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사랑으로


찬송찬미 2009-09-2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8100.html

*작사:israel lee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자아처리


주님누림 2009-09-22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8079.html

<대만 타이페이 베이터우온천 근처 도서관 뜰 2008 8>

사람의 내면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너무도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그것들을 분석하고 각각의 기능을 어느 정도 분류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의 기관들이 너무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서로 엉켜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몸과 정신이 밀접한 것은
물질인 몸의 오감의 예민함에 따라
사람의 정신적 감각과 예지의 능력에 차이를 주기도 함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이라고 불리우는 총체는
그 사람을 구성하는 물질과 정신적 영적 영역의 총체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은 양날이 선 칼처럼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실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과 혼을 따로 분리할 수도 있고
마음속의 생각과 그 뜻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존재를 꿰뚫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 앞에 나아가던 나아가지 않던
이미 우리를 아시기에
그분에게는 전혀 사람을 새삼스럽게 통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우리의 생각이 어떤 상태인지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상태인지 합당치 않은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치 칼로 찔림을 당하듯 우리 속부분들을
감찰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 집회때 촛점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역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명령하는 기도의 사역을 하는 것에 있었으나
그전에 자아처리에 대한 통과가 있어야 함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자아에 대한 관념은 주님의 관념과 매우 다른 것을 먼저 봐야 합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박히려는 주님을 만류하다
주님에 의해 심하게 책망을 받았는데
심지어 너는 사탄이다라는 말씀을 듣기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베드로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게 그 촛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자기의 생각과 원함에 대치되자
그는 극렬히 반대를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발생되곤합니다.

주님이 명하셨던 자기를 부인함은
늘 결정적인 순간에 엉뚱하게도
자신의 마음이 자기의 생각과 원함에 촛점을 맞추고 있음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베드로처럼 그의 뒤를 따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 귀감이 될 만큼은 아니지만
소극적인 예로 드러나기도 하고
때로는 은밀하게 드러나기도 할 것입니다

어떻게 자아를 부인할 것인가

자아를 부인하는 것의 첫번째 첩경은
이 세상에서의 자기의 입지를 내려놓는 것에 있음을 봅니다.
흔이 우리가 야심이라고 총칭하는 무언가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참된 자아부인속에 있었더면

그 말씀이 이해되지 않더라도
주님의 죽으심이 한면 감당할 수 없는 큰 근심이 되었더라도
묵묵히 그 말씀을 듣고 따랐을 것입니다.

주님이 분명 약속하신 말씀이 있었기로
주님이 능치 못할 일이 없기로
자신의 앞날을 역시 염려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주님을 눈앞에 놓고 주님의 기사와 이적을 보았던 베드로가 이러할진대
만약 말씀도 없고 그를 확증하는 어떤 것도 없다면....
우리가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하심이 있다 하더라도
자아를 여전히 붙들고 있다면 엉뚱한 반응으로 내쳐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아에 대해 교통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자아와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부르는 인성 또는 인격은
서로 달리 다뤄져야 할 부분임을 봅니다.

사람의 혼안에 있는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부분들은
합당하게 세워져야하고 새로워져야하고 그 기능이 강화되어야 할 부분들입니다.

잘못하면
자아가 없다는 것을
사물을 인식하고 분별하는 능력과 판단하는 사고와 그로 인해 산출되는
분명한 느낌으로 인한 의견이 없다는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회복안에서 앞선 체험있는 형제님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역시 주안에서 주의 마음을 가진 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아무런 느낌이 없이
무조건적으로 어떤 요구에 무조건 아멘하는 것으로 척도로 삼아선 오 정말 너무한 일입니다.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촛점이 주님에게 전적으로 맞추져있고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명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말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아를 부인하도록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주님을 따를 준비가 되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이 있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도는 이렇게 시작될 것입니다.

주여 말씀하소서..
모든 밖의 말씀과 영안의 느낌과 기름부음으로...






간구


찬송찬미 2009-09-2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8018.html

 간구-1.wma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좋은 집회란...


주님누림 2009-09-2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7998.html


 

 

신언은 이런 것이다라고
앞선 형제님들이 교통하신 그 수준에 미칠려면
우리의 모임의 어떠함은 
그 표준에 이르렀다고 감히 단언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함에도

어제 집회의 분위기는

(꽤 여러달전의 상황이었음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일단은 청년들이 그 분위기를 주도하기에
청년들의 솔직담백함과
이즘의 교육의 효과인 욧점만을 간결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데에 있어선
아주 신선했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두 사람의 교통이 인상이 깊었습니다.

 

한 교통은
변화산상에서의 주님의 변형이
제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교통한 것과

 

다른 한 교통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변화산상에서의 주님의 영광의 나타남을
성경전반에 걸쳐 큰 맥락으로 말씀을 통해
연결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사람의 교통은
단지 그주의 멧세지만을 추구해서
느낀 바를 교통했다기 보다는
평소에 꾸준히 말씀을 추구함으로
안에 저장된 말씀들 위에
빛가운데서 본 계시가 더해진 것입니다.

 

한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말하는 모임이기도 하지만
또한 듣는 모임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말할 입장이 되기도 하고
또한 듣는 입장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말하는 것도 중요하고
듣는 것도  그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말하는 사람도 잘 말해야하지만
듣는 사람도 기본적으로 영안에서 분별하는 역량이 있어야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다 함께
어떤 수준에서 같이 일치해야만
서로 반향하며 다른 사람의 영을 건드리고
그 영이 또 말하고 이렇게 주고받으며
상승하여 가장 높은 곳으로 도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누구나 그렇듯이


주님누림 2009-09-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7913.html

처음엔 누구나 그렇듯이
스스로 완벽했습니다.
이미 이룬듯 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을
애초에 다 받았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마치..
다 된 것처럼 여겼습니다.

햇병아리..
아장아장 봄볕 속에 걸으며
자신의 발걸음에
스스로 도취하듯이... 

그러나 그 은사들이
개발되고
자라야하고

변화를 받아야 하는
긴 과정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가늠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 시간을
마음대로 단축할 수도
대신 할 수도 없음도 몰랐습니다..

다만
경작지인 우리 안에 자라는
그분을 인내하며
바라고 있는 그분의
따뜻한 눈길만은 여전하다는 것
이것이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여전히 지금도... 

 



하나님의 왕자


찬송찬미 2009-09-1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7896.html

 

 

*작사:morningstar, israel lee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여전히 전투중


주님누림 2009-09-16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7889.html

<윈도우에서 제공되는 사진파일>


 

구약의 그림에서

부추와 마늘의 맛을 모르는!!!!

두번째 세대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러 들어갔다는 그 사실은

일단은 고무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첫번째 세대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세상적인 요소를 다 처리하지 못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없음~!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의 하실 수 있음과

능치 못함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할 수 없음만을 보고 낙담하여

주저앉은.....이유가 더 큰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들어가서도

제 2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더욱 타락하여...

아합때에 이르러서는

바알과 하나님중 누가 참하나님인가

경합시키는

그정도까지 하나님을 모욕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이고 있음을 볼 때

 

다시한번..

 

우리가 여호수아와 갈렙이 아니라면

길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들어갔다고 해도 여전히

믿음위에서 끝까지 서서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삶은 끝까지

공중의 권세잡은자와의 전쟁의 나날이라는 것을....



교회안의 중년들은...


주님누림 2009-09-14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7829.html
<초저녁 2009 8>

중년이란 무엇인가...

중년은 결코 새로운 출발을 하는 싯점이 아니다.
중년은 모으고 정립하고 그리고 결말을 보는 싯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어떤 일을 계기로 새로운 출발을 하는 듯 보이나
기실은 그 안에 이미 그런 싹과 기능과 역량을 안에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살아온 내적 외적으로 익어온 그리고 투자해온 자신의 역량을
총 집산해서 쏟아붓는 시기이다.

또한
중년은 외로운 그리고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시기이다.
살다보면 각각 자신의 길을 부지런히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동반자를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면서...

그러므로
중년은 새로운 인간관계를 정립하는 시기가 아니다.
즉 새로운 또래 집단을 형성하는 시기가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보라
사랑스럽다.
따로 떨어져 있는 아이를 보면 불쌍하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늙어가는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가
웬지 처량스럽다
그러나 홀로 떨어져 당당히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처연하지만 자연스럽다.

삶은 결국 홀로 그 길을 걸어야함을
그리고
당당히 그 길을 걸어왔음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은 역 피라미드와 같다고 했다.
많은 새로운 그리고 교회안에 살기시작한 믿는 이들을 떠받치고 있는
점점 좁아진 역 삼각형의 밑둥들이다.
이것은 상징적인 의미이지만 교회안의 중년들이 그래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중년은 모이지 말아야하는가..아니다 모여야한다.
모일 때 새로운 어떤 일을 위해 모이지 말아야한다.
살아온 그것으로
열매를 가지고
그 깊이대로 모여야한다.

그런 역삼각형의 밑둥으로 중년들은 모여야한다.

 

그러고 역으로 다시 흩어져야한다.

어떻게 어떻게 흩어져야하는지는 각각 주님께 물어야한다

각각 역삼각형의 밑둥이 되기위해.



아무도 모르지


찬송찬미 2009-09-1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7817.html
<2006 가을>

 

*작사:morningstar, israel lee / 작곡:Eugene / 편곡:Eugene*
 

   빨간 단풍잎을 보며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이쁘다고
   즐거워하지만

   그들은

   단풍나무가
   안으로
   목마르고
   앓고 있는 줄
   모르겠지

   긴 겨울을 앞두고
   푸른 잎을
   떨구기위해
   자신을
   말리고 있다는 것을

   그 열기로
   한 때 푸르렀던 잎들은
   점차로
   그렇게
   빨갛게 타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복음에 대하여


주님누림 2009-09-12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7802.html
<2009 8  일출>

새신자에게 뿐만 아니라
오랜 교회생활을 한 우리에게도
복음의 소식이 때마다 필요하며
또한 매 때마다 새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지지리도 이 땅에서 복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예 복이 없기로
작정해야만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린 어쩔 수 없이 또한
이땅에서 발을 여전히 세상에 담그고 있으며
천하고 혼잡된 속에 여전히 있는듯 보입니다.

그러나
배가 사망의 바다속에 빠지지 않고
그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세상에 있는 듯 하지만
세상과 분리될 수 있는 것은...
하늘에 속한 복이
 가장 순수하고 높고 완전한 것을 앎 때문입니다.

 

언젠가
여자스님이
이 땅의 최신의 음료인 스므디를
앙징맞은 플라스틱으로 떠 먹으며
아~~~맛있다고 탄성을 발하며 먹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맑고 투명한 해맑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한면 이 세상의 유혹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금욕을 하기에는
이 땅에는 맛있고 보암직한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세상의 것과 너무 분리되도록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그의 해맑음은 위험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모든 땅에 속한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은...
고행이나 도피가 아닌
그 하늘에 속한 복된 소식의 ..문자그대로의 복된 소식이 너무나 놀랍기에
넘어설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구약 전체 약속 예언 예표들의 성취이며
율법을 제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살아계신 인격입니다.

이 복음의 내용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통과한 과정과 성취하신 모든 구속의 일입니다.

 

이 복음을 게획하고 약속하고 성취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적용되어
우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에
이 복음은 또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또한  신성한 생명의 다스림아래 있게 하는 왕국복음이기도 합니다.

 

이 복음은 또한 우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는 화평의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게 하는 영광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은 밖의 것이 아니라
내주하는 주관적인 복음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복음은 신약의 계시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국 과정을 거친 삼일 하나님
그분이 우리의 생명과 내용이 됨으로 그분을 단체적인
몸으로 표현하는 것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회복을 갈망하는 우리는...


회복자취 2009-09-10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7762.html



아 주의 영광스런 회복!! 이렇게 외칠 때
우린 자신이 정말 굉장한 사람인 줄 착각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분의 영광스런 경륜안에서 보면 굉장하지만)

주의 회복안에 불림받은 우리는
그러나
선택의 제일 끝순위에 있었던 자인 것 같습니다

주님에 의해 먼저 초대받았던 이들은
이러저러한 일로 바쁘다고 핑게를 대었고
(그중엔 정말 주님을 위한 목회와 사업으로 바빴을지)

해서 주님은 그의 종인 천사들을 불러
네거리에 가서 아무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각색 병든 자들인 우리를
이 놀라운 경륜의 잔치에 초대하도록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성급히 앞에서 따랐던 제자들에 의해
시끄럽고 단순한 어린아이에 젖먹이로 취급받았던
자들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그 찬양의 열매를 인정받은...

실제로 회복안에 있는 우리들 중 뭐 그다지
대단한 사람이 있는 거 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면 대단한 사람이었을지 모르는 사람도
여기서는 평범한 작은 지체가 되어 버리는지
아니 되어버리지 않는다면
견딜 수 없게 되는지 모릅니다.

니 형제님의 경우도
그렇게 놀라운 역량을 가진 분이
(그의 책에 깊은 감명을 받은 주의 자녀들이 많음이
증명하는 바)
나의 운명은 들림받는 거 아니면
순교를 당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그저 한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지는 것이
자신의 운명임을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회복의 겉으로 보이는 숫자와
또는 밖의 어떤 움직임이 놀랍다 하더라도
회복은 그저 적은 무리에 불과합니다.

종교적인 바벨탑이나
큰 겨자나무처럼 커지는 것을 포기한 때문이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
주의 회복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안에 들어와 자신의 천연적인 역량이나
또는 강력한 리더쉽이 쓰임을 받을 것이란
기대를 하는 사람에겐
회복은 정말 맛이 없는 음식을 제공하는 곳일 것입니다.

두 니 리형제님을 귀히 여기는 것은
그분들이 리더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신 귀한 본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건축을 방해하는 어떤 것들로
잘못된 본을 보일까....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행적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인간적인 친밀함의 천연적인 꿀을
늘 경계하시며
(어떤 동역자와도 특별히 친밀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높이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으셨으며
(훈련집회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하는
표현을 쓰거나 또는 어떤 자매가 형제님을 사랑합니다
-물론 영적인 차원에서- 라고 말을 한 것에
구토를 느끼는 제스추어를 쓰시며)

주의 회복이 질적으로 양적으로 전진할 때마다
그것을 자신의 역량으로 착각할까
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였던 .........

리 형제님을 추억하며

.........



군사독재시대를 거쳐서..


주님누림 2009-09-0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7744.html
   <일출 2009 8>

 

우리 세대(?)는 군사독재문화에서 자라난 세대입니다.

북한공산군은 인정사정도 없는 살인마같은 빨갱이라고 주입받고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전쟁에 대비해서 교련훈련을 받았습니다.

.

일제히 모두 똑같은 교복을 입어야했고

머리길이도 제한을 받았습니다.

.

나중에 잘먹고 잘살기위해 아니 최소한 천하고 궂은 일은 하지 않고

펜대잡고 살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한다고 협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혹 참되고 사람답게 살기위해서 배워야한다고 하신 부모님이나 선생님도 계셨겠지만.

.

그리고 개인보다는 속해있는 단체의 이익을 중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웠으며

모든 명령

즉 집에서는 부모님말씀에

학교에서는 선생님 말씀에

나라에는 충성하라고 배웠습니다.

(그 집이 그 부모가 그 선생님이 그 나라의 인도자가 어떤 인격과 가치관을 갖고 있던간에)

.

그렇게 자라고 살아가고 하는 중에

세월은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

.

.

.

그리고 지금은

앞서 배운 모든 지식과 기준과 가치관이 재고되고 재 정립되고 비판되는 시기입니다.

.

,

그리고 인터넷시대가 돌아오면서

사람들은 각각 개인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

.

늘 들어야 했던 입장에서

말하는입들이 된 것입니다.

서로 말하고 서로 확인하고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공유하는 싯점에 왔습니다.

개인의 목소리를 내고

개인의 자존의 의미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

말할 권한을 주어 앞의 연단에 서지 않으면 할 수 없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그 모든 이야기가 그렇게 다 가치가 있거나 무게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직접적으로 나누고 배우고 하는 중에

서서히 단계적으로 상향곡선을 긋고 있습니다.

.

즉 이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교회생활에서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

전에는 목사라는 분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 것도 신성모독같이 두려워하던 신자들이

이런 저런 문제를 공개적으로 함께 드러내놓고  공감하고 추구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이 이 싯점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그들의 내면에서 직접듣는 것을 실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회복에서 지양하고 잇는 것을

인터넷이 모든 기독교성도들안에서 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몸을 다시 보게 됩니다.

몸의 표현은 하나이지만

개개인의 어떠함을 전혀 깔아뭉겐 전체주의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지체는 각각 자기의 기능과 분량과 역활이 있으며 머리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의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몸의 의식은 자동적인 것이지 외면적인 통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몸은 지체의 각각의 어떠함에 달린 일입니다.

지체의 어떠함이 아직 충분히 그 기능과 그 자람이 되지 못하였다면

영원의 시대안에서는 이미 완성된 몸의 건축이

아직 땅에서는 출현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은 몸의 거대한 실체가 이미 있어

지체를 통제하고 조정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우리가 갖는 모든 관계가 정상적일 때

거기에 합당한 인도와 부어짐과 통제가 있을 때

몸안에서의 느낌과 통제가 실재적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

사실 실재적으로 몸은 지체의 어떠함에 따라 조금씩 성장해가고

그 기능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



밧모섬에서


찬송찬미 2009-09-08 / 추천수 0 / 스크랩수 3 http://blog.chch.kr/lethim/7737.html
<노을 2009 8>
 

 Patmos-1.wma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찬송:May*

   밧모섬이라면...

   제가 있는 이 자리가

   하늘과 닿아 있는 곳이라면...

   모든 것과 단절되어도 좋겠습니다.

   어느덧

   빛바랜 연예편지처럼

   일상의 때에 절어진

   습관적 삶이 되어 버렸다면...

   차라리

   밧모섬에 스스로 갇혀도 좋겠습니다.

   다시 새롭게

   다시 가슴저미게

   다시 불일듯하게하여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두 번 잃어버릴 수 없는

   사로잡힌 사랑으로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잔잔한 성숙함으로 고백하고 싶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송에 대한 각각의 관념에 대하여


주님누림 2009-09-07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7716.html
How could I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1

From my heart comes a melody

Of the One who gave His life to me.

How can  I turn away from Thee?

Lord, I have seen Thy changeless love for me.

 

Enjoyment so full !

Life's reality,

That's what You're to me !

Lord, You have won my heart !

 

Take my heart, take my whole life too.

Lord, I can't help giving myself to You.

 

2

From the day that I first met You,

How could I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Emptiness turned life's pleasures blue;

No earthly love ever could see me through.

 

'Til I turned one day,

Opened up my heart,

Let Your love flow in

And fill my deepest part.

 

Now I know, Lord, You're one with me;

And I can't help giving myself to Thee.

Lord, I can't help giving myself to Thee.

 

 


 

 
 
 
이 찬송은 아마도 잘은 모르지만..미국에서 작사되어 녹음된 찬송같습니다.. 아마도 많은 형제자매님들 대부분이 
이 음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것입니다.
미국에서 아마도..우리의 일반적인 가요와 같이 널리 알려져 있는
국민 가요 같은 곡이라고 생각해도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 찬송의 원곡이 대중가요에서 왔기에
누군가는 친숙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곡조..아마 그노래도 ...
어떤 여인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느낌을 표현한 것이었죠... ...그런데...
땅에 속한 사랑을 노래한 곡조에다
주님에 대한 신성한 사랑의 마음을 담았다고 ...
일종의 신성모독이라는 느낌이 든다...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이것도 각각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지방교회에서 그때 당시의 신세대..
지금쯤이면 아마도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되었을 듯...
새신자겸...아직 교파와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자매를
목양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집에 가면..약간 대중가요 분위기의 찬송곡을 늘 틀어놓고
우리 일단의 회복의 자매들을 맞았었습니다..
아마도 그 자매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찬송을
같이 누리고자 하는 배려일 수도 있고..
아무튼..찬송을 들려주고 싶어서 ...그랬는지 어쨌는지는...잘 모르나 ..
우리가 부르던 곡조와 틀려서 그랬는지
우리 자매들은 아마도 말은 안햇지만 공통적으로 어색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 자매도 역시 아무 말 안했지만
속마음은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섭섭했을지...그냥 무덤덤했을지.. .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끝내 저희는 아무도 그 찬송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우리가 회복안에서 뿐 아니라
회복밖의 그리스도인들을 대할 때
어디까지 어떻게 열어야 할지를 생각해보자는 취지일 뿐입니다..
 
답은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체험된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이즘 사도행전의 사도바울의 행적을 읽으면서...
그가 로마서에선가 말했던 가요...
 
몇몇 사람을 얻기 위해 그가 어떠하면 그와 같은 모양을 취한다는...
그것은 단지 우린 당신을 존중하고..
당신의 느낌을 이해한다는 그런 체를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체를 하는 건지..진지함으로 그의 상황에 들어가는 것인지
금방안다고 봅니다)
 
그의 어떠함을 느끼고 그의 위치와 상황에서
그를 정말 알고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럴 때만이 사람이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마음속의 간절함에 대해
그도..그런가~~하여 비로소 마음을 열수 있는게 아닌지.....


아직은 그 모습 낯설지만


찬송찬미 2009-09-0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7610.html

첨부파일 strange.mp3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찬송:May*



교회의 행정


주님누림 2009-09-04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7594.html

<베이찡 자금성벽 2009>


 

지방의 터의 교회에서 말하는 행정은 어떤 것인가...

 

" 행정은 지방적으로 독립되어 있으며 직접 주님 앞에서 자신들의 책임을 진다. ..서로 동역하고 서로 상의하기를 원했지만 요한은 이와 상관없이 그는다만 교회가 각각 독립적임을 말했다."(기독도보 2-워치만 니 전집 1집 4 중에서 발췌)

 

각 지방교회의 행정에 있어

분리와 독립은 같은 의미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각 지방교회는 행정적으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만약 분리와 독립이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웟치만 니 형제님이 말씀하신...모든 지방교회는  지방적으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을 뒤집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나.........

"지방교회들이 다 서로를 향해 독립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다 그러나 이 독립은 교통이 아닌 행정안에서이다. 행정안에서는 모든 지방교회들이 각각의 권할권을 갖고 있지만, 교통안에서는 반드시 하나이어야 한다. 전세계에 걸쳐서 모든 지방교회들은 교통안에서 하나이어야 한다"( 신약성경안에서 본 놀라운 그리스도 340P -윗트니스 리 저-)

 

위의 멧시지를 보면 우리가 결코 분리되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행정적인 독립이 아니라  교통에서의 독립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이든지 그리스도의 관리만 받지 다른 교회의 관리는 받지 않는다 각 등대는 행정상으로 독립되어있으며, 다른 등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하나의 연합된 교회가 되어 그들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소위  구회(區會)나 연회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하나님은 결코 어떤 한 지방을 교회의 중앙으로 삼아 다른 교회를 관리하거나 제한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조직에는 결코 지상에 있는 중앙이 없다. 예루살렘은 결코 그 당시의 중앙 교회가 아니다"

(집회생활, 교회의 기독사역-웟치만 니 전집 2집 2 중에서)

 

등 이외의 통문휘간 ,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 등에서 행정의 독립과 교통의 하나의 부분을 강조하셨음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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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영과 몸"(윗트니스 리 저)의 한 부분

 

그영과 몸에 " 분리된 행정이 없음"이란 소제목이 나오는데

이는 어떤 지방안에서 소그룹으로 무리를 지은 어떤 무리를 지칭해서 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어떤 특별한 지방에는 특별한 이름이나 특별한 실행이나 특별한 교통이 없는 그리스도인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 지방에 있는 교회와 분리된 행정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리는 편당이다"

 

그리고 그 아래 소제목인 " 모든 지방교회들과 기꺼이 교통을 가짐" 아래

 

" 아마 특별한 이름과 가르침과 교통도 없고, 자신의 행정도 주장하지 않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이 땅에 있는 모든 다른 지방교회들과 교통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열어놓는지를 우리는 여전히 주의해야 한다...우리는 다른 교회들과 교통하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다고하자  만일 그들이 이렇게 말한다면 그들은 지방종파이다 그들은 지방교회가 아니다 왜냐하면 한 지방 교회는 많은 지방 교회들 중의 하나요 그 몸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

 

위의 인용문에서 나오는 무리는 한 지방의 터위에 서 있는 교회를 말함이 아니라  어떤 지방에 있는 한 작은 단체를 말함을 가리킴을 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의 절대적 보증은...


주님누림 2009-09-02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7556.html
<청계천 입구       2006 겨울>

주님이 우리에게 긍휼하신 많은 사례들이 구약에 있지만 특히 야곱의 경우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은 사람의 잘남과 그의 좋은 점이 있다거나 또는 어떤 싹이 보였다거나 

그 어떤 근거를 일절 암시하지 않고

전혀 그의 택하심이 오직 유일한 보증임을 보기 때문입니다.

 

특히 야곱의 많은 약점들을 볼 때 그의 약점들로 인해 위로가 없었더라면...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형제님이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하면서 왜 이렇게 변화가 없나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같은 일로 실패하고 여전히 성질이 바뀌지 않고

불같은가 하면서 한탄을 할 때 우린 눈물이 찌걱 배어나올 만큼

크게 공감의 웃음을 헛헛 웃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7장에 이를 때 쯤이면 사랑하는 라헬도 그의 어머니도 그의 아버지도 없고

많은 수탈당함과 두려움과 싸움도 겪었고 그의 고집스런 힘과 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만한 싯점이 되었을 텐데도

여전히 야곱은 그의 편협함과 편애의 틀안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그리하여 요셉의 타고난 많은 좋은 점,

예를 들면 영민하고 성겪이 반듯하고 가하고 불가한 것들에 대한 판단이 분명함등

당연 사랑받을만한 많은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

야곱이 특히 요셉을 편애함으로 편애를 받는 아이가 흔히 갖는 우쭐댐과 방자히 행하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눈치없음으로,

 형들의 잘못을 아비에게 고해바치는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더구나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지어 입혔으니,

채색옷을 해 입힌다는 것은 고대에 있어 아주 특별한 차별대우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그의 형들과 아비와 어미가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까지 꾸고

그것을 자랑삼아 다 얘기함으로 그의 경솔함은

형들의 시기와 노여움에 불을 붙이게 합니다.

 

야곱의 편애와 요셉의 경솔함은 마침내 그 형제들로 하여금

말째인 요셉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자기 동생을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리고

요셉이 죽었다고 야곱에게 말함으로 아비를 절망에 빠트리게 하는 상황에 이르게 합니다.

 

자신의 아들들의 잔인성과 방자함을 야곱이 모르지는 않았지만

설마 자신의 형제를 노예로 팔아버리는 정도에 이르게 될지는

야곱자신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인 야곱이 요셉이 죽었는줄 알고 그렇게 애통해하는데도

누구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은 것도 기가막힌 일입니다.

 

세상에 많고 많은 험한 일들이 있지만 이보다 더 비참하고 참혹하도록

수치스런 일은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야곱은 이렇게 험한 꼴을 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후에 야곱은 바로왕 앞에서 그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할 때 마침내 당대의 제국의 왕앞에 서서

그저..............험한 세월을 보내었노라고...말합니다.

이제 그의 사랑했던 어린 요셉은 그의 그늘밑에서가 아니라 나름대로 역경을 헤치며

크게 성공한 큰 나라의 지도층이 되어 있었으니

아비인 자신의 공을 내세울 것도 자랑스럽게 여길 것도 아닌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그런 토로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조금의 과장이나

영웅심의 어떤 발로에서가 아니라 담담히

자신의 일생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역시 우리 수중에 아무것도 남아있는 어떤 것도 없이 다 내려놓고

다 벗기워질 때까지 예외없이 긴 과정을 겪어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에 실망하고 모든 것에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고 

자신의 능이 아무 것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고 나서

그제서야 하나님의 택하심에 포함되어있는 그 모든 여정

그 모든 보장성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는 것인지 모릅니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찬송찬미 2009-09-01 / 추천수 0 / 스크랩수 2 http://blog.chch.kr/lethim/7540.html

 

창밖 푸른 가을하늘과  

밝고 따사론 햇살 고와도 

나의 마음에 사모한 당신은

슬픔의 눈을 지녔네

 

두손은 오랜 험한 세월로 

굳은 살 선명하니

나는 오히려 당신과 기꺼이

고난의 사람되려네

 

늘  당신이 이 땅에서

슬픔의 사람이요

늘 제한과 어려움 속에 사신 것

잊지 않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언제나 눈물의 사람

비록 언젠가 영광의 모습 속에

당신이 오실지라도

첨부파일 loved.mp3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찬송: May*



믿는 이들의 이방동족에 대한 태도


주님누림 2009-08-31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7495.html

<2009 창밖>


 

사도바울은 이방 믿는 이들의 사도였습니다.

복음전파의 방향이 이방땅에 향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명하심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 못하여 할 수 없이 그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하는 직업적인 삯군이 아니라  

영적 아비요 낳은 자신의 아이를 돌보는 어미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 이방땅에서의 복음 전파의 그 여정동안 그를 박해한 것은

이방인들보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에 대한 유대교도들의 탄압이 너무나 컸기에 생각하기

나름으론 동족인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생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믿는 이들에 쓴 서신에서 그러나 바울은 동족에 대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토로하고 있음을 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동족이 구원을 얻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이 동족에게 미치길 갈망할지라도

구원을 거절한 동족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이방땅에 향한 긍휼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주권하에 달린 것을 알므로

그의 동족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동족에 대해서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과

어떤 관게를 갖는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구원받기전 사람은 이땅에서 하나의 소속된 신분을 갖습니다.

땅에 속한 각각의 신분과 출생 그리고 국적을  가지고 있으나

구원은 땅에 속한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시민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날 때 믿는 이들은 하늘에 속한 나라의 시민권을 얻게 되었으니

그러므로 한면 땅에 속한 나라의 국민이며

하늘에 속한 왕국의 시민인 이중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법적이기도 하며 또한 실재적인 영역에서 그러합니다.

 

한 사람이 구원받아 땅에 속한 영역에서

하늘에 속한 영역으로 이주를 한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러나 땅에 속한 신분에서 완전히 졸업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실재적으로도 그럴 뿐 아니라 심정적인 상황도 그런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뒤에 사람은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며

이것은 마땅히 사람으로서 어떠해야할 많은 덕목들이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대책없이 무조건적인 것이 아닌 분별있는 사랑으로  

그러나  인간적인 사람으로서 그리고 회복에서 말하는 가장 높은 미덕을 갖춘 사람으로서

하나님 사람의 어떠함이 나타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밖의 모양이나 율법적인 요구가 아닌 자연스런 생명율의 나타남입니다.

 

이것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동족들과 동료된  거듭난 않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동일한 합당한 사람으로 대해야함에도

실상은

같은 한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한국인들에게 많은 비난과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자신의 교세의 확장과 기독교의 교리의 전파를 위해 목을 멘 사람들로서

자신들의 하늘에 속한 왕국을 위하는 사람들로서

동족인 한민족에 대한 태도는 심정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으니

너희 이방인들은 죽던지 살던지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일명 오해와 딴지걸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편파적인 매도일 수도 있으나

한면 이것이 오늘날의 정직한 동시대인들의 민심인 것도 사실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한다면

모든 사람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뿐 아니라

가까운 혈육과 민족에 대해 특별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또한 특별한 동족애를 갖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아니

그렇지 않았다면

 

주님당시 그리고 사도당시

유대교가 하나의 종교를 위한 종교였고

후에

카톨릭이 카톨릭 자체를 위한 종교였듯이

오늘날 아무튼 총체적으로

기독교도 기독교 자체를 위한 종교였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종교란 무엇입니까

 

종교의 특징은 종교 그 자체를 위하며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며그 종교의 교리를 거치는 사람들을 잔혹히 제거하며

자기의 양들을 아끼지 않고

목적이 되어야할 사람은 수단이 되어버리고

종교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스스로의 배를 불리고

자신이 번성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됩니다.

 

만약 주님을 믿는 것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위한 활동이 되었다면

위와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되게 구원받은 믿는 이라면 믿음의 선조들이 그랬듯

가족과 더 나아가 이웃과 그리고 동족에 대한 그리고 사람 자체에 대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있음도 또한 당연한 것입니다. 

 



교회의 간증의 다른 방면


주님누림 2009-08-2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7438.html
< 한강 일출  2009>

 

교회는 믿는 이들에게는 어떤 곳이며 또한

대외적으로는 어떤 간증을 지닌 곳인가하는 문제를 새삼 거론해 봅니다. 

 

교회는 가정이고 사랑이 충만한 곳이며 용서와 화해가 서로를 감싸는 곳이며

죄인들을 위한 도피성입니다.

구약에서는  일부러 고의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살인을 한 경우라도  도피성이 있어 그 안에 피하여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세상의 법으로는 가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신약에서도 가한 일일지 모릅니다.(과연 용인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이것이 교회의 한  방면이라면,

교회는 의와 공의를 기초로한 주의 보좌(시 84편)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또한 온 세상의 비치는 빛과 소금으로서의 간증이어야합니다.

 

외적으로 교회가 간증하는 의는 주님이 말씀하신바

바리새인들의 스스로에 대한 엄격한 것을 훨씬 넘어선

의로운 행실의 간증을 요구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늠하는 최고의 법정은 양심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믿는 이들은 구원받을 때 이 양심의 기능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고

주님께 돌이킴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선물로 받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양심은 점점 더 민감하게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양심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밖에서 누가 판단할 수도 없는

사람개개인마다 제 안에 갖고 있는 의의 심판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의의 심판대 앞에서 제 스스로 변호하기도 하고

스스로 판단받기도하고 스스로 인정을  하기도 합니다.

 

만약 믿는 이들이 이것에 스스로를 엄격하게 비추고

제한하고 정결하게 한다면 시간이 갈수록

더 빛나게 되는 등불처럼

온 땅을 비추며 칭송을 받으며 간증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의 맹점은 밖에서 선을 그어주지 않기 때문에

즉 외적으로 명문화된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 양심이 어떤 가에 따라 평강이 기준이 틀려진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만약 양심이 선하지 않고 양심을 버렸다면 전혀 가책을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양심이 더럽다면 어떤 행실이 더럽다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그 기능을 상실할 수도 있습니다.

 

이외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고의로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쳐놓고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는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을 길에 내 몰면서도

전혀 두려움의 느낌이 없는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거짓을 말하면서도

 참말을 하는 듯 가장하는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또한 양심을 무디게 한 그리스도인들이 몇몇 이상 모여 파워를 형성하고

교회의 유익이라는 대의명분속에

교회라는 도피성을 그들의 피난처로 삼는다면 더욱 길이 없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켜야할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다른 사람이 자신들을 받는 것에 적용하고

자신에 대해 적용할 엄격함인 자신의  죄와 허물의 어떠함을 직시하고 

제대로 돌이키고 고침받고 씻김받아야함에도

단지 그위에 살짝 그리스도의 보혈로 뎦어버리고 나서 끝났다 다 용서받았다고 해 버린다면

더 더욱 교회는 길이 없게 됩니다.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만한 사람이 교회안에 없다는 것도 비참한 일이며

두세사람의 증인으로도 장로를 고소할 수 없으며

만약 고소하는 사람이 있다하여도 너나 잘하세요~ 하고 말해버린다면

대부분의 입은 그날 주님앞에서 한 두사람씩 꼬리를 감췄던 그 광경처럼

하나씩 다물어 질 수 밖에 없다면

개인으로서는 맞는 말씀이지만

빛과 소금으로서의 교회의 간증의 다른 방면은 잃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