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밤에 산책하다가 쉬면서..
문득 옆을 보니
침묵에 잠긴 산의 형상이...
주님은 아마 밤
아니 오히려 새벽미명이시겠지만
모든 것과 떨어진 고즈녁한 곳에서
자주 마음의 위안과 평안과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셨을 것이란...
.
.
주님이 시험을 다 통과하시고 바야흐로 사역이 시작되었을 때
환경은 그분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의 길을 앞서 예비했던 침례요한이 잡혔단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그다지 알아주지 않았던 촌동네 갈릴리로 물러나옴을 택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오히려 그분은 환경의 제한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이란 것을 알았고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말한바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란 말씀이 응한 것입니다.
그 이방의 갈릴리가 오늘날 아시아의 동쪽 작은 나라안에 있는 우리들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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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다른 소그룹과 함께 섞임모임을 가졌을 때
한가지 알게 된 것은
그 소그룹의 영역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즉 소그룹의 구성원들이 각각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어도
여전히 그 소그룹의 명칭으로 같이 모인다는 것이죠.
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주의 경계를 한하시는 하나님의 안배에 따라
마땅히 이주한 곳의 모임으로 나가는 것이
인간적으로도 합리적이고
영적으로도 합당한 것이 아닐는지요....
누가 압니까?
어쩌면
하나님의 안배에 순종함으로 얻을 수 있었던
영적 축복을 놓치고 있는 것인지도...................
몽골교회 방문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이름모를 허브향이 공기중에 가득한
끝간데 없이 펼쳐진 대초원이었습니다.
그 풀밭 가운데 어쩌다 떨어져 있는 말똥조차 허브향에 쐬이면서 바삭히 말라있어
그냥 손으로 집어들어도 전혀 더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거 같은............
사실은 지금도 가끔 그 초원에 서 있는 상상의 꿈을 꿉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그 초원과 거기에 가득한 허브꽃들을 보면서
어느 동행인은 이 허브들을 상품화한다면 굉장한 돈이 될텐데.............
라는 꿈을 꾸는 것을 들으면서
사람에게는 그 사람에게 맞는 천하만국과 그 영광의 유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마 사단이 저에게 나타나 이 몽골 초원을 다 너에게 주겠다.
이 세상의 네가 좋아할만한 모든 자연경관을 다 너에게 주겠다
라고 했다면??
과연 사단에게 경배하는 일을 감행할 수 있을까요?
물론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겠고
만약 일어난다고 해도
어떻게 반응할지는 지금 아무리 장담한들 알 수 없는 일이겠죠............
사탄이 예수를 높은 산에 데리고 올라가 보여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의 유혹은
어떤 광경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주님은 오직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리라고 진심으로 천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시험을 받았으되 모두 물리쳤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육체에 갇혀 지낸 30여년의 시간동안 그분이 당했던 것은
땅의 권력으로 부터 온 핍박과 육체적 고통과 배고픔 등,
그리고 사람의 제도 아래의 제한 등등의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 성육신전에는 결코 체험할 수 없었던 제한은
자신을 하나님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거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령으로 잉태함을 체험한 마리아도
눈앞에서 아이가 커가는 걸 지켜보면서도 그것에 비례해
그 안에서 자라가고 있는 신성의 부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몰이해속에서 자라난 예수는
어떤 인간적인 관점에서 속은 꽉찬 그러나 외양은 평범한 유대남자였으며
어떤 찬송가사처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못하고 외로운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예수의 신성의 부분을 맨먼저 알아본 것은 유혹자 사탄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처단할 수 있는 자격과 위임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고 보내심을 받은
성육신 된 예수로 하여금
그의 소명을 실패하게 하기 위한 사탄의 꼼수는
하나님 사람인 예수로 하여금 피조물의 위치를 벗어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려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
그리하여 아주 멋진 착지를 할 것이고 하루아침에 너의 신성의 부분이
너의 주변의 모든 사람들, 유대민족들에게 다 드러나고 그들의 경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분의 신성한 능력을 완전히 펼쳐보이도록 그래서 성육신을 포기하도록
허세와 과시의 미끼를 던지는 유혹자...
그는 어느 정도 사람인 예수의 내면적 갈등과 슬픔을 알 수 있었단 사실입니다.
하물며 우리 사람의 속에 있는 갖가지 성정, 약함, 유혹을 아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
주님은 그분 자신이 성육신된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낮춰 사람의 모양이 되셨고 종의 형체를 취하셨으며
사단의 까불림을 물리치셨지만,
그에 반해
그저 긍휼이 필요한 죄인에 불과함에도
사단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너는 다른 일반 성도와 다른 특별한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라는 암시만으로도
무엇이 된양 드러나기를 좋아하며
그런 모든 기회에 쫑긋 귀와 마음이 쉽게 향하는
드러내는 실패들을.....왕왕 보게 됩니다.
저녁식사후 잠깐 들녁길로 산책을 나가는 길,
시골논둑길의 한적함과 초여름의 싱그러운 풀내음속의 평온함이란 이런 것..................
뒤이어 이어진 성경퀴즈 골든벨에서 우승한 분들의 기념컷~!
우승한 분들이 들고 있는 건 소지역내에서 통용가능한 상품권.
뜻하지 않게 진행을 맡으면서 갑의 횡포를 맛볼 수 있었던.....ㅋ
난이도를 은근 높인 출제문항때문에 평소 말씀를 추구한 분들이 확실히 돋보였고
때문에 다음의 퀴즈대회때는 업그레이드된 치열한 대회가 되리라 예상됨.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
그냥 숙소로 들어가기 아까운 아름다운? 해변의 밤......
가까운 카페로 드라이브가서 맛본 카푸치노..,,,,
나무와 고양이 문양의...
이즘 처럼 사람들이 자기들 입으로 들어가는 떡에
미친듯이...
모든 치부를 다 드러내고 달겨들어 싸우는 적이 있었던가?
이즘 세상돌아가는 걸 보면
코너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에게 덤벼든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사실 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말로 입으로 들어가는 떡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고고한척 쯧쯧 혀를 찰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떡이 중요하기 때문에
악한 자도 먹는 것을 가지고 예수를 시험했습니다.
사람의 모양을 입구나서 전능한 하나님도 배고픔과 물질의 필요에 대해
절실하게 느끼셨을지요.....
그렇기에
주님도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즉 사람이 살아가려면 떡이 필요하다는 걸 일차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필요한 것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먹구사는 떡은 물질적인 떡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정신적인 떡도 있을 것이나
사람에게 가장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류는 그 공허한 깊은 내면을 채우기 위해
이런 저런 것을 모색해 왔지만....
만약 사람의 내면의 영적 상태가 순수하다면
결국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대해
입맛을 갖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내면의 필요를 채우는 것은
산소와 같은 생명주는 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이 마침내 서른이 넘어서
기름부음받은자 그리스도로
이 땅에서의 사역을시작하려는 싯점에
시험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왜?
과연 자격이 있는가를 증거를 얻기 위해...............
사람이신 주님의 진짜 고난의 시작입니다.
그 첫번째 시험이
40일 동안을 굶어야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에는 이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를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그분의 신성의 부분이 특별한 능력을 주었을 거라는 어떤 착각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하여
별로 식욕이 없던 시절엔
먹는 걸 억제 못하거나 또는 억지로 굶어야하는 고통에 대해 공감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즘
한주에 500그램씩 약 2키로를 뺄 작정을 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데
먹는 걸 제한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겠구나를 좀은..............
그런데 전면적으로 40일을 굶는다?
아마도 눈앞이 노랗고 현깃증도 나고 기운도 하나없고 돌맹이도 떡으로 보일 만큼
그렇게 허기져 있을 때
언제든 원하면 돌맹이를 떡으로 변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걸 사용하지 않는다?
과연 그걸 이길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만약 회복이 아니었다면
나는
교회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대답은 아마도 아님~~
이유는
목사님 혼자서 설교하면 다만 아멘~하고 앉아있는 것이 따분하기 때문?
이라고만 생각했지만
국무총리 후보의 설교영상과 그에 동반된 대형교회 목사의 설교영상을 보면서
아니 저런 쭉정이같은 것을 봤나?라고 절로 일갈하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침례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호통친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그런데 마태목음 3장의 쭉정이와 13장의 가라지의 심각성은
천국의 마지막, 즉 천년왕국뒤에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분들의 말도 안되는 쓰레기같은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하고 앉아있던 분들은 어떻게 되는 건지..............
온 이방인들로 부터 무수한 질타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 설교 동영상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난 뒤의 느낌은
사실 성경의 관점에서 그리고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원수를 사랑하라 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혹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대로
우리나라를 해하고 우리 국민을 수탈하고 핍박한
이웃 일본을 용서하고 심지어는 감사히? 여기며
그런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고 겸허히 받아들여
게으르고 공짜를 좋아하는 민족성을 고치라라는
(남한테 하기는 좋으나 자신에게 적용하기는 어려운)
말은 다 나름 그에게는 맞는 관점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도대체 이 국민들이 왜 자길 보고 분노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억울하다고 항변하고 있는 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분이 혹은 믿는 이들이 잘못생각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첫째는 원수를 사랑하라 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는
혹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환경을 주시는 자격을 가진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땅에 있는 누구든 그 말씀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할 주제가 아니며
또한 그 말씀을 취하는 이들은 국가전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안에서 깨달아 취하는 개개인의 선택입니다.
둘째는 기독교가 이 땅의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이땅에 속한 나라의 권력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가 없습니다.
주님은 빌라도 앞에 와 심문을 받을 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죠.
그러함에도 많은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하늘에 속한 이상인 영적인 것을
땅에 속한 것으로 끌어내려와 적용하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낮고 천한 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타락한 이 세대를 향해 남방여인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남방여왕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그분의 지혜를 절실히 추구하였건만
정작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씀을 함부로 대한다면
위치가 거꾸로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하셨습니다.
.......................................
이즘 우리는 일반 국민 , 소위 이방인들에게
믿는 이가 심판을 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실재로 보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우리나라 국민들처럼
특히나 저로선
나라가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해 별관심이 없다가
(네 많이들 해 드세요~~버전)
세월호 참사로 인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거지?
라는 의문으로 경악하며
정권이 하는 일에 대해 무관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이구나라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가장 큰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가장 더럽고 가장 추한 인간의 밑바닥을 내보이는 정치라는 마당.
여기서 최후에 승리할 수 있는 그래서 맨꼭대기의 고지를 점령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뱀처럼 지혜롭게 그리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그리고 문득 우리가 사모하고 주님이 이기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도
바로 이땅을 천년동안 다스리는 왕권이라는 것!!
그렇다면 우리도 학습해야할 것이
뱀처럼 지혜롭게
그러나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침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침례를 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에겐 침례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 영향력있는 권력자를 거절하는 것이
자신의 입지를 얼마나 어렵게 할 것인가를 충분히 알면서도
그는 아주 철두철미하게 자신이 해야할 일에 대해 충실하였습니다.
물론 침례요한은 그들에게 직설적인 충격요법을 통해 회개하도록 종용한 것이지만
침례를 받기에 충분히 연단을 받지 않은 즉 회개의 열매를 맺지않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을 수 없었다라는 사실이 새삼 아주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
오늘날 주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미치는 것이지만 너무나 허술하게 전달되기에
그것의 가치만큼 귀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심지어는 아주 천하게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 주님의 구원입니다.
세상은 그렇다치고
교회안에 새로운 사람이 연결되고 집회에 출석하는 것은 모두가 정말 기뻐할만한 일이지만
새신자중 어떤 사람은
내가 이렇게 집회에 출석해주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은 고마워해야할꺼야~라고 말은 안하지만
웬지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위해 아~하고 한 입 밥 떠먹어 주는 고자세라고 할까요?
실은 밥을 먹지 않으면 자기배가 고픈 건데 말입니다-,-
문제는 언제까지고 누구든 어린아이 즉 새신자 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잘 먹고 잘 자라던 그렇지 못하던 시간은 가버리고
자라야할 시기에 자라지 못한 것을 보충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손실은 결국 스스로에게 일차적으로 미치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생활안에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주님도 그리고 교회안의 다른 멤버도 기뻐할 만한 일이지만
일차적으로 교회생활은 자신을 위해서 한다는 것을
첨부터 분명히 해야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것에 대해 진지하다면
우린 새신자에 대해서도 경고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귀한 것을 취하는가 취하지 않는가를 선택할 수 있다고.....
그리고 선택에 대해 책임질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당신자신이라고...............
이즘처럼 사람이 우는 것을 자주 본 적이 없는 듯 싶네요.
그것도 다 큰 남자와 여자가 우는 모습을 보는 건 .....드문 일이지요.
그것도 사람들 다 보는데서,
다 보는 걸 알면서, 우는 건...더더욱 드문 일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집회에서 설교?(혼자 몇십분 교통)하다 말고 격하게 울컥하는 분,
혹은 신언하다 말고 눈물바람인 분들이 가끔 있는 게 기억났습니다.
그때의 제 느낌으론 어떤 분들은 자주 감정을 조절하기 힘든가?보다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눈물바람을 밖에서도 이즘 자주 목격하게 되니
다 큰 남자와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우는 건
과연 얼마나 참된 것일까를
새삼 가늠해 보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울음은 자기도 모르게 어느 순간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일종의 참사같이 예기치 못한 내면의 폭발같은 것이죠.
예기치 못한 것이기에 금방 조절이 가능하지도 평정을 쉽게 찾지도 못합니다.
근데 어떤 공개적 눈물은 눈물보다 더 격한 동작이 먼저 연출됩니다.
그걸 보는 사람은 눈물보다는 그 격한 동작으로 깜짝 놀라게 되고
그가 울었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혹은 눈물은 흐르는데 얼굴은 조각처럼 근육하나 움직이지 않습니다.
............................................
문득 주님이 우셨을 때의 모습은 어땠을까 싶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아마도 그분은 목놓아 통곡하셨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너무 자유로워서 가끔 횡설수설하는 소설가가
우리나라 축구참패를 하필 이즘 민감한 화두인 세월호사건으로
비유로 섭섭함을 표현했는데 그것에 대하여... 비난의 화살이 퍼부어졌습니다.
왜일까요?
그건 그냥 세월호라는 배의 침몰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어린 생명들의 억울하고 불쌍한 죽음이기 때문이죠.
사실 그런 아픔의 상징을 한낱 축구라는 재미에 비유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냉담함 공감력의 부족임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동안 소위 감성호흡이나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주제로 글을 쓴 것의
진정정을 의심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언젠가 어떤 분이 교회모임에서 세월호에서 죽은 학생들이나 사람들 중
믿는 이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면서 우리는 복음을 부지런히? 전해야한다는 걸
느꼈다는 교통을 하는 걸 들을 때..문득 말은 옳은데 ...뭐랄까 냉정한 기운이 싹 도는 걸 느꼈습니다.
사실 이 사건을 접할 때 구원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를 구분하기전 우리의 정서는
참담하고 억울하고 불쌍해서 그냥 마음이 먹먹해지는 것 뿐 더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
가장 진실한 반응일 것입니다..
사실 주님 자신도 이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즉 이사람이 자신을 따르던지
그렇지 않던지 구분하지 않고 많은 병인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걸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긍휼입니다.
사람에 대한 한없는 아픔의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전능자의 헤아림이 언제까지고 우리 주위에
우리 위에 머물길 바랄 뿐입니다.
결혼식이 있어 어쩌다 가보게 되는 준?대형교회......
나무재질로 된 그윽한 느낌의 실내와 은은한 조명,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는듯한 잔잔한 음향.....
한동안 앉아있다보면 이즘 유행하는 말로 힐링되는 느낌.
거기에 비하면.....
현재 내가 생활하고 있는 모임장소의 현황은.....
소지역 모임장소가 없어 집을 전전하다가? 시끄럽다고 신고당한 뒤에
딴 소지역과 합해서 어떤 지체의 입시학원에서 정말 감사히 여기면서 모이고 있음.
두달에 한번 정도 가는 대지역집회장소는 약간 퀴퀴한 냄새가 어쩔 수 없이 맡아지는
공기가 잘 순환되지 않는 지하공간 (호흡기 계통이 별로 좋지 않은 사람들은 재빨리 뛰쳐나오길 권장함)
.................
주님이 사역하시기 직전의
유대성전에서의 우아한 대제사장의 의복 대 침례요한이 입었던 낙타털 옷과 가죽띠 패션의
조악함 만큼이나 비교되는 환경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새신자를 데려올 때 이런 상황에 데려오면 혹 걸림?이 되지 않을까 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의논되기도 합니다.
.
하지만 침례요한 당시에도 중요한 것은 사람의 안이지 밖이 아니었던 것처럼
이 시대에도 기독교의 폐단에 대해 신물?이 난 사람은 외양을 보지 않고 사람의 내면과 그 사람이 내는
말씀의 어떠함에 귀기울일 것이라 믿습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잊고 삽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일들을 접하고 나서
정말 그럴 수가?
그렇게 할 수가?라고 경악을 하게 되는데요.
사람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를 눈앞에 보면서도
믿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세월호참사같은 일이
그냥 일반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면 상식적으로는
재빠르게 인명을 구조하고
그일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일이 신속하게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그냥 그대로 있는 건
이일에 연루된 검은 커넥션,
이단종교와 검은 돈과 그리고 정권의 유착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보다 더 검은 동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들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개별적으로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체계적으로 가장 큰 악을 저지르는
소위 이 세대의 악의 축은
정치와 종교일 것입니다.
이 세대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두 바벨론, 정치적 바벨론과 종교적 바벨론을 철저히 훼파하실 것임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주님이 성육신되어 작은 아이로 오는 것은
이땅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 , 죄와 사망의 덫에 걸린 모든 사람에게 임할 축복이었건만
이 세상의 검은 세력은
작은 아기로 오신 그들의 주인을 없애고자
그 주변의 애꿎은 작은 생명들 모두를 죽이라는 간단한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과연 이 세상과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은 그들이 심판을 받을 때까지 그 악행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임을
암담한 심정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잊지 않을게
_한채윤
네가 있어야 할 곳에 네가 없네
흐르는 눈물이 멈추질 않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너를 보며
우리의 현실에 무너지네
잊지 않을게 미안해
꽃 같은 얼굴의 그 미소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
착한 아이였던 널 기억해 너를 잊지 않을게 미안해
거센 파도가 멈추면 네가 올까
슬픔의 무게는 저 바다 깊이
아픈 시간이 또 흘러 봄이 오면
오늘의 다짐이 빛이 되길
잊지 않을게 미안해
꽃 같은 얼굴의 그 미소를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해
착한 아이였던 널 기억해 너를 잊지 않을게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주님이 이땅에 성육신되어 오셨을 때
이미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계명을
유대교라는 철옹성으로 만든 뒤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오랜동안 기다렸던 메시야를 눈앞에 보고도
심지어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증명하는 증거를 보고도
구주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유대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마음과 영이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정말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만...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도 의심되었었지만..
그리고 우리는 아니 나는 결코 그리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구원파의 본거지?성지?라고 하는 금수원 입구에 걸린 현수막을 보면
십만성도를 다 잡아가도 유병언은 내가 지킨다라는 구절이 있는데요.
이런 저런 일로 그의 어떠함이 다 폭로된 마당에도
끝까지 그를 지키겠다는 그들의 결연함을 보면서
눈멀고 귀멀고 급박한 피해의식이
모든 정보가 열려진 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도 이렇게 답답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봅니다.
구원파는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고 말씀을 추구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유병언이라는 교주를 믿고 그를 옹립하는 견고한 조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디서 부터 빗나갔을까요?
이번에 롼형제님이 주신 첫번째 메시지에서 우리는 어디시부터 출발하는가?
즉 근원이 어디인가?를 점검해야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근원이 하나님인 것을 잊지 않는다면 때로 어떤 사람 , 좀 더 능력이 있어 보이고
좀 더 언변이 뛰어나고 인간적인 매력이 있으며 권모술수가 능한 어떤 사람이
많은 좌중을 흥분시키고 격동시켜 신바람?나게 할 수 있을 때라도
혹 그로 인해 좌지우지 당하지 않고 우리의 근원이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위에 서려고 하는 사람들을 항상 견제했던
회복의 기본 실행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김수호 곡 이상규시 전준한 노래)
연달아 꽃은 피워도
봄은 가네
혼자만 가네
길 잃은 철새
창창한 밤하늘
슬피울며 날으는데
두오리라
가는대로
가도 말없이 가는 것을
잡는다고 님
아니 가려는가
아 그거 아세요?
서울은 다시한번 아주 좋은 시장과 더하여 아주 훌륭한 교육감을 쌍으로 얻게 되었답니다.
ㅎㅎㅎㅎㅎㅎ아주 행복한 날~!!
서울은 이제 명실공히 개념있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멋진 도시임을 스스로 증명하였고
난 그런 도시의 시민이야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사는 시민들이 대통령의 어떠함보다는
서울시장의 어떠함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이
풀뿌리 민주주의의 덕분이듯이,
회복안의 교회생활이 아직도 할만한 교회생활인 것은
전체 회복에서 유명한 한 두사람의 리더나
혹은 비교적 영향력있는 어떤 연사들의 어떠함에 영향을 받기 보다는
혹은 대지역의 봉사하는 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기 보다는
몇십명의 소지역 모임에서
피차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회복안에서의 우리의 교회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분명히 베들레헴이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라고 했건만...
메시야는 당연~!! 예루살렘에 태어나시지 않겠는가? 그럴꺼야라고 규정되고 굳어진 관념.
더하여 누가 뭐라던 간에 반드시 예루살렘이어야만 한다는 고집.
미술관에서 한가지 실험을 해 본 적이 있는데
그림에 대한 특별한 안목이 없는 두사람에게
그림이 가득 걸려있는 전시공간 한 가운데 서서 이중 어떤 그림이 가장 맘에 드는가고 물으면 ............
어떤 사람은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고르고
어떤 사람은 중세시대의 성모자상을 골라서
물었습니다.
왜 인가?
한사람은 렘~의 그림속의 인물의 표정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서라고 하는 반면
다른 한 사람은 마리아와 예수상이잖아~! (난 믿는 사람이니깐)
%$#@!
눈에 끼는 색안경은 벗을 수 있지만
맘속의 색안경은 벗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하여
회복안의 어떤 신령한 분은 모든 그림과 조각상엔 귀신이 숨어있다
아이 무서워~~!라고.
헉..............
이분은 잘못하면 헛 것을 볼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
사는데 꼭 필요하지 않는 그러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버리지 못하고
꼭 끌어앉고 있다가 마지못해 버려본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저장공간이 마땅치 않기도 하지만 그 물건만으론
옛기억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인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난 기억들이 마치 어제인 것처럼
냄새나 소리나 장면이 생생하게 느껴지게 하는 곳이 있다면
정말 좋겠죠.
며칠전 예전에 살던 곳 근처에 가게 되었는데
자주 걸어다니던 그 길목들에서 나는 오래되고 익숙한 분위기 냄새와 느낌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걸 보고 정말 감탄하였습니다.
갑자기 한 십년쯤 전의 그 거리에 서있는 듯한 시공을 넘나든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 풍경이 언제까지고 변치 않게 되길 바래 봅니다.
그래서 가끔 그곳을 스치는 일이 있을때나 그렇지 않을 때라도 평안한 느낌 그대로 있길..
소위 재개발이란 미명하에 다 부수는 일이 없길....
우리가 알고 체험하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너무나 자주 낯설게 업그레이드되고 변개되어 버린다면
우린 지나온 세월동안 알게 모르게 우리안에 축적되어 있는 것들에 대한
회억을 갖기가 쉽지않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모든 것들이 언제까지고 변개하지 않고 견고히 서 있을 것이란 보장이
참으로 안심되고 평안한 그런 느낌을 줍니다.
오늘이라고 불리우는 불확실한 시대가운데에선 더욱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