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과 자랑
글/생명강가(2010.11.19)
날씨가 쌀쌀해지니 가로수마다 단풍이 들고
바람이 부니 낙엽이 되어 떨어진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서도 어떤 사람은 감탄하고
어떤 사람은 외로움에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살면서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들도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숨겨야 하고
또한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야 할까?
하루 종일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우리는 일반인이면서도 또한 그리스도인이다.
일반인일 경우는 물론 하나마나한 이야기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기준이 좀 다르지 않을까?
우리 주님께서도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다고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부끄러움과 자랑도
주님 앞에서 그 기준이 정해지는 것이 옳을 것이다.
주님께서 부끄러워하시면 부끄러운 것이고
주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시면 자랑스러운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약할 때 주의 강함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 수치로 여겼던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자랑치 않겠노라고 말했다.
영적전쟁에 있어서 우리는 혈과 육이 아닌
어둠의 세력, 즉 공중 권세 잡은 자와의 싸움인 것을 안다.
정작 우리가 숨겨야 할 것은 우리의 자랑이요
우리의 자랑할 것은 약하고 진실함 그대로가 좋다.
거짓 없는 진실함만이 주님과 교통을 유지하고
때로는 우리의 어떠한 상태가 부끄러울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영 안에서 진리(참)만이 참 승리인 것을 안다.
영적 아비
글/생명강가(2010.11.17)
언젠가 나의 영적 아비에 대한 어떤 글을 보고서
어느 지체께서 나에게 ‘행운아’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행운아’란 ‘때를 잘 만나 운이 좋은 사람’이란 뜻으로서
일반적으로는 ‘좋은 여건을 만난 사람’을 말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어떤 지체도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고
주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 행운아들이란 점에서
나는 그 표현이 결코 싫지 않았습니다.
이십오 년 전 나는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자연스레 주님을 영접한 이후, 지금까지 그분을
영적 아버지로 알고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멀리 충청도에 떨어져 계시지만
나의 참다운 부모라고 언제나 간증할 수 있습니다.
내 나이 스물일곱 살 되던 해에 만난 그분들이
나를 낳고 갓난아이 때부터, 아니 잉태할 때부터 인연을 맺은
혈육의 부모보다 더 친근하고 참 부모 같습니다.
우리 친 부모님은 이미 주님 품에 가셨고, 그분들도 나의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에 이런 나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삼 년 전 교회 안에서 나는 새살림을 난 것처럼
영광교회로 새 가정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생명이 더 어린 지체들 중에 아직은 부족하지만
영적인 아비 노릇도 해야 했습니다.
이 길이 때로는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두렵기도 하지만 또 야릇한 기대감에 사로잡혀서 멈추지 않고
지금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위로하시고 힘주시는
아버지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장로 직분이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장로들은 적어도 그 지방에서의 행정을 책임지는 사람들로서
내가 장로인가 아닌가는 내가 그 지방에서 몸의 하나를 위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인수도 많지 않은 개척된 어느 지방교회 이야깁니다.
두 봉사자가 서로 융화가 되지 않고 동역하기 쉽지 않아
결국 한 봉사자가 다른 지방으로 이주를 하려고
인근 교회로 집회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남아 있는 한 봉사자가 무슨 영문인지
그 인근 교회로 함께 집회를 참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거기에서 참다운 장로의 본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선생들은 넘쳐나고 있지만
참으로 영적인 아비가 부족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갈망을 짊어지고
기꺼이 자신을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영적인 아비들이 많이 산출되기를 사모합니다.
혹등고래
2010. 10. 24.
북태평양 바다에서
집채 만 한 혹등고래들이 새끼를 낳고 양육하기 위하여
하와이 근해까지 내려가 겨울을 나고
다시 여름 전에 북태평양 알래스카 근해까지 먼 여행을 하여
청어 떼를 사냥하며 사는 모습을 어떤 자료집에서 보았다.
고래들이 영리하다고는 들었지만
소리로 서로 신호를 보내고 물방울을 일어 먹이들을 유인하는
십여 마리의 혹등고래들이 청어 떼를 빙 둘러싸고
입을 벌려 동시에 그물을 치듯 일사분란하게
먹이사냥을 하는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개인주의적이고 욕심 많은 세속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 거의 한 곳에서만 살며
일생을 죽도록 일만하다가 그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혹등고래들은 수천마일이나 여행을 하면서
마치 드넓은 태평양이 자기들의 휴양지라도 되는 양
떼 지어서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보다 훨씬 품위 있어 보이고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수고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싱싱하고 깨끗한 청어 떼만을 사냥하고 사는 그들이 부럽다.
만약 사람에게 영이 없었다면 혹등고래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나는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넓고 할 일도 많다.
그러나 우리들의 인생은 거기에 비해 너무나 짧아 보인다.
많은 날 사람들은 지금 눈앞의 작은 이익만 바라보고 살다가
허망한 세월을 보내기가 일쑤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는 60세 전후 정년퇴직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조급하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아니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사람의 존귀한 인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넓다고 한 지구도 우주에 비하면 먼지 한 점과 같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우주의 크기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우리는 부활생명체로서 혹등고래들처럼 저 우주를 유영하며
그때는 새로운 창조물로서 자유롭게 살고 있지 않을까?
그날을 곰곰이 생각하면 오늘 우리의 할 일은 참으로 많다.
우리가 지금 미리 맛보고 있는 새 예루살렘의 실재와
과정을 거치고 완결되신 삼일하나님과 완전히 성숙하여 변화된
우리와의 연합이 아름답게 조화된 그 온전함과 누림이
과연 어떤 것인지 사뭇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