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열두 정탐꾼(민13-14장)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좋은 땅의
변경까지 이끄셨으며, 그들은 쉽게 그 변경을 가로질러
그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두 정탐꾼을 보내어 그 땅을 정탐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셨습니다.
이 시험은 그들을 최대한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을 주의하지 않고
자신들만을 주의했습니다. 인간 존재인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우리의 직업, 우리의 안전과 보호를 관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이 땅위의 참된 쟁점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문제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좇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만한 것으로 믿는 사람입니다.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민13:30)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열 사람은 그 땅의 거민의 신장이 장대하며
성읍도 견고하고 심히 크게 보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은 메뚜기 같이 보았습니다.
그들이 본 것은 그들 앞에 있는 어려움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좋은 땅을 취하기를 바라시지만
우리는 초보적으로 그분을 우리의 구주로만 누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누렸던
모든 항목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에 참여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유월절로, 만나로, 반석으로, 생수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율법으로, 제물들로, 성막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다만 그 땅으로 들어가서
믿음으로 그 땅을 취해야 합니다.“할렐루야!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그분은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십니다.
나는 이 땅을 탐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그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권익을 관심하는데서 생겨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많이 관심할 때는 하나님께
믿음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는 위치를 취하고, 그분의 권익을 위해
모든 우리의 장래, 가족, 생명까지도 위험을 무릅쓴다면
믿음이 저절로 우리 안에 생겨날 것입니다.
그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려 한다면 우리의 유익을 관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유익을 관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역사는
하나님을 관심하고 그들 자신의 유익을 돌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믿음에 속한 사람들이 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글/생명강가(2009.1.22)
음력 섣달그믐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날을 기점으로 사람들은 한 해를 마감하고
다시 새해를 시작합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며,
시작과 끝이다.”(계22:13)
이 말씀은 성경에서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가장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말씀구절인 듯 싶습니다.
오늘은 그 시작과 끝이신 주 예수님에 대하여
묵상했던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회복역 성경의 13의 2각주에 의하면,
<주 예수님은 처음이실 뿐 아니라 시작이시며,
마지막이실 뿐 아니라 끝이시다. ‘처음’이라는 것은
그분 이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고, ‘마지막’이라는
것은 그분 이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달리, ‘시작’이라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의
기원이시라는 것이고, ‘끝’이라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의 완결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주 예수님 이전에나 이후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분 없이는 기원도
완결도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신 주 예수님, 그분이 ‘기원과 완결’이시다는
내용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 글의 뜻이 나에게는 주 예수님께서 우주의 시작과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웅장하고 생동감 넘치며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대 서사시를 쓰고 계시며
영원한 드라마로 엮고 계신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분은 창세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엡1:4), 시간 안에서 부르시어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경륜을 위하여 우주의 중심으로서(롬5:14, 요17:23),
우리를 그 각본대로 연출케 하신 것 같습니다.
나는 언젠가 욥기가 한 드라마의 시나리오 같다고
여겼는데, 오늘은 성경 전체가 거대하고 웅장한
하나님의 대 서사시오, 온 우주를 무대로 한 광대하고
영원한 대하드라마 한 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위대한 극작가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 대본(성경)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는
수십 세기를 거쳐 지금까지 온 인류를 등장인물로서
움직이시고 계신다는 느낌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드라마 대본으로 비유한다고 해서,
그 거룩함을 폄하하고 싶다거나 성경의 진실성을 조금이라도
실추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을 밝혀둡니다.
다만, 이 글을 쓴 목적은 이 시대의 이기는 자들이 산출
되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드라마 대본이든지 시작과 끝이 중요합니다.
나머지는 모두 과정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현실인 과정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드라마의 끝, 즉 종결을
알면 그 과정을 더욱 충실히 계획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 내가 보니,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에
게서 내려오는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계21:2).
하나님은 영원 안에 스스로 계신 분입니다. 그분이 이
영원한 드라마를 각본하셨다고 가정한다면, 하와로 시작
하여 신부로 예표 된 교회가 마지막 단체적 하나님-사람의
영원한 합병체인 새 예루살렘으로 끝나는 그림이 있을 뿐
아니라, 뱀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마지막 옛 뱀, 마귀,
용으로 묘사된 사탄의 끝도 우리는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을 미혹하던 마귀는 불과 유황의 못에 던져졌는데,
거기에는 짐승과 거짓선지자도 있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밤낮으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계20:10).
영원 안에 계신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각본이 끝난 것처럼
성경의 주요 대목들을 과거시제로 기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어려운 시련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를
성령께서 격려해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님들, 용기를 내십시오. 여러분의 싸움은
이미 각본에는 승리한 싸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달리십시오. 나는 여러분의 고난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직 눈물은 보이지 말고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오. 여러분의
영광은 주님의 영광과 동일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회들에게 권고한 대로 처음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계속 NG를 낸다면 이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해
그 주역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세상과 연합하지 말고, 종교로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
하십시오. 교만과 미지근함도 버리고, 형제사랑으로 몸의
하나를 지키십시오. 교회는 주 예수님의 확대요, 증가요,
연장이요, 표현입니다. 금 등잔대로서 삼일하나님의 본질과
형태로 우리는 오늘날 예수님의 증거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이 우주의 서사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때로
우리를 사형선고 받은 것과 같은 시련에 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 예수님께서 시작이셨던
것처럼 끝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교회로서, 이 시대 온 우주의 주역입니다.
여러분은 왕국의 유전자를 가진 하나님의 왕국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글 쓰시는 예수님
글/생명강가(2008.12.27)
이른 아침,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
모여든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 이른 아침에 또 다른 한 무리,
율법학자들과 바리세인들이 몰아 닥쳤습니다.
그들은 어디에선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끌어다 주님 앞에 세웠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이미 살벌하게 돌들이
들려 있었고, 거기에 모인 무리는 긴장했습니다.
여인은 이제 부끄러움도 체념한 듯
속곳도 여미지 못하고 힘없이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거론하며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
예수님의 처결 방법을 묻고 있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시내 산에서 율법의 계명들을 친히 돌 판에
기록해 주셨습니다(출24:12, 신4:13).
평소엔 늘 말씀으로만 하시던 하나님께서
그 날따라 글로서 언약하신 것입니다.
문서에는 무엇인가 확실한 효력이 있습니다.
그 옛 언약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는
여인의 운명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은 몸을 굽히시어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이 이상한 행동 후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라고 하시고는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그러자 그 무리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다 물러가고 이제 그 자리에는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땅에다 무슨 글을 쓰셨기에
나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혼비백산 사라졌을까요?
나는 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주께서 기적으로
연대별로 그들의 죄들을 기록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사람들의 삶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 바벨론 왕 벨사살 때에도 예루살렘에서 탈취한
거룩한 성전의 금은 그릇들을 왕이 더럽히므로 그때도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왕궁 벽에 아무도 알 수 없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단5:24-28). 그 내용인즉,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를 세어서 시대를 끝냈고,
왕은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여, 그 나라를 메대와
바사사람에게 준바 되었다.’란 뜻이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 13장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땅은 사람들의 마음임을 밝혀 줍니다(마13:18-23).
그 땅의 상태에 따라 말씀을 받는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바울도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이며
우리의 마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쓰셨다고
말씀합니다(고후3:3).
나는 더 이상은 주님이 쓰신 글에 대해 알 수 없습니다.
나머지는 언젠가 우리 주님을 만나서 한가하게 차 한 잔
마시며 여쭈어 볼까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교훈을 얻어야 할 분명한 것은
율법에 의해서는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입니다(롬3:10).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롬3:24).
그러나 예수님마저도 이 여인을 정죄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도
그 누구를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선과 악으로 가득찬 타락한 상태이나
우리 주님은 긍휼과 사랑이심을 또 한 번 깨닫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종교적인 옳고 그름에서 해방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우린 구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