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물을 버림은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하는 것임
주님누림
201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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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881.html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율법의 모든 면에서 흠이 없다 자부하는 이였습니다.
또한 재산도 많았으니 이땅에서 얻을 것도 부러울 것도 없었읍니다.
그러나 한가지 더 얻어야할 것이 있었으니
주님께로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네가 가진 모든 재물을 다 나눠주라
그리하면 네가 온전하여질 것이고 네가 원하는 하늘의 복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고 답하십니다
주님은 스스로 의롭다 온전하다고 믿는 이 청년의 가장 큰 약점이자 거의 모든 사람의 약점인
재물에 대한 욕심 집착 의지함의 문제를 드러내신 것이죠
그러므로 또 제자들의 몰멘 반응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사실 사람의 한계로는 이런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그건 그 당시 주님을 따랐던 자들이 부자여서가 아니라 물질에 대한 선생의 개념이
이땅에 빌붙어 사는 사람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에 대한 유일한 해답은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라는 것입니다.
이때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장담하여 말하길 우리가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무엇을 얻겠습니까
라고 질문한 것에 대해선 확실한 보상을 약속하셨습니다.
즉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의 재물을 포함한 모든 버림은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란 의미이겠죠
여기서의 핵심은 재물이 아니라 재물을 내어버리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하실 수 있음입니다.
재물을 버림이 내적 혹은 외적인 사람의 강한 의지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면
접수되지 못한다는 사실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재물을 버리냐 버리지 못하냐의 잣대로
구원을 얻는다 못얻는다로 설파한
많은 거짓선지자들의 행태가 기독교역사상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회복의 역사에서는
자신의 재물을 내어놓은 어떤 믿는 이의 경우는
그의 헌물을 되돌려 버린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이 재물을 내어놓음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의지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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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실을 한번쯤 걸러봐야 하는 이유
주님누림
2015-0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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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865.html
돈푼께나 있고 권력이 있는 남자들이 가장 빠지게 되기 쉬운 유혹이
성적 문란함인지 모릅니다.
그간은 정욕을 참지못하는? 남자들의 성적인 특성일지 모른다는 변명이 있었지만
최근에 서울시향여대표의 막나갔던 횡포의 폭로로 말미암아
이건 남녀의 성적 취향이나 억제력의 차이가 아니라
지위와 권력을 가진 자의 완악함과 만행의 문제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
성경에서도 이렇게 말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알려지면 알려질 수록 그 당시의 기득권세력들은 주님을 견제하게 되고
어떻게 하면 올무에 걸려들게 할까 궁리를 하게 됩니다.
주님이 유대땅으로 돌아오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가한가란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날엔 물을 필요도 없는 명확한 법적 문제이나
당시에는 관례로 남편 맘대로 아내를 버리는 것이 율법적으로 허락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답은 원래 그렇지 아니하니라고 답하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 모든 유대남자들이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를 허락하였는데요?라고 반문합니다.
당신이 모세가 허락한 것을 문제있다고 하십니까라는 얘기죠
이에 대해 주님은 모세가 허락한 것은 너희가 워낙 완악하였기 때문이다고
그들의 완악함을 상기시킵니다.
그들은 아마도 머쓱해져서 물러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뿐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 까지도 차라리 장가를 들지 않는게 낫겠다 몰멘 소릴 합니다.
허그.............
오늘날 어떤 종교에서 일부다처를 허락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구약의 관례를 내세우는지 모릅니다.
사실 이 문제를 생각해볼 때
성경에 기록된 모든 사실들은
여과없이 관례로 받아들여야할 것이 아니라
원래는 어떠했는가를 되집어 봐야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줍니다.
즉 하나님의 경륜과 그분의 영원한 목적외에 깃털과 같은 사소한 것들은
원래는 어떠했는가
우리의 영안에서의 느낌은 어떠한가를
항상 고려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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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사함을 확증받는 길 --용서
주님누림
2015-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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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850.html
이땅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은 사람들 사이에 부대끼는 일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누군가는 누군가에게 맘을 상하고 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가 굳어서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도 않는 반면
어떤 혼이 약한 이는
상대방이 의도하지 않은 일에도 맘이 상하여 실족하기도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근심하여 자신이 쉽게 법하는 잘못을 어떻게 탕감받을 것인가를 애둘러 질문합니다.
만약 누가 내게 잘못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주리까?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이 어린아이같이 쉽게 맘이 상하는 이가 실족하게 하지 않음이란
엄격한 조건이라면
누가 과연 천국에 들어갈 티켓을 얻을 것인가?란 뜻입니다.
주님은 이를 간파하시고 베드로의 편에서 말씀하십니다.
실족케 하는 일이 발생했다치자
그런 일을 행한 자는 어떻게 구제받을 것인가?
하지만 주님은 실족하게 되는 어린아이를 다루는 일을 말씀하십니다.
어린아이같은 이가 어떻게 이땅에서 행해야만
천국에 무난하게 들어갈 것인가라는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이 갚을 수 없는 큰 빚, 죄의 빚을 창조주에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죠
그래서 그는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길을 가다 자신에게 약간의 빚을 진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그가 자신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자
그 사람을 끌고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민망한 일에 대하여
주님은 대노하셨습니다.
너도 니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이건 도저히 길이 없게 되는 것이죠.
우리 모두는 다 주님앞에서 죄의 빚이란 감당할 수 없는 큰 빚을 탕감받은 자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너무나 큰 은혜와 복을 받으면
그래서 행복이 넘치면
사람의 맘은 주변의 모든 일에 너그러워지는 게 자연스런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자신에게 빚진 자에게 박해지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이건 아마도 나를 넘어지게 한 자
나를 핍박하고 타박한 자
내게 물질적이던 심정적이던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자에 대해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경우입니다.
주님은 이에 대해 강하게 책망하십니다.
이 예는 아주 합당하며 합리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사함을 받았기에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이땅에서 서로 물려있는 존재입니다.
누구도 죄의 빚이란 면에서 다 창조주에게 탕감받은 자이고
한면으로 사람을 실족하게 한 자이며
반대로 실족당한 사람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사함이 확증되어 천국에 무사히 들어가기 위한 길은
우리가 탕감을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의 우리에 대한 잘못도 탕감해 줘야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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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교회에게 주신 판단의 권위
주님누림
2015-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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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땅에서도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도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어찌보면
하나님과 사람이 보기에 어린아이같이
자신을 낮추는 작은 자들의 모임에
너무나 큰 권위를 주신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 작음은 세상이 무시해도 되는 유약함 무능함이 아닌
하나님앞에서의 낮춤이란 뜻이었나 봅니다.
더군다나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무엇이든 구하면 내가 이루리라는
약속을 주신 것은 또 어떤 보장인지요...............
하나님앞에서 합당한 이들이 합당한 느낌과 목적으로 구하면
주님이 틀림없이 들어주신다는 것이라면
만약 두세사람이 함께 간구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구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거나
구하는 것에 문제가 있거나 한 것이라는 거겠죠.
때로 주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느끼면
그저 아니면 말쥐 뭐?라고 가볍게 여기고 물러난 것이
확실히 불성실한 태도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네요........
또 두세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으면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선
보장을 넘어서
모든 믿는 이의 모임에 대해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엄중한 느낌마저 줍니다................
그러고보니
그동안 자매들끼리 몇몇 모였을 때 너무 편한 나머지
주님의 임재함에 대한 무심함 느슨함이
결코 그럴 수 없는 것이었음을 새삼 돌이키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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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그의 택한자을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주님누림
2015-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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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아이같이 작고
회복안에서 그리고 지방의 교회안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큰 영향력도 없고 그저 작은 지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교회안에 있던지 있지 않던지
큰 차이가 없을것입니다
라고 약간은 자조적인 말을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대해 주님은
누가 크냐고 논쟁하던 제자들에게 어린아이같이 낮아질 것을 요구하시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100마리 양을 갖고 있는 목자가 있는데
어느 날 1마리 양을 잃어버렸다
목자는 어떻게 했을까?
자신에게 있는 99마리 양을 챙기는 것으로 족하고 1마리는 냅둘 것인가
오히려 99마리는 일단 그냥 냅두고 1마리를 찾기위해 들로 산으로 헤메고 또 헤메일 것인가
마침내 그 1마리를 찾는다면 99마리를 기뻐하는 것보다 그 찾은 1마리로 인해 더 기뻐할 것인가
답은 하나님은 아주 작은 자라 할지라도 결코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주님 자신이 나를 찾기위해 참 오랫동안 헤메이셨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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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족
주님누림
2015-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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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828.html
실족은 발을 헛딛다라는 의미입니다.
발을 헛딛으면 넘어지겠죠.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엔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실족하다 혹은 실족하게 하다는 훨씬 더 강한 의미
즉 믿음에서 떨어지거나
하나님의 길에서 물러나거나
구원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하거나 등등
회생불가능한 나락에 빠지는 실패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영적인 노정에서
실족하는 일보다
심각한 것은 없기에
그런 일이 발생하면
심지어는 자기의 발이나 손을 찍어내며
차리리 눈을 빼어버려라는
엽기적인? 강한 결단을 요구받습니다.
사실 이 말을 문자그대로 해석하면 안되겠죠.............
그만큼 이 문제는 물러나서도 타협해서도 심지어는 긍휼히 여겨서도 안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리라는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극명히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너는 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다
너는 사단이다 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순간 베드로는 너무나 놀라고 황당했을 것이나............
우리에게도 실족하거나 실족을 하게 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절대로 나는 그렇지 않을 거야
주님을 떠나지도
교회생활을 접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꺼야
라고 확신하는 것이 더 큰 약점이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사실 너무나 큰 확신은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충격이 치고 오는 순간
너무나 쉽게 실족할 여지를 주는 것인지 모릅니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볼 때
교회생활에서 떠나거나 교회안에서 물의를 일으켜
실족하거나 실족하게 하거나하는 이들을 볼 때
너무나 큰 자기확신과 신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았음을 봅니다.
실족하는 문제를 어린아이같이 낮아지는 문제 사이에서 언급하셨던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은 그런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은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낮고 연약한 자로 여기는 겸손함은
실족할 일도 적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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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눈으로 볼 때 믿는 이는 소위 어린아이같은 존재
주님누림
2015-0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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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819.html
사실 이방인의 눈으로 볼 때
성경과 찬송가를 끼고 가던 그냥 집을 나서던
교회모임을 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던 티가 납니다.
어렸을 때 주일날 아침 웬지 그들의 티가 나는 차림새가
정형화되어 있어 시대착오적이거나 거부감이 드는 생경한 느낌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마도 약간의 경멸감 더하기 그들이 흘리는 선민적인 특별함에 대한 반감이었는지 모릅니다.
반대로 이즘은 좀은 정장스타일의 옷을 입고 나서는 입장이 되는 주일 아침이면
색색단풍으로된 등산복차림의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그들의 눈에 믿는 이들은 어떻게 보일지요
그들의 눈에 오늘날 믿는 이들은 주님이 말씀하셨던 어린아이처럼 하찮게 보이나
만약 이를 접대하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라는
주님의 보증을 받은 이처럼 보일는지요.
혹은 믿는 이들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세상은 혹독하게 보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비호를 받는 이처럼 보일는지요.
문득 궁금해집니다만...........
결국
세상은
믿는 이들을 영접하거나 실족케하거나
둘 중의 하나인 듯 싶습니다.
덧붙이자면 믿는 이에게는 하나씩 천사가 붙어있다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을 가지고 아버지앞에 서 있다 합니다.
이쯤되면 믿는 이의 권세는 이땅의 왕 못지 않는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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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어린아이에 대한 상반된 개념
주님누림
2015-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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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777.html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후
모든 자녀들은 성숙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야 합니다.
어린아이 즉 육체에 속한 자처럼 남아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면에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주문하시는 것도 있습니다.
.
마태복음 17장에 주님께서 죽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시자
제자들의 관심집중은 이러하였습니다.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다음 아마도 천국에 들어가실 것이고
당연 우리도 함께 가게 될 것인데
주님은 첫째이고 그다음으로 누가 큰 자가 될 것인가를 논하다가
결론이 나지 않자
주님에게로 와 판결을 받자하고 얘기가 된 것이겠죠.
세상에서야 맨날 싸우는 것이 이런 류의 일 때문입니다.
어쩌면 교회안에서도 은근 이런 위치다툼이 있을 수도 있겠죠
.
그것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낮아지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게다가 그렇게 낮아지는 사람이 천국에서는 큰 자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낮아진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더군다나 어린아이처럼 낮아진다라는 것은...............
그냥 그냥 내가 겸손한 모양새를 갖거나 낮은 위치에서 섬기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나
어린아이는 보호가 필요하고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보살핌이 필요한 문자그대로 미약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주님은 이렇게 표현하셨을까요?
그냥 반의적인 의미로 크게 되고 다른 누구위에 군림하고 힘과 권력을 갖고자 하는
제자들의 천연적인 관념에 대한 반개념으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님 문자그대로 낮아지고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사는
연약한 존재가 되는 의미로 말씀하신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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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의 입에서 얻은 성전세
주님누림
2014-1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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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758.html
성육신당시 주님의 이땅에서의 행적은
어느 한 작은 것도 그냥 무심하게 행한 것이 아닌듯 싶습니다
우리 선생님도 성전세를 낸다고 호언한 베드로의 실수에 대하여
주님은 해결책을 내었습니다.
세금징수원에 가서 우리선생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성전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라는 것도 아니었고
이왕 니가 그렇게 말하였으니
책임을 져서 그의 소유의 돈으로 메꾸라고도
혹은
재정관리자인 유다에게 가서 돈을 타서 내라고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어찌보면 아주 번거로운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바닷가로 가서 낚싯대를 던져 맨먼저 잡히는 고기의 입을 열어 주님과 베드로를 위한
더도 말고 덜도 아닌 딱 한세겔의 돈을 꺼내어 갖다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고기입안에서 돈을 꺼낸 적이 있는 어부가 과연 역사상에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이적을 낼 수 있는 분은 오로지 주님뿐이었을 것이고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지 모르나
사람의 능력의 한계내에선 참으로 신기한 일일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주님이 혹 이땅에서 땀흘려 목수의 일을 하셨으나
그건 보통의 다른 사람들처럼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
인자이신 그분의 제한에 순복하기 위해
목수인 육신의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일을 하였을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빵을 얻거나 고기를 얻기 위해 분투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원하면 그의 먹이도 아닌 동전을 물고기로 하여금 꿀꺽 삼켜 내 뱉게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주님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베드로에게 여전히 부족할 뿐 아니라 여전히 우리에게도
부족한 부분인지 모르겠습니다.
윗트니스리 형제님이 교통하시길 아마도 베드로는 바닷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서
많은 생각을 반추하였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소유한 주님이 어떤 분인가를 새롭게 또 반추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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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세를 내는 문제를 다룸
주님누림
2014-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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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723.html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은
그들의 삶이 주님을 향한 순간부터
그들 주변의 모든 관습과 관례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갖아야합니다.
그런 것은 단지 세상의 풍습과 관례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종교의 관습에서도
돌이켜 새로운 관점으로 대해야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성전세를 내는 것에 대한 베드로의 실패는
여전히 주님의 제지들도 주님전의 구약의 관례에 묶여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실
유대인으로서 성전세를 내는 것은 예외없이 절대적인 것이었겠죠
왜냐면 그것이 단순히 세금을 내는 문제가아니라
자신의 생명의 속전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걷는 이가 베드로에게 너의 선생은 성전세를 안내냐?고 시비를 걸때
베드로는 아마도 갑자기 뭔 일에 찔린 것처럼 화들짝 놀라 낸다~!라고 선언을 하고 말았을지요.
사실 소위 기독교의 어떤 신자가
회복안의 너희는 이런 저런 것을 하지 않느냐
이를테면 너희는 목사도 없고 인도하는 자도 없냐
혹은 집회중에 누구든 마구 일어나서 돗데기 시장처럼 말을 한다며?
라고 그들이 전통과 예배방식과 우리의 모임의 방식이 다름에 대해 시빗조로 딴지를 걸면
화들짝 놀라서 우선 변명부터 하려는 우리모습이 혹 있지 않았을지 생각을 해 봅니다.
주님 당시에 유대교를 대하여 시대가 바뀌었음을 선언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부담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이 세대에
기독교의 타락에 대하여
회복의 기치를 든 우리는 좀 더 용감하고 직설적으로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하여 반 간증으로 일어났는지
그저 말뿐 아니라 우리의 실행에 대하여
혹 그저 기독교의 관습을 무심히 따르는 것이 있지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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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의 상황에서 주님을 제대로 아는 일에 대하여
주님누림
2014-1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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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704.html

우리가 믿는 주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는 정말 그분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한계내에서나마 힘껏 이해하고 있는가?
만약 그분의 신성의 발현을 주님의 성육신시대와 같이
이 시대에 우리 눈으로 바로 앞에서 보았다면
우리의 상황은 그 전과 어떻게 달라졌을지.........
헌데 그 당시의 제자들에겐 별로 그렇게 크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는지요
간질을 앓는 아이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자
주님은 그들의 능력이나 은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작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덧붙여
그들의 믿음이 겨자씨만큼만 된다 하더라도
산을 옮기거나 하지못할 일이 없을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선 주님은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그리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대부분의 우리 사람들이 그렇듯이 제자들은 자기의 귀와 마음에 닿는 것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죽은 자도 살리고 귀신도 내어쫓는 절대자인 주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야하는가 왜 그런 약함과 무기력과 지는 자의 위치로 전락하려는가
라는 의문으로 근심에 빠집니다.
분명 주님은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
우리가 만약 이런 상황에 놓여진다면 어땠을까요?
주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기대한 반응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시대가 악하고 믿음의 시험이 임할 때
우리의 반응은 어떤 것이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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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피터지게 싸워야할 실체는..........
회복자취
2014-1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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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678.html

사람이 자기 목숨을 걸고 추구하려면
그것이 그만한 가치가 있음을 봐야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고 하신 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요구하시지만
제자들이 과연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까요?
누가 크냐
누가 주님의 오른쪽 자리를 차지하냐고 싸우는
그 한계에 있는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자신을 따르게 하려면
하늘에 속한 광경을 볼 필요가 있었는지요..........
해서
주님은 제자들중 핵심멤버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중 이런 택함을 받은 이들은 정말 복된 자들입니다.
주님은 약간은 위험부담을 안고 제자들앞에서
물질의 한계안에 갇혀있던 신성의 어떠함을 표출하셨습니다.
그 모양은...........
얼굴이 해와 같고 옷은 빛처럼 희여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한 빛으로 가득한 거룩한 신성의 어떠함.
어떨까요?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한번쯤 이런 광경을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본다면
과연 십자가이던 어떤 고난이던 물불을 가리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요?
고통없이는 얻는 것이 없다
공짜는 없다는 건 역시 영적인 영역도 해당되는 것일까요?
유난히 추운날 새벽
유난히 붉게 시작된 새벽의 햇살이 참 경이로웠습니다.
궂이 앞으로 혹 닥칠 고난을 미리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뒤의 영광이 얼마나 클지
자연의 아름다움조차 말해주고 있는 걸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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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제 정선의 진경산수에서 알게 되는 사실
일상누림
2014-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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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659.html
겸제 정선의 산수화는 진경산수화의 범주에 속합니다.
즉 실재의 풍경을 보고 그렸다는 것이죠
18세기의 그가 본 실재의 풍경은 어땠을까?
그가 남긴 산수화중
백운동 , 창의문 ,그리고 인왕제색도는
지금도 거의 같은 풍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위의 그림은 백운동 지금의 자하문터널 바로 위에는 백운동석이 있는데 그쪽 옆으로 흐르는
옛계곡길

자하문 즉 창의문 길을 멀리서 본 그림입니다.
지금도 그 길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찻길이지만...

그리고 이건 중고교 미술교과서에도 나와있는 인왕제색도
아마도 청운중학교입구 에서 마주 본 시각의 묘사
그런데 실제풍경과 이 산수화를 비교해보면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세한 모든 묘사를 생략하고 그가 본 인상의 큰 맥락과 줄기를 그렸다는 것이죠
중국의 여산? 풍경을 그린 그림인데 좀은 경직된 느낌입니다.
이 그림들을 보면 처음에는 대개의 성실한 화도가 그렇듯
세세하고 꼼꼼하게 그릴려고 애를 쓰지만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따라하기는 하지 않다가
후에 우리나라 산야의 그것도 자신의 주변의 풍경을
담백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본만큼 그리고 또 마음먹은 만큼 표현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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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스런 주의 회복이라고 말하는 우리들은...............
주님누림
2014-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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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서두
만약 우리가 교회모임에 가서 합당한 신언을 하지 않으면
그날 그 시간 자신이 집회에 간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다 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단언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
만약 나는 영광스런 주의 회복안에 있다라고 여기는 모든 성도들은
집회에 가서는
신언을 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힘을 다하여 잡아야합니다.
비유
침몰하여가는 세월호에서 어떤 이들은 위기를 감지하고 배 밖으로 나오는 기회를 붙잡습니다.
어떻게 되겠거니 혹은 방송을 믿고 가만히 있던 사람들은 배와 함께 가라앉고 맙니다.
매번 집회에 올 때마다 우린 이 둘중의 하나에 편승할 수 있습니다.
대의
신언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인 건축이 완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의
집회에 나와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분깃은 신언입니다.
신언은 영적 음식이고 음료이고 호흡입니다.
다른 어떤 곳에서보다 집회에서 신언할 때 가장 최고의 영적 분깃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호흡하고 먹고 마셔야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성숙할 수 있습니다.
오해
신언와 간증과 이론의 나열은 전혀 다른 영역입니다.
길게 말하면 은혜를 더 많이 받으리라는 건 착각입니다.
안에서 성령의 밀어냄이 없이 말하는 것도 주님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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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는 왜 우상을 이용하는가
일상누림
2014-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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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지인중에 천주교신자인 분들이 있었는데
자기들 맘대로? 천주교유물 전시회?표를 사서 가자하는 바람에
그냥 하릴없이 따라갔었습니다.
한바퀴 휙 둘러보면서 새삼 생각한 것은
천주교 유물들이 가진 한계는
예술적인 가치의 문제를 따질 것도 없이
그냥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물질적인 한계안에 하늘을 묶어 놓겠다는 발상자체가 무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육체는 악한 것이다라는 규정으로 인해
그들의 우상엔 인간적인 따스함조차 부재할 수 밖에 없기에
어떤 것은 으스스하기 조차 합니다.
그런데도 천주교 신자들은 그런 것에 대한 아무런 느낌조차 없는 걸까요?
새삼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좋아 육신의 한계에 제한되시고
사람의 고통 아픔 슬픔 질병 배고픔등을 몸소 체험하시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의 약함을 긍휼히 여기시는데
이젠
보좌 우편엔 사람하나님이 앉아계시고
다시 오실 때도 하나님사람으로
땅으로 오실 것이라 했는데도............
사람들은 인성을 배제하고 신성하게 되려는 넌센스입니다.
과연 그 오래된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는 학자들은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요?
천주교는 왜 우상을 이용하는가?
그 옛날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 하나님 면전에 있을 때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앞에 경배하게 하고 즐거워하게 함으로
많은 불만을 잠재웠습니다.
어리섞고 무식한 신자들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다. 맛도 없고 냄새도 없고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으니 라고 한다면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래서 우상이 필요한 것이다라는 논리입니다.
심지어는 어느 천주교 예배당앞에는 불상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위의 사진은 이탈리아 북쪽 도시 (피렌체?)의 어느 성당에 있는 금으로 만든 천국의 문이란 것인데
흠..금.......변하지 않는 금............성경엔 금이 많이 등장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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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회복자취
2014-1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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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호숫가로 가시던 산위로 올라가시던
각색 병든 자들 불구자들 혹은 주님을 보고자 하는 무리들은 계속해서 주님께 나아와
다 고침을 받고 또 배불리 먹고 돌아가니 자연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당시 종교지도자들조차 주님께 표적을 구합니다.
이이가 정말 하나님께로서 온 자이면 뭔가 증표가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죠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앎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의 정권유지였으니
그들의 기득권이 도전을 받는다면 어떻게 해서든 약점을 잡아야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마침내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아셨고
그리고 그때부터 주님은 그분의 오신 목적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셨죠.
죽고 삼일만에 부활하여 그들에게 경고를 할 참된 요나가 바로 나이다.
그후의 행적을 보면 유대지도자들은
이 위험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능력자 예수가 야기하는 도전을 막아내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고 그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서는 모른척하기로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전쟁을 시작할 무렵에 뒤로 물러가 마치 싸움에 진 자처럼
죽음을 택하겠다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바라고 따라온 각자의 목적에 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필요와 욕구와 목적에 따라 색깔을 달리 하는지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주의 회복에 있으면서도 각자의 숨긴 의도와 목적에 따라
믿음은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계시록에서 주님은 교회들에게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시는지 모릅니다.
우린 참 말을 잘 듣기 힘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귀에 듣기 좋은 말에만 귀기울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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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 연습
일상누림
2014-1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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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595.html

살면서 알게 되는 것 중의 하나
뭐든 단순하고 간단한게 좋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의 가장 큰 약점은 물질적 부피감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이죠.
그림그리는 도구들을 늘어놓고 있어야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전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리고 크면 클 수록 좋은 작업공간.
그런 의미에서 현존의 가장 간단한 그림도구는
인터넷 그림도구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단순한 그림도구는 동양화도구 입니다.
동양화도구는 그저 둘둘말은 종이하나 붓하나 먹물담은 플라스틱 통?
그저 한묶음의 부피에 종이무게같은 가벼움이 장점입니다.
.
언제부터인지 동양화재료로 그려보고 싶었는데
인사동에 갈 일이 있을 때 커다란 화지 한묶음 사갖고 와서
가지고 있던 묵과 먹 별로 질이 좋진 않지만 동양화붓을 꺼내놓고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사군자 산수화등 기존의 화면에서
먹물과 종이와 붓이 어떻게 서로 협력하는가를 탐색해서
한 몇백장쯤 그려보면 나중엔 자유롭게 먹을 갖고 놀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라는
소박하지만
나름 야무진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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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언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셨는가
주님누림
2014-1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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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퍼진 주님의 병고침에 대한 소문으로 인해
주님이 어디로 피해가시던지
사람들은 구름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그로 인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즉 그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은
주님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지위와 명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이 내세운건 유대교의 전통이었습니다.
정말 소가 하품하고 웃을 일입니다.
번데기 앞에서 감히 주름을 논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런데 주님은
자신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인지도자들에게 당할 딴지검에 대해선
예상하지 못하셨던 걸까요?
그들의 패역함을 그정도까지는 모르셨던 것일까요?
유대종교자들과 그들에 맹신하는 어리섞은 백성들로 인해
주님은 두로와 시돈 즉 이스라엘 변방으로 물러나가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주님의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은 가나안여인이 병고침에 대해 구하였는데
거기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시큰둥이었습니다.
여전히 주님의 마음은 자기가 택한 백성 유대인에 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의 주님에 대한 배척은 계속되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택한 땅에서 스스로 물러나신 것이 아니라
배척당하고 쫓겨나신 것이란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유대인들이 당할 끝없는 고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재림때 그들은 원통함과 통렬함으로 회개하게 됨으로 끝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유대땅에서 일어난 일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계속해서 주님을 배척하고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도자가 그러했고 그들을 따르는 신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회복이라고 안전할까요?
회복은 안전하다라는 공식에 안주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통과 습관에 젖어들어 그것을 내세우는 일이 없으리라고
감히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요?
윗트니스 리형제님이 언젠가 우리에게 경고한 말씀을 다시 되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이라고 말하지 마라
주님은 언제든지 새로운 사람들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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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제자들을 다루시는 예
주님누림
2014-1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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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lethim/53558.html
때로는 아주 사소히게 보이는 것들을
꼭 필요한 것만 기록하는 성경에 남긴 것은 다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의 기록을 보면............
주님을 따르는 무리들은 적지 않은 숫자이기도 했고
상황도 각기 달랐을 것입니다.
들판으로 떼를 지어 몰려온 이들은
단지 병고침이나 이적을 보기 위해 주님을 따라온 것에 불과하였으나
긍휼히 여기셨기에
병도 고쳐주시고 기적으로 먹을 것도 공급해주셨지만
한면으론
그들에게서 어떤 것도 바랄 것도
주님의 성육신의 목적을 위해 도움이 될 것도 없는 것은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제자들을 분리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게 하고
그밖의 무리들은 자기들의 고향으로 보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에 에워싸여 휴식도 없고 시끄럽고 번잡한 시간후에
주님은 혼자서 기도하는 시간
아버지의 특별한 임재와 교통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파도가 높게 일어 노를 젓는라 애를 먹는 제자들에게
새벽무렵 바다위를 걸어서 가셨습니다.
제자들은 화들짝 놀라서 유령이라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들은 여러 이적들을 보고 체험하고 나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주님께 고백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런 사실을 보고
주님을 보고 주님을 향해서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문제들 어려움들 두려움들 위에 서서
주님을 바라보기만 해야한다는 사실....
그것이 참된 믿음에 서 있는 것이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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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기적의 이면에서 볼 수 있는 주님의 성정
주님누림
201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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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자기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헤롯왕이 침례요한이 다시 살아온 것이라고 말하자
멀리 빈들로 피신하여 가셨습니다.
즉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기에 사람들이 쫓아오기 힘든 황무지로 피한 것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두려워하셨을까요?
인간적으로는 두려운 것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아직은 십자가를 위해 붙잡히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주님을 따라 여러 마을에서 오랜 길을 걸어온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여자와 어린이를 제외한 5000명이라면
칠또는 팔천명쯤 되었을지 모릅니다.
고대에 그런 숫자의 이동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절박한 여려 사정들이 있었을 테죠.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혹은 병고침을 얻고자
혹은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자 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주님이 누구인지 그분을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 관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들을 거절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주시고 더하여 오병이어로 그들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작은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 2마리와 떡 5덩이의 헌신으로
수천명이 먹고도 열두광주리나 남긴 이 이적자체도 너무나 놀라운 것이지만
자기에게 오는 어리섞은 무리들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절대자의 긍휼에 넘치는 성정을 더하여 감상해 봅니다.
자기를 무시하거나 오해하거나 엉뚱한 것을 추구할 뿐 아니라
폭정을 일삼는 이땅의 지도자에 빌붙어 사는 어리섞은 피조물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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