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도랑을 파라(왕하3장)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 마리의 털과 숫양 십만 마리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그 때에 여호람 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
온 이스라엘을 점고(點考)하고
또 가서 유다의 왕 여호사밧에게 사신을 보내
이르되“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냐?”하니
그가“내가 올라 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같고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같고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같으니이다.”하는지라(4-7절)
여호람과 여호사밧 왕은 에돔 왕과 함께
에돔 광야 길로 모압을 향하여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을 나선지 칠 일째에 군사와
따라가는 가축을 먹일 물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이르되“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시는 도다.”하니
여호사밧이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하는지라.
이스라엘 왕의 신하들 중의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야가 여기 있나이다.”하니
여호사밧이 이르되“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있도다.”
하는지라 이에 이스라엘 왕과 여호사밧과 에돔 왕이
그에게로 내려 가니라(10-12절)
여호람은 위기를 만나 여호와를 원망하였으나
여호사밧은 위기를 만나 선지자를 찾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엘리사에게 에돔 편에서 흘러나오는
풍성한 물을 담기 위해 도랑을 많이 파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결과,
다음날 아침에 물이 그 땅에 가득했습니다.
이 물은 이스라엘에게는 목마름을 해결하는
‘생수’였으나, 대적에게는 그들을 패배시키는
‘붉은 피’였습니다.
우리의 영적 노정에 있어서도 유일한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렘2:13).
이것은 생수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자녀들과
교통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생수이신 그분이 우리 안에서 막힘없이 흐르
시도록 우리의 속 부분을 파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생수의 흐름을 막는 많은 죄들,
단독적임, 믿음 없음, 관념 등을 회개를 통하여
처리함으로 생수를 담을 수 있는 많은 도랑을
파내야 합니다.
우리가 생수로 충만하여 이 생수를 흘러 보낼 때
대적은 자연히 패배하게 됩니다.
181. 엘리사의 저주(왕하2:23-25)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23-24절)
엘리사의 기적은 모두 사랑의 일이었고,
그 스승 엘리야와는 다른 바가 있었습니다.
엘리사가 한 일은 항상 도움과 치료였습니다.
단지 한 가지, 그가 젊은 아이들을 저주한 일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42’는 성경에서 표류와 심판의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이 임의로 행할 수 있는 42개월을
허락하신 이유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계13:5).
벧엘은 그 당시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고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가 바로 그곳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알의 신좌도 거기 있었습니다.
물론 그 성의 사람들도 모두 우상을 경배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그들과 원수인
엘리야의 계승자인 엘리사가 오는 소식을 듣고서
그러한 우상을 숭배하는 젊은 아이들을 보내서
엘리사를 비방하고 조롱했던 것 같습니다.
주 예수님도 원칙상 그와 같은 일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 12절은, “밀의 알곡은 곳간으로
모으실 것이지만,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확실히 이 쭉정이를 태우는 것은 저주입니다.
더욱이 마태복음 12장에서 주님은
사함을 받지 못할 죄, 곧 성령을 훼방한 죄에
관하여 바리새인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팔중 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향한 주님의 저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