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일즈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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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즈의 부흥

글/생명강가(2010.6.19)




20세기 초,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웨일즈의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강한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술집과 오락장들이 문을 닫고

감옥까지 텅텅 비었다고 합니다.


생명의 교통은 그 영의 교통이요

그리스도인 머리를 붙듦으로

유일한 그분의 권위아래 복종하고

그 보좌 아래 하나를 이루며

서로 중보기도 하는 생활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안에 산다면

포도나무 가지가 저절로 열매를 맺듯이

우리의 가정과 이웃을 변화시키고

온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그분의 왕국이 임할 것입니다.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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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

글/생명강가(2010.6.3)




그리스도인들, 즉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언젠가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순교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순교란 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다가

핍박이 올 때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흔히들 순교를 두 방면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육신적인 순교와 정신적인 순교를 말하는데

육신적인 순교보다 정신적인 순교가 더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적인 순교는 가해자가 분명하지만

정신적인 순교는 가해자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신앙의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

만약 숨어서 집회를 하다 발각되어 끌려가

‘예수는 죽었고, 부활은 거짓이다’라고

만민 앞에서 시인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요구를 거절하고 순교하면 됩니다.


그러나 개인의 인권이 존중되고 표현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와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는

‘예수만이 유일한 구주시오,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

고 전한다고 해서 누가 그것을 제제하거나

누가 우리를 고소하는 사람이 없으니

거기에 육신적 순교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대신 타락한 세상의 재물과 오락, 정욕 등

여러 가지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심지어

종교적인 선행 등 그리스도가 빠진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는 분별되고 순교당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영 안에서 깨어있지 않다면

그 기준이나 사고하는 것이 사람마다 달라

각기 자기 좋은 대로 행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붙듦을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정신적 순교는 가당치도 않는 말입니다.


나는 그러한 정신적인 순교는 덮어두고

나의 육신적인 순교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며칠 전 교회 자매님의 일을 돕다가 부주의함으로

왼손 검지 손톱이 빠지는 상처를 입고 병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손톱이야 순간적 충격으로 빠졌다지만

의사선생님이 빠진 손톱 밑의 여린 살을 서너 바늘

꿰매자고 할 때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나는 상처가 심하지 않으니 그냥 치료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리므로 양푼의 포도주 같은

소독약물에 한 시간 가량 손 전체를 담군 후

붕대로 감고, 주사 맞고, 약 먹으며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오늘도 병원에 들러 통증이 있느냐는
의사선생님의
질문에 괜찮다고 피하듯 나와서

주사 맞고 붕대만 갈아 끼우는데도

여린 살 끝이 찌릿찌릿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만약 나에게

육신적인 순교를 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과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할까 암담했습니다.

나는 그때야 순교도 내가 할 수 없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이미 순교하셨고,

또한 순교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몸 안의 생활을 철저히 함으로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전화 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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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 한 통

글/생명강가(2010.5.6)




어린이날 휴일 오후

음성형제님의 아들 J형제로부터

쉬는 날이라고 하면서 모처럼

안부전화가 왔습니다.


이십오 년 전 수원에서

우리가 갓 신혼살림을 차릴 때 쯤

그때 중학생이던 형제였는데

벌써 마흔 살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님이 좋아서

음성형제님의 본을 따라

하나님-사람의 삶을 살고자

이곳 영광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어려웠던 가정형편으로

일찌감치 철이 들어버린 형제는

언제부턴가 꼬박꼬박 복음사역을 위해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금방이라도 교회를 부흥시킬 것 같은 사람이나

큰 복지관을 지어줄 것 같은 큰 사람이 아닌

어린아이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받으시고 움직이십니다.


아버지의 본을 따라 온 나처럼

이제는 형제가 나를 본받고자 합니다.

형제는 나 때문에 힘을 얻는다고 하지만

사실 내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형제들이 주변에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랑하는 참 동생인 J형제가

금방이라도 바턴터치를 할 것 마냥

마지막 남긴 말이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형제님, 다시 뵐 때까지 꼭 건강하셔야 해요.”


이런 형제가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면류관이고 보상이며

지금 주님이 부르신다 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무한한 행복을 느끼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