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린 자(눅8:26-39) 글/생명강가(2008.7.22) 결혼초기 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열심히 경작하여 해마다 큰 소출을 얻어 소유가 갈수록 늘어나던 시절입니다. 두로와 시돈에서 온 곡식상인들의 말이 돼지를 길러 팔면 농사짓는 작물의 소출보다 갑절 이상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그해 시험 삼아 새끼돼지 20여 마리를 사 와서 길러 보았는데 정말로 수익이 높아 고라신과 벳세다 시장에 내다 파니 하루 만에 목돈이 생기고,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은 덕에 원금의 세 배 가까이나 남겼습니다. 더군다나 두로와 시돈 지방까지만 내다 팔기만 하면 더 비싼 값에도 얼마든지 수요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나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다음해 아내와 나는 전 재산을 다 정리하여 바닷가의 작은 야산을 세 얻어 울타리를 치고 돼지 치는 일에만 몰두 하였습니다. 그 해에도 돼지고기 수요가 넘쳐 두로와 시돈에서 온 상인들이 다 자라지도 않은 돼지를 사겠다고 흥정이 들어오는데 그때 팔아도 비용 빼고 갑절은 남겠다 싶었으나 이왕 키운 것 조금만 더 키워 작년처럼 직접 고라신과 벳세다에만 내다 팔아도 세 배는 거뜬하게 받고 운 좋으면 그 이상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 후 보름정도까지 계속 찾아오는 상인들은 올 때마다 더 좋은 가격을 제시하였고, 아내는 이쯤에서 팔고 또 다시 시작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나는 잘만하면 단번에 몇 년 고생할 수고를 한꺼번에 얻을 수도 있겠다 싶어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고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우기가 닥치고 그 해 들어 유난히 장마 비가 계속 오는가 싶더니 상인들의 발걸음도 끊기고 돼지무리 중에 비실비실 몇 마리가 영문을 모르는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나는 경험이 없는 탓에 전염병이 아니길 바라고 그러나 혹시 모르는 일이어서 병든 돼지를 격리시키고 온 우리 안에 소독약을 살포하였으나, 그러나 장마 후 폭염 속에서 계속 돼지들은 죽어 나갔습니다. 나는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모든 돼지 떼를 분리해 가며 주사를 놓았고 아내를 보내어 이웃마을에 다니며 돼지 상인들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고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고라신과 벳세다 시장을 돌며 살아있는 돼지라도 팔아보려 하였으나 이미 전염병 소문이 돌아서인지 헐값에 내놔도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 해 여름에 우리의 모든 재산이었던 돼지 떼를 다 잃고 썩어가는 죽은 돼지 떼의 큰 무더기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없이 술로만 세월을 보내는 비참한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몇 달 후 그 꼴을 견디다 못한 아내는 어디론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나는 계속 그곳 주변을 떠나지 못하며 풀밭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출하할 돼지가 여전히 그곳에 있는 양, 착각을 하면서 아무 사람이나 붙들고서 마치 두로 상인이나 만난 듯 돼지를 팔겠다고 흥정을 하고 다니는 미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남의 돼지 떼를 어떤 상인들과 흥정하려다가 그 동네의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나에게는 더 큰 증오심까지 격동시키며 수많은 무리의 귀신들이 들어와 나는 그들의 거처가 되어버렸습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나를 피하기만 하였고 나는 더욱 난폭한 행동을 과감히 하고 다녔으나 아무도 나를 제어하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엔 생각 속에 터무니없는 욕심을 불어 넣어서 한 사람, 아니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더니만, 결국 귀신들은 나의 의지까지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귀신들은 내 육체 속에서 이상한 동반관계를 이루며 나는 그들의 인격을 살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들짐승처럼 자기들의 공동목적과 안위를 위해서 구더기처럼 우글거리고 있을 뿐, 사사로이는 미친개들처럼 서로 헐뜯고 불신하며 시기하는 자들입니다. 나의 깊은 속에서는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언제부터인가 그들처럼 미친 척 악담을 하면서 사는 것이 편해졌습니다. 그분이 오시던 아침부터 전령귀신들이 바쁘게 드나들므로 여느 때 같으면 늦은 오후까지 늦게까지 잠만 자던 나도 그날은 눈이 벌겋게 혈기가 발동되고 긴장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바다 건너편에서 오시는 그분을 공중의 영들과 합세하여 바다 중심에서 단숨에 몰살시키는 전략으로 작전을 세웠었고, 마침 예수님도 배 안에서 잠이 들어 계시므로 절호의 기회였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공중 영들의 군단에서 강력한 폭풍을 일으키지 못하는 바람에 산발적인 공격이 되어버려 오히려 그분이 잠에서 깨어나 권세 있는 말씀으로 우리 연합군들을 일시에 제압해 초토화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중의 권세 있는 군단은 그 책임을 우리들 귀신 군단의 파도 덮치기의 실패였다고 거짓으로 상부에 보고해 버리고 이래저래 전세가 불리해진 것을 안 상부에서도 우리 거라사 귀신 군단도 기회를 포착하는 대로 예수님을 피해 본국(무저갱)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귀신들이 이처럼 두려워하고 아무런 맥을 못 추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려 우리가 거하는 땅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순간 평소 우리의 충천하던 사기는 여지없이 꺾여버리고 귀신들은 마지막으로 나를 인질 삼아서라도 도망갈 궁리만 하였습니다. 그것을 눈치 챈 그분은 벌써 내 안의 귀신들에게 그 속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고 다급해진 그들은 내 입술을 사용하여 거짓으로 화해전술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였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내가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간청 드리니,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하며 나로 소리치게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귀신들이 고통 받는 때를 정하심을 알고서 귀신들은 아직 그때가 아님을 상기시키는 말이었습니다.(계20:13)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시고 나를 제쳐 두고 계속 그들을 대하시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시자 “우리는 군단입니다.”라고 정체를 밝히며 귀신들은 아직 때가 아니니 자기들을 억압하는 명령만은 하지 마시도록 간청하고, 마침 그 산에서 많은 돼지 떼가 먹이를 먹고 있는데 차라리 그 떼 속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직 그분의 때가 아니심으로 그쯤해서 끝내시고자 그들에게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혼비백산 잠시 나에게 발작을 일으키고 모두 빠져나가더니만 그 돼지 떼 속에 들어가므로 거의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갑자기 가파른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뛰어 내리므로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다에는 그 돼지들의 시체들로 즐비하였고 그 모습은 마치 교환된 포로들이 본국으로 귀환할 때 적국에서 입혀준 옷을 모두 벗어서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시위하듯 떠나버리는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아무튼 나는 온 몸과 마음이 이제야 평온해 졌으며 오랜 광란의 포로생활 끝에 해방되어 마침내 내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습니다. 어느 사이에 나의 벌거벗은 몸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입혀준 흰옷이 입혀져 있었고, 나는 그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제자들과 함께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언젠가 두루마리에 기록된 이사야서의 “주님의 영께서 나에게 임하시니, 이것은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나를 보내시어 포로 된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에게 시력의 회복을 선포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님께서 사람들을 기쁘게 받으시는 희년의 해를 선포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목격했던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거라사와 인근의 마을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니 사람들이 믿기지 않는 그 일을 보려고 몰려 왔다가, 정말 귀신들렸던 내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돼지 떼를 보고서 자기들의 산업이 망하게 됨을 알고서 예수님께 그 마을에서 떠나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되돌아가셨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한 귀신들의 역사를 전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제서야 그 사실을 깨닫았고, 이 기회에 혐오스러운 그들의 세계를 온 천하에 드러내고 고발하고자 합니다.(계18:11, 막16:17) 첫째, 귀신들은 더러운 영들입니다. 그들이 어두움을 좋아하는 이유는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며 깨끗함이 불편하고 더러움을 편하게 생각합니다. 씻고 소제하는 것은 아예 귀찮고, 일부러 정돈된 상태를 흩어 놓고서 무덤 사이에서 지내고 하나님의 교회까지 혼돈케 합니다.(마12:43-45, 계18:2) 둘째, 귀신들은 음란한 영들입니다. 항시 모든 사람과의 관계 속에 음탕한 생각을 넣어 주는가 하면 그 중 의지가 약한 사람은 술이나 혼적인 쾌락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미혹합니다. 나는 그 음란함이 광적으로 변하여 오랫동안 벌거벗고 다녔으며, 공개적으로 육체를 드러내 즐겼습니다.(눅8:27) 셋째, 귀신들은 사람을 방황케 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넣어 주므로서 정신을 혼미케 하고, 특히 잠을 자지 못하도록 온갖 염려를 다 가져다주며 꿈을 통해 사람들의 숙면을 방해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결국은 그 사람의 몸도 안절부절 못하게 하여 결국 집을 떠나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게 합니다.(눅8:27) 넷째, 귀신들은 초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육신에 강력한 힘을 주므로 높은 담을 가볍게 뛰어 넘는다든지 쇠사슬과 족쇄를 간단히 끊어버리기도 하합니다. 또한 사람의 혼에도 능력을 주므로 사람들의 약점을 알고 역이용하여 괴롭히기도하고 무당에게 찾아가 점을 치게 하는 등, 결국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의 영역 안에 가두어 버립니다.(눅8:28-29, 행16:16) 다섯째, 귀신들은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온 몸에 문신을 새기도록 충동질하거나 팔뚝이나 복부 등에 칼자국을 내고 돌로 몸을 쳐 멍들게 하므로 사람들의 공포심을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 같은 우월감을 과시하게 하고, 때로는 사람을 마비시켜 입의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며 넘어뜨려 몸을 상하게도 합니다.(막5:5, 눅9:39) 여섯째, 귀신들은 거짓말을 조장하는 영적 사기꾼입니다. 사람들의 타고난 선함을 역이용하여 조상숭배라는 허울 속에 자신들을 숨겨 사람들로 자신을 섬기게 하고, 금방 탄로 날 일들도 자신이 소유한 거짓말로서 천연덕스럽게 속이는 자이고, 일부러 사람들을 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금도 죄의식이 없는 비인격적 존재이며, 만약에 그 거짓말이 탄로 난다 하더라도 절대로 회개하지는 않고 오히려 다른 이를 탓하며 변명하게 합니다.(요8:44, 창3:12-13) 일곱째, 귀신은 무리를 짓는 군단입니다. 그들은 천사장 루시퍼가 하나님을 향하여 배역하던 때, 이 땅에 거하던 육체를 가졌던 영들로서 하늘별 삼분의 일의 타락한 천사들 무리와 함께 그 사탄의 배역에 가담하였던 땅에 속한 영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영역에 깃발을 세우고, 이 땅의 대 환란 끝 무렵에는 사람들 중 이억의 기병대를 충동질하여 모으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군대와 마지막 전쟁을 벌이기도 할 것입니다. (창세기L/S 2번 메시지 참조, 욥38:7, 사14:12, 계16:14) 예수님께서 거라사지방을 떠나 가실 때, 나는 이제 갈 곳도 없고 모처럼 찾아온 이 평온함을 또 다시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대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하셨는가를 말하십시오.”라고 하시면서 격려해 주시고 내 머리에 안수하고 돌려보내셨습니다. 나는 그날부터 기쁨이 충만하고 담대하여져서 온 동네를 다니며 우리를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키시는 참된 희년이신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전파하였습니다.(눅8:39)
귀신들린 자(눅8:26-39)
글/생명강가(2008.7.22)
결혼초기 나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열심히 경작하여
해마다 큰 소출을 얻어 소유가 갈수록 늘어나던 시절입니다.
두로와 시돈에서 온 곡식상인들의 말이 돼지를 길러 팔면
농사짓는 작물의 소출보다 갑절 이상의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그해 시험 삼아 새끼돼지 20여 마리를 사 와서 길러 보았는데
정말로 수익이 높아 고라신과 벳세다 시장에 내다 파니 하루 만에
목돈이 생기고,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은 덕에 원금의 세 배 가까이나
남겼습니다. 더군다나 두로와 시돈 지방까지만 내다 팔기만 하면
더 비싼 값에도 얼마든지 수요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나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다음해 아내와 나는 전 재산을 다 정리하여 바닷가의 작은 야산을
세 얻어 울타리를 치고 돼지 치는 일에만 몰두 하였습니다.
그 해에도 돼지고기 수요가 넘쳐 두로와 시돈에서 온 상인들이
다 자라지도 않은 돼지를 사겠다고 흥정이 들어오는데
그때 팔아도 비용 빼고 갑절은 남겠다 싶었으나 이왕 키운 것
조금만 더 키워 작년처럼 직접 고라신과 벳세다에만 내다 팔아도
세 배는 거뜬하게 받고 운 좋으면 그 이상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 후 보름정도까지 계속 찾아오는 상인들은 올 때마다
더 좋은 가격을 제시하였고, 아내는 이쯤에서 팔고 또 다시 시작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나는 잘만하면 단번에 몇 년 고생할 수고를
한꺼번에 얻을 수도 있겠다 싶어 조금 더 기다려 보자고 고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우기가 닥치고 그 해 들어 유난히 장마 비가 계속
오는가 싶더니 상인들의 발걸음도 끊기고 돼지무리 중에 비실비실
몇 마리가 영문을 모르는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나는 경험이 없는 탓에 전염병이 아니길 바라고 그러나 혹시
모르는 일이어서 병든 돼지를 격리시키고 온 우리 안에 소독약을
살포하였으나, 그러나 장마 후 폭염 속에서 계속 돼지들은 죽어 나갔습니다.
나는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모든 돼지 떼를 분리해 가며
주사를 놓았고 아내를 보내어 이웃마을에 다니며 돼지 상인들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하였고 하는 수 없이 우리는
고라신과 벳세다 시장을 돌며 살아있는 돼지라도 팔아보려 하였으나
이미 전염병 소문이 돌아서인지 헐값에 내놔도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 해 여름에 우리의 모든 재산이었던 돼지 떼를 다 잃고
썩어가는 죽은 돼지 떼의 큰 무더기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없이 술로만 세월을 보내는
비참한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몇 달 후 그 꼴을 견디다 못한 아내는 어디론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나는 계속 그곳 주변을 떠나지 못하며 풀밭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출하할 돼지가 여전히 그곳에 있는 양, 착각을 하면서
아무 사람이나 붙들고서 마치 두로 상인이나 만난 듯 돼지를 팔겠다고
흥정을 하고 다니는 미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남의 돼지 떼를 어떤 상인들과 흥정하려다가
그 동네의 청년들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 나에게는 더 큰 증오심까지 격동시키며 수많은 무리의
귀신들이 들어와 나는 그들의 거처가 되어버렸습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나를 피하기만 하였고 나는 더욱 난폭한 행동을
과감히 하고 다녔으나 아무도 나를 제어하지 못하였습니다.
처음엔 생각 속에 터무니없는 욕심을 불어 넣어서 한 사람,
아니 한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하더니만, 결국 귀신들은
나의 의지까지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이곳에 오셨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귀신들은 내 육체 속에서
이상한 동반관계를 이루며 나는 그들의 인격을 살고 있었습니다.
귀신들은 들짐승처럼 자기들의 공동목적과 안위를 위해서
구더기처럼 우글거리고 있을 뿐, 사사로이는 미친개들처럼
서로 헐뜯고 불신하며 시기하는 자들입니다.
나의 깊은 속에서는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언제부터인가
그들처럼 미친 척 악담을 하면서 사는 것이 편해졌습니다.
그분이 오시던 아침부터 전령귀신들이 바쁘게 드나들므로
여느 때 같으면 늦은 오후까지 늦게까지 잠만 자던 나도
그날은 눈이 벌겋게 혈기가 발동되고 긴장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바다 건너편에서 오시는 그분을 공중의 영들과 합세하여
바다 중심에서 단숨에 몰살시키는 전략으로 작전을 세웠었고,
마침 예수님도 배 안에서 잠이 들어 계시므로 절호의 기회였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공중 영들의 군단에서 강력한 폭풍을 일으키지
못하는 바람에 산발적인 공격이 되어버려 오히려
그분이 잠에서 깨어나 권세 있는 말씀으로 우리 연합군들을
일시에 제압해 초토화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중의 권세 있는 군단은 그 책임을 우리들 귀신 군단의
파도 덮치기의 실패였다고 거짓으로 상부에 보고해 버리고
이래저래 전세가 불리해진 것을 안 상부에서도 우리 거라사 귀신 군단도
기회를 포착하는 대로 예수님을 피해 본국(무저갱)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귀신들이 이처럼 두려워하고
아무런 맥을 못 추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려 우리가 거하는 땅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순간 평소 우리의 충천하던 사기는 여지없이 꺾여버리고
귀신들은 마지막으로 나를 인질 삼아서라도 도망갈 궁리만 하였습니다.
그것을 눈치 챈 그분은 벌써 내 안의 귀신들에게 그 속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고 다급해진 그들은 내 입술을 사용하여 거짓으로
화해전술로 정면 돌파를 시도하였습니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내가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간청 드리니,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하며 나로 소리치게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귀신들이 고통 받는 때를 정하심을 알고서
귀신들은 아직 그때가 아님을 상기시키는 말이었습니다.(계20:13)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시고 나를 제쳐 두고 계속 그들을 대하시며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시자 “우리는 군단입니다.”라고 정체를 밝히며
귀신들은 아직 때가 아니니 자기들을 억압하는 명령만은 하지 마시도록 간청하고,
마침 그 산에서 많은 돼지 떼가 먹이를 먹고 있는데 차라리 그 떼 속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직 그분의 때가 아니심으로 그쯤해서 끝내시고자
그들에게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은 혼비백산 잠시 나에게 발작을 일으키고 모두 빠져나가더니만
그 돼지 떼 속에 들어가므로 거의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갑자기
가파른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뛰어 내리므로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다에는 그 돼지들의 시체들로 즐비하였고 그 모습은 마치 교환된
포로들이 본국으로 귀환할 때 적국에서 입혀준 옷을 모두 벗어서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시위하듯 떠나버리는 모습과 흡사했습니다.
아무튼 나는 온 몸과 마음이 이제야 평온해 졌으며 오랜 광란의
포로생활 끝에 해방되어 마침내 내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습니다.
어느 사이에 나의 벌거벗은 몸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입혀준
흰옷이 입혀져 있었고, 나는 그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제자들과 함께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언젠가 두루마리에 기록된 이사야서의
“주님의 영께서 나에게 임하시니, 이것은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나를 보내시어 포로 된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에게 시력의 회복을 선포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주며, 주님께서 사람들을 기쁘게 받으시는
희년의 해를 선포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목격했던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거라사와
인근의 마을에 가서 이 사실을 알리니 사람들이 믿기지 않는 그 일을 보려고
몰려 왔다가, 정말 귀신들렸던 내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는 것을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돼지 떼를 보고서 자기들의 산업이 망하게 됨을 알고서
예수님께 그 마을에서 떠나 주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되돌아가셨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게한 귀신들의 역사를 전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제서야 그 사실을 깨닫았고, 이 기회에 혐오스러운 그들의 세계를
온 천하에 드러내고 고발하고자 합니다.(계18:11, 막16:17)
첫째, 귀신들은 더러운 영들입니다.
그들이 어두움을 좋아하는 이유는 빛 가운데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며
깨끗함이 불편하고 더러움을 편하게 생각합니다.
씻고 소제하는 것은 아예 귀찮고, 일부러 정돈된 상태를 흩어 놓고서
무덤 사이에서 지내고 하나님의 교회까지 혼돈케 합니다.(마12:43-45, 계18:2)
둘째, 귀신들은 음란한 영들입니다.
항시 모든 사람과의 관계 속에 음탕한 생각을 넣어 주는가 하면
그 중 의지가 약한 사람은 술이나 혼적인 쾌락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미혹합니다.
나는 그 음란함이 광적으로 변하여 오랫동안 벌거벗고 다녔으며,
공개적으로 육체를 드러내 즐겼습니다.(눅8:27)
셋째, 귀신들은 사람을 방황케 합니다.
처음에는 여러 가지 생각을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넣어 주므로서
정신을 혼미케 하고, 특히 잠을 자지 못하도록 온갖 염려를 다 가져다주며
꿈을 통해 사람들의 숙면을 방해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결국은 그 사람의 몸도 안절부절 못하게 하여 결국 집을 떠나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게 합니다.(눅8:27)
넷째, 귀신들은 초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의 육신에 강력한 힘을 주므로 높은 담을 가볍게 뛰어 넘는다든지
쇠사슬과 족쇄를 간단히 끊어버리기도 하합니다.
또한 사람의 혼에도 능력을 주므로 사람들의 약점을 알고 역이용하여
괴롭히기도하고 무당에게 찾아가 점을 치게 하는 등, 결국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기의 영역 안에 가두어 버립니다.(눅8:28-29, 행16:16)
다섯째, 귀신들은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온 몸에 문신을 새기도록 충동질하거나 팔뚝이나 복부 등에 칼자국을 내고
돌로 몸을 쳐 멍들게 하므로 사람들의 공포심을 일으켜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 같은 우월감을 과시하게 하고, 때로는 사람을 마비시켜 입의 거품을 물고
경련을 일으키며 넘어뜨려 몸을 상하게도 합니다.(막5:5, 눅9:39)
여섯째, 귀신들은 거짓말을 조장하는 영적 사기꾼입니다.
사람들의 타고난 선함을 역이용하여 조상숭배라는 허울 속에 자신들을 숨겨
사람들로 자신을 섬기게 하고, 금방 탄로 날 일들도 자신이 소유한 거짓말로서
천연덕스럽게 속이는 자이고, 일부러 사람들을 우롱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조금도 죄의식이 없는 비인격적 존재이며,
만약에 그 거짓말이 탄로 난다 하더라도 절대로 회개하지는 않고
오히려 다른 이를 탓하며 변명하게 합니다.(요8:44, 창3:12-13)
일곱째, 귀신은 무리를 짓는 군단입니다.
그들은 천사장 루시퍼가 하나님을 향하여 배역하던 때, 이 땅에 거하던
육체를 가졌던 영들로서 하늘별 삼분의 일의 타락한 천사들 무리와 함께
그 사탄의 배역에 가담하였던 땅에 속한 영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영역에 깃발을 세우고, 이 땅의 대 환란 끝 무렵에는
사람들 중 이억의 기병대를 충동질하여 모으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군대와 마지막 전쟁을 벌이기도 할 것입니다.
(창세기L/S 2번 메시지 참조, 욥38:7, 사14:12, 계16:14)
예수님께서 거라사지방을 떠나 가실 때, 나는 이제 갈 곳도 없고
모처럼 찾아온 이 평온함을 또 다시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그대를 위하여
얼마나 큰 일을 하셨는가를 말하십시오.”라고 하시면서 격려해 주시고
내 머리에 안수하고 돌려보내셨습니다.
나는 그날부터 기쁨이 충만하고 담대하여져서 온 동네를 다니며
우리를 모든 속박에서 해방시키시는 참된 희년이신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전파하였습니다.(눅8:39)
글/생명강가(2008.7.18)
나는 지난 12년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심한 출혈병으로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착하고 성실한 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넉넉하지는 않지만 그동안 어느 정도 재산도 모으고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려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왠일인지 가끔씩 하혈이 있더니만
계속 멈추지 않았습니다. 피곤해서 그렇겠지.. 곧 괜찮아 지겠지..하고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몇 달이 지나도 전혀 낫지 않고
점점 심해지는 것을 느끼고 동네 의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았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몸이 허하면 그런 현상이 있을 수 있다고만 하여서
의사가 권하는 보약을 석 달 동안 처방대로 술이나 돼지고기 등을 피하고
정성껏 시간 맞춰 잘 달여 먹었습니다.
그러나 출혈에는 아무런 차도가 없었고 약효가 늦게 나타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석 달 치를 더 조제하여 복용하여 보았으나
오히려 출혈은 더욱 심해지고 이제는 온 몸에 힘이 빠지고
내 몸이 점점 메말라 가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병세가 위중해 짐을 느끼고 남편의 권유로
서둘러 이웃도시의 큰 병원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난 후 그 결과가 나왔는데
유대인 의사가 이 병은 입원하여 격리치료를 해야 하는
심각한 유출병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남편과 의논한 끝에 할 수 없이 난생처음 집을 떠나
병원의 요구대로 격리치료에 응하였습니다.
그러나 격리치료실은 말만 병원이지 마치 감옥과 같았고,
옆 병실에는 나병 환자들도 있었고 이곳 격리병동은
온갖 불결한 냄새가 죽어가는 환자들에게서 나고 있지만
가족들도 돌아보지 않는 버려진 환자가 부지기수였고
의사나 간호사들조차도 부정한 환자들이라고 해서
경멸하는 말투와 형식적인 치료 외에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단 한 번 면회가 가능한 시간에 나는 남편에게
이곳에서는 병이 낫기는커녕 죽을 것만 같으니 빨리 나를
이곳에서 나가게만 해 달라고 사정을 해 보았으나
격리환자들은 병원에서도 마음대로 내 보낼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결국 6개월 후에서야 그것도 남편 직장의
상사의 도움으로 다른 병원으로 이송한다는 조건으로서
많은 돈을 지불하고 겨우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몸이 더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 있었고
출혈도 이젠 매일 생리하듯이 쏟아졌습니다.
집에 와서도 이곳저곳 용하다는 의사란 의사는 다 찾아다녀 보았으며
때로는 외국산 특효약이라고 해서 값비싼 약을 복용해 보기도 하였고
민간요법이라 하여 별의별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이 그동안 남편이 애써 벌어 놓은 재산만 다 탕진하였을 뿐
아무도 나를 치료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는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밀려오는 괴로움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어 그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러다보니
우울증까지 생겨 어느 날부터 어떻게 하면 쉽게 목숨을 끊고
이제 이 고통에서 해방 받을 수 있을까만 궁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절망 속에 빠져 지내던 나에게 어느 날 이웃의 아주머니로부터
유대사람 신언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며
불치병도 무료로 치료해 준다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예수.. 그래, 언젠가 남편친구의 아는 분이 갈릴리에 갔다가
우연히 그 예수께서 수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각색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나는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 유대 신언자 예수께서 혹시
나를 불쌍히 여기고 치료해 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고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 달라고 사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계신다는 갈릴리 바닷가 쪽 가버나움이란 마을로
그분을 찾아 나서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해변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나
그곳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바다 건너편 거라사 지방에 가신
예수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모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무리 중에는 유대 회당장이라는 야이로라 하는 분도 계시므로
나도 틀림없이 이곳에서 기다리면 그분을 만나게 되리라는
확신을 하고 함께 온 남편은 직장일로 인하여 붙잡을 수 없어
억지로 돌려보내고 나는 가져온 보리떡바구니와 물병, 그리고
모포 한 장만 갖고서 거기서 이틀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분을 거기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나를 치료해 주실 것을 처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전능하신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심각한 유출병에서 치료하여 주소서!.. "
그곳에서 기다리는 무리들 중에는 전해들은 이야기와
자기가 직접 그분을 만난 사실들을 무용담을 하듯 하루 종일
자랑삼아 나누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는 척 하면서도
그분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분은 산 위에서 천국의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가장 먼저 나병환자를 깨끗이 낫게 하셨다는
그 이야기는 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3일째 되는 날 오후 늦은 시간, 주위의 무리들이 소란스러워
지므로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배 한척이 부두에 도착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가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분이 오신 것 같아 나도 남은 물병의 물로 얼굴과 손만
간단히 씻고 짐을 꾸릴 시간도 없이 그냥 그분이 도착하는
부둣가 쪽으로 힘든 몸을 끌고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나 같은 연약한 이방인이 어떻게
그분 앞에 나아가 치료해 주실 것을 요청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아니다 다를까 그 회당장이란 분의 수하의 건장한 사람들이
부두 입구를 막아서고 자기의 주인이 먼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나가려고 아우성을 쳐 보지만 뒤쪽에 서서
그분이 지나가시기만을 기다려야했습니다. 나도 그 군중들 무리에 끼여
이리저리 밀리며 앞쪽으로 다가서 보려고 했으나
이방인이란 이유로 무리 중에 어떤 이는 욕하며 심하게 주먹질까지
해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 길 위쪽 조금 한적한 언덕에서
배에서 내리시는 그분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야이로라 하는 그 회당장이 배에서 내리는 그분을 가장 먼저 영접하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고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더니 잠시 후
그 회당장이 앞장서고 그 뒤로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인 듯한 사람들이
따라 나오는데, 언듯 보기에는 그분이 다른 사람보다 더 야위고
연약해 보여서 오히려 그분께서 그 제자들의 종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조급한 마음으로 언덕에서 내려와 무리들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더욱 아우성치는 군중들은 이제 나 같은 존재는 안중에도 없었고
온통 그분을 향하여 손을 뻗고 뭔가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또 그 틈바구니에서 밀려 넘어졌으나, 이젠 마지막으로
그들의 발에 밟혀 죽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각오로
개처럼 엎드려 무리들의 다리 사이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이러한 나를 막는 이는 없었고
가까스로 길 안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더니 회당장이 그 수하의
사람들 도움을 받아 막 지나가고 있었고, 나는 정말 개처럼 그들의
고급스런 향취까지 코끝으로 맡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분의 제자들이 무리의 에워쌈을 헤치고 그분을 모시고
비릿한 생선 냄새를 풍기는 투박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체 높은 회당장의 무리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시는
그분을 그 군중 가운데 멈춰 세울 힘도 기회도 없음을 알고
다만 그분의 발끝이라도 만져 보면 여한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아니.. 그분의 겉옷만이라도 만지면 내 병이 낫을 것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말 제자들의 허벅지 사이로
그분의 옷 술이 잠깐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옷 술을 만졌습니다..
아!.. 그 순간 나는 내 속에서 몸이 뜨거워지고 내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이의 무릎이 나를 치는 것같이
나도 모르게 나는 벌떡 일어섰고 동시에 그분이 돌아섰습니다.
“누가 나의 겉옷을 만졌습니까?”
무리들은 갑작스런 그분의 말씀에 멈칫하였고 잠시 시간이 멈춘 듯
긴장이 감돌았습니다. 제자 중 한사람이 “선생님, 무리가 선생님을
에워싸 밀어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분은 다시 “누군가가 나를 만졌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내가 알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다만 그분과 나만이 알고 있는 사실임을 알고
숨길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분 앞에 엎드려 하찮은 이방여인이지만
그분을 만질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그때 내 몸에서 즉시 출혈이 멈추고
12년 동안 앓아온 병이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감히 큰소리로 외치지도 못하고 다만 눈물을 흘리면서
작은 소리로 “주! 예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다정하고 사랑스런 목소리로
“딸이여, 그대의 믿음이 그대를 낫게 하였으니, 평안히 가십시오.”라고
말씀하시고 돌아서셔서 가던 길을 가셨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남편과 같이 그분께서 늘 말씀하시던 대로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던 날까지 갈릴리를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들을 청종하였습니다.
또 베드로 형제님을 통해 그분께서 부활하시고 생명의 영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 주셨다는 말씀을 듣고서,
우리도 기뻐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주님을 여러 차례 체험하였으며
지금은 많은 형제자매들과 약속대로 그분께서 다시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나인성 과부(누가복음7:11-17)
글/생명강가(2008.7.17)
내가 나인이라는 유대마을로 시집을 온지 어언 20여년..
오래전 남편을 여의고 남겨진 어린 아들 하나 의지하고
갖은 어려움을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 왔는데..
그 아들마저 이유 없이 몸이 쇠약해지는가 싶더니만
약 한번 제대로 써 볼 기회도 없이 갑자기 죽게 되었습니다.
아니! 세상에 이럴 수가.. 나에게 이런 비극이 일어나다니!!
나는 그때 망연자실하여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서
통곡만 할 뿐이었습니다. 유독 당신의 아들만 의지하고 사셨던
시어머니께서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아들 잃은 그 허탈감을 어찌하지 못하고 지난 십수 년간
아들 생각만 나면 며느리를 미친 듯이 원망하며 살아 오셨건만,
그러나 우리는 더 싸울 기력도 없이 그이의 남겨진 핏줄
하나 때문에 모든 슬픔을 억지로 잊고
한 많은 세월동안 그 남겨진 자식에게 사랑을 쏟으므로
가까스로 소망을 걸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 이런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믿기지 않는 일이 또 일어난단 말입니까?
과연 내가 사는 게 무엇인지.. 죽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는 그때야 알았습니다. 내가 숨이 붙어 있고 눈이 떠있으니까
살았다고 하는 것뿐이지..
나는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한 의미를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나는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지만
모든 사람들이 찾아와 무언가 안타까이 위로의 말을 전하니
나는 스스로 도리질을 하며 이 모든 것이 꿈속이려니 했습니다.
친척들이 장례준비를 하던 중 아들의 시신을 이제 입관 해야
한다고 하니, 나는 내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고 미친 듯
시신을 붙들고 발버둥 쳐 보지만 이미 차가와진 아들의 시신은
내 손에서 떠나고 나는 짐승처럼 울부짖고만 있었습니다.
삼일 후 사람들은 어디론가 내 아들의 관을 메고 나가는데
나는 삼일동안 한 숨도 자지 않고 물 한 모금도 먹지 않았지만
어디서 솟아나는지 또 눈물을 줄줄 흘리며 피를 토할 것 같은
쉰 목소리로 “내 아들 죽지 않았다! 내 아들 내려놔라!!”고
부르짖으며 맨발로 따라 나서며 의미없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성문 까지만 모친을 모시자고 하는 말에
나는 발버둥을 치며 누구에게 인지도 모르는 원망과 비통함을
통곡으로 쏟아 내고 있었습니다.
오!.. 인생이 이렇게 허무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름답게 단장하고 혼인잔치를 위하여 이 성문을 들어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결국 내가 이 꼴을 보려고 그 수고와 노력을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단 말입니까? 오! 하늘이여~ 땅이여~
이런 참혹함을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나 말 것을..
오! 나는 나의 어머니의 모태를 저주했습니다!..
그때 무리 중에서 누군가가 잠결에 들리는 음성처럼 부드럽게
“울지 마십시오.”하시기에 엉겹결에 눈을 지그시 떠 보니
중천에 떠오른 밝은 해를 등진 사람이 친척 같기도 하고
어떤 지나가던 사람 같기도 한데?.. 나를 애절히 내려다보시고는
앞으로 걸어가시더니 아들의 관에 손을 대시고
그 관을 메고 가는 사람들을 멈추게 하였습니다. 그때서야
누군가가 옆에서 “예수님이시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예수?.. 아! 그분이 이곳에 어인일이실까?..’하며 나는 일어나
앉는 순간 그분이 서서 말씀하시길 “청년이여, 내가 그대에게 말합니다.
일어나시오!”라고 하시자 갑자기 관이 움직이며 요동하여
사람들이 놀라 그 관을 땅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때 우리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뚜껑을 닫지 않은 관속에서
내 아들이 꽁꽁 묶인 채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놀라 그 동인 베를 풀어놓자, 아들이 살았어요?
아들이 살았습니다!~ 아들이 살았습니다!~
나는 지금도 꿈은 꾸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아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자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며 무슨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들의 오른손을 잡고 일으키시자 아들이 일어서서
그분의 손에 이끌리어 나에게로 오더니
예수께서 “여인이여, 이제 슬퍼하지 마십시오.
내가 당신을 위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나를 믿으십시오.”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주 예수님, 당신을 믿습니다.”하고서 땅바닥에서 일어나
아들을 꼭 안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껴안은 두 팔의 한쪽 손목을
스스로 꼬집어 보았습니다. 아팠습니다. 꿈이 아니라 실제였니다.
오! 주여! 이럴수가? 나는 아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또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아들아, 사람들이 네가 분명히
죽었다고 했는데 정말 괜찮은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예, 어머니 괜찮아요. 아프던 것도 이젠 하나도 안 아픈걸요?
저도 정말 이상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로 모든 사람들이 놀라 그 예수님 무리를 모시고
앞서서 오던 길을 돌아 집으로 들어가시고 우리는 다시 살아난
내 아들의 손을 잡고서 기뻐뛰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오는 길에 또다시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는데..
정말 사람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람의 사는 것과 죽는 것을 주관하시는 저 예수님을 아는 것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습니다.
슬픈 장례식을 위하여 만들었던 음식을 함께 나누며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오셔서 기쁨의 잔치로 변한 자리에
나와 아들도 그분 곁에서 함께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때 그분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나는 태초부터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 주님은 그분의 말씀대로 우리 민족의 지도자에게
붙잡혀 십자가에서 빌라도의 병사들에 의해 죽으시기까지
나는 항시 그분을 가까이 따랐으며 그분이 부활하신 이후에도
그분의 어머니이었던 마리아 자매님에게도 집회에서 뵐 때마다
우리 모자에게 하셨던 그 주님의 말씀을 나누며 위로했습니다.
그분과 연결된 후 우리는 얼마나 고귀하게 바뀌었는지..
아멘, 할렐루야!! 참된 희년이신 주님!
우리가 사모하고 기다립니다! 어서 오십시오!!
연극 같은 사실(2) 글/생명강가(2008.3.27) 아담과 하와도 실패하고 욥의 처도, 이스라엘 백성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실패했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써 우리는 한 새사람이 되어 위대한 극작가이시며 연출가이신 주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어떤 이는 주를 위하여 고난을 기쁨으로 받고, 또 어떤 이는 주를 위하여 순교까지 영광으로 여기며 기꺼이 순종의 길을 가고자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연극 무대에서는 연극이 끝나게 되면 관객이건 연기자이건 다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은 다 연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다이아먼드를 얻은들 기뻐 춤추겠습니까? 또한 잃었다 한들 마음아파 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참 된 보화이신 주님을 얻지 못함을 진실로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욥기를 자세히 읽노라면 무신론자나 진화론자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뛰어난 가르침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익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는 참 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정된 인생에게나 연습이 있고 연극도 있겠지만,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실재이고, 연습과 연극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 실재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야 우리와 우리의 삶도 영 안에서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세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연극처럼 살고(죽고), 주님에 대해서는 실재로 살아야 합니다(갈6:14, 롬6:11) 아무튼 나의 표현은 궁색하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체류자의 삶이요, 잠시잠깐 머물다가는 것이니 연극처럼 멋지게 살다가(죽고)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연극이 주님 편에서는 실재이니 우리가 연극한 대로 장차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역도 잘하면 잠시 인기를 누리겠지만 영원한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의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롬2:6-8).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타락한 본성 안에서 힘들겠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쉽고도 가볍다고 말합니다(마11:30). 즉 이 세상의 삶은 연극이니 순교를 한다 한들 두렵지 않고 또 왕국 안에서는 그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도랑 치고 가재잡고’라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여, 다 내게로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허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혼이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마11:28-30)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이 세상은 혼의 타작마당과 같습니다. 육신(세상)에 둔 생각은 사망이요,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한 번 밖에 없는 우리의 연극 무대이면서도 그 결과는 영원한 실재로 이어질 우리의 운명..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각처에서 이기는 주인공들이 되어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나무랄 데 없고 흠과 티가 없는 단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되기를 앙망합니다.
연극 같은 사실(2)
글/생명강가(2008.3.27)
아담과 하와도 실패하고 욥의 처도, 이스라엘 백성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실패했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써
우리는 한 새사람이 되어 위대한 극작가이시며 연출가이신
주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어떤 이는 주를 위하여 고난을 기쁨으로 받고,
또 어떤 이는 주를 위하여 순교까지 영광으로 여기며
기꺼이 순종의 길을 가고자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연극 무대에서는 연극이 끝나게 되면
관객이건 연기자이건 다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은 다 연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다이아먼드를 얻은들 기뻐 춤추겠습니까?
또한 잃었다 한들 마음아파 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참 된 보화이신 주님을 얻지 못함을
진실로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욥기를 자세히 읽노라면 무신론자나 진화론자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뛰어난 가르침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익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는 참 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정된 인생에게나 연습이 있고 연극도 있겠지만,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실재이고,
연습과 연극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 실재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야
우리와 우리의 삶도 영 안에서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세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연극처럼 살고(죽고),
주님에 대해서는 실재로 살아야 합니다(갈6:14, 롬6:11)
아무튼 나의 표현은 궁색하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체류자의 삶이요, 잠시잠깐 머물다가는 것이니
연극처럼 멋지게 살다가(죽고)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연극이 주님 편에서는 실재이니
우리가 연극한 대로 장차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역도 잘하면 잠시 인기를 누리겠지만
영원한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의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롬2:6-8).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타락한 본성 안에서 힘들겠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쉽고도 가볍다고 말합니다(마11:30).
즉 이 세상의 삶은 연극이니 순교를 한다 한들 두렵지 않고
또 왕국 안에서는 그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도랑 치고 가재잡고’라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여, 다 내게로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허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혼이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마11:28-30)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이 세상은 혼의 타작마당과 같습니다.
육신(세상)에 둔 생각은 사망이요,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한 번 밖에 없는 우리의 연극 무대이면서도
그 결과는 영원한 실재로 이어질 우리의 운명..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각처에서 이기는 주인공들이 되어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나무랄 데 없고 흠과 티가 없는
단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되기를 앙망합니다.
글/생명강가(2008.3.27)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구약성경 욥기 2장 5~9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저는 요즈음도 여전히 욥기서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주님의 안배가 아직은 그러할 필요가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욥기는 구약의 시가서(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중
가장 첫 번째 책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욥기를 기록한 저자가 누구인지, 언제 적 이야기인지 정확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 문장 자체가 극의 형식인 운문체로 기록된 것과
이유 없는 시련과 환란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해피앤딩으로
마무리 짓는 모습이 마치 웅장한 오페라 한 편을 관람한 듯합니다.
제가 성경을 한 편의 연극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그 가치나 소중함이 떨어진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으로(딤후3:16)
그 저자가 누구이든지간에 시편이나 아가서 노래처럼
문학적 형식을 빌린 우주의 위대하고도 장엄한
하나님의 경륜을 주제로 연극 대본화한 것이라면
그 웅장한 우주적 대하드라마의 극작가요 연출가는
바로 하나님 자신일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수많은 연극들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희노애락을 표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는 어느 성경보다도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위에 기록한 욥기의 내용 일부와 그 등장인물이나
배역의 위치만 보더라도 긴장감이 감돌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고 생각 됩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원래 우주 안에서 최고의 완벽한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유지하였었으나
사탄의 교만으로 인한 배역이 드러났으므로
이젠 적대관계가 되었습니다(겔28:13-18).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단은 그 존재나 성질상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욥기에 함께 등장하는 것이나,
욥과 그의 아내도 평생을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겠지만
극한 환경이 그들에게 닥치자 그의 아내는 위로는커녕
영문도 알 수 없는 사탄의 말을 대변하며 오히려 욥을 저주하는
장면 등은 타락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의 관계도 그러했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실패가 교차되면서 성경을 보는 모든 이에게
깊은 속에서 긴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만약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욥기를 연극 대본처럼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면 오늘날 우스땅과 같은 각처에서
욥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주인공들로서
이젠 욥보다 더 멋진 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이기는 자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욥’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적대 받은 사람’, ‘미움 받은 사람’,
‘슬퍼 신음하는 사람'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사탄에게 이러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욥은 자신에게 까닭없이 닥치는 환란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태어난 날을 원망하고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마지막에는 귀로 듣기만 하였던 그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뵙게 되므로써 결국 욥은 회개하였고
하나님은 그 욥을 처음보다 더 복되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욥도 이러한 사실을 미리부터 알았더라면
자신에게 오는 환란을 훨씬 더 잘 극복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욥기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신약경륜 안에서 그분의 신부로 변화되어
속히 오실 신랑이신 주를 맞이할 꿈을 가져봅니다.
또한 우리 믿는 이들의 장래가 새 예루살렘임을 볼 때
우리는 각처에서 욥과 같이 하나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멋진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