수 있음 입니다. |
<제주도 2009>
복음집회에서 (여러달 전이었음)
소위 교회안에서 나잇살? 들은 연륜있는 분들의 기능발휘?나
또는 나름 초대된 분들에게 보다 설득력있는
(아마도 연령별 대비?) 권고가 되겠다 싶어서인지
한 두어사람에게 5분동안의 간증하는 코너를 넣은 듯.......해서
부탁이 왔을 때 좀은 당황을 하였지만
(말인즉슨 다른 자매들이 못하겠다하여 ..결국 돌고 돌아 낙점이 되었다고)
이런 저런 봉사하는 분들의 짐을 좀이라도 덜고자 하여
길게 끌지 않고 선선히 응하였다.
하지만 막상 무엇을 말한다....
무엇보다 여전히 심장이 마구 뛰는 소심함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지.....
무대공포증에다 약간의 대인기피증?증상......인 내가..
등등의 우려가 있었지만.
<간증할 때 절대~~~~하지 않는게 좋을 거 같은 것을 우선 생각해 보자>
1. 주님을 믿으면 만사형통이라는 간증은 금물이다.
물론 주님은 언제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물질적인 복을 생각하고 주님을 믿거나,
혹은 그런 기복신앙을 혐오해 주님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이 물질을 주시던지 주시지 않던지는 그분 맘이다.
또 자녀나 기타등등 세상의 복을 주시는 것도 그분 맘이다.
분명한 것은 결코 굶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고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실하게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굶지 않으려고 교회생할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2.주님을 믿으면 재미있는 일들이 많으며
교회생활은 너무나 행복하다는 간증도 금물이다.
교회생활은 얼마나 놀라운가라는 말은 맞다.
전혀 생판부지의 사람들이 형제요 자매요 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행복인가 아닌가는 꽤나 주관적인 측면이 많다.
.....................
교회생활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고하는 기본 생활만으로도
내 삶은 너무도 버거웠다.
생각나는 일...
집회다니는 것과 살림을 위한 장보러 다니는 것이 전부인 내 사는 모양이
그저 그랬던 모양이다.
어떤 막 교회생활을 시작하기로 했던 사람이
자매님은 사는 게 너무 재미없게 사는 것 같다고 했다.
(내 사는 모양이 맘에 안들어 떠날 수 도 있던 그 양반은 다행히 교회생활을 떠나지 않았다)
사실 재미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조차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사는가 또는
사람으로서 해야할 일을 하기 위해 사는가의 기준의 차이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확실히 보상은 있다.
그런 일정한 훈련을 거친 후에 충분히 행복할 만한 이유를
밖이 아닌 내 속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인생의 목적을 찾았다라는 말은 너무 극단적인 표현이기에 반발감을 줄 수도 있고
별로 호소력이 없다.
지금 이 말을 듣는 방황할지 모르는 혹은 호기심으로 온 어떤 사람 당사자의
인생의 목표가 나름 있을지도 모르며
그것을 크게 생각할지도 모르기에
자신의 인생의 목적을 바꿔야한다는 말처럼 들려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나도 나름 인생의 목적이 있었다.
그것을 정말 절대적이라고 여기진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적성에 맞는 것이라고 여겼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일보다도 주님자신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정말 다행인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주님을 믿는 일은 내 전공이다.
가면 갈 수록 느끼는 것.
....
( 실제간증은..어떻게 주님을 만났나라는 이야기를 했던 거 같다)
그러나
거친 사막 통과해 내 온 존재 부서지고
주와 하나될 때까지 |
주님이 어느날 먼 시선으로 보고 계시더니...
내가 이 세상의 마지막에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즘은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듯 여겨집니다.
경제적인 것에서부터 자연재해 전쟁속 살육의 현장까지...
인간의 타락된 이기심이 만들어낸 이 시대의 실상은
주님이 그때 보셨던 마지막 때의 어떠함을 보이고 있는 걸까요.
이스라엘과 이슬람의 대치에 대해 어떻게 여기십니까.
이스라엘이 분명 구약시대에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민족이었으나
오늘날 그에게서 하나님의 성품의 어떠함을 반영하는
어떤 기릴만한 것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진득히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의 방법으로 얻은 이스마엘.
그 아내 사라는 이삭을 낳고
이삭을 조롱하는 이스마엘에게 위협을 느껴
이스마엘과 그 어미를 내쫓으라 아브라함에게 요구했고
하나님도 그에 동의했으나
그러나 사막한가운데서 목말라 죽을 처지에 있던 그 모자에게
물을 공급하신 긍휼을 생각해 봅니다.
어려운 시절을 거친 사람들이
외려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더 잘 이해하고 돕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스라엘의 생존방식은 그와는 다른 것인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인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을 보존하실 거라는 믿음은 없는 것인지....
...
공존하는 길은 없는 것인지.................
...
흔히들 자국의 이익에 대해 절대적인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고
전쟁도 불사하는 대치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이 세대.
그러나 사람에 대한 사람의 생존권리에 대한 인정이 없는 이 세대는
그 범위가 크면 애국이라는 미명을 덧붙이고
그 범위가 작으면 가정을 책임지며 보호하는 것이지만
다른 사람을 희생하는 것에 무감각하다면
궁극적인 출발은 끝없는 ..이기심이며 탐욕이며
조금 범위가 커지면서 무엇이라 이름붙이던 집단 이기주의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돌봄을 믿지 못함으로
자신을 위해 곳간을 만들고 재물을 쌓아두고
힘을 축적하기위해 사람들을 한 데 모아 세력을 만들고
그리고 그 힘을 과시하기위해 곳곳에 쌓은 바벨탑들이 있는.............
소그룹할 때 이제 산달이 얼마남지 않은 예비엄마자매가 자기 친구를 만난 얘기를 하였습니다.
이제 한돌이 넘었을까 말까한 아이에게 이미 태어났을때 부터 개인보육교사를 붙였다는 것이죠^^
하긴 우리 아이들 어렸을 때도 이미 그런 조기교육의 전운이 감돌았으니 지금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영재나 천재는 비록 아닐지라도 가진바 비범한 재능을 어렸을 때부터 발견하여 발전시켜야한다는 말씀.
이미 그런 강을 건너 아이를 품에서 떼어놓은 제 입장이야 홀가분하지만
다음 세대는 갈 수록
살기가 녹녹치 않은 시절을 앞에 놓아두고 있는 듯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라나는 이세를 잉태하고 키우는 사람들에게 제일 큰 시험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아는 사람들일 수록 아이를 낳기를 주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자기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제 아이를 잘 키워야하는데 주변상황은 갈 수록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 37)
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어떻게 적용이 되어야할까요.
아주 오래된 옛날에 어떤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함께 준비한 식사를 먹으려 할 때
거기 좀 연세가 드신 노형제님이 있었는데 다른 한 자매님이 그 형제님의 지체사랑에 대하여 칭찬하면서
이 형제님은 자기의 자녀보다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잘 먹이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며 그 분을 천거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은근흐믓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 형제님을 보면서
그런데 웬지 마음이 편치 않았음을 부인할 수 없었죠.
그 말씀의 뉴앙스가 웬지 자녀들은 어디서 무얼 먹는지 모르지만 그들의 먹을 것을
웬지 우리가 대신 접대받고 있는 듯한...............불편한 느낌.
.
말씀을 적용할 때 같은 말씀이라도 어떤 한계에서 받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은...
자기의 안에 가진 천연적인 알량한 사랑을 나눠주어야한다는 계산법으로는
자신의 가진 것을 다른 한 곳에 부으면
또 다른 곳은 바닥이 보여야하겠지만...
그래서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은 다른 것을 덜 사랑하고의 결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지만
주님의 말씀은 사랑하고에 더 더!!! 를 붙여서 더 사랑하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기에...
마땅히 하나님의 사람이 가져야할 정상적인 사랑은
자신이 마땅히 자동적으로 사랑하여야할 것을 사랑하는 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녀이던 피붙이던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던..............
다만
절대적인 가치가 있는 존재에 대해 더 감사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풍부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역시
당연하게
왜냐면
주님 자신은 그런 가치가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
우리는 아무리 우리가 애를 쓴다해도
그 범주를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구조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에도
어느날 하나님이 안에서 번개처럼 나타나는 경험을 하는 사람도 있는지 모르지만...
여전히 우리는 말씀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
원하시는 것
하나님의 목표등등
밖에서 객관적인 기준을 세워
그것이 거울이 되고 지침이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가 추구하여 알아가도록
기록된 말씀을 남기셨고
우린 기 기록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난 뒤에
그 사람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배움을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세상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우리와 세상의 관계에서도
이것은 같은 범주로 적용됨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어떻게 요리하는가
어떻게 대처하는가는
여전히 땅위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으로서
하찮게 다루어야할 문제가 아닌고로....
많은 주의 종들이 선견자들이 나름대로 그 원칙을 교통해놓기도 하였습니다.
니 형제님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락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이런 제목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셨던바....
.
극단적으로 말해 세상을 똥이라고 한다면...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요...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똥이 무서워서 피한다면
그것은 외경의 대상이 되기가 쉽습니다.
똥이 불결하며 많은 병균와 오염물질을 갖고 있다는 지식이 있기에 피한다면
그것은 적절한 대처일 것입니다.
가령
무지한 미개한 사람들이 동물의 형상이나 나무나 자연물을 놓고 경배를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아는 지식있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영향을 받거나 그것을 하찮게 여기면 벌을 받는다는 위협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그냥 나무요 돌이요 아무 힘도 영향력도 없는
자연물의 일부분일 뿐임을 앎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무지함이
그것에 어떤 영적 힘이 있다고 믿어버리고
그앞에 절을 하기 시작하면
밖의 자연물은 똑같이 여전히 자연물이로되
사람의 마음은 이미 어떤 미지의
그러나 스스로의 관념과 두려움의 지배를 받게 되어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면서
결국에는
악한 영에 의해 조종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세상에 대해 무지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세상의 악한 힘이 어떻게 정지적인 권력 배후에서 작용하는가
또는 경제적인 상황으로 어떻게 세상이 지배를 받고 있는가
그에 대해 합당하며 꽤뚫는 지식이 있을 때
그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그것으로 근심하지 않고
그것으로 지배되지 않고
세상의 겉으로의 현란함으로 인해
그것에 현혹되거나 동경하게 되거나 소원을 두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하나
결국 무로 돌아가고
파산하고 싸우고 죽고 죽이는 사람들의 종말을 보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그 종말을 보고 있게 될 것입니다.
.
그러나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죽었고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죽었으나
세상은 여전히 살아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는지요.
밖의 세상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 그 세상에 대한 반응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요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이 자연스레 생래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지식적 욕구나 정서적 감흥을
마치 세상을 사랑하고 그것에 마음을 두는 행위라도 되는듯
싹을 잘라내어 버리고
금욕주의적인 성향을 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겉으로는
경건한 외양을 갖을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큰 그러나가 있습니다.
(이형제님이 생전에 이런 투로 말씀을 많이 하셨지요...^^)
예를 들어 음악은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정확히는 하나님에게서 쫓겨나)
그 외롭고 허한 마음 그 채워지지 않은 애닯음과 서러움과 그리움을 표현함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단으로 발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 음악으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체험하는 찬양의 어떠함으로 되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음율이라는 정서적인 표현과 기능이
우리의 영을 일깨우고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며
우리의 온 존재를 열어놓게 하며
반응하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름다운 음악적 선율이 안에 없거나 감흥이 없는 사람은
조용하고 참착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서 섬세하고 부드럽고
뜨거운 사랑을 느끼는데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온 존재..영과 혼과 몸으로까지...하나님을 사랑하길 원하십니다.
만약 즐겁고 기쁜 일이 있다면 다윗이 그랬듯..심지어 춤을 추며 덩실덩실 돌아가다가
옷이 벗겨지는지도 모를 만큼 그렇게 열정적으로...
(천박한 감흥으로 육신의 흥겨움을 푸는 흔들거림은 물론 아닌....)
.
요컨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관건은
그 중심이 그리스도요
그 출발이 영이며 그 과정이 영으로 인한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도 오직 영에 있음을 봅니다.
.
그리고 그것을 지지해주고 확증해주는 말씀에 있음을 봅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떠나서
어떤 획일적인 잣대가 생기고 그것에 꿰어맞추려 할 때
바로 종교가 또아리를 틀게 되고
밖의 형식과 틀로 짜르게되고
영의 자유함이 아닌
규례와 율법으로 스스로를 얽어배고
다른 사람을 그 잣대로 판단하게 됩니다.
<포천 백양계곡 근처 2009>
영으로 말씀을 취하는 것은 분명히
생각과 지성으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 인간의 언어로 그것을 말하기가 쉽지 않기에
성경은 그래서 "모든 간구과 기도로..."라고 말합니다.
모든 간구와 기도로 할때
우리 사람의 영으로 말씀을 접하고
그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함이 관건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것이 영인지 지식인지
구별이 가지 않습니다.
마치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는
별로 효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다가 반복하여 단련하면
어느 순간에 운동을 하고 나면 그
효력을
확실히 느끼게 되고 ..
그러면 운동을 하는 것이
내가 일부러 힘을 들여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안의 요구로
식욕을 느끼듯
몸을 움직일 요구를 느낌으로
안 밖이 함께
협력함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지식인 것 같습니다.
영은 아직 미약하게 느껴집니다.
영은 움직이는 것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일부러 힘을 들여 습관화해야 하는 것처럼
말씀을 접합니다.
먼저 말씀이 계시되고 깨닫고 인상이 남습니다.
처음엔 그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날 실제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밖에서 빛비춰져서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이 드러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속에 확대되어 하나가 되어있음을 느낍니다...
하나의 율과 요구가 이미 내것이 되어 있습니다..
마치 영안의 영역이 넓어지고 두터워지는 것과 같이...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있는 자는 더 얻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그 말씀대로...
그게 언젠가 심판대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이땅에 살면서..
점점 더 그렇게 차이가 날 것 같은...
주님께 헌신하는 자는
더 헌신하여 나갈 것이며
땅에 속한 것에 안주하는 이는
그렇게 주저 앉아...
애곡하여도 울지 않고
춤을 추어도 기뻐하지도 않고
소귀에 경을 읽는 것처럼...
많은 멧시지를 들어도
들을 때 뿐이며..
결국은
모든 탓을 다른 모든 것에 돌리며
우리의 실정에 맞느니
안맞느니 하면서
...귀가 얆은 비슷한 동지를
끌어들일 것같은...
.
.
제 자신을 돌아보며
주여..
다만 객관적인 밖의 말씀이 아닌
주관적인 말씀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온 땅에 주님의 경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영적인 개안을 갖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