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같은 사실(2) 글/생명강가(2008.3.27) 아담과 하와도 실패하고 욥의 처도, 이스라엘 백성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실패했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써 우리는 한 새사람이 되어 위대한 극작가이시며 연출가이신 주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어떤 이는 주를 위하여 고난을 기쁨으로 받고, 또 어떤 이는 주를 위하여 순교까지 영광으로 여기며 기꺼이 순종의 길을 가고자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연극 무대에서는 연극이 끝나게 되면 관객이건 연기자이건 다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은 다 연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다이아먼드를 얻은들 기뻐 춤추겠습니까? 또한 잃었다 한들 마음아파 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참 된 보화이신 주님을 얻지 못함을 진실로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욥기를 자세히 읽노라면 무신론자나 진화론자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뛰어난 가르침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익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는 참 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정된 인생에게나 연습이 있고 연극도 있겠지만,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실재이고, 연습과 연극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 실재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야 우리와 우리의 삶도 영 안에서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세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연극처럼 살고(죽고), 주님에 대해서는 실재로 살아야 합니다(갈6:14, 롬6:11) 아무튼 나의 표현은 궁색하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체류자의 삶이요, 잠시잠깐 머물다가는 것이니 연극처럼 멋지게 살다가(죽고)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연극이 주님 편에서는 실재이니 우리가 연극한 대로 장차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역도 잘하면 잠시 인기를 누리겠지만 영원한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의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롬2:6-8).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타락한 본성 안에서 힘들겠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쉽고도 가볍다고 말합니다(마11:30). 즉 이 세상의 삶은 연극이니 순교를 한다 한들 두렵지 않고 또 왕국 안에서는 그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도랑 치고 가재잡고’라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여, 다 내게로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허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혼이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마11:28-30)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이 세상은 혼의 타작마당과 같습니다. 육신(세상)에 둔 생각은 사망이요,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한 번 밖에 없는 우리의 연극 무대이면서도 그 결과는 영원한 실재로 이어질 우리의 운명..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각처에서 이기는 주인공들이 되어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나무랄 데 없고 흠과 티가 없는 단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되기를 앙망합니다.
연극 같은 사실(2)
글/생명강가(2008.3.27)
아담과 하와도 실패하고 욥의 처도, 이스라엘 백성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실패했으나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생명주는 영이 되셔서 우리 안에 오심으로써
우리는 한 새사람이 되어 위대한 극작가이시며 연출가이신
주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어떤 이는 주를 위하여 고난을 기쁨으로 받고,
또 어떤 이는 주를 위하여 순교까지 영광으로 여기며
기꺼이 순종의 길을 가고자 할 것입니다.
다른 한편, 연극 무대에서는 연극이 끝나게 되면
관객이건 연기자이건 다 그곳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은 다 연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짓 다이아먼드를 얻은들 기뻐 춤추겠습니까?
또한 잃었다 한들 마음아파 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참 된 보화이신 주님을 얻지 못함을
진실로 한탄해야 할 것입니다.
욥기를 자세히 읽노라면 무신론자나 진화론자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안에 뛰어난 가르침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익하고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외에는 참 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정된 인생에게나 연습이 있고 연극도 있겠지만,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것이 실재이고,
연습과 연극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 실재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에야
우리와 우리의 삶도 영 안에서 실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세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연극처럼 살고(죽고),
주님에 대해서는 실재로 살아야 합니다(갈6:14, 롬6:11)
아무튼 나의 표현은 궁색하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는
체류자의 삶이요, 잠시잠깐 머물다가는 것이니
연극처럼 멋지게 살다가(죽고)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연극이 주님 편에서는 실재이니
우리가 연극한 대로 장차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악역도 잘하면 잠시 인기를 누리겠지만
영원한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의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롬2:6-8).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타락한 본성 안에서 힘들겠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쉽고도 가볍다고 말합니다(마11:30).
즉 이 세상의 삶은 연극이니 순교를 한다 한들 두렵지 않고
또 왕국 안에서는 그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일컬어 ‘도랑 치고 가재잡고’라고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여, 다 내게로 오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안식을 줄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허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혼이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마11:28-30)
사랑하는 형제자매님! 이 세상은 혼의 타작마당과 같습니다.
육신(세상)에 둔 생각은 사망이요,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어쩌면 세상은 한 번 밖에 없는 우리의 연극 무대이면서도
그 결과는 영원한 실재로 이어질 우리의 운명..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 각처에서 이기는 주인공들이 되어서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 나무랄 데 없고 흠과 티가 없는
단체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되기를 앙망합니다.
글/생명강가(2008.3.27)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구약성경 욥기 2장 5~9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저는 요즈음도 여전히 욥기서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주님의 안배가 아직은 그러할 필요가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욥기는 구약의 시가서(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중
가장 첫 번째 책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욥기를 기록한 저자가 누구인지, 언제 적 이야기인지 정확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그 문장 자체가 극의 형식인 운문체로 기록된 것과
이유 없는 시련과 환란으로 시작하여 마지막 해피앤딩으로
마무리 짓는 모습이 마치 웅장한 오페라 한 편을 관람한 듯합니다.
제가 성경을 한 편의 연극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그 가치나 소중함이 떨어진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으로(딤후3:16)
그 저자가 누구이든지간에 시편이나 아가서 노래처럼
문학적 형식을 빌린 우주의 위대하고도 장엄한
하나님의 경륜을 주제로 연극 대본화한 것이라면
그 웅장한 우주적 대하드라마의 극작가요 연출가는
바로 하나님 자신일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수많은 연극들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희노애락을 표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는 어느 성경보다도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먼저 위에 기록한 욥기의 내용 일부와 그 등장인물이나
배역의 위치만 보더라도 긴장감이 감돌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고 생각 됩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원래 우주 안에서 최고의 완벽한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유지하였었으나
사탄의 교만으로 인한 배역이 드러났으므로
이젠 적대관계가 되었습니다(겔28:13-18).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단은 그 존재나 성질상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욥기에 함께 등장하는 것이나,
욥과 그의 아내도 평생을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았겠지만
극한 환경이 그들에게 닥치자 그의 아내는 위로는커녕
영문도 알 수 없는 사탄의 말을 대변하며 오히려 욥을 저주하는
장면 등은 타락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의 관계도 그러했었고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그리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과 실패가 교차되면서 성경을 보는 모든 이에게
깊은 속에서 긴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만약에 참으로 하나님께서 욥기를 연극 대본처럼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면 오늘날 우스땅과 같은 각처에서
욥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주인공들로서
이젠 욥보다 더 멋진 삶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이기는 자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욥’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적대 받은 사람’, ‘미움 받은 사람’,
‘슬퍼 신음하는 사람'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과 사탄에게 이러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욥은 자신에게 까닭없이 닥치는 환란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태어난 날을 원망하고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마지막에는 귀로 듣기만 하였던 그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뵙게 되므로써 결국 욥은 회개하였고
하나님은 그 욥을 처음보다 더 복되게 하셨습니다.
만약에 욥도 이러한 사실을 미리부터 알았더라면
자신에게 오는 환란을 훨씬 더 잘 극복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욥기를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하나님의 신약경륜 안에서 그분의 신부로 변화되어
속히 오실 신랑이신 주를 맞이할 꿈을 가져봅니다.
또한 우리 믿는 이들의 장래가 새 예루살렘임을 볼 때
우리는 각처에서 욥과 같이 하나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멋진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모세와 십보라
글/생명강가(2007.9.17)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를 부르셔서
애굽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위대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예전의 자기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스스로의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하나님이 노하실 정도로 자신감이 없고
심사숙고 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부터 26절에 보면
모세의 가족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향하던 중 얼핏 하나님의 행하심을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하니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하나님은 모세를
그의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택정하시고
바로의 궁정에서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망명자의 생활 40년 동안에
미디안의 광야에서 혹독한 훈련을 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일을
맡기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일을 수행하러 가는 모세를
하나님은 길에서 갑자기 죽이려 하셨을까요?
그것은 앞 뒤 문맥으로 볼 때
분명히 모세의 아내 십보라를 다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십보라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일곱 딸 중
하나로서 아버지의 양을 치다 모세의 아내가 된
점으로 보아 이방 풍속에 익숙하고
책임감이 강한 맏딸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은 지 팔 일만에 행하여야 하는
할례를 무시할 정도로 이스라엘의 율법과
모세의 말을 거부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아들의 양피를 베어 흠집을 내고
피를 흘리게 한다는 것은
할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그녀에게는
히브리인의 미련한 풍습정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충청도 음성에 가 계신 김명찬 형제님이
젊은 시절에 먼 친척뻘 되는 수원의 어떤 집에
복음을 전하러 왕래하던 때의 간증입니다.
그때 당시에 형제님은 복음을 깨닫고
구원의 확신을 처음 가졌던 터인지라
얼마나 양의 피, 문설주의 피, 지성소의 피,
예수의 피 등을 강조하였든지..
조카뻘 되는 아이들이 대문 앞에서
“피 아저씨 오셨다!”고 할 정도였답니다.^^
물론 오늘날은 할례가 마음에 있고
우리의 영 안에 있는 것으로서
옛사람을 부인하고 자신을 죽음에 넘기는
자아처리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평상시의 교회생활은
어느 정도 자아처리 없이도 용납될지 모르지만
주님과 동역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은 끝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환경을 만났을 때 십보라는 순종하였지만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졌다’는 표현과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라는 고백은
마음 안에서 진정 순종하는 모습이었는지
마지못해 한 순종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출애굽기 18장 2절부터 12절을 보면서
그녀는 모세와의 동행에서 제외되었음을 봅니다.
즉 자신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하여
백성들과 함께 바로의 억압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너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기쁨에
참여할 기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의 신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여전히 자기의 관념과 자아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에서 실패하므로
하나님의 이기는 자의 영광에서 제외되는 일이
우리 중에도 있을 것임을 예시한 것으로
우리의 진정한 할례와 순종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