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사사 입다(삿11장)
입다는 큰 용사였으나 기생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출생이 명예롭지 못한 사생아였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그가 어떻게 믿음의 증인이 될 수 있었는가
(히11:32)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그의 형제들과 다투지 않고 피하여
돕(기름진 곳) 땅에 거했습니다.
이러한 예는 요셉(창39:12)과 다윗(삼상22:1-5)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둘째,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1절은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고 말합니다. 또한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아에 판결 하시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셋째, 입다가 암몬에게 보낸 서신을 보면(15-27절)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능통한 것을 봅니다.
입다는 암몬 왕이 문제 삼은 그 땅을
하나님이 아모리 사람으로부터 취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므로
이스라엘 땅이라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 안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입다에게 여호와의 영께서 임하시어 암몬과 싸움에서
승리하고 잡류(부랑배)인 그가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입다는 처음에 전쟁이 아닌 대화로서 문제를 평화롭게
해결하려 하였으나 암몬 왕이 듣지 아니하므로,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시매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습니다(32-33절).
입다가 하나님께 서원하기를 암몬과의 전쟁에서
자신이 평안히 돌아오면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리고 번제물로 드린다고 했던 것은
원문에는 ‘여호와께 드리거나 혹은 번제로 돌릴 것이니’라는
뜻으로 두 부분이 서로 교차되는 내용입니다.
즉 한 부분은 그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고(가족, 노예)
한 부분은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소, 양 등 짐승인 경우).
입다가 미스바에서 승리하고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에 참담함을 느꼈던 것은 결코 딸을 번제로 드려야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무남독녀였기 때문입니다.
입다는 서원한 것을 이루는데 있어서 그의 딸을 처녀로
여호와께 드렸으나, 이방 풍속과 같이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번제로는 드리지 않았습니다. 즉 입다의 딸은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자로 드려진 것입니다(출38:8, 눅2:36-37).
100. 사사 아비멜렉(삿9장)
기드온이 죽은 후,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 때문에 세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알 신당의 은 칠십 개로 건달들을 고용하여
자기 형제 칠십 인을 죽이는 악을 행하였고,
이 일에 동참한 세겜 사람들도 악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직 여룹바알의 말째 아들 요담만은
스스로 숨어 화를 면하고, 나중에 세겜 사람들에게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와 가시나무 비유로서
그들이 왕을 세운 어리석음을 꾸짖었습니다.
요담의 이 비유는 여룹바알의 아들들을 앞의 세 나무들로
아비멜렉을 가시나무로 비유한 것이지만,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만족케 하며 기쁘게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계시해 줍니다.
곧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신의 위치와 직분 위에서
생명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고 있으셨고
3년이 지난 뒤 아비멜렉과 세겜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셔서
세겜 사람들로 아비멜렉을 배반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에게 행한 포악한 일을 갚되
그 형제를 죽여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22-24절).
에벳의 아들 가알의 등장은 세겜 사람들로
아비멜렉을 대항해 싸우도록 했는데, 특이한 것은
3년 전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을 꾀었던 것과
똑같은 논리로 가알도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가알의 반역은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는(고전5:6)
말씀처럼 죄는 누룩과 같이 또 다른 죄를 번식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아비멜렉과 함께 그의 형제들을 죽이는데 동참했던 세겜은
그 죄악으로 인해 아비멜렉과 그 성읍장관 스불에 의해
비참하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비멜렉 또한 후에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건들 뒤에는 비밀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이스라엘 성읍 중 가장 큰 성읍이었던
세겜 성을 쉽게 점령하자 작은 성읍인 데베스를 공격하여
취하고, 아비멜렉은 성중에 견고한 망대로 피한 백성들을
망대와 함께 불사르려다 위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머리를 맞아 매우 수치스럽게 죽고 말았습니다.
아비멜렉의 최후는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그 형제
칠십 인을 죽인 그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된 것은 이스라엘에 좋지 않은
본을 세운 것이며, 참된 왕이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런 아비멜렉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가장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그를 죽게 한 것입니다.
99. 보리떡 한 덩어리(삿7:9-25)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꿈에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영으로 굴러 들어와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위쪽으로 엎으니
그 장막이 쓰러지더라.”
그의 친구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느니라.”
하더라(13-14절).
보리떡은 첫 번째로 그리스도의 부활능력 안에 있는
기드온과 그의 삼백용사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움직이심(겔1:15-21)과
생명의 떡이신 주 예수님을 의미합니다(요6:35).
주님은 그분 자신이 생명의 떡이신 것과 그분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한
그분을 먹는 것이란 그분의 육적인 살을 먹는 것이 아니라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을 먹는 것임을 설명해 주셨습니다(요6:63).
주 예수님, 곧 생명의 떡이요 보리떡이신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만 우리는 대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때에야 비로소 대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효력이 있으며
양날이 선 어떤 칼보다 더 날카로워서,”(히4:12)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혼과 영을 나누는 칼입니다.
우리의 무기인 그분의 말씀(엡6:17)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어떤 대적의 견고한 요새도 무너뜨릴 수 있는
하나님에 속한 능력입니다(고후10:4-5).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기도하며 읽음으로써(엡6:17-18)
생명과 영을 얻는 것을 뜻합니다.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주셨느니라.”하고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하라 하니라(15-18절)
항아리는 질그릇인 우리 자신이며
횃불은 질그릇 안에 담겨 있는 보배입니다. 이 보배는
하나님의 빛이신 그리스도요, 영광의 그리스도입니다(고후4:6-7).
그 빛은 드러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겉 사람이요, 자아인 항아리를 부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생활에 적용하면,
나팔은 부는 것은 부담을 전하는 것이며
항아리를 깨뜨리는 것은 모두가 이것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보리떡이 되어 미디안 요새(세상을 예표함)를
무너뜨리는 기드온의 칼날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