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이 땅을 지배했던 세력이
그 힘을 잃지 않기위해 안간 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몇년간 이 땅에서 누렸던 자유가 그 어둠이 마치 멀리 있기라도 한듯
오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둠은 교회를 빛으로 더 드러내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빛이 될 수 있는 것은
세상보다 더 선해서도
세상보다 더 우수해서도 아니고
단지 살아계신 하나님앞에 보다 더 정직하게 될 때이며
그래서 고침받고 씻김받고 새로워질 수 있을 때라고 여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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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의 주제는 주님앞에서 뿌리깊은 감춰진 생활입니다.
문득..
이렇게 교회안의 사이트이긴 하지만,
자신의 생활의 이런 저런 방면을 공개적으로 열어놓고
심지어는 밥상에 올려논 반찬도 보이고
소그룹할 때 이런 저런 접대로 하였다고 생색도 내고
개인의 일상사도 미주알 고주알 열거해 놓는
저의 블러그야말로
경박함과 나댐의 극치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
그러나...
감출 때가 있고 드러낼 때가 있다면,
아마 인생에서 한 시기와 또 다른 한 시기에 낀 공백의 때인
이 시간들이 아니면
..또 이런 여유와 정리의 시간을 갖을 수 있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이런 기록이 긴 교회시대의 어느 한 싯점에서 어떤 한 사람이
있었노라의 작은 전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중략하고)
그동안 교회생활하면서
복음전파의 이런 저런 실행들에 참여를 해 보았습니다.
문두드리기 실행부터,
이런 저런 복음집회,
그리고 5일장날 짝지은 자매들과 함께
좌판벌인 상인들에게 찾아가 복음전하기.
이제까지 해본 것중에 제일 좋았던 것은
대전에서 교회생활 할 때
시골장날 좌판벌인 노점상이던 상점안이든
찾아들어가 쭈구리고 앉아 말을 건네던 때
....................
그리고 지금 복음텐트는 과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지역은 비교적 늦게 시작하여 아마도
삼주정도 ?의 이력.
.
집회소에서 가까운 이수역 근처는 저의 지역이 매주 복음텐트를 치는
찜 장소입니다.
서울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시위문화가 정착한 곳이죠...
때로는 일인 시위 또는 맘맞는 사람들끼리 몇사람 모여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지 복음텐트가 그렇게 돌출적이거나 불편을 끼치는 거리 점유로
보이지 않는 느낌이 저는 들었는데...............
복음텐트를 설치하고 일대일 상담의 장의 외모가 갖춰졌기에
꾸준히 하기만 한다면 결실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사진기는 매번 가져가지 못하고
오늘은 비가 오는 가운데 우산을 쓰고 찬송을 불렀기에
..................
진실한 것이 무엇인가?
정직한 것이 무엇인가?
사람으로서 이땅에 태어나고 사는 동안
자신이 한 모든 행동과 일에 있어
그 모든 것을 오롯이 책임질 사람은 바로 자신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가감없이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사람들의 인정과 시선과 칭찬이나 연민이나 판단이나 정죄같은
사람사이의 관계나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의식할 수 있는 한 오직 한 번뿐인 인생길에서
무엇을 해야하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며
계속 정직한 길을 모색하자.
사람의 한계에 대해
사람의 눈멈에 대해
주님은 불쌍히 여기소서...
사람이 자신을 속이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을 속이는 한
결코 긍휼히 여김을 얻지 못할터이니
혹 심판의 불을 머리에 쌓는
그런 어리섞음에서 우릴 구원하소서...
그러니
힘을 다하여
정직해지자
그리고
진실하게 살자.
참 사람이 되자.
*작사:morningstar / 작곡:Eugene / 편곡:Eugene*
건강을 달라
이땅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부터 부딪히게 되는
모순된 상황들을 만나게되는데
무엇보다 가장 절망스러운 것은 자신안에 있는 모순들입니다.
다른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실망도 크지만
안에 타락한 악이 가득한 자신을 느끼되는 순간부터
삶은 안팎으로 견딜 수 없는 모순으로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리고 어느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우리 밖의 그리고 우리 안의
모든 모순된 일의 원인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
한 조상 아담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임을
마침내 알게 됩니다.
또한가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모순이 해결되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전적으로 우리가 죄를 짓기도 전에 우린 죄인이었으며
동시에 우리가 방법을 찾기도 전에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
그러나 실상을 보면.
사실은
모순은 더하여진 셈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죄인의 본성을 갖고 있으면서
또한 그 죄인이 아니라는 모순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를 한다면
모든 타락의 가능성을 지닌 죄인아닌 죄인
이라면 어떨까요.
이 모든 모순의
그 실타래의 한 가닥을 풀어나가는 몫은
여전히 우리에게 달려 있어
거듭한 우리의 영
주님과 연합된 그 영을 따라 살아라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럼 또 한가지 절실한 의문이 뒤따라 옵니다.
영을 따라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것인가.
.....................................................
(그냥 영을 따라 살아..라고 말하는 것 말고
정말 묻고 싶습니다.
정말 형제님은 혹 자매님은 영을 따라
사는 것에 대해 알고 체험하고 계십니까)
민족적 성향이란 것이 때로는 주님을 추구하거나 그분을 전파하는 데
쓰임을 받기도 하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드러남으로 종교계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2007년 서울 잠실운동자에서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복음대행진은
한국에 있는 지방의 터위의 교회의 성도들에게
대로에서 주님의 간증으로 서 있었던 시간으로 큰 의미를 던져주었다고 봅니다.
저역시 그동안 많은 대 집회를 참석했지만, 능동적으로 움직였던 집회였기에
기억에 남는 추억으로 의미를 가집니다
새삼..사진을 잘 보니 기동을 못하시는 분들도 휠체어를 타고 다들 참여를 하셨군요.
아이들도 중고등부학생들도........
어제 저의 지역은 가까운 사당에 있는 태평백화점 맞은편에서
복음텐트를 두번째 실행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목이 맛이 갔는데,
그전날 노무현태통령의 서거소식에 눈물을 흘린 연유도 있겠지만,
길거리에서 한 시간이상 계속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더니 목이 쉬었습니다.
(카메라가 없어 촬영을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길옆 매연냄새가 계속 나는 곳에 복음텐트가 설치되어있었습니다.
남편형제는 공기않좋은 곳에 오래 있으면 별로 안좋습니다.
............오는 길에 머리가 좀 띵~하다고............
형제가 등산을 가는 대신 복음텐트 한쪽 끝이라도 잡아야겠다는 부담으로...
저도 복음텐트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마도 다들 그러하셨겠지만 그래도 찬송을 크게 부르고
주님을 큰 소리로 선포하고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뻥 뚫리는 시원함과 신선함을 얻었습니다.
물론 텐트안으로 연결된 어떤 작은 사람 외로운 사람 과부와 어린아이로 예표된
이땅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새롭게 다가간 어떤 계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여러 다른 분들이 찍은 사진을 모아온 것입니다.
일일이 허락을 받지 못한 것을 양해드리고 허락해 주시리라 믿으며...감사드립니다)
<아래 글은 원문 http://blog.naver.com/r_wj?Redirect=Log&logNo=60040270653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부흥전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서 각처 교회에 영화(靈火)가 붙었다는 일이
반드시 조선에 희망을 초래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도 과거에 경험한 바이요,
사회 전반이 기독교적으로 변하여 상고(商賈)*까지도
예수쟁이 행세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이 되는 일도
조선에 희망을 약속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은
서북지방에서 벌써 시험제(試驗濟)*가 된 일이었다.
그 밖에 신학을 지원하는 청년이 많음이라든지
독립 전도의 비장한 결심으로써 구령(求靈) 사업에 진출하는 이를 보았으니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일로써 희망이 생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신학이나 전도에만 거룩함이 있고 갱생의 희망이 나온다는 것이 아니다.
양돈과 양계에라도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헤아리며
산란의 일자와 계보의 정부(正否)를 속이지 말면서
성전(聖前)에서 행하는 일이면 다 거룩한 일이요,
희망이 전족(全族)에게 임하는 대사업이다.
우리의 희망은
그대한 사업 성취나 혹은 신령한 사업 헌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그가 아무 사업도 성취한 것 없이
그리스도와 같은 참패(慘敗)로써 세상을 마친다 할지라도
참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와 함께 걷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노역하는 자면
우리의 희망은 전혀 그에게 달렸다.
- 김교신, ‘조선의 희망’ (1937년 3월)
* 상고商賈 : 장사치
* 시험제試驗濟 : 이미 경험하여 결론이 난 일
나는 무교회(무예배당)주의자였던 김교신 형제님이 말한 '진실한 인물'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하나님사람(God-man)-곧 '이기는 자'라고 생각한다.
위의 글은 “김교신전집1- 인생론”을 읽다가 동감하여 옮겨 적는 김교신 형제님의 글이다.
이 글은 참으로 예수를 제대로 믿어, 조선에 기여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관한 형제님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감격이 있다.
제대로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의 삶을 그대로 따라 사는 것이
오히려 대부흥의 역사보다 더욱 값진 일이라고
역설함으로써 제대로 밝히고 있다.
이 글의 첫 문단은, 선교와 전도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자주 인용하는 ‘평양대부흥’이라는 것이 결국에는 어떠했을까에 대해
짐작할 수 있는 평가가 담겨져 있다. 이 글이 1937년에 쓰여졌으니,
소위 평양대부흥이 있은지 대략 30년이 지난 후인데
그 30년 동안 그런 영성운동이 조선에 무슨 기여를 했던 것인가에 대한
선생의 비판적 어조가 드러난다
한 마음과 한 입으로 ~~(롬 15:16)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고전 1: 10)
.
한 때 교회가운데 피에스알피를 할 때...
개요의 한글자도 틀리게 외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습니다(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그래서 개요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기하려는 일이 있었습니다.
개요를 한토시도 틀리지 않는 것에 집중하다보니
외우기에 멈춰서서 그 다음단계로 넘어가는 것에 한계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우기 보다는 그 개요의 말씀의 깊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언할 때 유기적으로 교통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기도로 말씀먹으며 얻고 체험한 그리스도가
생활과 신언의 힘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피에스알피의 모든 것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한 마음과 한 입 그리고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서로 동떨어진 다른 상황이 아니라 같은 상황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말을 하라는 것이 그저 같은 단어와 내용을 되풀이하는
문자그대로의 같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교회의 신언집회에서
그러나 우리가 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마음 한 뜻 한 목적안에서
근원적으로는 우리 안에 주님으로 부터 출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안에서 우리의 영과 연합된 영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서울교회 1집회소에서 어떤 형제님이 오셔서 교통하신 것에
실제적으로 교회생활할 때 적용할 긴한 말씀이 기억납니다.
우리가 교회중에 교통할 때 영안에 없을 때
말하길 멈춰야 하며...심지어는 영안에 있는지 분명치 않다면
그 역시 말하길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입을 가지는 결과에 도달하려면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연합된 영안에 있어야 하며
한 새사람의 인격이 되신 주님자신입니다.
교회가운데 말하는 문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말하는 가운데
영과 인격이 있다면 그것이 주님의 말해내심이며
그것이 그 영이 말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린 자연 한 마음 한입으로 같은 것을 말하는 실재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생황에 있어 몸의 통제란 무엇인가...
원칙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머리의 느낌이 몸에 전달되어 나타난 반응을 말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린 몸의 통제라는 것을
머리의 통제에 의한 것이기 보다는
보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혹 제재를 받거나 혹 통과되는 것으로
인식해 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그 몸의 일부분으로서 말하는 지체들,
즉 사람들이 느끼는 느낌을 듣는 것 ,
더 나아가 그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을
몸의 통제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유한한 사람이
절대자이신 머리의 느낌을 온전히 그대로 전달한다는 것이
분명 바라는 바요 희망하는 바일지라도 ,
과연 정말 그렇다
그대로 머리의 느낌을 전달한다 라고 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구약의 시대에서 차라리,
갑자기 사람의 말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
당나귀야말로
그 동물의 한계를 넘어서 전혀 자신의 어떤 것이 섞이지 않은 채로
가장 순수한 상태로 머리의 뜻을 전달했던 놀라운 신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인성과 인격과 혼의 인식을 통과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느낌은
사람의 제한 사람의 느낌 사람의 동의를 거쳐서야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영적인 사람도
그 어떤 영성을 가진 사람도
심지어는 삼층천에 이끌림을 받았던 사도바울조차도
어떤 상황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고하고자 할 때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 백프로 그렇다라는 확증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땅의 어떤 사람도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낸 어떤 말도 그 말 자체가 흠없는 완성일 수는 없습니다.
우린 다만 한 시대 한 세대를 통해 점진적으로
사람안에서 그 한계안에서 말씀하시고
또 다른 세대 다른 사람안에서 나아가시는 그 여정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일은 아무도 확증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어떤 전환이 도래할는지
어떤 것이 또 회복이 되어야할는지
주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우린 여전히 마음을 열고 들을 겸손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변치 않지만
그 시대안에서 주님의 움직이심은
늘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기준은 주님에게 맞춰져 있을 때 그 움직임에 유동적으로
능동적으로 또한 순발력있게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계있는 사람과 사물과 장소를 그 기준으로 삼는다면
그 선에서 우리의 모든 것은 고정되어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다만
저의 서원을 기억하여 주소서.
남은 일생이
혼자이든
둘이든
다만
기뻐함이 유일한 일이라면
다른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에
헌신하여
주님께 부어지는 것조차
원하시는 게 아니면
그래도 기뻐할 수 있기를
남은 시간은
그렇게 기뻐할 수만 있다면
족하겠습니다.
다만 주님으로 인하여...
그러다
혹
어쩌면 상을 예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있든 없든
감히 바라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고
그저
기뻐한다면
기뻐할 수 있는 것으로
.............
일박이일로 포천으로 소그룹 섞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소그룹이 새로 개편되고 나서 서로 더 친밀한 교통을 위해서...
이번에는 포천교회로 방문을 갔습니다.
포천교회는 약 열두분이 있는데
우릴 점심접대해주신 가정과
숙박과 저녁식사를 제공하신 가정...
또 아침식사를 준비해오신 자매님,
그리고
점심을 오리훈제로 접대해주신...등등 너무나 많은 수고와 힘을 쏟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
첫날 낮에 허브랜드를 보러 가서..
허브비누와 허브차, 라벤더 쟈스민화분등을 구입했죠...
그리고 저녁에는 포천교회 형제님 댁에 가서
삼계탕 한그릇씩 다 비운다음...^^(정말 그게 다 들어가더군요)
가까운 학교운동장을 여러바퀴 도는 운동을 한 다음
...거실에서 둘러앉아 이런 저런 속내얘기들로 더 깊이있는 교통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철원교회(약 7분의 지체가 있다고..)에서 마실?을 오셔서
함께 풍성한 주일집회를 누렸습니다.
죄를 용서받음에 있어 제일 먼저이며 어쩌면 유일한 상대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에 의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배상을 할 것은 해야겠지만 이것은
죄를 용서받고 난 결과적인 행동이지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전제조건은 아닌 것입니다.
주의 만찬상앞에 가기전에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것이 있다면
먼저 화해할 것을 말하고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촛점은 죄를 용서받거나 배상을 하는 것에 있지 않고
화해를 하는 것에 있습니다.
참다운 화해가 있으려면 용서를 구하기도 해야할 것이며
배상도 해야할 것입니다.
법적으로 배상을 하고 받아도 화해가 없다면
그것은 계산적인 손해를 메꾼 것이지 화해의 차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요구는 보다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고의던 실수이던
살인이라는 큰 죄를 저질렀는데
그가자신의 행위를 보고 놀라고 돌이켜
주님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했을 때
주님은 그 큰 죄도 물론 용서를 하실 것입니다.
.
그런데 이런 뒤에 사람이 세운 법으로 인하여
벌을 받는 것이 필요할 것이냐 필요치 않을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떤 죄도 하나님에겐 그 죄인이 회개하고 자백하면
용서치 못할 죄가 없기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은 사람은
단지 죄에 대한 징벌차원의 단계를 뛰어넘습니다.
오늘날 주님은 우리의 도피성입니다.
구약에서는 우범죄을 저지른 사람을 위한 물질적 보호처였지만
오늘날에는 모든 돌이키고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은 자를 위한 도피성입니다.
온 세상이 심판아래 놓일 때 용서함받은 죄인은 그 심판을 피할 것입니다.
.
그런데
구약의 도피성을 신약에서 물질적으로 적용하여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은 죄인을 세상의 법이 응징할 수 없다는 것을 내세워
하나님의 대리권위로서 스스로를 천거한 카톨릭은
성당이라는 곳을 성역화하여 피신하여 들어오는 죄인들을 보호하는
거룩한 영역으로 성당을 사용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없을 수 있을까요?
여기에 두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생각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어떤 죄인이 하나님에게 참된 용서함을 받았는가를 판단할 권위를
하나님의 대리권위라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그가 신부던지 교황이던지..)에게 주었는가
누가 또 판단하여 확증할 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그 권위를 실제로 가진 분은 성령이기에
내게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다라고 한다면 누가 그것을 분별할 것인라는
난관에 봉착합니다.
또 한가지는 하나님이 그 죄를 용서하였다 하더라도
교회가 세상의 권위 위에 서서 세상의 법을 집행하는 것을
거절하거나 무효화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말씀에 있어서도 그렇지 아니하거니와
교회의 권위가 세상의 권위 위에서
세상의 권위를 좌지우지하기도 하며
막강한 실제적인 힘과 영향력으로 행사할 때
어떤 식으로든 오류를 범하는 것에서 안전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카톨릭이 저지른 수많은 오류 더나아가
교회의 권위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악행들을 저질렀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차적인 문제는 일단 뒤로 밀어놓고자 합니다.
용서를 받는 입장에서는
용서할 권을 가진 자의 처분에 맡기우는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놓아주고자하여도 또는 관원에 넘겨주어도
그렇게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땅에 있을 때의 그가 감당하여할 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 보다는 과연 하나님께 참으로 용서함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참으로 도피성으로 들어가
죄의 형벌을 받지 않는가가 더 큰 근원적인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
사람의 죄가 용서받는 것의 관건은
용서하는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받으려 하는 사람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심으로
사람의 모든 죄에 대한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실제로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이미 값을 다 치르었지만 그것을 아는
또는 모르는 모든 인류에게 다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모르는 것 뿐 아니라 단지 안다는 것만으로는 죄가 속량되지 않고
자신의 죄로 인한 영원한 형벌외에 다른 길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 죄가 하나님의 대신 피흘림으로 갚아졌음을 보고
부끄러움과 감사함과 사랑함으로 회개하고 통회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다시 원래로 돌아가 본다면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관건은
하나님에게 용서받음에 있으며
하나님은 이미 죄의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언제든 용서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나
그 죄를 용서받으려 하는 사람자신의 어떠함에 달려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그 용서받음의 조건은
죄를 자백하는 것에 있음을 봅니다.
그러나 그 자백은 단지 재판관앞에서
저는 이런 죄를 저질렀습니다라는 문자적 시인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죄를 통회하고 두려워하고 근심한
상한 심령으로 인한 돌이킴으로인한 자백인 것인가에 따라
용서받을 수도 용서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본인과 그리고 하나님만이 아는 문제입니다.
.
제 삼자의 입장에서
어떤 사람의 드러난 죄가 용서받았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는
결국 용서받은 죄인이 어떤 회개의 열매를 맺었는가
그 열매로 판단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의 용서받았음이 참된 것이었다면
그는 배상도 할 것이며 그 배상을 위한 구체적인
행위도 있을 것입니다 그
외의 많은 다른 것들 실재적인 사는 모습들에서
그 결과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람의 행위와 존재의 어떠함을 보고
과연 그가 참되게 용서를 받았는지 받지 못하였는지를
보고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만약 해를 입은 당사자나 유족이나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 후에 그 사람을 용서하고 덮고 사랑하고 감싸는가는
그렇게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런 것이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전제조건이 될 수도 없고
근본적인 용서받음을 바꿀 수도 없는 것입니다.
,
결과적으로
교회의 권위란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사랑과 긍휼을
확증하고
증거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임을 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는
이미 죄의 값을 치루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참되게 돌이킨 죄인들이 있으며
그 죄인의 용서받음으로 인한
평강과 안식과 회해의 결과물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만약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면
꼭 있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모든 일 뒤의
여타의 시간의 몫이여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단지 자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들러리의 장식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의 지위를 버리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 사랑을 위해
안락한 생활을 포기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 사랑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대신 목숨을 포기하는 것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그 사랑을 소유하기 위해
자신을 음부의 불로 태울만큼
질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
그리고
내게 사랑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런 사랑에만
눈을
돌릴 것입니다.
그런 사랑에만
손을 내밀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위해서만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것입니다.
모든 이름들을..
쌓은 모든 것들을...
그리고 자신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