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의 습성
글/생명강가(2009.12.15)
어릴 적 어떤 책에서 보았던 이야기인데
누구나 한번쯤은 이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정확한 전달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날씨가 추운 날 당나귀를 타고서
낮에는 힘들게 움직이다보니 잘 몰랐지만
밤에는 매우 추웠습니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그 사람은 인적이 없는
들판에서 천막을 치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두툼한 이불을 덮고서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밖에서 당나귀가
“주인님, 날씨가 너무 추워요. 머리만이라도 천막
안으로 넣고 밤을 지새우게 해 주세요.”라고 하니
그 주인은 하루 종일 수고한 당나귀를 생각하고
허락해 주었습니다.
잠시 후, 다시 잠이 들려고 하는데 당나귀가
“주인님, 앞다리 두 개만 더 천막 안으로 넣게
해 주세요.”하니
넉넉한 바닥에서 자는 주인이 생각하기에
당나귀의 두 발바닥 면적이야 매우 작은 것이므로
또 허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자다가 너무 추워 일어나보니
당나귀가 몸통 째 주인의 이불 밑으로 들어와
오히려 주인을 밀어내 버린 것입니다.
주인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일컬어 비유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어떤 주인이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 품삯을 정하고
자기의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도록 배려하였습니다.
낮에도 그런 사람을 불러다 일을 시키고
저녁나절에도 여전히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포도원의 일을 시켰습니다.
일이 끝나고 나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품삯을 주니
처음 불려온 사람들이 그 주인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주인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항시 이런 자기 기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하기도 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큰아들로 예표 된 유대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만유를 포함하시고 우리의 모든 긍적적인 것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삽니까?
아니면 우리 기준의 또 다른 뭔가를 추구하며
그것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까?
나는 가끔씩 내 안의 또 다른 기준으로
허우적거리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자신을
나는 철저히 미워합니다.
당나귀의 습성을 가진 나는 죽었습니다.
임마누엘
글/생명강가(2010.9.18)
두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께서
어느 부부가 합심해서 전도할 때
내 마음에 임하셨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이고
임마누엘은 사람이 부르는 이름으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대로
처녀에게서 나신 그분께서는
이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구주이시고 생명주는 영으로서
우리와 함께 장막을 치시므로
결국 새 예루살렘이 되실 것입니다.
독수리 날개
글/생명강가(2010.9.16)
여름이 세 번 지나고
겨울도 세 번 지나가는 동안
우리에게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누가 묻기를 어떻게 사느냐고 하면
독수리 날개라 했습니다.
우리에게 약함이 있기에
두려움과 갈등도 있었지만
언제나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독수리 날개 치는 것처럼
초월하는 능력 때문입니다.
한 가지 눌림은
다섯 명을 기도했을 때
오십 명인들 못주시겠느냐는 말씀에
이제는 믿음으로 반응하여
주의 강함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