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나실인 삼손(삿13-16장)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시니라
소라 땅에 단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삿13:1-5)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경건한 부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부부를 통해 사사시대의 가장 능력 있는
사사인 삼손을 얻으셔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무분별한 생활과 자신의 힘만 과신함으로써
나실인의 원칙에 따른 지속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는 블레셋의 딸 중 한 여자를 보고 아내를 삼기 위해
그 부모와 함께 딤나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거나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 되었습니다(13:14).
그러나 블레셋 아내를 취하기 위해 ‘딤나의 포도원’에 출입하고
여호와의 영을 오용하여 그의 힘을 그에게 돌진해 오는
어린 사자를 찢는 것과 삼십 인을 죽이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매우 능력 있는 사사였습니다.
그는 혼자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잡아 블레셋 사람의 곡식밭을
불태웠고(15:4-5), 나귀 턱뼈로 일천 명을 죽였습니다(15:15).
그러나 그는 늘 혼자였고,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어
동역의 필요성을 몰랐던 것이 그 실패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을 성취함에 있어서 제한을 받으시는데
그 이유는 ‘동역’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과 힘으로 싸워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힘의 근원을 알기 위해 삼손이 사랑하는 들릴라를 매수하니,
날마다 재촉하고 조르는 들릴라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여
그의 힘의 근원인 머리카락이 잘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삼손은 마지막 나실인의 규례마저 어기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여호와께서 그를 떠나셨습니다(16:20).
나실인은 바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사람입니다.
이렇듯 능력은 우리가 배우고 기억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을 바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없어지자 그의 능력이 없어졌고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가사로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잔치 때마다 그러한 삼손을 데려다
재주를 부리게 하였고 그를 노리개 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삼손의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하였고
그가 여호와께 부르짖으므로 다시 새 힘을 얻게 되니
블레셋 모든 방백과 지붕에만도 삼천 명 가량의 구경꾼들이
모여든 집에 두 기둥을 붙들고 힘을 쓰자 집이 무너지고
삼손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고, 그도 함께 죽으니
그 날에 죽은 자가 그가 살아 있을 때 죽인 사람보다
더욱 많았습니다.
'신언’
글/생명강가(2009.10.15)
신언이란?
주님을 위해 말하는 것이고
주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주님의 말을 하는 것이라고 했던가요?
아무튼 신언은 교회를 건축합니다.
우리가 집회 때마다 신언을 하지만
다들 신언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하며
주님과 연합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신언을 하다보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나의 경우에는 주로 내 경험을 많이 말하고
성경은 그 경험을 보충해주는 정도로만
말하기 때문에 신언에 힘이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과 메시지를 중심으로
교과서처럼 정석으로 말하기는 하는데
자기의 체험은 전혀 없이 지식만을 전람하는
경우로서, 이러한 신언은 집회만 끝나면
그 내용은 곧 잊혀져 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신언만 하면
눈을 부라리고 책망하듯 가르치려고만 하는데
그런 신언은 집회 분위기를 경직시킵니다.
그것은 신언하는 사람의 자아처리가
부족한 데서 오는 원인입니다.
신언이란 가장 먼저 말하는 자신이
감동되고 빛 비침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다 경험을 해 보았겠지만
대부분 신언을 망설이다가 쫓기듯 하다보면
말하고 싶은 중점은 놓쳐버리고
두서없이 자신의 약함만을 변명하다
얼버무리는 일이 태반입니다.
주님을 깊이 누리지 못한 이유로
자기의 약함만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양심 안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우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예 신언을 기피해 버리려는 지체들도 있는데
그것은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이며
몸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언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신언은 잘 한다는 것은
나의 경험에 의하면 성경 말씀을 근거로
말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특히, 관련 성경 구절의 몇몇 단어만이라도
붙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중심 부담을 말해내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러한 훈련이 잘 된
형제자매들이 많이 있음을 인해 감사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교회 건축은 신언함으로 이뤄집니다.
어떤 지체가 얼마만큼 신언하는 것이
곧 그 지체가 교회 안에 얼마만큼 건축된
정도라고 말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언하기를 사모해야 하며
신언은 우리 회복된 교회의 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신언을 하되 집회 안에서 운행하시는
성령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즉 영을 따라 하되
보이지 않는 순서와 질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집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아직 기초도 놓지 않고
지붕을 올릴 수 없는 것과 같이
신언함에 있어서 시기적절하게 말해내는 주님은
바로 우리가 새 예루살렘으로 지어지는
과정과도 같으며, 이 성이 완성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합당한 신언은
좋은 건축이라고 말할 수 있고
성공한 신언은 좋은 집을 건축하고 난 후의
뿌듯함과 같이 온 교회가 기뻐하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사람
글/생명강가(2009.10.11)
집회소 안에 오래된 피아노가 한 대있다.
타지 교회에서 자매들이라도 오면 가끔씩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대부분 우리 김종수형제님의 딸들인 예은이와
예영이의 교습용 피아노에 불과하다.
만약 이 피아노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를
주인으로 만났더라면 그 용도와 가치에 있어서
얼마나 뛰어났을까?
우주 만물은 제각기 그 기능과 용도가 있어
하늘은 땅을 위하고, 땅은 만물을 위하고,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사람만은 그 존재의 목적을 모르고
인생을 허무한 것에 굴복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복음을 바로 듣고
인생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주일 집회 중 다이아자매님이 신언을 하는데
자매님은 신언이라고 해 보았자 겨우 해당 성경
몇 구절과 몇 마디의 느낌을 조금 말할 뿐인데
교회 집회소로 오는 길에 주일날 길거리에서
정신없이 일만 하는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는 것은
자신이 오만한 것이 아니냐고 물으셨다.
오늘 우리의 교통의 주제는 ‘복음의 비밀’이다.
세상에 살면서 천지의 주재자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그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도 허망할 노릇인데, 우리는 거기에다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의 모든 것,
즉 그분의 재생산이요, 신부이며, 금 등잔대요,
하나님의 집이요, 새 예루살렘을 말하고 누리니
‘거룩한 오만’을 가질 만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분별되었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사람 되심은 우리가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과 기능과 표현과 그 능력에서까지
하나님과 똑같아 지리라는 우리의 신화 진리를
가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세상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지는 구별됨이 있고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으뜸이신 주님과 같이
우리도 부활 생명으로 견고하게 서 있게 되는
새사람 안에 속할 때 비로소 이 복음의 비밀이
땅끝까지 전해지게 되리라
피아노는 그 주인을 잘 만나야 가치가 있고
영을 가진 사람은 영이신 삼일하나님을 만나야
그 인생이 의미 있는 사람이 될 것이므로
우리의 이 청지기 직분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 모든 비밀이 복음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비밀을 가진 자들로서
이 복음을 통해 우리는 의미 있는 사람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