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의 뛰어난 점이 무엇인가고 묻는다면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결정적인 그리고 분명한 이상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것은 회복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것이며
많은 믿는 이들이 의식하건 하지 못하건
그 목적을 향해 흘러가도록 주님이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회복의 전용 소유물이 아니다.
만약 회복이 실재적인 교회생활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거처인 새 에루살렘의 완결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의 축소된 모형을 보일 수 있다면
그건 영광스러운 간증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좀 더 많은 시간이 지나간 뒤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바톤이 넘겨질 수도 있는 문제이다.
이형제님이 경고하신 말씀은 다시 기억해 보면
회복이 우리라고 말하지 말라
주님은 다른 무리를 또 일으키실 수 있다고...
회복은 우리의 회복이 아니라
주님의 회복이다.
우리가 주님과 어떻게 합력하는 가에 따라
이 회복의 한부분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을지도 또는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무엇을 보았는가는 참으로 중대한 일이다.
그무엇인가를 본다는 것도 쉽지 않으며
보되 그 길로 곧바로 행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회복은 두 뛰어난 자질을 가진 형제님들의
하나님의 경륜의 이상을 봄과 본바에 따른 올바른 행보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두분의 사역은 아주 뛰어난 매개체인
출판물로 이루어졌다는 것도 중요하다.
니 형제님의 많은 멧시지들이 문서화되지 못하고 그냥 사라졌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나 ...남아있는 많은 문서화된 멧시지 만으로도
늘 주님앞에 새로이 서는 새신자들에게는
요셉의 곡식창고처럼 계속 퍼날라도 충분한 양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남아있는 문서는 그 후에 어떤 사람들이 회복을 변질시킨다면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그런 야심을 사전에 방지하는 예방책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정말 큰 회복의 장점은
교회생활의 그 실행에 있어
니골라당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형제님은 주님 품에 가시기 전에 회복의 사역을
한 사람의 어깨위에 남겨놓지 않으셨다.
한 무리의 동역자 형제님들이 합력하여서
건축된 방식으로 사역하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몸된 교회의 중간계급으로 세우신 것이 아니다.
실재적인 교회생활에는 사도와 선지자와 그리고 교사,
또한 실재적 영적 아비인 장로들 같은
많은 관절과 같은 지체들이 있다.
그들의 몸된 교회안에서 자신들의 맡은 바 사역과 봉사를 충실히 수행한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들이 스스로 니골라당으로 나서기로 작정한다면
먼저 하는 일은 성도들의 말하는 입을 다물게 하고
그것이 보이는 것이던 보이지 않던
우상을 섬기게 하는 종교적 행위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골라당을 훼파하길 바란다면
그 첫번째 실재적인 길은 모든 사람이 집회에서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교회의 모임중에 말하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고 쉬운 일이 아니다.
영안에서 영으로 말미암아 영의 감동으로 주님 자신을 말해내는 것은
세상의 모임에서 좀 생각을 추스려 말해내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든 구원받은 사람들은 안에 주님의 영으로 말할 수 있다.
아니 주님의 영으로 말하는 것을 훈련해야만 한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주님이 안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합당하게 말하는 것이야 말로
모든 사람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영적 예배이다.
이것이 오늘날 회복이 점점 더
그 실재를 회복하고 있는 가장 귀한 부분이다.
그것은 회복이 추구하는 바
그 몸의 건축의 아주 실재적인 간증이기 때문이다.
회복안의 전시간 훈련에서 아주 중요한 훈련의 하나로 여기는
(제가 직접 참여를 안해서 주관적 증거를 댈 수는 없지만) 것의 하나가
진리추구와 함께 성격의 훈련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에 열심히 외웠던 기억으로
진실함 근면함 순수함 엄격함 관대함 섬세함 음...
그리고 이런 서른가지나 되는데 감자기 더 생각이 안남....
성격은 일종의 바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차에 연료를 가득 실어 얼마든지 갈 힘은 있는데
막상 앞으로 가려면 튼튼하게 잘 굴러가는 바퀴가 제대로 잘 장착이 되어 있지 않다면
운전자가 운전대를 돌리는 대로 잘 굴러갈 수 없겠지요
한면
성격은 얼마든지 훈련이 가능하다고 한 것은
많은 교육학자들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타고나지 않은 성격이 자신의 것이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성격은 일종의 습관과도 같아서 그 습관이 그의 어떠함
심지어 인격의 조성에 있어 기여를 할 수도 있고 기여를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성격은 많은 시간은 허송세월하게 만들기도 하고
시간을 귀하고 알차게 보내게 하기도 함으로 그 열매를 결정짓기에
아주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함에도 그것은 기질과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성격이 그러하면 자질은 또 무엇인가,
자질은 사람의 됨됨이 그 자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끔 ..주님이 왜 그러셨을까하고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한 이스라엘 부자청년을 보고 주님이 아주 좋아하여
이는 참 이스라엘사람이로다 그 안에 간사한 것이 없다 하셨고
즉시 그 청년더러 자신을 따르도록 부르셨던 일입니다.
주님은 그 부자청년의 자질을 보셨던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안에 간사한 것이 없는 옥토와 같은 고운 인성의 그를 보자
좋은 흙을 발견한 토기장이처럼 반가우셨을 것이라는....
(그러나 그는 부자인고로 근심하여 돌아갔습니다. 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이므로...)
사람의 자질 그 됨됨이는 그런데 달라질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아주 드문 경우에 개과천선 또는
마치 사람이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말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사람의 자질 혼 본질이 달라졌다기 보다는
그 사람안에 눌려져 있던 양심이나 선함이 보다 우위를 점유하게 되는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것이 잠시동안 유지되다가 마치 돼지가 다시 오물더미에서 뒹굴듯
자신의 본질대로 편하게 사는 쪽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타락한 죄의 본성에 절망한 선지자는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에레미야서 13장)고 토로하였고
어떤 민족의 대다수의 성정에 대해 사도바울은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디도서 1장)라고 격한 분을 내기도 하였습니다.
(크레테섬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사도의 규정에 대해 어떻게 반발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사람인 동족에게 느끼는 절망감은 모든 판단기준이 지극히 주관적인 잣대이고
이 주관적인 잣대마저도 깊이 사고한 인식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자신에게 이익인가 불이익인가하는 지극히 표면적이고 얕은 잣대로
니편 내편을 가른다는 것입니다.(이것은 일반적인 성정이나 특히 이런 부분이 강하게 나타나는 기질을 갖고 있다고 봄)
이런 기질의 극단적인 나타남은 나한테 잘하면 착한 놈
나한테 잘하지 않으면 나쁜 놈이렇게 아주 단순한 사고구조로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첫째왕이었던 사울은 이런 면에서
객관적인 판단의 기준을 상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것을 행해야 할지 어떤 것을 금해야할지에 대한 겸허함을 잃고
자신에게 유익인가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의 명을 어기는 중대한 잘못에다
다윗이 아무 잘못이 없고 결코 자신을 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윗에 대한 미움과 적대감을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스스로 수치스런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멸망의 길을 자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질은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의 기준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는 타락한 성정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타락한 본성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고운 인성과 좋은 자질을 가진 뛰어난 인격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타락한 죄의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스스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한계안에 있고
스스로 이 본성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안에 있는 타락한 본성을 거슬러 하늘에 속한 본성으로 사는 것은
어떤 협의나 동의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마치 더러운 벌레를 보듯
그렇게 철저히 객관적인 판단의 눈으로 정확히 보지 않으면
내적인 성령의 역사에 합력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의 터위의 간증으로서의 지방의 터라는 것이
일반 기독교의 종파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개념이라면
그건 일종의 '지방의 터'라는
즉 지방입장의 터를 주장하는 지방종파라는 비평을 받아도
우린 할 말이 없게 됩니다.
한 지방의 한 교회라는 입장이
지극히 포괄적인 것이 될 때
즉 한 지방에 살고 있는 거듭난 믿는 이들은
실질적인 인식의 범주에서
그 지방의 교회의 멤버라는 인식일때
이것은 강한 간증이 됩니다.
오늘날 회복에서 기치로 삼는 교회의 하나의 입장과
교파와의 차잇점이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는 이들 사이의 참된 하나의 간증을 귀히 여기고
그 간증안에 머물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회복안의 높은 진리와 해석된 성경의 높은 수준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의 간증 이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거듭나 그분의 참된 자녀들이 된
많은 믿는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즉
지상의 어떤 곳에도 말씀이 있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있으며
주님을 이런 저런 방면으로 누림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분열을 싫어하심을 많은 믿는 이들이
간과하고 있습니다.
믿는 이로서의 개인은 문제가 없으나
교회로서의 주님의 몸의 간증으로는
절대적으로 한영 한생명 한 몸의 간증이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것에 대해 일부러 눈을 질끈감고
분열된 채로 장성한 어떤 교파
<옥합자매님사진>
<옥합자매님 사진>
이땅에서 통용되는 논리로 볼 때 어떤 사람도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날 수 없다.
두 사람이 있으면 서로 의견과 뜻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반면에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과 관심사와 가치와 선호와 이익을 달리하는 것으로 인해
옳고 그른 시시비비를 따지는 일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대의 명분에 있어 그 시대의 최고의 가치를 따라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될 것이다.
이를테면...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에 어느 정도 협조하는 것이
외적으로도 또는 내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친일파란 수치스런 주홍글씨를 매달고 정죄받은 시기가 되리라고
일제강점기시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옳고 그름은 그 시대의 가치를 따를 수 밖에 없으며
그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세대는 과연 그 영향권을 벗어날 수 있을까?
사도바울을 보라
그는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을 마치 철천지 원수처럼 대하였고
그들의 목숨을 뺏는 일이 외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 철썩같이 믿었다.
일제강점기라면 일본에 충성하지 않은 독립군이나 독립투사들에 대해
이를 부득부득가는 일제하의 직업형사처럼 말이다.
그는 자기가 믿고 신뢰하는 옳다는 하는 일에 대해 철저하였다.
사람의 한정된 시야와 시대적인 가치에 제한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는 자기가 믿는 바에
목숨이라도 내놀만한 그릇이었다.
그의 그런 어떠함이 주님에 의해 긍휼을 입고 택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인가.
그러므로 감히...이런 선례를 힘입어
만약 당신이 자신이 믿는 바에 철저하다면 죽기까지 충성하는 것이
삶을 최대한도로 치열하게 사는 것이리라.
차라리 자신이 믿는 바에 철저히 충성한다면 감히 당신을 아무도 정죄하지 못할 것이다.
유한한 삶을 사는 사람이 그 무슨 전지전능한 잣대로 당신을 판단하겠는가.
그건 절대자의 몫이고 절대자의 영역이다.
그러나 당신의 제한과 눈멈과는 달리
정치적인 제스추어나 계산된 이기심을 발휘하지 말라
그렇다면 절대로 구제될 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는 어떤 싯점에서 이런 자기의 소신이나 시대적인 가치관이나 이념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도바울이 유대교의 유전에서 그것의 실재인 그리고 시대의 전환인
육신된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서 살고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리고 승천하여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해 하늘에서의 사역을 수행하였던 것을
마침내 보게되어
일생 일대의 전환점을 발견하게 되었던 그런 긍휼을 입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이 나에게 발생되지 못해
내 눈이 평생 그냥 감긴채로 살게 된다하여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분명 치열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삶을 산다면 어느 순간에
정말 절대적으로 유한한 짦은 삶을 사는 인생의 허무함과 그 한계를 뼛속깊이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의 삶에 그렇게 연연하지 않게 되는 그런 경지에 이르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 때서야 우리는 이땅에서 얼마큼 삶의 시간이 연장되는가에 대해
초월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따지지 않을 여유가 생길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선악 지식의 영역을 벗어나
생명의 영역안으로 옮기는 실재를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
이땅에서 그 무엇에도 연연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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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시어머니의 병실에서
티비에서 비보이들의 춤대결을 본 적이 있습니다
( 참 저 정도 추려면 얼마나 연습해야할까.)
또 예전에 어떤 아이가 하루에 피아노를 대여섯시간씩 연습하는 것을 보고
만약 공부를 저렇게 한다면 ??이라는 가정을
주변에서 세우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피아노 보다는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했으면 하는 바람...
하물며 춤연습하며 보내는 시간은
허랑방탕한 시간들로 여겨질지 모릅니다.
아직도 이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공부가 잘 맞는 사람의 기질이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공부하라고 하면 전혀 눈이 떠지지 않지만,
음악에 맞춰 온 몸으로 열정을 표현하는 훈련에는 새벽부터 눈이 떠져
팽이 돌아가듯 침대에서 튕겨져 나올만큼 몸이 가벼운 걸 어떻하겠는지요.
만약 그에게 억지로 책상앞에 앉혀놓고
잘 나가는 판사나 검사를 시킬려고 공부를 시킨다면
그는 평생 패배의식과 심지어는 무능한 자신으로 인한
죄의식에 시달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무 쓸모없는 살가치 없는 놈이야..라고)
..............................................
교회안에서 우리가 존중하는 은사의 문제는 어떠한가요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성경을 읽어야하지만,
말씀을 깨닫는 일이 좀은 둔하며
그 일에 깊이 감흥을 못느끼는 한계를 가진 어떤 이는
말씀추구에 별다른 느낌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은 그에게 맞는 일은 차라리 집회소안의 집기를 정리하거나
차를 몰거나 이런 저런
몸으로 하는 봉사가 더 맞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 형제로서 그는 웅지가 있기에 교회안에서 인정받고자 하는
그리고 귀하게 씌임받는 형제가 되고 싶을지 모릅니다.
만약 귀하게 쓰임받는 것이 말씀을 쪼개거나
말씀을 전파하거나 말씀을 공급하는 봉사라는 관념이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흐르면서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그는 딜렘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자신의 기질과 능력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단지 말씀을 잘 쪼개는 형제로 인정받고 싶어
이런 저런 모양새를 내는 지체가 있었는데
만약 운전을 하는 봉사나 청소를 하는 봉사의 가치를
은사의 나타남으로 귀히 여기는 분위기였다면
그는 자신의 기질에 맞는 합당한 봉사를 찾았을 것이고
아주 누림있는. 정말로 행복한 지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체의 누림은 모든 다른 지체들의 누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체들에게 말씀을 공급하는 지체가 되려는 웅지를 가졌기에
나름 진리추구를 열심히 하려하지만
그것은 마치 적성에 안맞는 공부를 하는 것처럼 힘겨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질상의 기호간의 차이와
은사와 받은 능력의 차이등등모두는
분명 각각 존중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각각 그 몸으로 행한 어떠함으로 상을 얻고 분깃을 얻거나,
혹은 손실을 당하거나 누림을 잃게되는 천년왕국에서의 상벌은
이 땅에서의 그의 행위의 결실인 것만은 분명하나
그러나 기질성의차이나 기질적 우열?의 잣대로
자신에게 맞지 않은 열매를 얻으려 하나 좌절을 당하고
그런 것으로 인해 자신의 부족함을 주님께 자백하고
해결을 받으려 한다면
과연 일이 풀릴까요?
우리가 충분히 알거니와
해야한다는 의무감이나 요구가 아무리 강해도
기쁨과 즐거움과 그것자체가 주는 보상과
어떤 의미로든 쾌락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면
열매를 얻게되는 일이 저절로 발생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
좋은 부모는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잣대로
아이들을 억지로 어떤 동일한 목표와 수준에 도달하라고 요구하며
그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녀를 도태?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기질과 능력과 취향과 소질을 살피고 그에 걸맞는 일을 찾아주는 것이듯,
우리의 하늘에 속한 아버지도 역시 그러한 분일 것입니다.
그리고 몸의 머리인 주님은
몸안에서 각각 위치에 따른 각 지체의 기능을 주시는 분으로
은사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각 지체의 기능은 각각 존중을 받으며
귀히 여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인간사는
그 문명이나 시대적인 상황과는 관계없이
비슷한 행태를 갖고 있는 거 같습니다.
서로 서로 조금씩 필요한 만큼만 나눠쓰면 좋겠는데
가진 자는 더 가지려 하고 욕심은 끝이 없어
강한 자는 약한 쪽을 침략하고 약탈하면서
모든 것을 손아귀에 움켜지려 싸움이 끊이질 않으니 말입니다.
주님이 이땅에 성육신으로 오실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밑에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바라는 바와 관심사는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제자들은 메시야인 주님에게
이스라엘을 회복하는 때가 이때입니까?하고 묻습니다.
택한 백성이 압제하에 시달리고 있으니
주님이 이스라엘을 당연 해방시키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관심하고 그가 세우려는 왕국은
땅에서 일어나는 흥망성쇠와도 무관하며
또 땅에 속한 소유에 관계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시나 또는 이 물질적인 나라를 하나님께 봉헌하느니
하나님께 속하였느니 하는 멋대로의 결정이나
대통령이 그리스도인이니 모든 무지한 백성은
모두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 발상도
도무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그저 자기 맘대로 자기 좋은 대로 하나님을 끌어다 붙여
자신의 종교적 권세를 취하려는 구실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주장들은 자신들이 다 지도계층에 붙어있고
지배층에 속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망상에서나온 합리화일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무지한 발상이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주권은 하나님의 안배이다 그러니 위에 있는 권세에 굴복하라~는 말씀을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으로 문자적으로
들이대어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의의도 없는 무조건적인 굴복이어야 한다면
이나라의 대통령이 만약 승려이고 그래서 모든 국민은 다 불자가 되어야한다고
법을 만들어 통과시킨다면
그 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그 권세에 굴복하여
불자가 되어야한다는 공식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당신이 그리고 우리가 이 나라의 법에 굴복하여야하겠습니까
아니면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의 도리를 지켜 이 나라의 권세에 굴복하지 말아야하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권세아래 굴복하여야한다는 말씀대로 행하여
불자가 되라는 법을 그대로 받아들여 불교신자가 되었다면
주님이 잘 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 무지하고 어리섞은 사람아 ,,라고 책망하시겠습니까.
이 나라의 법과 주님의 관계에서
주님이 단순히 이 나라의 권세아래 있는 것으로 생각한
베드로가 실패한 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 선생은 세를 내지 않느냐?는 말에 그럼 내고 말고...라고 정색을 하면서 .....호언을 했던 베드로.
이에 대해 주님은 자신과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땅에 속한 백성이 아니니 세을 낼 필요가 없다는 말씀으로 명쾌한 답을 주시지만,
이땅의 권세를 전복하거나 구데타를 일으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주님은 그 당시에 그런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고 있었습니다)
자신과 베드로를위해 세를 내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세를 바치는 문제에 대해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공세를 바칠 자에게 공세를 바치라고 권면하고 있는데 이는 어떤 사람이
세금을 떼어먹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의 믿음의 위치를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엇습니다.
그러므로 세를 내느냐 안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마음과 양심의 법에 따라서 결정할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주님 당시에 종교적 지도자들과 정치적 지도자들은
로마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로마군병에 의해 잡히셨을 때도
권세있는 자 앞에 섰을 때도
그들이 부리는 권세에 대해 대항하지 않으셨습니다.
땅의 권세를 통해
주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시는 일이 이뤄져야 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밖으로 보기에 그 권세앞에 힘이 없어 붙잡힘을 당한듯 보이셨으나
주님은 이 땅의 모든 권세위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주님의 이 땅에 계셨을때 대처하신 모든 상황은
오늘날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의 행사와 뜻과 일을 아는 믿는 이들로서
이 땅의 권세와 이 나라의 권세를 잡은 자들에 대해서
어떤 마음과 태도와 관점과 원칙을 가져야할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창밖 2009 8>
얼마전 집앞에서 일어났던 일.
밖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떤 형광색을 입은 청년이 마구 뛰어오더니
우리 집 옆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집앞에 차를 주차하기 위해 차를 백하는 중에
저쪽에서 경찰차가 마구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니......어....그 속도로 달려오면 우리 차 옆구리를 그냥 쳐받을 기세였다.
어 하는 사아에 우리 앞에서 바로 끽~하고 차를 세우던 경찰 아저씨 내려 묻는다.
뛰어가던 사람 어디로 갔는지 봤어요? 우린 주차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경찰은 뛰어내려갔다 오더니 차를 조금빼놓고 차안에 앉아 있는다.
아마 잠복근무이다.
아들이 말한다. 그 애 여기 사는 아이야 여러번 봤어..맞아...
그렇담, 그 아이는 사고치고?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는 얘기이다.
...............
아이는 일단 집으로 튀고 본 것이다.
절대로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약 우리 아이들이 사고를 치고 들어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아났나 마구 야단을 칠 것인가? 그리고
너는 잘못했으니 경찰서로 가자하고 마구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도피하도록 도와줄 것인가?
이런 밖의 결정이전에....무슨 일이 일어났던 어떤 잘못을 했던,
아이를 따뜻하게 품어주었을 것이다.
적어도 가정이란 아니 모든 아이에 대한 부모의 마음은
절대적으로 따뜻한 품이어야한다.
모든 사람이 그 아이를 손가락질할 지언정......................................
마구마구 혼낼 수도 있다.
그러나 평소에 기본적으로 야단을 치던 벌을 주던
사랑으로 인한 것임을 안다면, 결코 아이가 잘못될리는 없겠지만,
살다 엄청난 큰 실수를 했다해도........................
모든 사람이 나를 받아주고 감싸줄 한 곳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이 이 사회가 이렇게 삭막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도 역시 그러한 곳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사람을 긍휼히 여김은 밖으로 나타난 표현이자 마음의 행위이다.
그보다 더 깊고 근본적인것은 불쌍히 여김이다.
주님은 정말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다.
과부가 그 외아들을 잃어 절망하여 있을 때
어떤 영적인 유익이나 그분의 사역의 움직임과는 관계없이
그저 그 아들을 살려서 돌려주셨던 것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말로 많은 진리를 칼로 쪼개듯 명쾌하게 논하는 것을 좋아할는지 모른다.
회복은 그런 면에서 최첨단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나 양심적으로 말한다면 사랑이라는 면에서 과연 최첨단의 길을 걷고 있는가
사실 회복의 높은 진리와 실행의 그 높은 표준이
우리 자신에 대해 엄격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또한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자신이 그 잣대에 맞게 힘을 다해 달리고 있고 절대적이라고 여긴다면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역시 그런 잣대로 평가하고 자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잣대에 자신이 미치지 못함으로
코를 빠트리고 죄송한 모습을 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그다지 쉽지 않다
이 현대의 경쟁적인 사회에서 최선을 다해 일을 하던 공부를 하던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말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조차 단순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저 밥만 먹고 주님을 찬양하고 함께 동거하고 단순하게 살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적인 생활이다.
거기다 사람마다 각각 다른 문제들을 갖고 있다
기질적인 문제도 각각 다르다.
또는 타고난 체력적인 에너지도 다르다.
게다가 환경적인 상황도 각각 다르다.
그런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 모든 것안에 들어가보는 것이 쉽지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 사람이라고 하는
가장 합당한 상태에 도달한다면
주님이 이 땅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사람에 대해 가지셨던 무한한 불쌍히 여김의
언저리에라도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많은 자유
행동의 자유
발언의 자유
믿음의 자유 등등
사람으로서 또는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누리는 자유가
비록 여전히 불완전하더라도
이 나라에서 누리는 자유는 결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를 위해 매 시대 매 상황마다
부적절하거나 부당하거나 또는 믿음과 올바른 가치에 반대될 때에
그것에 굴하거나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할 말을 하고
해야할 행동을 하고
그것에 합류하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위에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왔습니다.
외면적으로 볼 때에는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외면적인 자유의 틀은 잡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기왕에 얻은 자유의 소중함을 아는 것일까요?
조금 먹구살만하다 보니 그것에 조금이라도 위협된다면
자유로움과 존중을 헌신짝처럼 내어버리는 것을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에 여전히 더 많이 집착을 하고
지위와 명예와 사람들의 인정같은 외면적인 것들을 더 많이 추구합니다.
믿음의 문제에 있어서도 기독교는 이미 거대한 조직을 형성하고 있고
각각의 작은 왕국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킹덤위에서 군림한 소위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얻은 부와 명예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심지어는 말씀조차도 변개하여 사용합니다.
마치 정치세력처럼 자기들만의 아성을 쌓아서
그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니
세상사람들이 조금은 말을 하고 싶은 대로 좀 할 수 있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을지 모릅니다.
이왕 어떤 지배자들이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여전히 쥐고 있는 한 ,
평민들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었다가 다시 옥죄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먹을 것과 취할 것들에 의해 종노릇할 것이며
죽기를 두려워하고 많은 염려로 얽매일 것이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변이 온통 실망스런 일 투성이이고
어디서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는 진작에 기득권자들의 이기심으로 인해
주변 강대국에 소리없이 먹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한 나라로서 주권을 갖고 있는 것은
누군가 희생을 하였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기독교라는 거대세력에 대해
만약 마틴루터가 입을 다물었다면..그리고
최근에 와서 워치만 니가
그리고 윗트니스 리가 주님에 의해 밀어내심을 받을 때
움직이지 않았다면.....
기독교라는 아성에 처음부터 질려버린 저 같은 사람들은
아예 하나님으로 부터 저만큼 멀리 떨어져서
도대체 절대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절대로
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분들이 희생하지 않았다면................
.
<옥합자매님사진 2009 7>
50년마다 한번씩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포된다는 희년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도 50년동안 산 후에 비로서 많은 것들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워졌으며
또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안되는 싯점이라는 것도 새삼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너무나 지혜로우시므로 원래의 모든 지파 모든 집에 땅을 골고루 분배하셨죠
그리고 그것은 영영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 되게 하셨습니다.
비록 땅과 집과 그리고 자기자신까지도 팔아버리는 즉... 완전 파산신고를 한다 할지라도
적어도 50년후에는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게을러서 그랬건 속아서 빼았겼건
또는 실패와 실수를 해서 잃었다 하더라도 영영 낙담할 것이 없으며
욕심을 내어 남의 것을 남의 땅을 빼앗았건 정당히 지불해 샀건
재산을 힘껏 불려놓는다 할지라도
50년후에는 다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에
그렇게 좋아할 것도 후대?를 위해 욕심낼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그림자이며 땅에 속한 것일 뿐입니다.
참된 희년은 원래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안에서 마땅히 분깃으로 취해야할 것을 잃어 버리고
우리 자신 까지도 죄와 육체의 노예가운데 팔아넘겨버린 비참한상태에 있다가
원래 우리의 분깃이던 하나님 자신과 그분께 속한 모든 좋을 것을 다시 찾은 것에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릴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죄와 그로인한 사망과 그 사망에의 두려움에서 놓여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우리의 참된 누림이신 그리스도의 어떠함과
그분 자신을 우리의 분깃으로 주셨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재생활에 들어갈 때 아직 우리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미 이뤄진 사실은 저편에 있느나 체험해서 헤쳐나가야 할 강은 가로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상은 예약되어 있으나 그 상을 얻기 위해서 우린 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실재를 누리지 못하면 온전한 희년을 누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도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면서 누릴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용의 문제에 들어가서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봅니다.
.
우리 또는 당신이 얷매였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언제든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건강이던 남편이던 자녀이던 또는 지향하는그 무엇이던...000)
어떤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사람에 대한 또는 어떤 신조에 대한 어떤 원칙들에 대한)
희년은 문자그대로 희년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원한다는 말은 여전히 희년의 실재에 들어가 있지 않다는 뜻이다.
(어떤 최악의 경우에도 우린 기뻐할 충분한 것을 이미 가졌다)
어떤 성취한 일들에 대해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늘 새로운 노정을 향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주님은 보여주신다)
이번 주 말씀을 여는 형제님의 교통대로 이즘은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그런 시기인 듯 싶습니다.
근데 잠깐.
오늘 말씀을 여는 형제님은 저의 남편형제였습니다.....
(얼마전의 상황이었음)
그의 충실한 동반자로서
오늘의 집회의 오픈 테잎을 잘라내는 교통에 대해 솔직한 느낌은...
....오늘날 주의 회복에 새삼 웬 목사??님의 설교??..........
물론 괜찮은 날도 있지만 오늘은 확실히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내된 자매는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라는 노래를 반복해 부름으로
그를 격려하는 것이 마땅할까요?
아니면 무슨 말을 해도 원수삼지 않는?
유일하게 유리한 위치에서
직언으로 솔직한 교통을 하는 것이 유익한 것일까요?
어떤 이는 자매로서 머리된 남편에게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위치에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일평생 오직 머리라는 권세아래의
덮임을 당하는 위치밖에 없다면 말입니다.
아내된 자매는 분명 어떤 면에서는 남편의 머리됨의 아래에 있는
덮이는 위치에 있어야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몸안의 지체로서 느낌을 교통할 위치도 갖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형제가 피치못하게 직언을 말한다면
그는 그 형제의 말을 절대로 평생동안 잊지못하고
마음에 남겨둘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약간은 씁쓸하고 좋지 못한 기억으로.
반대로
그러나 아내가 말한다면,
평생동안 잊지 않고 마음에 새기기는 커녕,
잊고 경홀히 여김을 당하는 것이 외려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하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습니다.
경우에 따라선 약발이 먹히는 수도 있더군요.
세상에서도 아내의 말을 잘 들으면 잘되지 않는 일이 없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성경에도 "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언 12:15절>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안에서 체험이 많은 어떤 형제님이 교통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성경에 보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는데 .
실은 많은 경우
남편은 외려 아내에게 순종하는 일이 많고 (잘 나가는 집은.....?)
아내는 외려 남편을 사랑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참 신기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고
아내는 평생 사랑받을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또 한참을 기다려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에서 점점 더 멀어짐으로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여기다 알게 된 것은
불행히도 남편이란 사람이 아직 하나님 사람으로 완성되지 못하여
마땅히 남편으로서 자기 몸같이 아내를 사랑하기엔 역부족이란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에고..내가 사랑하고 말지... 차라리 이렇게 풀고 말지..하고 말입니다.
(세상 여자들이 철없는 남편을 향해 아들하나 더 키우는 셈치지..하고 말하듯 말입니다)
반대로 남편은 아내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순종하고
자기 말대로 뭐든 옛썰~~ 하고 따라주길 바라지만
어떤 것은 부당하다 반기들고
어떤 것은 그건 잘못된 것이다 반박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게다가 실생활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생기고 나면
아예 백기를 드는 일까지 벌어지는 경우도 있을지 모릅니다. ㅋㅋ
그래서 내 맘이 편하고 가정이 평안하려면 아내에게 차라리 순종하며
그의 맘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길이란 것을 발견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
무릇...우리보다 젊은 세대는 이 점을 잘 알아두었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제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거겠죠...??^^)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라는 답은
아주 원초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의 기준은 너무나도 천차만별이고
그리고 그 수많은 기준은 다분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길거리에 포장판대기를 깔고 자는 노숙자도
어쩌다 무료 급식소에서 얻어먹은 한끼 식사에 배불러
양지바른 곳에 누워 달콤한 잠을 취할 때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행복한 순간일 것입니다.
그가 오히려 딱하게 여기는 것은
이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위해
애쓰고 경주하며
어렵고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어떤 범죄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취할 수만 있다면
그로인해 자신이 만족하기만 하다면
그리고 자신만 행복하기만 하면
그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이 괴롭든 말든 고통스럽던 말던 어떤 희생을 당하던
전혀 눈하나 깜짝안하는 잔인성을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추구하는 목적이 단지 자신의 행복과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닌
보다 고상한 것
보다 이루기 어려운 것
보다 타인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삶에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가치가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것에 행복감을 느끼냐 하는 것에 따라
인생의 가치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표가 훌륭하고 행복한 것일 뿐 아니라
출발과 과정또한 행복한가 아닌가 역시
중요한 일입니다.
.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너무나 가치있는 행복추구입니다.
그러나
이 싯점에서 먼저 나는 아니 우리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인가를 반문해 봅니다.
만약
자신은 전혀 행복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도 저급한 것이고
그저
무조건 희생하며
자기의 마음의 느낌은 부인되어야 하며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
자신을 고려하는 것은 무조건 없어져야한다는 전제조건을 다는 순간
성경에서 말하는
그것은 마귀적이고 귀신적인 금욕주의가 되는 것이며
너무도 힘든 고뇌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억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귀한 목적을 추구하고 있더라도
행복함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무자비한 것이며
또한 그 목적을 이룰 원동력이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근본적으로 행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전제조건은
절대적으로 충족되어야 함을 봅니다.
만약 교사를 직업으로 한 이가
아무리 교사라는 직업이 철밥통이고 좋은 조건을 가진 직장이라도
가르치는 것이 영 자신에게 맞지 않고
그로 인해 행복하지않다고 한다면
그의 삶은 갈수록 비참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 목적인 좋은 교사가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그저 무슨무슨 대전에 입상을 해서
경력을 인정을 받고 그림값을 높게 쳐 받는다고 해도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그에게 행복이 아니라면
그는 결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것이고
원래의 목적인 좋은 화가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어떤 그리스도인이 있어
그의 목적이 이 땅에서 합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서
변화받고 성숙됨으로
그날 주님이 다시올 때
그와 함께 영광스런 보좌에 앉을 것을 기대함으로
이땅에서 고난을 받기로 작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이 땅에서 한 그리스도인인 것만으로 행복하지 않다면
즉
주님과 함께하고 그분을 누리고
그분의 보양과 돌보심과 그분의 어떠함을 실재로
체험하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면
그 전제조건인 행복함의 출발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 과정도 행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원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삼 묻습니다.
나의 그리스도인의 출발은 어떠한가
내 자신은 행복한 그리스도인인가
그 출발이
행복하기위해서
아니
행복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려 하는가
그 출발도 그 과정도 그 목적도
모두가 다 행복한 것인가
주님을 그렇게 행복하게 누리고 있는가
답은......
.
지방의 입장위의 교회들과
니,이형제님의 사역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
외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리,이 두 형제님이
지방의 터위의 교회들의 창시자이며
심지어 회복교회의 교주?라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혹 또는
지방의 터위의 교회에서 생활하는 분들중에
회복의 교회들이 니,이형제님에게 속해있다고
그래서 관리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들과 이 두분 형제님의 사역의 관계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니,이 형제님은 그분의 사역이 있습니다.
니 형제님이 시작하셨고
이 형제님이 계승하신 사역입니다.
이 사역의 말씀을 발견한 이들중에 몇몇이
그 사역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각각 속해있던 교파의 분열된 입장에서
또는 유리하던 양같은 광야에서 나와서
합당한 하나의 터인 각 지방에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원하여 사도의 말씀을 공급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방의 터위의 교회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각 대륙에 각 나라에 각 지방에 이 사역의 말씀이 전파되었고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니,이형제님은 각 지방의 교회들에 어떤 행정권을 갖지 않았습니다.
사도로서 각 지방에 교회의 장도들을 세우는 문제에서 권한이 있었으나
(어떤 나라의 어떤 지방에서는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이 나라에서는 그 권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호주머니에 지방교회들이 있다는 송사는 근거가 없습니다)
.....
만약 한 지방의 터위의 교회가
니, 이형제님의 사역의 말씀을 받는 것에 있어서 아멘하는 것은
그 말씀에 성령의 말씀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한가지 이유뿐입니다.
.....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각 지방교회가 가진 어떤 행정권
그리고 어떤 사역을 받는가 받지 않는가에 대한
각각의 자의적 권한이 있다는 것을
역으로 말씀드리는 것에 있습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회복을 어떻게 보느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어떤 오해나 핍박이나 공격이 있던..
더 큰 함정은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는 어떤 획일적인 관념입니다.
주님이 가하지 않은 어떤 율법적인 관념으로
타지방을 또는 타나라를
요구하며 어떤 기준?에 이르지 않았음을
정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니 ,이형제님의 사역의 정점은
지방교회에 자체에 있지 않고
지방교회는 하나의 과정으로
유기적인 우주적인 몸의 건축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방의 행정적인 독립을
무시하거나 억압할 수 있음도 아니요
그것이 교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또한
정말 이 사역을 위한다면
자기가 있는 각 지방의 터에 있는 교회에서
실재적인 지방교회건축을 추구해야 함을 봅니다.
언젠가 들은 멧세지에서
각 지방의 터위의 교회들은 우주적인 한 몸의 교회의
축소판임을 강조하셨고 그것은 정말 합당하며 아멘입니다.
그러나 한 나라와 다른 나라간의
한 지방과 다른 지방의 우주적인 교통에 있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하위개념이 아니듯이
한 지방은 다른 지방의 하위위치가 아니나
그 건축과 생명의 성장정도에 따라 도움을 얻고
공급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것도 강요나 또는 무조건 받음이 아니며
단지....
생명의 교통안에서 말입니다.
사랑과 온유과 겸손한 가운데에서
영의 느낌을 따라...
교회안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모욕적인 언어는
그 형제 좋은 형제야...
그 자매 좋은 자매야...
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좋다고 말하는 것에는
많은 뉴앙스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주 정치적인 제스처. 그리고 천연적인 예의로 인한 포장..
드러나지 않는 조심스런 감춤
그리고 좋은 인간관계....
이런 것으로 인한 교회안에서의 행적은
사실 주님이 많이 필요없습니다...
보고 인용할 참고서적은 발에 채일 만큼 많고
그동안의 살아온 경륜으로 어떻게 발췌할 것인가도 알고..
그렇게 일주일의 한 두시간 때우면 됩니다...
그것은 한면으론 일이고
무대위에서의 잠시의 역활의 분담입니다..
그러나 자신안에서는 참다운 보양이 없을 수 있습니다..
찬송에도
말씀의 한구절에서도
그리고 고봉의 진리를 다룬 개요 한 줄 안에서도...
자신을 위한,자신을 먹이기위한 충분한 시간없이...
심지어는 씻는 보혈의 참다운 적용이 없이도...
시간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집회에서 먼저 우리가
주의 할 것은
이런 서로서로의 씻김과 보양이 있는가하는 것...
내가 누린 것을
내가 정리하여 준비한 것을
발표하는 세미나가 아닌....
참된 누림의 ..아버지의 집에서의 씻김과 먹임과 덧입고
잔치하는 누림의 시간이 부족할 때...
알게 모르게 차츰 차츰
메마르고
식욕이 없고
그리고 기쁨이 없어져 갈 때
기쁨없는 의무감만 남을 수 있습니다..
출근도장 같이 ...눈도장 찍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의 반복이 가져온
마모의 결과를 볼 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집회생활의 촛점은
집회자체나 신언을 해내는 것에 있지 않고
지체 자체에 있다는 것을 봅니다...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자라게 하고
사람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체들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영안에서 흘러넘쳐 혼의 목양에 이르는...
인성안에 넘치는 적셔드는 누림에 이를 만큼...될때
모든 집회와 모임은 의미가 있음을 봅니다...
자매들이여 트러블메이커가 됩시다.~!
이말은 어떠한 달콤한 말인지
얼마나 안식하게 되는 말인지.....
누구든 트러블메이커가 되기는 원치않지만
어쨌든 자매인 하와는 분명
최초의 트러블 메이커였습니다.
왜냐면 간교한 뱀은 아담에게 오지 않고
화와에게 왔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자매들은 그 타고난 섬세함과
뛰어난 직관력으로
모든 것을 분명히 볼 줄 아는 눈을 가졌기에
자매들은
자신이 굉장히 지혜롭고 분별이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항상 무엇인가를 먼저 보기 때문에
그래서 항상 유혹을 느낍니다
내가 이 어리섞고 둔한? 형제들 대신 무엇인가를 해야겠다
그럴 때 사단의 함정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때
자매들은
자신이 판단하고 분별하고
결정을 내리지말고
심지어 그 누구를 위해서도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도 변명해서는 안됩니다.
그럴때 진짜 돌이킬 수 없는 트러블메이커가 될 것입니다.
다만
아담인 형제에게 이 모든 말썽거리를 가져가면 될 것이지요.
자신이 보고 들은바 모든 것.
뱀이 오늘 낮에 내게 나타나서
이런 저런 말을 했다고
아담에게 고하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아담에게 일거리를 고민거리를 가져가야 할 것이지요.
그로 실직하지 않게
아니 가장 중한 일을 처리할 업무를 그에게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아담이
과연 어떻게 이 일을 처리하는 가를 구경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날
사단은 또 어떤 위험을 화와에게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와는
말썽거리를 또 아담에게 가져올 것이고,
아담은 이 사랑스런 하와가
늘 자신에게 말썽거리를 가져오지만
그녀를 탓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늘
무엇인가를 배우게 하고
그로 자라게 하고
그로 참다운 하나님을 대표하는 권위로
세우는 훈련을 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녀의 말썽거리는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가를 알게 될 것이기에...
그러므로
자매들이여
트러불 메이커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기로 합시다.
교회안에는 끊임없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 많은 문제들이 어디서 왔건 간에
다만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변명하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금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안의 많은 문제는
모사가 되는 많은 자매들의
스스로의 결정에 있는 것을 봅니다.
그녀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조차도 모르는 채
분명 자매들은 너무도 똑똑하고
너무도 분명하지만..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결론은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보호를 잃게 될 것이고
정말 트러블 메이커가 될 때
큰 문제를 야기할 것입니다.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