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글/생명강가(2009.5.21)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갈2:20상)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환경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나는 의도적으로 이 말씀을 되뇌었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적용하기를
나를 위해 주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그 은혜로 나는 용케 살아남아서
이제 남은 생애를 덤으로 사는 것처럼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쩐지 환경 가운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다보면
아무리 참아보려고 해도 속에서 분노가 있었고,
순간순간 지체들에 대해서까지 원망이 있었습니다.
오, 주 예수여!
그러나 이제 깨달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나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기보다는
내가 당신과 함께 이미 죽었다는 의미라는 것을..
어느 교회에서
복음 텐트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처음엔 신이 나서 기회만 있으면 텐트를 쳤습니다.
그러나 연일 혼자 치는 회수가 많다보니
슬그머니 할 일 없는 사람마냥 부끄러움이 몰려옵니다.
복음지로 쓰던 교회 소식지가 몇 주째 쌓여만 갑니다.
오, 주 예수여!
그러나 이제 깨달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나에게 어떤 능력이 필요하다기보다는
내가 아니요 당신이 내 안에 산다는 의미인 것을..
잔디밭의 새
글/생명강가(2009.5.17)
오늘은 예기치 않게 중년훈련생들이
정읍에 오게 되어 정읍교회에서 장성교회와 함께
섞임 집회로 모였습니다.
장성교회가 처음 시작할 무렵..
장성에는 간증이 되는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한 가정은 간경화로 몇 번이나 사선을 넘나들었던
장성 나사로라고 할 수 있는 연로하신 형제님 부부,
그리고 일찍 남편을 여의고 오남매를 손수 키우며
농사일을 해 오신 장기순 자매님이십니다.
오늘 집회 중 자매님의 신언을 듣고 그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진에 살고 있는 큰 딸이 먼저 회복되었고
자매님은 장성교회가 세워지기 불과 일 년 전에서야
큰 딸이 주고 간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를 읽고
삼십 년 교파생활을 접고 돌아섰습니다.
자매님은 연세가 육십 중반쯤 되셔서
힘든 농사는 거의 놓아버리고 지금은
잔디 농작 일만 조금씩 하고 계십니다.
얼마 전 체험한 일이었답니다.
아침부터 혼자 잔디밭에 앉아 잡초를 매는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조그만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자매님을 떠나지 않고 예쁜 소리를 발하며
친구처럼 놀더랍니다.
자매님도 싫지 않아서 계속 일을 하는데..
한나절이 다 되도록 갈수록 더욱 아양을 떨며
뛰었다 앉았다를 반복하기도 하며
이젠 땅바닥에서 뒹굴기까지 하기에
어째 좀 이상하더랍니다.
순간, 새끼가 주변에 있나? 하고
잔디밭 옆 소나무 풀 섶을 둘러보았더니
아니다 다를까 예쁜 둥우리를 틀고
조그만 알을 네 개 낳아 놓고 그것을 지키느라
그 야단법석을 떨었던 것입니다.
세상에 작은 미물도 자기 알을 낳고
저렇게 한 나절이 다 되도록 자리를 지키며
땅에 뒹굴며 염려를 하는데..
하물며 우리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가슴에 품고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자매님은 거기까지 얘기를 하시고
목소리가 떨리시더니 잠시 말씀을 멈추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울먹이셨습니다. 자매님은 이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시고는 서둘러 신언을 마치셨습니다.
구약에 ‘하박국’이라는 성경이 있습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품에 안다’ 혹은 ‘매달리다’는 뜻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계시합니다.
하나님의 갈망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사람이 되심으로
죄인들을 품에 안으시고 죄인들로 그분께 매달리게 하여
그들로 신격에서는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나는 회복 안에서 이러한 메시지가 예사롭게
흘러가고 있지 않음을 주께 감사했습니다.
놓인 암사슴
글/생명강가(2009.5.17)
창세기49장 21절은 납달리가 놓인 암사슴이며
아름다운 소리를 발한다고 말합니다.
‘놓인 암사슴’이 상징하는 것은
죽음에서 해방되시어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시는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원래 사슴이란 동물은 비밀스런 존재입니다.
요즈음은 사람이 농장에서 사육을 하기도 하지만,
올가미는 씌우지는 않고 깊은 산속에서
방목하여 사육합니다.
사슴에 올가미를 씌운다는 것는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주 예수님은 비밀스럽고
절대로 자유로운 사슴으로 비유했습니다.
“아, 사랑하는 임의 목소리! 저기 오는구나,
산을 넘고 언덕을 넘어서 달려 오는구나,
사랑하는 나의 임은 노루처럼, 어린 사슴처럼 빠르구나,
벌써 우리 집 담 밖에 서서 창틈으로 기웃거리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아, 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속삭이네.”
(표준 새번역, 아2:8-10상)
“동산 안에서 사는 그대, 동무들이 귀를 기울이니
그대의 목소리를 들려주오.
임이여, 노루처럼 빨리 오세요.
향내 그윽한 이 산의 어린 사슴처럼,
빨리 오세요.” (표준 새번역, 아8:13-14)
주 예수님께서 인생 삼십삼 년 반 동안
제한 받으시고, 십자가의 죽음 가운데서
잠시 묶인 암사슴이 되셨습니다.
그 암사슴이신 주 예수님은
아마 이미 쌍태를 벤 암사슴이었을 것입니다.
암사슴과 함께 죽고 산 쌍태,
주 예수님은 암사슴이시며, 또한 ‘쌍태 속의 맏아들’,
우리는 단체적인 나머지 ‘쌍태 형제들’..
부활 안에서 주 예수님은 맏아들로 인정되시고
단체적인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오시는 그리스도,
그분은 온 땅에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시는
납달리 지파로서 놓인 암사슴임에 틀림없습니다.
오! 주 예수님,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