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마지막 다섯 장은 이 책의 가장 좋은 부분으로
좋은 땅을 미리 안배하심에 대하여 다룹니다.
여기에서 르우벤과 갓, 두 지파는 가축의 떼가 많음으로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그들의 원함대로 요단 동편 땅을
그들의 분깃으로 요구했습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가 요구한 땅은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땅으로서 우리는 그들이 가나안 점령을 위한
전쟁에만 함께 참여한다면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지 않는다는 것은 옛사람을 처리하지 않거나
장사를 치르지 않는 것을 상징합니다.
영적인 일들에 있어서 우리의 선택에 따라 일하는 것은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택함이 최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상 그것은 최악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을 따르지 않고 그들이 택한 것을 따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으려 했던 그들과 그 땅은
결국 이스라엘 땅 중에 동편의 이방 침략자들에 의해 첫 번째로
점령당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대상5:26).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선택을 갖는 대신 우리의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우리의 몫을 기다리되
르우벤과 갓 지파처럼 자신의 선택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가나안 땅의 경계는 부활과 승천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 경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 바다-지중해와 사해-와 하나의 강-요단-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민34:1-15).
이것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그분의 죽으심과
긴밀히 관련됨을 가리키고 우리의 누림은 그분의 죽으심의
영역 안에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부활과 승천 안으로 들어 갈 수 없습니다.
민수기 34장 16절에서 29절까지에는 좋은 땅의 배분자들이 각 지파
별로 나오는데 그 명단에는 이스라엘의 아홉 지파와 반 지파 외에
요단 동편의 두 지파와 반 지파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선택하여 얻은 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된 것 같지만 사실상 그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것일 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분으로 여겨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선택이 아닌 주님의 선택을 관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좋은 땅의 기업이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예표임을
알고 그 기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므낫세 지파의 슬로브핫의 딸들은 모세에게 아들이 없는 아버지의
기업을 상속하도록 요구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이것이 관례가 되어 이때부터 여자의 기업권에 관한 제도가
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업이 다른 지파로 옮겨가지 않도록
이스라엘 자손 중 그 기업을 이은 딸들은 자기 조상지파의
가족 되는 사람에게만 결혼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율례로 인하여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친족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었고, 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결혼하여
요셉이 장인 헬리의 아들로 인정되었던 것이 바로
민수기에 기록된 이 율례가 완성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명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의 각 종족대로 백성을 재계수하니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 여행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시고 구속하신 백성들은 크고 두려운 광야와
온갖 종류의 시련, 고난, 신성한 돌봄, 공급 및 징계를
통과했습니다(신1:19, 8:2-5). 이것은 또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법궤가 있는 성막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구속받은
백성들이 짊어진 간증이었습니다.
광야에 있었던 기간 동안 이백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간증을 돌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상업이나 일에 종사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만나를 보내시고 반석에서 물을 공급하시므로
그들의 생계를 돌보셨습니다.
사십 년의 기간 동안 여호와의 사자가 앞장서서 인도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광야에서 진을 치며 여행하고 있었는데
열국 백성이 보기에 그들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교회생활 안에서 하나님의 간증을 짊어지고 돌보기 위해
자신을 드려온 우리도 역시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실질적으로 게으르고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입니다(마20:3).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민수기는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속하신 백성들이 좋은 땅이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셔서 하나님을 위해 싸우고,
하나님과 함께 여행하기 위하여 제사장 체계로 편성된 기록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601,730명이었는데
첫 번째 계수는 군대의 편성을 위한 것이고(민1:3),
두 번째 계수는 그 땅을 기업으로 받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전쟁을 한 후 땅을 분배하기 위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적은 온 백성이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을 예표 하는
좋은 땅을 얻어 나누고 누리기 위한 것입니다.
땅을 분배하는 원칙에는
종족들의 수에 따라 나누는 것과 제비뽑아 나누는 방면이 있는데,
그것은 인수를 증가시키는 사람의 책임과 신성한 주권아래 있는
축복에 따라 분배하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으며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겼던 지파로서 계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계수된 사람 중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세와 아론을 포함하여 아무도 두 번째 계수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글/생명강가(2009.3.21)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창2:10)…
‘에덴’의 뜻은 ‘평원’, ‘초원’을 의미하고 70인 역에서는
‘기쁨의 동산’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물의 근원지’라는 뜻을 가진 ‘수원’에서
교회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수원교회는 ‘생명의 샘터’요,
‘기쁨의 동산’으로서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거듭남을 체험했고, 천방지축 어린 생명이었지만
거기 교회생활의 테두리 안에서 뛰놀고 자랐습니다.
지난달 우연히 전주에서 섞임 집회를 갖게 되었을 때,
수원교회에서 회복되어 호남지방의 완주, 무주, 정읍, 영광
네 지방에서 봉사하고 있는 형제들이 자연스레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미 먼저 수원에서 이주하여 각지에서 교회 간증을
지키고 계신 형제님들을 찾아뵙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 일을 두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주님께서 빠르게 일하셔서
음성형제님댁에서 지난 2주 전에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음성형제님께서 수원교회에서 최초로 이주하신지 16년 만에
처음 갖는 모임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인근에 괴산형제님도 계셔서
그곳으로 장소를 안배했습니다.
강원도 평창과 정선을 다니시며 교회들을 돌보시다
건강문제로 수원에서 쉬고 계시는 형제님 내외분과
화성에서 봉사하시는 형제님 내외분도 두 분의 자매님을
모시고 오셔서 이번 모임에 함께 참석하셨습니다.
모두다 사도행전 29장을 쓰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이번 모임을 갖기 위해서 형제들과 함께 기도할 때에
주께서 심히 기뻐하심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마음은 있었으나
형제님들과 변변한 식사자리 한 번 갖지 못했습니다.
마침, 이번 사도행전 결정연구를 통한 사역의 흐름을 따라
각 지에 흩어져 있는 우리에게도 한마음 한 뜻의 동역이 시급했고
이미 칠십을 넘긴 세 분의 옛 수원교회 장로형제님들께도
함께 주의 길을 가는 우리의 긴밀한 동역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추억이나 향수에 젖어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각자 봉사하는 교회의 일정 때문에 금요일 저녁에 모여
다음날 점심을 먹고 헤어지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세 번의 유기적인 집회를 가짐으로 권면과 위로가 넘치는
사도행전의 실재적인 교통을 많이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꾸밈이나 체면치레도 없었고
자신의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내 놓고 주님의 인도를 구하며,
서로 격려와 위로가 충만했습니다.
오! 주 예수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나는 이번 집회를 통하여 아름다운
동역을 누렸습니다. 우리는 어떤 목적이나 의도도 없었고,
다음에 언제 또 만날지 아무 기약도 없는 모임이었지만
몸 안에서 다만 유기적으로 사랑하고 격려했습니다.
오!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 그동안 마음 뿐이었지
앞서가신 형제님들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섬김에 있어서는
늘 아쉬움이 있었으나 이 한 번의 집회를 통하여
주께서 마음껏 위로하고 축복해 주시므로
우리에게 정말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음성형제님은 몸이 불편하시면서도 복음사역을 계속하시고,
요즈음은 심장까지 나빠지셔서 많이 야위셨습니다.
특히 괴산형제님은 74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매 주일마다
차량봉사까지 겸하시고, 자매님은 육십이 다 되어 괴산에 가셔서
지금까지도 새댁이라 불리며 식사봉사나 허드레 일을 하신답니다.
그 정도로 노인 인구가 많은 농촌에 도시의 평범한
형제자매 한 가정만이라도 와 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번 집회를 통하여 느낀 점은 교회 안의 작은 지체 한 사람도
그의 신앙 상태가 어떻든지 간에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독교와 같이
개척교회 지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들처럼 노후대책이
되어있는 것도 아니지만, 주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고
자신을 허비해 주님의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습들이
눈물겹도록 존경스럽습니다.
나는 회복 20년 교회생활 동안 영광에 오기 전까지는
라이프-스터디 책 한 권도 제대로 추구해보지 않던 그야말로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불과 이삼 년 사이에 교회의 필요를 위해서 말씀을 추구하므로
지난 20년 간 황충에게 먹혀버린 잃어버린 시간들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헤어지기가 아쉬워 정읍교회에서 주일집회를 하고
영광교회까지 들려 하루 밤을 더 묵고 가신 화성교회 지체들과
나누었던 우리들의 교통, 세세한 것을..
아마도 그 기쁨과 영 안의 풍성함을 다 기록해야 한다면
우리 집회소를 가득 채우고도 부족할 것입니다.
나는 다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길.. 갈수록 좁은 이 길..
그러나 바꾸고 싶지 않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