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교황이 전의 교황들보다 검소한 편이라고 하는데
광화문에서 있었던 행진이나 미사하는 걸 보면서
역시 천주교의 예배는 화려한 의복과
근사한 배경의 높은 천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없는 지루한 껍데기 의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아마도 유대교 성전의 의식도 그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사장의 화려한 의복
금으로 도배한 럭셔리한 내부장식등...
그런데
그것이 전부인 시절에
그것을 박차고 전면 부정했던
침례요한은 얼마나 파격적이고 용감한 인물이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구약의 마지막 제사장은 그렇게 철저히 유대교의 껍질을 깨버리고
시대의 종결을 선언하였습니다.
그런 그는 주님이 인정한 바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였습니다.
그런 그일지라도 결국에는 예수가 바로 그가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던
그 메시아인지
의심하며 절망하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토록 확신하며 예수를 천거했던 그였을 지라도..............
왜 였을까?
어쩌면 침레요한이 생각하고 바랐고 상상했던 예수는 달랐을지도 모르겠고
혹은 자신을 구하기위해 아무런 손길도 주지 않은 원망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이런 시험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혹에 핍박에 그리고 어떤 맘에 들지 않는 상황이 왔을 때
과연 예수가 하나님인가?
그리고 회복은 정말 회복인가?
혹은
현재의 교회의 상황을 보면서도
자신은 마치 회복의 일부가 아닌양 팔짱끼고 견제하는 자세를 취하면서 지내고 있던지
불구경하면서 남의 일인양 자신의 안위나 조그만 재미를 찾으면서 교회생활을 하고 있던지
......................................
이렇게 성경은 어떤 상황도 미화하거나 건너뛰지 않고 정직하게 기록하고 있으면서
많은 시사점을 오늘날에도 던지고 있습니다.
타락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들의 역사는 대립과 갈등의 양분의 구조로 이어져왔습니다.
가진자와 못가진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
영적인 것도 어쩌면 대립된 구조로 이어져 왔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대 사탄의 의지
믿는 자와 믿지 많는 자
참되게 믿는 자와 거짓 믿는 자들
순수한 자들과 순수치 못한 의도로 믿는 자들
이럴 때 순수하게 믿는 자 혹은 순수하게 믿으려 하는 자들은
어떤 형태로던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최초로 그들이 제자들에게 경고하신 말씀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이 받게 될 박해와 핍박 반대 고난 등등을 예언하셨지만
반대로 그들이 얻게 된 공급과 보호와 상급을 약속하셨습니다.
탈취자이며 꼼수의 귀재인 야곱은
그리스도인은 돈이 필요없는가?
성육신이 될 때부터
예수는 참 피곤하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서른이 되어 사역을 시작하고 나니 전보다 더 피곤하게 되었습니다.
각종 병을 고친다더라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문둥병자도 오고
백부장도 오고
제자의 집에 들어가 장모의 열병도 고치고 ,,
아마도 먹을 시간도 잠잘 시간도 부족하셨을 것입니다.
조금의 쉴틈도 없을 지경이니 사람들이 에워쌀 때
예수는 건너편으로 피할 작정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풍랑이 치는 바다한가운데서도
정신없이 잠에 곯아떨어지셨을 것입니다.
........................
아마도 주님은 사람으로서 살 때
누구보다도 힘들고 피곤하게 사셨을 것입니다.
.........................
그런 상황가운데서도 사람들은 그에게서 무엇을 얻는 것만 관심했습니다.
(산책로에서 발견한 대추 열매, 이렇게 파랗고 제대로 열매를 맺고 있는 대추나무를 첨으로 봤음.......)
성경에 대한 라이프스타디가 끝난 후
결정연구에 들어가면서 좀 더 깊은 영적 개념을 표현하다보니
리형제님의 말씀대로
전에 없었던 새로운 개념의 영적 언어들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교회에 연결된 새로운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토로하는 것은
회복안의 말씀이 너무 어렵고 용어가 낯설다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보통
회복안의 말씀의 수준은 대학원 수준이라고 으스대며? 말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맞는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중학교정도의 학습정도에서는 대학원에서 다루는 전문용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의 주님의 말씀은
주님이 산에 올라가서
따라온 무리들에게 설파한 소위 산상수훈인데
이해하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가져온 일화로 빗대어 친절하게 설명하시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의 권위는 말하는 용어의 난해함에 있지 않고
그 말씀안에 담겨있는 신성한 빛비춤으로 인해
그들의 마음과 양심에 찔림과 함께 만져짐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의 신언도
피차에 공급받기에도
새로운 사람이 듣기에도
심지어는
중학생정도의 아이가 듣기에도
어렵지 않게 말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멧시지를 읽고 나서 빛을 받은 것이나
깨달은 것이나
체험한 것을
평상적이고 일상적인 상황안에서 풀어서 교통하는 것이
멧시지를 요약하거나 크게 선포하는 것보다
때로는
더 어필하고
더 공급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밖의 결과를 놓고 정죄하는 것을 다룹니다.
하지만 신약의 율법은
결과에 이르는 동기를 다룹니다.
사실 우리는 다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노하는 잘못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하나님의 높은 율법의 요구를 부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약의 시작은 이렇게
............우리는 철저히 무능하다
.............우리는 철저히 할 수 없다
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얼마있다가
신약의 높은 율법의 요구에 부응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신령한 자아발현의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할 수 없음의 나락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아닌 그리스도가 하시게 하는..것을 조금씩
알아가게 됩니다.
(북악산 , 디지털 , 와콤ctl 480으로 인스피레이션도구로 그렸음)
어쩌다 보니 저의 소그룹에는 나 그림그려요 혹은 그렸어요 라고 말하는 3명의 자매와
바이얼린해요 라는 자매 1명과
대금불어요 라는 형제님 1명등
퍼센트상 예술쪽으로 종사내지 그냥 좀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 편입니다.
덕분에 저도 왜 난 쫌 다르지?라고 굳이 질문하지 않고서도
비교적 맘편하게 지내고 있음을 감사하면서도...............
한면
왜 회복안의 멧세지에서
세상이라고 말하면
항상 그 항목중에
가감없이 음악 미술등이 세상으로 분류되었는가?에 대해
꼭 할 수 없이 새롭게 소위 예술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이 아닐 수도 또 세상일 수도 있는
그 미묘한 다름을 설명해야하는 번거로움을 감당하는 불편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
만약 정말 소위 미술이 정말 세상이 되려하면
즉 진짜로 예술을 하는 사람은 결코 교회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림은 그냥 직업이 될 수 없나?
그렇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좀 그림을 그려서 팔거나 그림을 가르치거나 하는 것은
엄격한 의미로는 예술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술이란 믿음처럼 전면적인 삶의 방식 사고의 방식 존재의 방식이 되었을 때에야
의미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사실은 결혼생활도 인간관계도 사회생활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연을 갖지 않는게 피차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가장 이상적인 그림 그리는 사람의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해야할 여러 많은 일상의 일들에서 자유로워야하고
그냥 빈둥대다가 문득 어떤 날은 종일 그림그리다가 등등 모든 것이 기분내키는대로?
살 수 있는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림그리면서 아래 떨어지는 작은 먼지 부스러기가 문득 신경쓰고 더러워진 바닥을
걸레로 닦아야지..하는 거추장스런 일거리가 자꾸 압박하면 ?
..................
그래서 살림살이와 그림그리기가 서로 친하지 않은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생활의 먼지를 양상하지 않는 도구인
컴으로 그림을 그리는 쪽으로 선회할 수 밖에 없어서...
...........
결국 얼마전에 노트북과 가장 저가의 와콤을 구입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파스텔먼지를 날리는 그림도 가끔 그리면서.............
...........
내게 있어 그림은..
마치 일기쓰거나 메모를 남기거나 하는 일상의 기록같은 소소한 취미.............
중고등학교시절
역사는 정말 재미없는 암기과목이었습니다.
좀 나이가 들고 나서야
역사는 자신의 정체성과 민족의 정체성을 이해하며
사람의 삶을 이해하는 조망을 얻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구약시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과 규례는
어떤 사람들에겐 보다 더 깊게 내재적인 의미로 다가왔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그저 외형적으로 지켜야하는 굴레같은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신약에 와서
비로서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가능케하는
생명의 율에 대해 듣습니다.
그리고 그걸 취합니다.
안의 생명의 느낌에 따라
평강과 안식이 허락하는 것을 따라 행하는 것이 ,
치우쳐진 관념이나 육의 욕심으로 행하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고
더 기쁘고
더 만족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웟치만니는 1948년 메시지 중에서 '전쟁'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아래와 같이 표명했습니다.
전쟁의 문제에 있어서 구약의 상황과 신약의 상황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구약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시며, 가나안의 전쟁은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쟁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에서 우리는 오늘 화평의 사자들이다. 주님은 여기서 전쟁을 하지 않는다. 그분은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웠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유다가 사람들로 주님을 체포하게 했을때 베드로는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다. 그 때 주님은 즉시 "검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 하셨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하나님의 역사의 목적은 다 화목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칼은 다 칼집에 꽂혀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전쟁을 반대해야 하는가? 우리 자신은 전쟁을 원치 않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위치에 서야 하고, 우리는 전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전쟁을 반대한다는 말은 아니다. 전쟁은 정부의 일이고 정부는 싸울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켜야 한다. 주님은 우리로 전쟁하는 사람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영은 이 시대에서 화평하기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형제가 전쟁에 나가야 할 일이 생겼다면 반드시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 가서 "나는 사람을 죽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권위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당신을 처리하는가에 관하여는 그들에게 맡겨야 한다.
우리는 싸움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전장에서 형제를 대면하고 있다면, 그는 당연히 싸울 수 없다. 상대방이 죄인이라 할 지라도 싸울 수 없다. 만일 싸운다면 바로 그의 영혼을 영원한 불못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싸우기 위한 군인이 될 수 없다.
이상의 것들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국가 정권에 대하여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와 실행이다. 우리는 초신자에게 그들이 올바른 태도를 갖고 정직히 행할 수 있도록 이것을 분명히 말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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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것에 동의한다면 그리스도인인 어떤 형제는
며칠전과 같은 군대내 총격사건같은 순간에 임병장과 막닥트렸을 당시에도
총을 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만약 나라면 이런 상황에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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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여러해전이긴 하지만 미국의 부시가 중동에 군대를 파견할 때
그리스도인인 그는 그 전쟁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에 대해 회복에서 이름만 대면 삼척동자도 다 알만한 형제님이 말씀을 전하는 중에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이 聖戰 즉 성스런 전쟁?이라는 표현을 쓰신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곤혼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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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볼 때 어떤 상황에 대해
주님이 주신 영적인 느낌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는
개개인이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어떤 것을 택하는 것은
누가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말했다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안에서 말씀하시는 음성과 느낌을 따라
적용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은 것은
주님은 결코 한가지 일에 대해
다르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
그러므로 어떤 일에 대해 견해가 다를 때
내 자신은 그저 작은 감자에 불과하고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영적 거인이라면
그저 간단하게 내 자신의 것을 내려놓고
그 분의 견해에 단지 아멘하는 것이 안전할까요?
아니면 감히 내 자신의 느낌이 합당하다고 내 놓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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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제들의 기질에 대하여 한때 외국형제들의 표현구는
"브레이크 없는 트럭"이었죠.
덧붙여 회의적으로 표현된 구는
"몇명만 모이면 싸운다 왜? 누가 크냐?고" 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브레이크 없는 트럭이란 표현은 '추진력이 좋다' 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어디다 꼴아박거나 여러사람 다치게 하는 큰 사고를 유발하는 성질머리?가 있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신군부독재에 맞선 민주화시위가 한참이던 때
미국의 티비에 비친 한국의 광경은
무시무시한 폭력시위와 연기자욱한 최류탄 가스로 점철된 영상이었는데,
특히 백년이상 전쟁없고 공해없는 푸르른 땅에 거하는 사람들의 한계로는
그 당시의 한국사회의 절박함이 보이기는 커녕
틈만 나면 서로 돌팔매질하고 가스를 쏘아대는 호전적인 사람들이란
편견을 갖게 하는 걸 보았습니다.
그당시 한국교포들중에는 한국사람들이란? 하면서 혀를 끌끌차는 사람도 있었지만
미국형제들 중에도 한국사람들의 민족성이나 특성에 대해 안좋은 편견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비교적 최근에 대만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대북의 어떤 집회소에서
그곳의 비교적 약간 나이가 드신, 인도하는 분중의 하나였는지 아니었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몇마디 얘기하는 중에
한국교회 특히 서울교회의 인도하는 상황에 대해 상당히 우려하고 비난하는 말을 하시는 걸
듣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면으론 맞는 말입니다.
그래 맞아요. 최근에는 더 기가막힌 일도 있죠
정권만 총리를 유임할 뿐 아니라 교회도 책임형제를 유임하더군요...
그중에서도 대한민국의 음영을 적나나하게 보여준 일이...
기독교계의 장로라는 분이 자신의 민족을 폄하하는 말을 소위 강단에 서서
토로하는 것을 들으면서 우리는 외부에서도 비난 받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비하하는 것이
일반화된 분위기에서 사는구나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나마 이 분이 온 국민의 비난과 반발에 찔끔하여 총리 후보에서스스로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외국에서도 얼마나 비웃었을 것이며
우리 스스로도 열등한 자괴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 뻔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우리나라 민족이
정말 그렇게 형편이 없을까?
한가지 아는 것은 내 자신은 우리나라를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연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어떤 비난을 하던 흠..모르쇠,..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누가 내 새끼에 대해 비난을 한다거나 입을 비죽거리는 모양새라도 비친다면
내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투사로 변신한다는 것이죠.......ㅎ.....
그러나 위로가 되는 것은
사도바울같은 영적 거인도 자신의 민족에 대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얻길 간절히 구하였었다는 것입니다.
풍부한 물과.................
무지 통통한 애벌레와 아 시끄러 좀 조용히 해...
라고 할 만큼 왁자지껄한 새소리가 가득한....
신선한 산소가 마구 쏟아져 내려오는 지점에서 가능한 한 오래 버티고 있다가...
(몽골교회 방문시 우릴 접대하기위해 준비했던 양.
잠시뒤 이 양은 죽임 당하고 각이 떠져서 커다란 솥에 끓여졌음...............)
현재 직장에 다니고 있거나
직장에 다닌 적이 있는 분들이 체험하는 공통된 자괴감은
월급 몇푼 주면서 마치 나를 전부 산듯한
굴욕적인 모드를 접하게 될 때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혹은 나의 가치 즉 나의 혼의 가치가 이것 밖에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것을 그저 나의 고용주와 나와의 지엽적인 관계가 아니라
정권대 국민
혹은
전세계를 움직이는 큰 손 대 나머지 인류의
대결관계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개인의 신상정보가 얼마전 노출되었다고 난리가 난 적이 있는데
최근엔 병력기록이 특정 병원에 넘어가고 혹은 보험사등 이익단체에 넘어가고 있다는 얘길 들으며
그건 이미 정부가 전 국민의 신상명세,
수입과 지출 건강 가족관계 학력 기타등등의 정보를 다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적으로 기분이 안 좋다는 걸 넘어서서
이런 것이 다 돈과 연관되어 팔리고 있다는 .........
계시록 18장에
땅의 상인들 즉 재벌이나 거부들이 살고 파는 항목들 중에는
맨 나중에 나오는 항목인 사람의 영혼도 있음을 볼 수 있는데요.
과연 우리는 정말 이것이 실재가 되는 세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간증하길
나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교회생활을 하거나 하게 될 줄을 몰랐다.
...............라고 말하는 걸 듣습니다.
제 자신을 생각할 때
교회안에 남아있는? 자신이
여전히 신기하게 생각됩니다.
하지만
타고난 어떤 기질을 오랫동안 거스를 수 있다는 것은
그건 그 사람의 노력이나 결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어떠함에 이끌렸고 사로잡혔음을 의미하는
긍정적인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에 의해 최초로 부르심을 받은 야고보 요한 베드로 빌립보의
경우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들은 각각 생업에 바쁜 평범한 갈릴리 바닷가의 어부들로서
침례요한의 천거를 통해 주님을 발견하지만
여전히 고기잡이 일에 종사를 하다가...
주님을 보고듣고 하면서
차츰 조금씩 그분에 이끌려
마침내
배를 버려두고
혹은
아비를 뒤에 놔두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