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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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화 그리기

글/생명강가(2009.10.10)




아들들이 중?고등학교 때나 썼을 것 같은

그림 그리는 화구가 지금도 책상 서랍에 남아있다.

이사를 몇 번이나 다니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은

평소 그림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언제쯤엔가는

꼭 필요할 것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쓰다 남은 물감 통들을 열어보니

모두 굳어져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아침에 에베소서 3장 9절의 ‘비밀의 경륜’에 관한

말씀을 개인적으로 누리고 나서 즉시

두 지체에게 전화를 하여 함께 누림을 나누었다.

두 지체가 한결같이 하시는 말씀이

아침에 혼자서 다 누렸던 말씀이었지만 함께

교통할 때 더 분명해진다고 기뻐하셨다.

나 역시도 교통을 나누면서 많은 것을 느꼈는데

그것을 나는 이렇게 표현해 보고 싶다.


교통이나 신언을 한다는 것은

마치, 물감 통 안에 있는 물감을 꺼내서

도화지에 어떤 형태의 그림을 그리듯

하나님의 그릇들인 우리 안에 공급되고 저장된

그리스도를 지체들 가운데 전시하고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만약 용기인 우리들 안에 아무리 아름다운

물감이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혼자만 소유하고

도화지 등의 지면에 그려내지 않는다면

그 아름다움은 표현할 길이 없다.


교회는 마치 각각 소유한 물감들을
각 색상별로
진열하고 여러 지체들의 각기 다른
색상과
조화되어 함께 아름답게 표현되는
유기적인 한 폭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이 그림은 유기적이기 때문에

그려진 한 폭의 그림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매년 매월 매일 매 시간마다 바뀔 수 있는 그림이다.

처음에는 어린 아이의 그림처럼 그 표현에 있어서 
분명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모방하고 또 배우다 보면

날이 갈수록 새 예루살렘이라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목표에 이르기까지 점점 투명해지고 섬세해짐으로

결국 아름다운 걸작품이 되어져 간다.


그러한 면에서 우리의 신언은

교회생활 가운데 모든 성도들이 꼭 실행해 내야 할

몸 안의 지체들의 기능이며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그러면 이러한 합당한 신언이나 교통은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그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생각해 본다면

먼저 인도하는 형제님들은 하나님의 신약경륜에

관한 분명한 이상을 가지고 있으면 좋다.

그리고 집회 서두부터 어떤 본론적인 교통보다는

스케치를 하듯 전체적 교통의 방향을 가볍게

열어줄 필요가 있는데 염두 해 둘 것은 언제라도

성령의 흐름을 따라 그 그림이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각자의 물감이 잘 섞여야 하는데

그 좋은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송 시와

찬미를 주셨다. 집회에서 찬송 시와 찬미가 흘러넘친다면
지체들의
신언과 교통은 저절로 이뤄진다.


그리고 모든 지체들이 한사람이 그리듯

신언을 통해 한 그림을 그려내야 하는데
가능하면
처음에는 스케치 하듯
가벼운
교통부터 시작하여 모든 성도가
기능발휘를 하도록
부추길 필요가 있다.
즉 그림으로 말한다면 점점 구체적
으로 그려가듯

건축의 방식으로 신언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이럴 때, 어떤 지체가 기능이 있다하여

진한 색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장중한 교통을

앞부분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거창하게

그려 놓는다면 자칫 다른 지체들은 주눅이 들어

기능발휘를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그림은 그 표현이 아무리 뚜렷하고 분명

할지라도 명작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우리에게 매 집회마다 이러한 신성한 공급하심과

분배가 있다면 매일 먹는 육신의 양식이 질리지 않듯
모든 성도들에게 집회 때마다 기쁨이 있고

활력이 넘칠 것이다. 내일은 또 집회에서
어떤 그림이 그려질 것인가
사뭇 기대가 된다.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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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복’

글/생명강가(2009.9.28)




월요일 아침, 서둘러 광주에서 열리는

목회자 세미나를 위해 집을 나서는데

아들도 광주에 볼 일이 있다며 따라 나선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들과 나는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아들에게 회복의 참된 진리도 배울 겸

전 시간 훈련에 들어갈 마음은 없느냐고 물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들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아들에게 이유를 물으니 저희들이 어려서는

부모의 강요로 마지못해 교회생활을 하였지만

이제 자신의 인생까지 구속받고 싶지 않다고 한다.


아들은 대학 2년, 군복무 2년 동안 친구따라

몇 번 기독교 모임에도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오히려 청년들을 향한 시스템은 그곳에 더

좋은 점이 많더란다. 그리고서 심통이 나는지

회복이 특별히 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고

따지듯 되묻는다.


나는 그런 아들을 대하기 힘들고 부끄럽다.

그렇다고 한 치라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수원 원천동의 한 신학대학원에 가 보면

정말 명문대를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는데 그들의 학문의 깊이와

인품이 뛰어남을 나도 인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이 회복의 길을

왜 가야만 하는지 설명할 기회를 얻었다.


아들이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는 서문할아버지,

즉 지금은 음성교회에서 봉사하시는 형제님께서

지금의 내 나이 때쯤 교회에서 한창 봉사하던 시절,

교회 형제님들과 어떤 일로 심히 다투게 되어

형제님 댁에서 별도로 모이고 있을 때였는데

나는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가 형제님을 통하여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었다.


“아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서문할아버지가

교회서 다투고 따로 모였단 말이 사실이에요?”

아들은 평소 아버지가 존경하는 서문할아버지가

교회 안에서 다투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다는 듯

의외로 관심을 보였다.


그 당시 나는 지금 아들을 낳았을 무렵인데,

말씀을 배우던 중, 성경에서 떡 떼는 것을 발견하고

형제님께 왜 우리는 모일 때 떡을 떼지 않느냐고

여쭈었더니 형제님께서 매우 난처해하시더니만

마지못해 대답하시길..


“형제여, 우리가 비록 사정상 교회 형제들과

지금은 함께 모일 수 없지만, 그러나 그 형제들이

떼고 있는 한 떡을 양심상 따로 뗄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시는데, 그 때 나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전혀 몰랐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회복은 기독교와 달리 그리스도의

인격을 사는 생활이요,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참된 믿는 이들로서, 그 후 나는
형제님과 함께
회복되어 주님을 영접한지 3년 만에
비로소
교회에서 떡을 뗄 수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아들에게 들려준 그 이야기는
영광스러운 회복의 작은 단면에 불과하지만

성경보다는 무협지 소설을 많이 읽었을 아들은

“우와! 아버지도 상당한 내공이 있으신데

서문할아버지는 완전히 ‘은닉기인’이시네요?

회복도 다투기는 하지만 몸의 하나를 위해서

양심은 지키는군요?” 아들은 감동스럽다는 듯
내 손을 끌어다
연거푸 입을 맞춘다.


그래, 회복은 서문할아버지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이 시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지킴으로써

삼일하나님과 사람의 영원한 합병체인
새 예루살렘을
이루고자 이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아들과 충분히 교통을 나누게 되었다.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아들을 내려주고

나는 세미나 장소로 이동하고 있는데
움직이는 차를
향하여 아들은 순복한다는 뜻으로
장난스럽게
큰소리로 거수경례를 하며 존경을 표한다.

그런 아들이 여전히 사랑스럽다.



어떤 주일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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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주일집회

글/생명강가(2009.9.27)




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주일 아침,

제대하고서 한동안 늦잠만 자던 아들이

주일 아침인데도 아직 기척이 없는
아빠가
걱정스럽다는듯 와서 잠을 깨운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젯밤 늦게 잔 것도 아닌데 비몽사몽

아침 여덟 시가 되도록 잠이 깨지 않았다.

어떤 날은 새벽에 일어나 보면

그제야 잠자리에 드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무척 심각하게 염려도 했었는데
그 아들이 나를
깨워 주는 것도 싫지는 않았다.


아들을 위해 기도하였더니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것 같기도 해 반갑고

아무튼 이상한 주일 아침이었다.

나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30분 정도 먼저

기도하고 나서야 주일집회 준비에 들어갔다.


주일집회에 말씀을 여는 김종수형제님과

만찬 봉사하시는 이기석 형제님께서
추석일
로 인하여 집회 참석을 못하시고
오늘은
주의 상을 봉사할 형제가 나밖에 없다.

작년 추석 무렵은 주일집회에 나 혼자 남아

있기도 했는데, 그나마 올해는 자매님들이 계셔서

집회에 대한 염려는 조금도 없다.


거의 한 달 만에 문장 자매님도 집회에 오시고

교회생활 이제 겨우 일 년 반쯤 되신

술람미 자매님께 집회의 말씀을 여시라고 했더니

항시 형제가 말씀을 여는 것을 보아온 터라

차분하게 기능발휘를 하시었다.

도시교회에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일이다.


오늘따라 교회인 금 등잔대에 공급되는 기름이

우리들 안에 넘치도록 흐르는 것을 체험하였고

비록 서너 명이 모였지만 삼사백 명이 모이는

집회에서 누리는 풍성함을 동일하게 누린다.


‘하나님의 복음의 구조’를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교통할 때, 적은 무리 가운데서도
이렇게 밝게
빛 비추고 섬세하게 공급해 주시는 것은
오직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의인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고 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근거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시고 그분의 경륜을 이루어

가실 수밖에 없는 분이시다.


교회생활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기초로
해서 이루어진다면 이기는 자들인
시온의 무리를
우리가 못 넘겨다 볼 것도 없다.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주시며,

없는 것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