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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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나

글/생명강가(2009.2.14)




주님이 아담이실 때, 나는 갈비뼈였으며

주님이 솔로몬이실 때, 나는 술람미였습니다.

-창2:20-24, 아가서


주님이 증거궤이실 때, 나는 조각목이었으며

주님이 등불이실 때, 나는 등잔대였습니다.

-출25:10-22, 31-40, 계1:20


주님이 찔리심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었고

주님이 상하심은 나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사53:5, 엡2:1, 5


주님이 의사로 오실 때, 나는 병든 사람이었고

주님이 구주로 오실 때, 나는 죄인이었습니다.

-마9:12-13


주님이 인성을 입으실 때, 나는 신성에 참여했고

주님이 보배이실 때, 나는 담는 질그릇이었습니다.

-요1:14, 벧후1:4, 골2:9-10, 롬9:24


주님이 한 알의 밀로 죽으실 때, 나는 많은 밀이 되었고

주님이 ‘다 이뤘다.’하실 때 나는 해방되었습니다.

-요12:24, 요19:30


주님의 죽으심을 나의 삶의 틀로 여겼으며

주님의 부활하심은 나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갈2:20, 빌3:10-11


주님이 포도나무이실 때, 나는 그 가지였으며

주님이 목자이실 때, 나는 양 무리에 속했습니다.

-요15:5, 시23편, 요10장


주님이 그 영을 부으실 때, 나는 주의 이름을 불렀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실 때, 나도 그분 안에 거했습니다.

-욜2:28-32, 요20:22, 14:23


주님이 아버지를 증거 하시고, 내가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은

주님이 원본이시고, 나는 복사판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요1:18, 계1:2, 9, 11-12, 20


주님이 맏아들이 되셨을 때, 나도 아들이 되었으며

주님이 승천하셨을 때, 나는 보좌에 참여했습니다.

-롬8:29, 요1:12, 엡2:6, 계20:4


주님은 머리이요, 나는 그 몸의 지체인 것은

주님께서 손등이시면, 나는 손바닥이란 뜻입니다.

-골1:18, 고전12:12, 행9:4


주님이 사탄을 이기셨으니, 나는 사탄에게 증거하였고

어린양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그분을 따릅니다.

-요14:30, 계12:11, 14:4


어린양의 결혼 날에 나는 신부가 되었고

주님이 전쟁하시는 장군이실 때, 나는 신부군대였습니다.

-계19:7-8, 11-14


주님의 거룩한 삼일성을 내가 누릴 때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나는 공동 왕이 될 것입니다.

-요14:20, 17:21, 계20:4, 6


주님이 생명수의 강으로 흐르실 때, 나는 보석이 되어 

주님과 나는 함께 새 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

-창2:10-12, 계22:1-2, 21:19-20, 23



신랑 예수 바쁘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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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예수 바쁘다네~ 

글/생명강가(2009.2.12)




꽃가마를 타고 오는 신부의 행렬 앞서서
조랑말을 타고서
자꾸만 뒤돌아보며 히죽거리는 
신랑의 풍경이 있었습니다.

신랑이신 주 예수님을 생각하면 오늘은 나도
왠지 장난기가
발동하는 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내재적인 의미를 추구하다보니

‘항상 전진하시고 결코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일’이란

구절이 자꾸만 마음에 부딪쳐옵니다.


과연 그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 혼자 생각하다 보니

결국 그것은 단장된 신부를 찾고, 조성시키는 일이라고

단정 짓게 되었습니다. 물론 신부는 그리스도의 증가요,

한 무리의 거듭난 사람들인 교회를 예표합니다.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마치시기까지는
결코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신부는 또한 그분의 안식처요, 거처(요14:23)가 될
것이기에
아직 주님께는 쉴 곳도 없으셨던 것입니다(마8:20).

그러므로 신랑이신 주님은 신부를 위해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내 주셨을 뿐 아니라(엡5:25, 빌2:8)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생각해 보면 리브가를 신부로 맞이하던 이삭이

들에서 배회하였던 것도 사실 신부가 무사히 도착하기까지
안절부절
하며 초조하게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창24:65). 


주 예수님도 그분의 마음에 갈망하시는 신부가

단장되기까지 안절부절 못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실지 모르겠지만,

그분이 기록하신 보아스의 이야기만 봐도 틀림없습니다.

보아스는 이 시대에 이방 여인과 같은 우리들을
신부로 맞는
주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룻기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방 여인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룻3:18)


정말 나오미의 말대로 보아스는 룻을 사랑하므로,
성문에 나가
먼저 기업을 무를 사람을 찾아 그를 데리고

성읍 장로들 앞에 가서 담판을 짓고서 나오미의 말대로
일을 성취하기까지 쉬지 않고 결국 댓가를 지불하고

룻을 맞이하여 아내를 삼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룻4:13).


이삭의 축복을 받기 위해 아들 야곱에게 자칫 저주를
받을지도 모르는 무모한 일을 시킨 리브가(창27:13)와

며느리 룻을 딸로 여기고 모든 일을 계획하는 나오미는
마치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어떤 여인과 동일한 여인들인 것 같습니다.


사실 솔로몬 왕께는 왕후와 비빈들이 많이 있었으나

게달의 장막과 같은 시골뜨기 소녀를 사랑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의 형편 없는 신분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복사판이 된
이유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주님이 그런 바보이기에.. 우리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가
무엇이관대 주님은 그토록 찾고 찾는 건가요?
우리에게 무엇을 얻으시고자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실까요?

사랑에 눈이 멀어 바보처럼 오늘도 쉬지 못하시는
그런 주님을 이렇게 놀려도 되
나요?


오늘날 우리의 느긋하고 형편없는 모습을 보노라면
당신을
놀림이 지금은 큰 허물이 될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 친근한 몫은 다른 분
들에게 돌리고,
나는 당신의 분명한 복사판이 되기 위해
연단하는 불로
흠과 티나 주름 잡힌 것들을 모두 태우고
내 안에 조금도 거스름이 없도록 당신을 내 주로 삼고

주 예수, 당신을 나의 으뜸으로 삼습니다.

주 예수,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아멘.


1년 전 인천 지체들께서 오셔서 곡도 없이 불러주고

가신 찬송입니다. 그 노래가 이 글을 쓰는 중에 생각나서
함께
올리며 마치고자합니다. 가사가 틀리면 수정해 주시고

어느 분이 곡도 알면 올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빛이 없어도 환하게 비쳐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당신의 노래가 있으므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나는 없어도 당신이 내게 있으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나는 있어도 당신이 내게 없으면 나는 언제나 없습니다.

당신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당신의 노래가 있으므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아버지와 아들


잔잔한 시냇가 2011-12-13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mdhsk2545/35457.html
아버지와 아들

글/생명강가(2009.1.29)



 

내가 청년시절일 무렵 나에게도 아버지가 계셨고, 또 세월이 흘러
이제 아들이 그 만한 청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무책임한 생활력과 목표 없는 인생을 사시던 모습을 보고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항시 속으로 다짐하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약주를 좋아하시다 보니 마을 앞 윷놀이 판에서는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떠들썩하니 들리는 일이 예사였습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감히 가까이 할 수 없었고,
아버지도 나에게 다정스럽게 대해 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특별히 좋은 기억이 없었음에도
어린 내 마음은 아버지에 대한 불평이나 미움은 조금도 없었고,
그냥 큰 바위처럼 옆에 계신 것만으로도 좋았던 것 같고
오히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아버지의 그 호탕한 기개를
펼치며 사실 수 있도록 잘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그러한 기회는 드리지 못하였으나
만성 기관지 천식으로 세상을 떠나실 때, 나는 자식된 도리로서
대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그분께 안겨드렸습니다.


반대로 나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내가 부둥켜안고 씨름도하며
아빠이면서 친구처럼 친근하게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런 아빠를 어릴 적 아들들은 영웅처럼 여기며 잘 따랐습니다.
그 후 아들도 자라서 청년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고서는

어느 날 아들이 나에게 서슴없이 말하기를
자기는 커서 아빠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빠는 주님과 교회만 위하고
남들처럼 물질적으로 여유롭게 살 생각을 안 해서 싫답니다.


그날 가만히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동안 말은 안 해도
친구들처럼 넓은 아파트에서 살아보고 싶었고,
봉고차가 아닌 좋은 승용차를 타는 아빠의 모습도 보고 싶었고,
유명메이커는 아니어도 옷이나 신발도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사 보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나는 그런 아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사역원 청소년집회에서 부산의 J형제님 아들이
청소년 사역자가 되어 집회 중 잠깐 간증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젊은 J형제는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아버지는 늘 밥상 펴 놓고 성경보시는 일과 다락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거나 주무시던 아버지의 모습 밖에 없었답니다.
기독교의 목회자였다가 회복되신 후 특별한 직업이 없으셨던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에 신고 갈 운동화가 없어 교회 안에서 대물림한
운동화만을 신고 다니기 일쑤였고 언젠가는 신발이 떨어져
성한 것만 골라 아들이 짝짝으로 신고 다니는데도
아버지는 아무 대책 없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시더라는 겁니다.


처음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왜 우리 아버지처럼
주님만 믿고 의지하시는데 도와주시지 않으시냐며  
참 많이도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 계셨고, 그 아버지의 기도로 말미암아
방탕하던 자신이 세상으로 흘러 떠내려가지 않고
이 시점 아버지와 같은 봉사자가 되고 보니,
그 어려움 가운데 자식이 신고 다니는 색깔 다른
짝짝의 운동화에도 조금도 요동치 않으시고 여전히
눈물로 주님을 의지하고 신실히 기도하시던 그 아버지께서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럽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날 이후 젊은 J형제의 아버지를 전국 사역집회에서 뵐 때마다
고개 숙여 깊이 존경합니다.
 아버지로서 그런 아들을 갖는다는 것은
최고의 기쁨이요, 영예일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부모의 또 다른 결점이 많아서 그런 말을 했으리라
짐작은 합니다만 아들도 그렇게 말하고 미안했던지,
아빠가 먼저 아브라함처럼 축복 받고 웟치만 니 형제님처럼
훌륭한 사람이 된다면 저도 아빠의 하나님을 믿고 기회가 되면
전 시간 훈련도 받겠노라고 했습니다.
나에게도 아직 가망은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순종의 길 가고,
웟치만 니 형제님처럼 순교의 길을 가다보면
언젠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날도 있겠지요?
아멘, 그러므로 나는 잠시도 혼 안에 머뭇거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