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과 구원사이에 있는 작은 강....순종


주님누림 2009-07-22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6671.html
<베이찡 이화원 2009 6 >

 

아내인 자매가 남편인 형제가 자기를 깊이? 사랑하지 않는 거 같다하여

남편에게 투덜거린다는 말을 신혼인 형제가 뽀록내는 바람에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결국은 자신들이 얼마나 잉꼬부부?인가를 자랑하는 셈이 되었지요....

 

그런 얘길 들으며 킥킥 웃어댈 수 있는 경우는 여유가 있는 축이고..

쏠로인 누구 가슴에 염장을 지르나?하면서 ...

어이없어하는 노처녀자매도 있을 수 있겠지요...^^



원망과 시비라고 표현하신 우리 맘속에 일어나는 각종 불편한 심사들이
구원을 이뤄내는 것을 얼마나 방해할까는

그리스도인이 된지 일정시간이 지나보니 그 폐해를 알 거 같습니다.

원망이란 늘
당연히 받아야 할 것들, 즉
내 몫이라고 여겼던 것을
취하지 못할 때
안에서
화산분화구처럼 부글부글 솟아올라

오직 자신의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주님도 주변의 사람들의 귀함도 보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아침
읽어야할 말씀 중에
특히 자매들의 원망에 대해
많이 쓰신 것을 보고
...좀 웃었습니다...
형제님들이 대부분
자매들의 원망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제가 생각한 것은
원망하는 기준이 참으로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복한 사람은
더 많이 누리지 못할 때...


어떤 불쌍한 사람은
가장 비참한 환경에서...

어떤 극한 환경에 놓였던 사람들은
단지 한 대접의 물로
이것으로 이를 닦고
세수하고
또 목욕을 하기위해 머리를 짜내느라
원망할 새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펑펑 쏟아지는 물로 샤워하다가
갑자기 단수가 되어
그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원망과 화가 치밀 것입니다...

단지 한 조각의 빵과 물만으로도
감사의 눈물로 식사를 할 수 있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도
입맛이 없다 타박할 수도 있습니다...

전같이 사랑하여주지 않는다하여
의심하며 원망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이 땅 어딘가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무그늘 밑에 앉아 시원한 바람과
새소릴 들을 공간이 있음을
감사할 수도 있고...

시원한 그늘아래 앉아서도..
이 너른 땅중 내 소유는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리느라 안은 불이 나는 사람도 있더군요..


원망과 구원을 이룸 사이에는 작은 강이 있는데
메시지에선
그걸 순종이라고 하더군요....

 

모든 것을 순종함으로 그 안에서 최선을 것을 얻음...

아무튼...

그것을 무어라 이름붙이던...


주님이 제게 주신
모든 것들로 인해....


최소한의 것들로 인해
감사하며
기뻐하며
누릴 수 있길


주님과 더 친근하여 지길...... 

 



회복의 신언집회에 대하여...


주님누림 2009-07-20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6631.html
                    <뉴질랜드 남섬 데카포 호수, 2009년 2월경 촬영>
 

 

 

 

어떤 사람들은 윗트니스 리 형제님과 웟치만 니 형제님의 멧세지를 텍스트로 하여

주일집회에서 서로 교통하는 회복의 집회에 대해 꼬투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신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깨닫고 빛비춤받는 것을 교통하는 것이 아니라

윗트니스라는 개인의 관점과 해석에 가둬진채로

그 싯점에서 교제의 내용이 정체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하는

스스로는  예리한? 지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날 회복안의 지방의 터위의 교회생활은

각각 그처해진 대로 행정적인 안배와 영적인 안배하에서 이뤄워져서 그 결과

집회에서 다루는 텍스트가 윗트니스 리 형제님의 멧시지이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고 꼬투리를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집회의 어떤 상황은 

어떤 지방의 교회의 그 교회가 도달한 영적 생명의 단계와

일치됨을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저도 한때 어떤 지방교회에서 생활할 때

메시지의 개요를 거의 외우다시피해서

그 일부분을 선포하는 것으로 신언을 하는 분위기에 있던 적이 있습니다.

 

만약 그런 집회에 어떤 외부의 믿는 이가 참석했더라면

아마도 앵무새같이 모두 똑같은 내용을 큰 소리로(영을 해방해서) 말한다고

정죄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흐르고 있는 시간과 변하고 있는 상황의 일부분을 보고

또는 한 지방의 한 집회만을 보고 그것이 회복의 신언집회의 어떠함이라고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해야할 중요한 점은 회복의 신언집회는

계속 그 질에 있어 전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윗트니스 리 형제님이 1985년도에 대만에서 새로운 전환을 실험하시고 난 후

한 사람이 말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듣는 열방의 모임의 어떠함

말못하는 우상의 어떠함에 끌려 다니는 구습을 떨쳐버리고

모든 사람이 한 사람씩 그 영을 따라 말하는 모임의 전환을 교통하셨을 때

그것은 회복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존의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는 담을 허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니골라당을 훼파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의 회복이었습니다.

 

그것은 회복안의 지방의 터위의 교회들에게도 큰 도전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과연 집회가 제대로 이뤄질 것인가에 대한 우려 역시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중구난방으로 이런 저런 말들이 튀어나오면 어떨 것인가

또는 누구도 말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된 상황이 벌어지면 어떨 것인가

등등의 염려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회의 서두에 교통의 방향을 잡기위해 미리 위임을 받은 형제가

간략하게 교통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여는 것을 실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각각 안의 느낌을 따라 자신이 일주일 동안 누린 것에 대해

적절한 싯점에 일어나  교통하게 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제가 출석하고 있는 집회에서는  아직..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영이 온전히 역사하는 가운데 집회를 열어놓는다면

그런 틀이 필요없겠지요

아무튼 이렇게 저렇게 실험하고 결과를 보고 서로 지방교회들간에 배우기도 하며

어떤 때는 개요를 외워 선포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메세지의 일부분을 읽기도 하고

어떤 때는  신언노트를 작성해서 그것을 읽기도 하는 등.....

어떤 때는 단체적인 실행으로 어떤 때는 개인의 상황으로  이런 저런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그 당시에서는 최고의 것이라 여겨지는 것을 취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늘 하고자하고 해내고자 하고 참여하고자하는 침노하는 영이 있는가

그러므로 위로 올라가고 고양되며 해방된 영이 지배적인가

물러앉고 침묵하고 구경하며 침체된 상태에 빠져있는 영적 상황인가하는 차이일 뿐입니다.


오늘날 제가 속해 있는 교회의 집회에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자는 방법적인 제안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분은 일어나서 자신의 집에 있던 상황을 예로 재미있게 풀어내기도 하고

(웃음과 동의 유발) 어떤 분은 아주 진지한 진리를 설파하고

어떤 지체는 현재의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토로하기도 하고 ..................

각양각색입니다.

 

참다운 신언이란 주님 자신을 말해내고 주님자체를 말해내는 것이고

하늘과 땅에 선포하는 엄위한 것이지만

그것이 실재가 되기까지의 나아가는 과정중에 그 모임

 교회의 단체의 생명의 수준에 달려 있는 일임을 봅니다.

그런데 그 전에도 그러했지만

텍스트인 이즘의 오늘의 양식에서 한 주일 분량의 멧시지는 그 개요에 있어서

구약의 이책 저책에서 상당한 양의 말씀과 

신약의 이책 저책의 말씀으로 넘나드는

방대한  참고 성경구절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만약 그 주의 양식을 제대로 먹고 추구한다고 한다면

참고 성경구절을 일일이 찾아보고

또 읽어야할  영적 참고서적의 부분도 다 찾아서 읽는다면

그건 마치 대학원생이 세미나 가기전에 참고도서를 다 찾아 읽고

거기서 발표할 준비를 하는 것과 같은 분량의 추구를 해야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준비를 한다면 다른 지체가 일어나 교통할 때에

거기에 뭔가 자신이 더하여 교통할 것이 분명 있을 것이고

또는 같은 영안에서 감동하여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방향은 같으나 다양한 접근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추구하는 가운데 각각의 성도에게

주님이 영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결코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외부에서 판단하는 회복의 신언집회의 어떠함의 관건은

어떤 텍스트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라

신언자 자신의 영적 어떠함에 달려 있음이 더 큰 비중이 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결국 합당한 추구는 당연히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으로 돌아가게 할 것이고

또한 너무도 당연히 각 지체 안에서 말씀하시는 레마의 말씀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먼저 신언자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추구하느냐는 먹는 문제로 비유하자면

단지 차려진 밥상에서 조금 떠먹고 나서 내 할 일을 다했다고 할 것인지 

또는 조금 더 양에 충실한 식사를 하고 나서 만족할 것인지

어떻게 밥상이 차려졌는지 반찬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관심을 가질 것인지

그리고 실제로 반찬을 만드는 과정을 하나하나 알아볼 것인지....

그리고 나름대로 먹기좋은 반찬을 하나라도 차려내어놓을 것인지...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반찬을 하나씩 만들어 내오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하여...

그것이 지체됨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실재로

집회끝나고 나서 갖는 점심 애찬은 각각 집에서 조금씩 상황대로 

요리한 것을 가져오는 것을 나누어 먹고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영적인 예표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오해


주님누림 2009-07-19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96.html

         < 베이찡의 카페거리에서 발견한 illy커피 전문점  2009, 6월경 찍음>
 

우리는 종종 주님의 말을 얼마나 오해하는 걸까요...

많은 문자적인 해석들이

그리고 많은 자의적인 해석들이

종종 하나님의 마음을 잘못 오해하고

말하신 뜻을 잘못 인식하고

그리고 그 잘못된 인식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 자신이 사람을 위해 이땅에 보이시면서

사람들과 가까이 하셨을지라도 

사람들이 정작 애타게 뭔가를 확연히 말씀해주시길 청하였을때

주님은 자신의 생각과 뜻과 하늘에 속한 일에 대해

일부러 비유로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알길 바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살짝 자신의 깊이를 덮개로 감춰버리시고

 많은 여타의 해석이 여지가 있는 광범위한 뜻을 가진 단어를 사용하셨고

또 구체적인 지침서를 전혀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오해하는 일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불가하다고 생각하여

실족하는 일도 생기고

그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그중에 하나가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한 오해일지 모릅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무엇인가 이 말씀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겟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은 문자그대로 자신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장 위기의 순간에 또는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

극단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태가  자신을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내어던지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행위는 그

 행위자체에 대해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받는 영역의 밖에 있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사람은

이 땅이 그리고 현재 이땅에 존재하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영역안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버려도

결코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자기자신이라는 존재입니다

 

모든 만물이 나라는 존재와 대치되고

마주보는 상황속에 잇는 한

자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만물이 여전히 거기 있으나

내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는 다 존재하는 만물이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내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계시건 계시지않건

그건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이 만약 문자적으로

자신을 버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야말로 맨정신으로는

즉 자신이라는 존재안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이 말씀을 감당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감당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이 말씀을 던져놓으셨습니다.

감당할 수 있건 없건 이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들을

 보려는 뜻을 그대로 보이신 것이며

 

그러므로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며

사람들을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지는 않으나 

 이 말씀을 받을 수 없음으로 인해

말씀의 요구를  왜곡함으로

그 뜻을 경감시키기는 잘못을 범합니다.

 

이를 테면 모든 금욕적인 행위와 자신을 학대하는 행위들은

육체적인 쾌락이나 안락을 포기함으로

자신을 버리는 주님의 요구를 대치하는

종교적 행위들을 앞에 내세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위들을 표면적으로 가장 많이 내세우는 종교가

바로 카톨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경건한 모든 외양들 많은 봉사들 많은 희생적인 삶들은

많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요구는 이러한 것이니라고 생각하도록

오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 편에서 보면 

참으로 악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개신교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경건의 모양을 갖추기 위해

담배를 피지 않고 술을 끊고

이런 저런 잡기를 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티비나 신문도 악한 것들로 여기고 보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어떤 기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또는 이런 저런 선한 생활의 본을 보이는 것으로

어떤 기준에 이르렀다고 볼지 모릅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을 판단하는 기준입니다. 

 

 또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측정하는

눈에 보이는 바로미터가 될 지도 모르나

하나님이 요구하는 자아를 부인하는 것과는 핀트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밖에 나타난 것을 주의할 때

경건의 외모는 있으나 경건의 실재는 없는

외식으로 떨어질 위험이 더 큰 요소입니다.

 

더하여 이런 행위들의 목적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못미치는 자신을 위로하고

스스로 눈감아주려는  자기 만족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코

하나님의 요구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것들로 대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로 인해 하나님이 

그 절대적 요구를 변질시키지 않으실테니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이 자기학대만하는 모양일 뿐입니다.

 

또는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을

혼적인 무능의 상태로 들어가

어떤 생각도 어떤 판단도 어떤 의지도 없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생활과 방향에 대해

일체의 결정권을 맡기는 것으로 오해한다면

삶 자체가 커다란 공황의 상태에 이르는

위험한 지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악한 자로 이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미혹당하게 하며

그들의 삶을 망치게 했는지 ,

많은 거짓된 이론과 신화를 만들어 내어

사람들을 속이고 꾀어서

그들의 판단과 이성을 마비시켜서

그들의 삶을 송두리채 삼켜버리는 이단 종파들이 일어났었는지 ......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틈만 나면

사람들의 꾀이려 하고 있는지

그 폐해의 예들을 이 땅에서

이 나라에서도 보고 있습니다.

 

조금만 판단력이 있으면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는 실상조차도

 파악이 안되는 무조건적인 믿음을 덕으로 내세워

사람들을 정신적 무능아로 만들어

그들의 인격자체를 파괴시키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악한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저런 것들

이런 저런 상황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함에도

그 누구가 아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자의 요구조건입니다.

 

그러면 어떻해야겠습니까.............

 

우리가 이 문제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믿음생활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솔직히 시인한다면 말입니다.

.

.

 



헌신


찬송찬미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88.html

 

 
작곡:메이    편곡: 유진    작사: 모닝스타   찬송:안티파스리 ...그리고 나중에 모닝스타 덧입혀 부름
 
 
당신의 군대로 편성되어 당신의 땅을 점령할 자격있는지..

당신의 영광스런 포로 되어 당신의 위대함 향기로 뿌릴 자격있는지..

당신의 사슬에 묶인 대사되어 당신의 유익을 대변할 자격있는지...

판단은 당신께 있으나

원함은 내게 있으니

자원함을 귀히 여기는 주님께

내 자신 열어 드립니다.

언제나 열린 그릇으로서....

언제나 반응하는 연인으로서...
 
 


그날을 바라봅니다


찬송찬미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87.html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찬송: Antipas Lee 후에 morningstar 덧입혀 부름

 

자료와 음원출처 :             와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

 
 
 
당신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기로
이 좋은 봄날에
오히려
죽음을 도처에 봅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
생명이 없는 것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다  그 속에
죽음과 부패를 떠안고 있음을 봅니다.
그리고 저도 그처럼 탄식하며
주님 당신이
그 언젠가 다시 오셔
만물을 회복하시고 만물을 소생시켜
다시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을 때를
소망으로 바라보며
만찬상앞에서
당신의 죽음을 기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찬송찬미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86.html

 

                         

                         *작사:morningstar / 작곡:May / 편곡:Eugene*

                          /찬송 : Antipas Lee  , 나중에 morningstar 덧입혀 부름

 

 
 
 
 
 태속에 길리워 낳은 자식을
                  결코 져버릴 수없는 어미의 마음처럼         
 
             사랑하는 이의 병듦이 그를 퇴색시켰으나
              더한 사랑으로 그 초라함을 덮은 연인처럼
                              ......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을
그렇게
그렇게

     하나님 사람으로 되돌리시는

       그 사랑.....
     그 사랑...

 


                                    


아침에 창문을 열면


찬송찬미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84.html
                                     

 


 
 
 
 
          *작사:최용우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찬송: morningstar
 
 
 
   아침에 창문을 열면

밤새 고였던 방안의 공기가

싱그러운 새 바람으로 바뀌어

머리가 맑고 투명해지듯

내 머리를 열어

그동안 쌓였던 생각들을

하나님의 영과 생각으로

새롭게 바꾸고 싶다

답답했던 흐름이

탁 트인 자유로운 흐름으로

빡빡했던 관계가

부드럽고 순한 관계로


주여 우리 마음이


찬송찬미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6583.html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찬송: morningstar


 

 

 

 

 주여                                                                

우리 마음이 낮아져

겸손함을 배우게 하소서



주여

우리 마음이 비워져

주신 소소한 작은 것들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 마음이 단순하여

주신 역량을 넘어 이름을 남기려는 야심에서

떠나게 하소서



주여

우리 마음이 밝아져

단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우리의 전 존재가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할 인생임을 알게 하소서



주여

우리의 마음이 주님에게 고정되어

고요하던 풍랑을 만나던

깊은 속에서 평강을 유지하게 하소서



주여

우리의 마음이 정직하여

거짓과 위선을 멀리하며

주님 뵈올 때까지 끝까지 곧은 길을 가게 하소서

 


나를 위해 이루시고


찬송찬미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82.html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
 
 
 
 
나의 귀에 속삭여주신
나를 위한 십자가에서 피흘린 그 사랑
나를 위한 그 구속의 노래가
여전히 귓가에 들리네

이땅의 어떤 괴로움 어떤 상실도
함몰하지 못할
하늘에 쌓아둔 분깃
유일하며 절대적인  소망이네

불의와 부정직과 속임이 가득한 땅에서
나를 사랑하여 치룬
순수하며 정직한 그 희생
더욱 빛나는 가치를 지니니

이 땅의 여정이 끝날 시간이 가까울수록

당신의 존재의

빛남이
기쁨이

더욱 가득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찬송찬미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81.html

 


 

*작사:LSM / 작곡:Eugene / 편곡:Eugene*
 
 

 



당신품에 날아들게 하소서


찬송찬미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1 http://blog.chch.kr/lethim/6580.html
 
 
*작사:성결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주님! 당신의 눈동자속에 제모습이 늘 머물고 있습니다.

당신의 따스한 시선이 저로 평온케 합니다.



주님! 사랑하고 사랑하고 더욱 사랑합니다.

저로 당신품에 날아 들게 하소서

물방울이 형체를 잃어 하이얀 구름으로 하늘에 오르듯

둥지에서 떨어지기를 연습하다 하늘 위로 비상하는 새처럼

당신품에 날아 들길 간절히 바라옵니다.


세상에 혼란이 닥치기전

내몸에 생의 주검이 임하기전...

진정 바라옵니다.


주님! 데려가옵소서

하루 하루 당신과 동행하는 오늘을 가집니다.

눈을 감고 눈을 뜨는 오늘의 하루중 데려가옵소서


주님! 하루중 데려가옵소서.



그때도 여전히


찬송찬미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79.html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
  

   언젠가 내 나이 60이 되어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때에

   모든 사랑이 다 지나가고

   메마른 육신만이

   한꺼풀 껍질처럼 남았을 때도...


   그때에

   주님의 눈이

   여전히 내안에 감춰진 열정을

   보실 수 있을까...


   모든 것 뒤에

   감춰져있던 주님의 실체를

   나는

   비로소

   만날 수 있을까....


교회에 대한 단상


주님누림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78.html

교회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곳입니다.

 

갖가지 사람들이 모여있고 그 모인 사람들이 여전히 타고난 성정이 다르고

또한 변화되지 않은 타락한 어떠함대로 행하는 것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기에

많은 문제가 공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더욱 어려운 것은

나쁜 것들은 물론 쉽게 분별이 되지만

흔히 좋은 것이라 하는 사람의 선하고 기릴만한 것들이

분별없이 통과되기도 할 뿐 아니라

그런 것이 쉽게 척도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더하여

직선적인 것보다는 우회적인, 어쩔 수 없는 정치적인 제스추어가

일반적인 분위기가 되기도 하고

 

어디에 도달하던지 정직히 행하며 주님앞에 각각 서는 것 보다는

이상하고 거북한 영적인 외양을 만들기도 하고

 

이미 고착돤 관념의 잣대로

 어찌하든 추구하는 것은 위험한 도전으로 판단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외면적으로 보여지는 현상들일 뿐이며

결국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은 영이며

영의 어떻게 충만한 만큼이 교회라 인정될 수 있기에

(교회전체가 추구하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거긴 이미 교회가 아니기에 그건 제외하고)

주님을 추구하고 참된 것을 추구하는 거듭난 사람들이 있는 한

교회안에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움직임( 말씀이 말하고 성령이 증거하는 )이 분명 있음을 봅니다.

 

주님에게 취미를 갖는 것만이,

주님에게 갈급한 사람만이 ,

참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참다운 기쁨을 얻으며 참다운 살맛을 체험하게 될 것이기에

 

날마다 우린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자기가 서 있는 곳과 나아갈 곳을 점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결국 자기가 안 만큼 ,본 만큼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교회안에서 자기식대로의 판단의 잣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우리는 저러했지만

오늘 우리는 더 전진하고

내일은 더 하늘에 속한 부분으로 나아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안에서

판단하고 인도하는

아마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분은

 주님이 인정하는 바 영적인 사람일지 모릅니다.

 

이 인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영적 증거, 영적 역량 ,영적 은사 ,

영적 능력과 영적 권위가 나타난 사람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 거인이 아니라

 몸의 작은 지체라고 낮추어 겸손하게 말하는

우리 거듭난 믿는 이들

그저 작은 감자라고 빗대어 말하는

한달란트를 가졌을 뿐인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러므로 한면으로 구원받은 죄인에 불과하고

한면으로는 이 땅의 사람들이 함부로 판단하지 못할

놀라운 영적인 영역에 속한 사람들이어야하는 것이 우리의 어떠함이어야 합니다.

 

교회의 간증이 이런 몸의 지체들에 의해 명백히 나타날 때

여전히 교회안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어떤 사람들의 

소극적이고 육적인 상황들이 돌출될지라도

 

마치 파도를 잠잠케하는 것처럼

곧 모든 것이 드러나고 판별되고 진정되고 심판을 받을 것이기에

그것이 세상사람의 비방거리가 아니라

외려 주님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날 기회가 되고 사람들은 너희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성찰에 대해


주님누림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77.html

사람이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 실패하여

상처가 남는 것은

그 상처를 준 외부적인 요인이

원인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내적 약함으로인한

분별력의 부족과

판단 부족 

또는 욕심에 의한 눈멈이

자초한 것일 겝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치유하고자 할 때

상처가 보여주는 자신의 내면의 실상을 보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결국 자신의 내면의 실상을 보는 것이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아 나의 실상이 이렇구나

 

아 나의 약점이여.

 

그리하여 우린 일생동안

자신의 상처받고 건드려지기 쉬운 약함에 동정하며 애닯아하며

싸매며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쓸지도 모릅니다.

 

누가 그 약함을 건드리기만 하면

심지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할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 문제가 점점 더 커져서

누구도 건드리지도 못하는 옹벽이 될 수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하기에

나이가 먹으면서

더욱 더 고약스럽고 더 이상스럽고

도무지 달라지지않은

모든 약함과 약점 투성이의

늙은이가 되어버리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이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이 문제를 풀어나가는 사람이

적은 숫자입니다.

..............

 

어떤 사람의 그리고 내 자신의  

타고난  약한 부분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그러함에도

우리의 약함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나 일단

실행함으로 얻은

구속의 기쁨을 체험한 사람은

이 세대에서도

평강의 길을 갈 뿐 아니라

 

우리의 혼의 구원과 함께

천년왕국에서의 놀라운 누림에 참예하게 하는

상급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남은 소망입니다.

 

 

 



그 영 늘 부어주소서


찬송찬미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76.html
 
*작사:morningstar / 작곡:May / 편곡:Eugene*
 
 
 
이미 약속한 말씀으로 구하오니 차고 넘치게  그영 늘 부어주소서
내 자신의 약함 한계 보이지 않게 그영 부어주소서
병듧이나 아픔에 대한 고통두려워하지 않게 그영 부어주소서
실패와 소심함 흔들림 이기고 또 이기게 그영 부어주소서
이미 약속한 말씀으로 구하오니 차고 넘치게 그 영 늘 부어주소서

 


신언에 대하여 생각해봄


주님누림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75.html

예전에 처음으로 신언으로 주일집회를 전환하기 전
어떤 안배가 있었습니다.
요번 주는 어느어느형제님이 어떤 순서를 따라
몇분까지 말씀을 전해서 집회를 이끈다는 원칙으로 말입니다.
그런 뒤에 몇분 형제자매님들이
간증의 형식으로 남은 시간을 쓸 수 있었습니다.

그뒤 처음으로 신언만으로
말하자면
주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한사람씩 한사람씩 말하는 집회로의 변환이 이루어질 때
많은 염려가 있었습니다.
만약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실제로 그런 일이 집회에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침묵이 일어난다면
주님은 부담을 갖고 말하는 신언자를 다음 주에 일으키실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침묵이 그다음주에도 일어난다면
그런 상황을 주님앞에 가져가는
기도의 사람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도 역시 침묵이 집회가운에 일어나고
사망이 덮친다면
차라리 그런 상황이 아구까지 차서
침묵하는 사람이 견딜 수 없을 지경에까지
가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전 집회중에 말하지 않던 어떤 지체가 일어나
" 형제 자매님들 왜 아무도 일어나 말하지 않습니까?
정말 답답해 못 살겠습니다"
그럼
모두들 "하하"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그날 집회는 그렇게 끝났지만
애찬을 하면서
그렇게 교통한 지체의 말을 되풀이하며
다시 웃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지체들끼리 화기애애해져서 속시원해서
친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런 분위기로
일주일을 산다음엔
정말 멋진 ..쪼개는 신언을 하진 못하더라도
어떤 형제가 일어나서
"지난 주 그 형제님의 그 말이 제 속을 시원하게 했습니다.
............"
이렇게 말문이 열리면서
또 한바탕 웃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조금씩 나아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오히려
부담을 혼자 짊어지고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분위기 쇄신을 위하여
용감히 일어나
길게 말하는 지체입니다.

또는
안의 부담이 아닌
지식의 나열을 되풀이하는
습관적인 말들입니다.

그리고 영의 발아가 아닌
목에서 소리치는 발성연습같은
듣는 이의 귀를 괴롭히는 외침입니다...

모든 것이 정말 유기적인 것이 좋습니다...
미약한 시작일지라도...
조금씩 배우면서
넘어지면서
함께 나아가는.... 

 



믿음에 대한 단상


주님누림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74.html

단정적으로 말해
사람은 믿음이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타자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한번 의심이 속에서
뭉글뭉글 피워오르기
시작한 경험이 있다면...

그런 의심의 상상이
어디까지 머무는지..
나중에는 스스로 어이없어
지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의 약점에 대한 통찰력이 있었던
세잌스피어는
오셀로라는 극에서

충직하며 우직한 한 남자가
간사한 몇마디 말에서 이미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를
따라왔던 사람이었음에도
.......

의심의 원조는
하나님의 마음을 의심한
아담과 화와에게 있었음을
성경은 보여주지만..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서
이런 사람의 믿음없음을
드러내십니다....

먹는 문제에..대해

마태복음 16장 8절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입는 문제에 ..대해

마태복음 6장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리고 환경이... 닥칠 때
  
마태복음 8장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리고 마지막 때에 이땅에서
보기 힘들게 될 믿음에 대해.....

누가복음 18장 8절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착각할 때
자신에게는..믿는 단순함이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
이런 믿음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걸 모른다면,
네가 내게 이럴 수 있느냐고
반대로
어떻게
나를 의심할 수 있느냐고...
새삼 실망을 합니다.

이제 알게 되는 것은..

사람에 대해서는
기대할 것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기대할 만한 것이
없음으로..

그로 거짓말하게 하거나
속이게 하거나
위장하게 하지 않도록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상대로 하여금
편안하며
자유롭게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이땅에서
사람에 대해 취한 태도이셨습니다.

주님이
사람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던 것은
사람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미쁜 것이 없으므로
사람이..
스스로 실족하지 않도록
배려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몰랐던 베드로를
주님은 ...
끝까지..품으셨습니다.

사람에게 의탁할 만한 것이
없음은
슬픈 것도
새삼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우린 그런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느끼는
배반감은
..이런 것을 모르므로
스스로 실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는
해 줄 수 없는
사람에게
목을 매는
어리섞음은
사람을 모르는 어리섞음일 뿐..

유일한 길은...

참 미쁘신 그분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참 미쁨이
되길 사모합니다.

그리하여 감히
점차로...
미쁘신 그분으로 인해
그분의 어떠함으로..

사람에게
늘 한결같은
그런 미쁜 사람이고 싶습니다.

끝까지 의뢰할 만한...

믿음의 사람이고 싶습니다.



무제


주님누림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73.html
 
 
이 이야기는 제가 만든 이야기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출처가 궁금한 분들을 위해..)
이건 일종의 넨센스 퀴즈같은 자문자답을 위한 것입니다.
 
+

 

어떤 사람이 여행 길을 떠났습니다.
 
때론 순탄한 길을
때론 험난한 길을
통과했습니다.
 
그러다가 양쪽에 나무가 울창한 좁은 숲속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앞에 어떤 낯선 사람이 떡 버티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긴 인상도 험상궂을 뿐 아니라
몸집도 장대하고 살기등등한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 험상궂은 사나이는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서는
느닷없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너 바보 될래? 나쁜 넘 될래?"
 
.
.
띵~~~~~
.
.
 
 
어쨌든 한가지 대답을 하지 않으면 길이 없겠다 싶어서
바보될래 ~~~~라고 했더니
비몽사몽 연기가 휩싸인 가운데
사람인지 뭔지 달겨들어서 옷을 벗기고
입에 재갈을 물리고 목에 밧줄을 걸고 또 눈 양옆에 판을 세워 놓으니
말도 못하고
옆도 보지 못하고
어깨에 안장이 놓인채
영락없이 사람 말이 된 꼴이었습니다.
그리고
등에 누군가가 냉큼 올라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랴~ 가자 하고 채찍으로 다리통을 치니 아파서 팔짝팔짝 뛸 수 밖에 없었습니다.
 
.
 
.
 
그러다가 번뜩 깨어보니 꿈이었습니다.
길을 가다 곤하여 잠시 잠이 든 것이었습니다.
에휴~~ 다행이다 안심하고
길을 다시 떠났습니다.
속으로는 나쁜 넘~~되는게 훨~ 나았을텐데 궁시렁 거리면서말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길을 계속가다가 꿈속에서와 같은 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꿈 속에서처럼 험상궂은 사나이가 역시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습니다.
 
남자는 ....나쁜 넘~ 될래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 말의 등짝에 올라타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래서 사람말은 들구 난리를 치고 펄쩍펄쩍 뛰는 통에
차라리
사람말 등위에서 내려올려고 하니까
저편에 사람말 뒷발에 사정없이 채이는 어떤 남자가 보였습니다.
 
남자는
자신도 등위에서 내려오면
저렇게 뒷발에 차이겟지 싶은 생각이 들어서
정말 나쁜 넘~~처럼
채찍으로 사정없이 사람말 정강이를 내리쳤습니다.
 
사람말은 아파서 펄쩍펄쩍 뛰니 그 기운에
빨리도 잘 달렸습니다. 
 
그리고 숲속길이 끝날 무렵
일단의 군인들이 또 역시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
,
 
사람 말은 모든 굴레가 벗어져 자유롭게 되었으나 영영 바보가 되었고
나쁜 넘~~은 채찍으로 바보를  때리고 괴롭힌 만큼 자신도 똑같이 당해야 했고
그리고 늘 나쁜 넘~~이라는 글자를 등에 매달고 있어야 했습니다.
.
.
.
.
 
과연 바보가 되거나 나쁜 넘~~이 되는 것외에 다른 길은 없었는지요.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바보이거나 나쁜 넘~~이 되거나
둘중의 하나가 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그런 느낌이 드신 적이 없었습니까
 
이 이야기는 복음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다운 한 사람으로서
이 험악한 땅에서 살려면
 
어떤 어려움과 두려움을 극복해야할는지
(때때로 앞을 가로막는 험악한 협박에서)
(혹은 달콤한 유혹자의 꼬심으로)
 
어떤 어리섞은 선택의 기로에서
(이거냐 저거냐 둘다 마음에 안드는)
 
어떻게 할 것인가
.
.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것에 관한 성경의 예는 아주 많을 것입니다.
 
유혹자가 주님을 광야에서 시험한 예
주님을 따름으로 유대교에서 축출을 당할 것이냐 말것이냐의 선택의 예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앞마당에서 질문을 받은 예
등등...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생활의 벽들앞에 선택의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우린 대원칙은 갖고 있지만
교과서적인 답
모든 질문에 적절한 답을 이미 갖고 있는 해설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나 승천의 실재는
그렇게 거창하지도 않게
곳곳에 있을 것입니다.
 
물론
비참한 실재도
곳곳에 널려 있지만.
 
.
 
 
 
 


진짜 땅주인은 누구?


주님누림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72.html

어렸을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 거인과 아이들?이란 동화가 있었죠...

거인은 자신의 땅 주변에 커다란 담을 치고 혼자서 자신의 정원을 즐기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봄이 오지 않고 늘 겨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담이 허물어진 구멍사이로  조그마한 어린이들이 들어와 놀고 간뒤에

자신의 정원에 꽃이 피고 따뜻한 봄이 찾아온 것을 보고 난뒤

거인은 마음에 깨달은 바가 있어서

담장을 허물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정원에 들어와 즐기도록 했다는 얘기 말입니다.

 

땅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그 정원에 꽃이 피게한 아이들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아이들 덕분에

자신도 그 땅을 누릴 수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이죠.

 

.

 

그럼 한국판 거인과 아이들 얘기를 한번 해 볼까요?

 

어떤 사람이 부동산 투기를 해서 번 돈으로

시골 어떤 마을의 산 전체를 사게 되었습니다.

산은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밤나무들이 빼곡 들어차 있을 뿐 아니라

제법 오름직한 등산로에다 바라보는 풍경도 제법 좋은 곳이어서

땅주인은 여간 뿌듯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나 땅주인은 도시에 살아서 산에를 자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주인은 다행히 동화속의 거인처럼 산 전체를

담으로 쌓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그 산자락 밑에는 

그 산을 오르락 내리락하면서 자라난 소년이 있었는데

어느덧 어른남자가 되었습니다.

남자는 산밑에 황톳집을 지었습니다.

 

남자는 산아래 밭에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그런 어느날

 남자는 그 산이 어떤 도시부자에게 팔렸다는 말을 듣게 되었죠

 

남자는 땅주인이 생겼다는 말이 불안해서인지

어느날 밤

땅주인이 산을 통채로 들어 서울로 옮겨가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하는 생각에 매일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근심스레 산을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게절이 바뀌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산은 여전히 거기 있었고

남자는 운동삼아 또는 산나물이랑 버섯을 따러

산에 올라가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자 밤송이들이 주렁주렁 열리게 되었습니다.

 

비록 남의 산이지만 밤송이들을 그냥 썩힐 수가  없어서 어느 가을날

온 동네 사람들이 밤송이를 털어서 밤을 까서 푸댓자루에 넣어놓았습니다.

더러는 산에 사는 동물들 먹으라고 흘려놓기도 하였죠....

 

초겨울 무렵 땅주인이 자신의 땅이 잘 있나 보러 왔습니다

산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땅주인을 보고

산밑에 집짓고 사는 남자는

밤이 든 자루를 내어주었습니다.

산나물 말린 것도 좀 내놓고 말린 버섯도 좀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일부는 좀 식구들과 동네사람들이 먹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땅주인은 고맙다고 말을 하고 다음해에도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산을 대신 잘 지켜봐 달라고 말하고 갔습니다.

그렇게 땅주인은 일년에 많아야 두세차례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은 여전히 마을 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

몇번 땅주인은 바뀐 것도 같습니다.

가끔 땅주인이라고 나타나는 사람이 바뀌곤 했으니까요......

 

어떤 땅주인은 산의 나무를 베고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다가 

정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아서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 산아래 사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다행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

 

그렇게 계속 땅주인도 바뀌고

세월이 감에 따라

산아래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바뀌며 살아갔습니다.

 

 

 

 

 

.

 

 

이땅에 사는 동안

땅주인이 누구이던

또는 누구라고 주장하던

다만...

그 산아래 살면서

그저 땅을 누리는 남자이었길

 

.......................

 

 

 

 

 

 




참된 그릇이 됨


주님누림 2009-07-18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lethim/6571.html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의 부재시

그의 빈자리가 얼마나 휑하게 크게 느껴지는가에 달려 있는 듯 싶습니다.

 

몸도 작고 말도 어눌하고

단호하지만 약삭빠르지 못해 술수를 쓸 수 없었던

그러나 진실함과 참됨으로 이 나라를 섬기고자 했던

참 대통령의  비참한 죽음은 이나라 모든 사람의 모든  가슴에

큰 빈자리를 남겼습니다.

 

눈물을 보이는 것을 쑥쓰럽게 여기는 남자의 눈에도

눈물이 비같이 흐르게 하고

이 글을 옮기면서도

저역시 비감함으로 눈물을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간 분을 그리워하고 애통하고 미안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나라를 참되게 이끌 지도자의 부재에 대한

서글픔이 너무도 크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죽을지도 모르는

마지막 길이란 것을 알자

그의 목을 끌어안고 눈물로 통곡했던 그 때

그 분들의  심정도

바울같은 영적 인도자를 잃기 때문이었는지요....

 

사도바울은 주님께 특별히 쓰임받는 그릇이었습니다.

혹자는
그의 박식함과 풍부한 지적용량에
촛점을 맞추어
또는 그의 놀라운 전도의 열정을 들어
그래서
주님이 그를 들어 쓰셨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를 다매섹에서
거꾸러뜨리기전,
그의 일생동안
전적인 가치를 부여하며
추구하고 쌓아놓은 모든 것들을
지식과 가문과 조상의 유전에 대한 열정들을
.....
어느날 전일하게
참으로 배설물로 여기지 않았다면
똥으로 여겨 버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매일 매일 두려움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놓는
전적인 자기부인을 하지 않았다면
주님은 그를 통해
아무 것도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

어떤 사람들은 확실히

어떤 의미에서 특별한 그릇들입니다.

그가 가진 지적인 역량
일을 해내는 추진력
그리고 절대적인 헌신과 열정적인 마음

그럼에도 그 아까운 기초들이
아무 소용이 없을 뿐 아니라
외려 걸림돌이 되는 것을 봅니다.

 

.



주님이 역사하실 수 있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한번은
깨끗이 허물고
전적으로 벌거벗은 것처럼 자신의 무익함을 본
하나님앞에서 두렵고 떠는
정결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주님의 역사가 부족한 이유는
우리가운데 쌓은 것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직 주님앞에서
이런 공과가 부족한 연유일까요

인재는 많되
참된
그릇이 부족한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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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능력을 감춰둠의
속마음의 진상은
자신을 여전히 나타내고자 하는

교만함이 자신을 가두기 때문이며

많은 능력을 겸비함이
외려 걸림이 되는 것은
이것이 그로하여금

성령이 역사하실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인지요.


오늘날 우리가운데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며
철저히 주님이 보이신 길로
낮아지며
겸비하며
두려워 떨며
가려는


깨끗이 한번은 허물은
안과 밖이 동일한
그런 그릇이 너무도 필요합니다.

 

그 용량의 크기가 어떠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