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피의 적용에 있어서...
이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이 사실을 받는 데 있어서,
우린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야만 한다...
그 피의 씻음은 과거에 일회적으로 완전하게
일어난 사실일 뿐 아니라
현재적으로 적용될 수 있으며
그리고 미래의 모든 예견된 허물과 죄들에 대해서도..
아니 완전히 구속이 이뤄지지 않은
우리 전 존재에 대한 온전한 보증수표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여전히 시간의 구속에 묶여있는
우리의 한계내에서
반복되는
송사로 인한
시간과
심정의 낭비를 하게 될 것이니까...
자책은
미덕이 아니라
그분의 눈에 보면
아직도 자신을 모르는 무지에 불과하다..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여전한 오만과 자애의 연속이다.
사단의 송사는 언제나 교만한 사람을
덮친다..
아직도 뭔가 스스로 자신의 의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는...
피의 적용은
심지어 우리가 잘하고 있다고 믿는 모든 순간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보증수표이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마음이 고울 것이고
음악을 사랑하면 음악처럼 풍부한 감성의 폭이 있을 거 같고...
또 그림을 사랑하면 어떨까요...
.....
이렇게 사람들은
어떤 것을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 그것의 깊이대로
깊어질 것이며
그면에서 취하는 것으로 인해
풍부해질 것이며
닮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잘 키우려는 사람은
아이가 엄마태속에 있을 때부터
태교라는 것을 하여
좋은 음악과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기타등등
좋은 품성을 지니도록 하여
자라면서도 좋은 것만 보고 먹고
듣도록 배려를 하여줍니다.
물론 아주 틀린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부모들은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를로 만들기 위해
어려서부터 키울 때 말씀으로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성경이야기도 들려주고
말씀도 읽게하고....
............
기원전 200년경에 형성된 유대교의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들의 경건한 생활과
성경에 대한 지식에 대해
아주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좀 더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이 어떠함에 대한 자만함이 생기며
그에 따른 위선적인 행동에 빠지게 됩니다.
또한 유대교의 다른 종파인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천사와 영을 믿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마태복음 3장과 23장에 의하면
침례요한과 주님에 의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비난받게 됩니다.
그들의 출발은 적극적인 것에서 시작되었지만
결국 외식과 빗나간 진리에 이르게되는 것입니다.
....................
음악자체가 좋아서
또는
그 음악을 지은 사람의 정신세계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는 경우도 있거니와
음악을 자신의 감성수준의 악세사리와 가벼운 유흥으로 여길 때
그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을 봅니다.
또한 그림을 그저
사물의 외면을 묘사하는 기교로 본다면
와....똑같이 그렸네...라는 평가의 수준에 머물 것이며
남들이 하지 않는
또는 남들이 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새로운 표현법의 발명정도이면 또 역시 그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나
그림과 그림을 그린 사람은 하나이다라는
(그런 미학평론이 있다고 들었음)
아니 하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림에 대한 평가는 아주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
성경에 대한 접근도
접근하는 사람의 어떠함에 따라 다른 각도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문적인 접근으로...
어떤 문화적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또는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기 위한 신학으로
많은 사람이 이런 저런 이유로 성경을 상고하나...
성경을 대하는 것의 중심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마음의 뜻에 두지 않을 때
말씀은 생명의 방식으로
사람의 존재안에 스며들지 않고
밖의 엑세서리처럼 장식이 되며 외식이 되고 말게 됩니다.
성경은 확실히
지식을 위해 있지 않고
어떤 것을 이해하기 위해 있지 않고..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기 위해
그 본질의 변화를 위해
신진대사로 침투되기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하면 말할 수록 아주 어렵게 보이나
주님 자신은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은 돌아가시전에 자신이 죽으셔야만 하는 이유를 제자들에게 누차 말을 하셨지만 그러나 정말 그것을 진지하게 받지 않았던 것은 역시나 이성적인 판단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사랑으로 인한 믿음보다는.......... ,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인간세상에서의 가장 큰 삶의 주제는 역시 사랑이다. 그래서 어디가나 사랑타령이고 사실 사랑을 모르는자 인생을 모르고 기실 인생에 실패한 사람이다. , 허상인 인간사가 실재의 그림자라면 실재인 조물주와의 관계에서 그 하이라이트에 이르는가 그렇지 못한가는 역시 사랑으로 인한 우리의 온 존재가 그에게 점유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머리로 생각하는 이성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생각과 힘으로 즉 온 존재가 사랑으로 그에게 얼마큼 집중되는가 하는 것에 달렸음을 말한다.
그래서 결코 빠지지 않는 그 실존했던 예화의 주인공 마리아가 거론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이 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행한 일이 꼭 거론되리라 했던 이유를 알 거 같다.
이 여인이 향유를 예수께 붓던 그 사건자체가 일어난 훨씬 그 이전부터 이 여인의 온 존재는 예수께 열려 있었고 주님 한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모든 것 주님의 말씀하심 전체가 이 여인에게는 실재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주님의 죽음을 실재하는 사실로 받았고 주님의 죽음을 위한 장례를 미리 준비하려는 마음을 갖게 한 것이다 그녀의 이런 태도는 주님을 따랐던 모든 제자들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마음가짐이었다. 그래야 주님이 누구인가 주님이 무엇을 하시려는가를 보게 되며 주님이 어떠함이 우리안에 계시되고 빛비추이며 주님 자신을 우리안으로 주입하실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사람은 우짜든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러나 무조건 절대적인 사랑을
하라고 하진 않으신 걸 봅니다.
어떤 원수된 자가 고의로
하나님의 자녀를 해꼬지 하며 오랫동안 괴롭혔는데
...........
어느 날 보니 그가 이 땅에서도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목마르고 주려있는 걸 발견할 때
잘 되었도다~~ 하며
쾌재를 부르며 속시원히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를 돌봐주고 필요를 공급해 주어야합니다.
..............
그러나 그렇게 해서
그를 얻을 것이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 숯불을 그 머리에 쌓는 것이
될거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더 고약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길....원하지만
피할 수 없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길은
자기에게 빚진 자에 대한 것입니다.
그 빚이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그 밖의 다른 정신적인 종류의
빚을 진 것이 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탕감하여 주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빚을 그리하셨던 것처럼...
그를 마음편히 가게 해주는 것입니다...
............
그리해서 그도 그러한 사랑을
똑같이 베풀 수 있을지 모릅니다.
............
그리고 남은 한가지 길은..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택하셨던 우리들에게 그러하신
것처럼......
마치 진주조개의 살을 파고든 모래알 처럼
그렇게 와 박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뱉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외려 감싸고
보듬고
덧입혀
하나의
진주알을 산출해내야 하는....
조개인 우리에게
모래알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뱉어야 마음은 편한데
그를 모른척해야 살 거 같은데
그가 떠나주면 더 좋겠는데
안으로 파고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프지만 끝까지 사랑해야할 존재가 있습니다.
........
이러한 사랑은 얼마나 귀하고 귀한지요...
,,,,,,,,,,,,,,,
..............
살아가다보면
우리의 삶의 노정에서
우린 여러 일을 만나고
여러 사람을 만납니다.
나라는 존재는
엇갈려 가게 되는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마음을 품게하는 사람일지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나에게 닥치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재산을 다 팔아 내어놓은 주님의 역사의 되풀이였을 것입니다.
그 때 물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처럼
소극적인 현상도 나타났었지만.
이것은 성령의 어떠함으로하지 않고
육체의 자랑으로 삼으려는
잘못된 의도를 폭로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중국에서의 부흥의 시기에 동역자들은
어떤 성도의 제물은 보류하여
그로 하여금 다시 주님앞에 고려하도록
권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마 성령의 역사인지에 대해 확신이 없기에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원하여 가난하게 됨
그리고 빈곤 속의 풍요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인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사람의 편에서 볼 때
동일한 수준으로 놓을 수 있음을 주님이 보여주십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사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는 없지만
사람은 이렇게 주님을 재물과 동등하게 놓아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재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의 현재의 처지가 어떠한가 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음을 봅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재물에 대해 담백하고
부하다고 해서 재물에 집착한 것도 아닙니다.
모든 건 그 마음에 달려 있는데,
그건 살아계신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공중의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의 원칙에 대한.
오늘 우리 나라의 이런 물질적 풍요는
살아가면서 피부로 느끼는 급격한 변화인데..
언제부터 우리 나라가 이렇게 잘 살게 되었지 하는 ..
그러나 개인적인 풍요가 과연 교회의 풍요로
얼마큼 전환이 되었는지는 미지수입니다.
교파에서는 헌금을 목숨의 내어 놓듯이 열심히 하던 성도들이
회복에 들어와서는 헌금에 대해 자유로워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교파에서 하도 많이 당한데 대한 반대급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대전환을 가져올 부흥이 필요한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떤 분위기를 몰아 사람의 일시적인 감정을 요동케하는
혼안에서의 격동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와 움직이심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이 되어야 할 것이고..
억지가 아닌 사랑에 의한 내어드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개인이 아닌 단체적인 움직임이 될 것입니다...
문득 이런 부흥의 역사가 사모됩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말입니다.
교회생활에 막 들어온 새로운 분들이 당하는
가장 큰 시험은
(그분이 막 구원받은 분이건...
긴 그리스도인의 여정가운데 있었던 분이건...)
회복안의 높은 멧세지와
현실의 지방안에서의 교회생활의 사이의
큰 공간상 시간상의 괴리를
납득하며 이해하기까지의
기간을 어떻게 넘기느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우리에게는 다 종교적인 관념이 있습니다.
또 현재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건
나름 잣대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안의 바리새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실상과는 관계없이
높은 진리의 외양을 취해
이미 도달한 양 착각하고 있음으로
이런 시점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정죄의 대상입니다.
자신만 빼놓고는...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것을
자신이 도달한 양 신령한 모양만 있는 것도 위험하지만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모든 것을
가볍게 여기고
이론이라고 규정해버리고
아직도 변치 못한 많은 어두움을
심지어 인간적인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하는 것도 위험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땅에서 걷는 길은
너무나 긴 여정입니다.
그 가운데 산도 있고
골짜기도 있고
사막도 있으며..
오아시스에 잠시 머무는
기쁨의 순간도 있습니다...
다만 이 모든 여정에 주의해야 할 것은
보이는 외양으로 속이거나
속지 말아야할 것이며
넘어지거나
오해하거나
심지어는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 과정의 한 부분안에 정착하여
도무지 꼼짝도 하지 않는 자가당착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늘 전진하며 끊임없는 추구와 모색은
자기부인과 전에 잡았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
버림의 고통을 수반하지만,
..................
..................
교회안에서 우린 강한 자아에 대해 | ||
|
우리의 타고난 바 이런 저런 것은 다 문제투성이이고
우리의 영은 절대 신성 순수 오류가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영은 아무 문제가 없기에 영으로 돌이킨다고 하지만
그 영안에도
직감과 양심과 교통의 복잡한 기능이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더 민감하게도 되고
더 정결케되기도 하고
더 활발한 부어짐이 있게 되기도 하며
...
영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또는 더럽혀진 상태에 있기도 하며
또는 언제든 더럽혀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록된 말씀에 보면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우리 자신을 정결케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육의 온갖 더러운 것은 육체적인 쾌락의 범주에 속한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육을 타락하게 만듭니다.
우릴 타락케하는 많은 요소들이 장소들이 밖에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영적인 사람은
몸이 그 보양을 받고 필요를 채우는 것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는
아주 작은 사소한 것도 몸이 육으로 떨어지게 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알아야 할 것은
흔히 우릴 타락하게 하는 요소가 밖에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은 좀 더 옛날보다 더 타락해졌으므로,
(흥미롭게도 모든 세대는 그 나름대로 다 타락의 정점을 달리고 있으며
이보다 더 타락할 수 없다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우물가에서 맴돌다가 거기에 떨어져질까 두려워하는 부모의 맘으로
우물가근처에도 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제어합니다.
그러나 정작 경계하여야할 요소는 우리 육안에 있으며
(육의 어떤 강한 욕망은 잠시 제어를 받을 수 있으나
기회가 되면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버리기도 합니다.)
이 육은 밖의 규례나 금욕으로 제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섞은지
충분히 지난 모든 사람의 거듭된 실패의 기록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그러므로 자신의 본을 따라
과부된 어떤 자매들이 그대로 지내며 주님을 섬기도록 권면하고 있으나
인간의 본성에 대한 앎을 통해
과부된 자들은 시집을 가도록 오히려 권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은 일례로 이 땅에서의 모든 사람의 생활에 모든 상황에서 적용될 수 있는 것일 것입니다.)
영의 더러움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쓸 당시는 고린도에서 성행하고 있던
우상숭배와 그에 관계된 온갖 사상과 관례와 신화와 철학등이 혼잡됨과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이것을 적용한다면
우리 시대에 있을 수 있는 영적 위험요소로 대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육과 혼의 온갖 더러운 것이라 하지 않고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이라고 말한 점입니다.
이것은 육의 어떠함이 영의 어떠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육과 영이 그만큼 더러워지기 쉬움을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본능적이고 여리고 열려져 있기 쉬운.....
영은 하나님의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들
하나님의 기호들
하나님의 성향들
이것은 아주 섬세한 영역이며 또한 더러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영의 내적 부분들과 육의 외적인 욕망을 처리하고 보존하고 또한 민감하게 하고
적절히 보살피고 조절하는 것은
역시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는 부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혼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잘 동역할 수 있게 되길...
그렇게 훈련되길....
.
말라가는 육신속에서
새 생명의 풍요한 잉태를
이미 직감하며 느끼게 하소서
열심히 일한 자가 예감하는
느긋한 안식의
부드럽고 따뜻한 주님의 품을 느끼게 하소서
오랜 수고와 수치를 참아낸 후에
상주시는 이로 인해
보상받을 기쁨을 예감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사랑하는 이와 늘 함께 있음의
행복감으로
온몸이 떨리는 순간이 되길......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회복은 교회의 무오성을 주장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우리가 본 이상을 향해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 있는 과정중에 있음을
확실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마치 음식을 만들기위한 조리과정중에 있는 부엌으로
교회를 예를 들어 말하고 있으니까요
또한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같은 성숙한 분량의 지체가 있고
좀 더 자란 형과 누나의 구성원과
이제 막 태어난 장난꾸러기이며 말썽장이이나
사랑스런 아이들이 있는 가정으로 예를 들기도 합니다.
또한
치료받아야할 병들과 약함을 가진 환자들이
그 상하고 부패한 그대로 치유받는 과정중의 병원으로
빗대어 묘사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품는 범위가 이렇게 넉넉하고 편하고 안식이 있기에
우리가 많은 부분에 아직 미숙하고 어리고
그러므로 오류를 범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으나
넘어져도 몸안에서 넘어질 때 바로 설 수 있고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안식을 누립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천연적인 관념으로 이해된다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하는 것은
머리를 유지하고 지탱하고 떠받치고 있는 것은
몸인 우리 자신이 아니며
반대로 몸을 유지하고 떠받치고 지탱하고 공급하고
모든 신진대사를 조절하는 것은
머리이기 때문에
(실제로 의학적으로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몸의 구성원인 각 지체들은 절대적으로
머리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해야만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몸이 머리와 긴밀한 관계에 있을 때
이런 목양과 돌봄과 치유와 고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체라는 것은 먼저 머리와의 관게에서 지체됨을 말합니다.
각 지체는 각각 머리와 관계를 갖습니다.
그 뒤에 자라면서 다른 지체와 연결되고 상합하면서
유기적으로 건축됩니다,
그리그 그와 동시에
각 지체는 각각 그 안에서 자람과 씻김과 변화와 새롭게 됨의 과정을 거칩니다.
몸안에서 라는 것이 보장이 되는 경우는
지체인 내가 머리와 합당한 관계를 갖게 될 때라는 것을 확실히 해야합니다.
이 형제님은 성경의 말씀중에 분명히 교회는
이땅에서 현존하는 몸으로 건축될 수 있다는 청사진을 보셨습니다,
그 청사진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그리고 진지한 영적 상황을 요구합니다.
그 절대적인 진지한 영적 상황은
우리의 천연적인 이해와 방법과 기교로는 도달할 수도 이룰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청사진은 너무도 완벽하기에
청사진을 놓고 마치 건물이 다 된양 미리 기뻐하고 꿈꾸는 것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그리고 너무 일찍 그런 교회의 완전성을 믿기에
현재의 교회도 무오하다라는 착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봅니다.
즉
교회의 완전한 청사진과
현재의 우리의 그에 미치지 못한 실상의 괴리사이에서
환상과 착각속에 현재의 교회의 모습 역시 완전하다는
오류에 빠질 수도 있으며
교회는 완전해야한다는 원칙에 입각한
상상된 영적 모습을 (과연 그런 모습일까는 차치하고서라도) 연기하는
어색한 영적인 모습을 연출하는 상황을 보일 수도 있으며
일종의 전형적인 어떤 틀을 만들어
그 모델에 일제히 끼워맞추는 기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교회의 완전성에 이룰 수 없을 거라는
좌절과 무능에 빠져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도달해야할 저쪽에 이미 완성된 청사진이 있다면
그 중간의 길에 믿음이라는 징검다리가 놓여져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저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믿어버리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한발한발 성취해가며 확인하며 신실한 하나님을 체험해가는
실제적 노정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나아갈 힘은 믿음의 실재적 체험적 노정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책임져야할 실제적 영적 노정입니다.
대신 묻어서 갈 수 없는 길이란 것 역시 분명합니다.
믿고 구원얻음이 개인적인 관문인 것처럼
주님의 몸으로 건축됨 역시
개인적으로 책임져야하고 체험되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땅에 계실 때 사람의 어떠함을 알므로
자신을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안에 건질 것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자신이 택한 백성을 향해 누구야 누구야 부르며 통곡하시는
좌절을 어쩔 수 없이 토해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정죄하고 판단한 것은 그렇다치고라도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조차도
그분이 정말 누구인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실수 연발에
물질적인 관념과
세상적인 지위다툼을 일삼는 혼돈속에
갇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찬송가 가사에도 있듯이 외로운 길을 가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오해하고
주님의 길을 오해하고
주님의 목적을 오해하고
주님의 뜻을 오해하고
자기 눈높이에 맞추어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나
주님을 명예나 지위나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이나
각각 사람의 한계안에서
그분을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행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은 뜻을 포함하고 있는지
우리는 아직도 잘 모르는지 모릅니다.
한평생을 살면서 어떤 우여곡절을 겪더라도
그 깊이안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높이에서
주님의 깊이에서
사람을 향한
그분의 사랑으로
이 땅의 그분의 제자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인데....
참된 그분의 어떠함에서 비롯된
사랑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
나는 압니다
라고 그 누군가는
말할 수 있는 분도 있겠거니와
저는 그 몇만분의 일조차도
그 곁에 가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때로는 정말 이런 저런 봉사도 하고
섬김도 하고
자매들이 할 수 있는 이런 저런 일도 감당하기도 했지만
어떤 일을 하고 안하고의 차원이 아닌
생명으로 역사하는 참된 깊이 안에 들어가서
행한 적이
있었던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깊이 안에서
행하였다 또는 한 적이 있다고
말 할 수 있는지.....
먼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지 못하기 때문인데.........
살면서 이런 저런 일도 당하고
이런 저런 모양들도 보고
이런 저런
세월들을 거치면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사람을 사랑한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오묘한 것인지를
좀이라도 알았다면
그나마 좀은 희망이 있을까요.
........................
그나마..............
.......................
우리가 우리의 한계에서 무엇을 이길 수 있을까요.
반대로 이기는 그 어떤 누구를 볼 수 있을까요
날이 갈 수록 이것이 더욱 의심스럽게 되는 것은
우리가 단지 이김 그 자체에 묶이고 이김을 원할 때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더욱 확인할 밖에
없기 때문일지................
진리적인 이론 상으로 생명이 사망을 이길 수 있건만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보기가 힘든 것은
마치 연료가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고
심지어 그 연료를 갖고 있음에도
그 연로를 자동차의 연료통에 넣고 달리게하지 못하는
어떤 부족한 한 단계를 넘어가지 못하는
한계안에 처해 있는 것과 같은 것일지요....
그건 아마도 사람자체가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 우리가
주님의 싯점에서 보는 것처럼
진지하고 적나나하게 보지 못하는
아니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첫번째 장벽일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다 아니어도 특정한 사람들을 향해 예외를 두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나와 배우자와 내 자녀와 또는 내가 사역하는 또는 봉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이며 요구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환상과 실상간의 괴리를 메우지 못한채 시간이 흘러가고있고요......
우리 자신 그리고 내 주변의 어떤 사람도
아니 인류의 어떤 영적 거인이라 할지라도 그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객관적 사실이 아닌
주관적이 뼈저림에서 오는 인식과 인정
흔히 말하는
두손 두발 다든 완전한 포기 완전한 항복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아니 다행스럽게 너무 늦지 않은 어느 싯점에서 이것을
체득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일이겠지요.
그래서 배우자에건 자녀에건
내가 몸담고 있는 주변의 교회의 형제자매들에건
또는 인도하며 봉사하는 장로들에건
일체 요구와 기대를 내려놓을 일입니다.
주님이 이땅에서 피조물의 형체를 입고 새삼 눈물을 흘리며
사람안에 있는
온갖 할 수 없음과 악함과 한계를 발견한 것처럼.............................
혼의 목자이신 주님앞에 나아가
정직하게 말하길 원합니다.
사역의 많은 말씀들
단비같은 성령이
우리 주변에 그렇게 많이
강물처럼 흘렀건만....
많은 말씀은
그저 머리위로 지나가는 빠른 화살처럼
덧없이 날라갔고
성령의 흐름이
우리 자신을 적시지 못했다면
당신은 아십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혼의 목자이신 주님..
우리의 생각 감정 의지를 살펴주소서
구부러지고 어그러진
모든 것들을 바로 세워주소서
그리하여
우리 혼의 구원을 이뤄주소서
우리 마음 눈을 열어
당신의 말씀이
우리 온 존재를 통과하는
이상이 되게 허락하소서
당신의 귀함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게 하소서
우리 마음대로 행하지 않도록
오직 당신만이 우릴 가게하며 서게하며
달리게 하소서
----아래글은 2004 여름 골로새서 결정연구...8번째 메시지..
롼 캥가스 형제님의 교통의 녹취서중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이 형제님은...이런 간증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내가 자신의 유익을 관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언할 수있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과 자신의 지방과 자신의 일과
개인적인 영성을 잊어버리고,
주님에게서 그분의 몸에 관한 부담을 받아야 한다."
이런 말을 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로 충만되고 흠뻑 적셔져서
그리스도의 생각, 그리스도의 느낌,
그리스도의 의도, 그리스도의 갈망으로 충만 되고
몸에 대한 필요가 그를 불사르고
그 자신의 존재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몸을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바울이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의미한 것이며
니 형제님과 리 형제님이
두 분의 사역 안에서 몸에 관하여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한 교회를 기대하는
이상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적인 교회 안에서 살면서
이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약에 따른 현실적인 교회 안에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 안에서든 개인적인 생활안에서든
우리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몸을 본 것이 부족하다는 데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몸의 실제는 지방 교회들 안에서 표현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지방교회들은 수단이자 절차로서
반드시 존재해야 합니다.
외적인 교회생활이 없다면 내재적인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교회의 실재인 몸을 만질 때만이 중심을 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몸인 지체들임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물질적인 몸에서
머리는 다른 지체와 상의하지 않고
중주 신경계를 통해 몸의 각 지체를 직접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어떠한 체계나 계급체나 조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생활의 첫째 원칙은
머리의 권위에 순좋하는 것입니다
몇몇 장로들은 지신들의 권위라고 느끼는 것에 대해
매우 강한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 자신은 어떠한가
당신이 성도들을 그러한 방식으로 취급할 때
당신은 직접적으로 머리 아래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매라 할지라도
몸의 질서아래 있다면 그들도 주님의 권위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머리를 붙든다면 우리는 어떤 개인이나 무리에 대해
특별한 느낌,
혹은 특별한 관계와 교통을 가질 수 없습니다.
몸안에는 우리의 선호가 있을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교통은 있습니다.
또한 한 영과 한 혼 안에서 봉사하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머리를 통한 것이어야 합니다.
심지어 아내와의 관계도 머리를 통한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가 머리에 의해 결정될 때
생명과 사랑과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의 체험에서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머리이시라면
성경에 관한 다른 해석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머리는 매우 분명합니다.
해석상의 차이는
어떤 지체들에게 머리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으며
그들이 머리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교회안에 발생하는 모든 차이들의 배후에 있는 참된 문제는
누군가가 머리를 붙들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참된 화평은 몸의 문제입니다.
거짓되게 남을 비난하고도 자신은 화평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자 망상입니다.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몸의 의식을 가져야 하고
몸을 위한 느낌을 가져야 합니다.
몸의 생명은 머리의 생명이 몸의 생명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자아가 만져지지 않고
타고난 생명이 파쇄되지 않았다면,
몸의 의식은 자아의식에 의해 완전히 봉해졌기 때문에
사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몸의 의식을 갖고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몸안에 사는 것은 지대한 공급을 가져다주지만
그것은 또한 지대한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한 지체가 고난 받을 때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느낌은 생각의 구조,
즉 사물에 대한 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메시지를 들을 때
우리가 실제로는 말한 적이 없는 것을 듣습니다.
원인은 우리 모두가 정신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자아와 대립됩니다.
몸의 이상을 보지 못하게 하고
몸을 실행하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은 자아입니다.
마침내 오늘 복음텐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네요.
마침,
대학생야외모임에 갔었던 지체들이 합류해서
참여인원이 대폭늘어 근사한? 분위기일때 찍을 수 있었습니다.
매번 대 여섯에서 열명정도의 사람들이 텐트안으로 들어와
책도 받아가고 등등을 하는 거? 같습니다.
저로선....
열악한 상황?에서 찬송을 열심히? 부르는 파트라 다른 것을 관심할
여유가 없어 정확한 것을 알 순 없습니다만.
찬송부르는 입장에선
엠프시설이 좀 갖춰졌으면 하는 ....
그래도 처음보다는 좀 이력이 붙어서 목도 안쉬고 목소리 합체?도 잘 되는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