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근 동산
글/생명강가(2008.11.1)
왕의 사랑을 받게 되는 신부의 조건들은
미모, 교양, 미덕, 가문, 재물, 건강.. 등
많은 것들을 들 수 있겠지만
특히 그 중에서 으뜸으로 꼽으라면
신부의 처녀성 즉 그 비밀스러움이 아닐까?
솔로몬 왕에게도
모든 조건을 고루 갖춘 수 없이 많은
왕후와 비빈이 있었지만
시골처녀 출신으로 오직
솔로몬으로만 점유된 순수한 여인은
술람미 한 사람 밖에 없었다.
그녀는 솔로몬을 알게 된 이후
모든 여자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할 정도로
오직 사랑하는 그분에게만 사로잡혀
그분을 향한 사랑의 병을 앓으며
뛰어난 사랑을 노래하므로써 결국 모든
여자들까지도 그분을 찾아 나선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아4:12)
솔로몬이 그녀를 가리켜 높이는 찬사이다.
잠근 동산은 주인 외에 출입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영역을 말하고
덮은 우물은 먼지나 불순물이 들어가지
않는 정결한 성분을 간직하는 것이며
봉한 샘은 아무에게나 공개할 수 없으며
오직 주인만이 마시고 기쁨을 얻는다.
이것은 그녀가 왕의 만족과 누림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땅의 사람들도 한 쌍의 남녀가
지속적인 사랑을 나누며 끝까지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비결에는 무엇보다
이러한 신부의 순결이 중요하다.
지혜롭고 현숙한 여인이란
남편 외에 그 누구에게도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고
오직 남편만을 위하는 여인에게서 비롯된 말일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 받고 싶은 여인들에게
그 비결을 아가서에서 배우라 하면 지나치다고 할까?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천한 동물의 세계만 보더라도 각기 자기의
영역을 표시하고 만약 그 영역을 침범하는
대적이 있을시 죽음의 혈투를 벌이는 것을 본다.
하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교회를 사랑하시는 그 맹렬한 질투심은
성경 곳곳에서 그분 외에 어떠한 것으로도
그분을 대체하는 것을 용납지 않으신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왕이신 그분에게 온전한 사랑을 드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문을 열면 안 되는
비밀스런 주님만의 영역임을 말한다.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의 왕 브로닥 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들에게 보였는데 왕궁과 그의 나라 안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히스기야가 그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더라.(왕하20:12-13)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하니(왕하20:16-18)
유다 왕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신실하였고
왕으로서 훌륭한 치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왕으로부터 자신의 병문안을 온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자신의 보물고로부터 나라 안의
모든 것을 자랑스레 다 내보였다.
그 일로 인하여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소유들을 이방에 쉽게 열어버린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과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초래하게 된다.
나 또한 이러한 행동을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작은 깨달음만 있어도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여기저기 다 퍼내버리고
실재로는 영 안에서 너무나 빈곤함을 느낄 때가 많다.
물론 꼭 세상을 향하여 자신을 일부러 열어 놓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나의 천연적인 본성은
상대방을 위하여 선한 일이라고 생각되면
쉽게 모든 것을 열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미가 신언자의 경고와 같이 오히려 주님을 향한
비밀스러움이라고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얕은 그리스도인으로 전락되기 십상이다.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미7:1-5)
마지막 때가 가까올수록 깨어서 자신을 분별하여
주께 드리고 그분의 만족을 위하여 자신을 지키고
오직 그분의 비밀스런 신부가 되기를 소망 한다.
글/생명강가(2008.10.29)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 앞에 던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출4:24-26)
이스라엘의 부르심 받은 족속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남자들에게 난 지
팔일 만에 포피를 베는 할례의 언약을 정하셨고
그 후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무리들도
또한 모두 할례를 받게 된다.
할례는 소극적인 면에서는 죽음을 의미하고
적극적인 면에서는 제 팔 일째 되는 날 행하는
믿는 이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할례가 죽음과 부활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광야의 호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코자
선택된 백성에게로 보내어졌다.
그런데 가는 길에서 하나님은 갑자기
영문을 알 수 없이 모세를 죽이려 하신다.
평소 하나님을 섬기던 모세에게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무슨 연유였는지 그동안 할례를 거부해 온 듯한
십보라의 마지못해 행하는 아들의 할례로 인하여
모세는 겨우 하나님의 진노에서 모면하게 되었고
이때 모세는 아내에게 피 남편이라 불리었다.
피 남편이라 함은
세상과 육체로는 이제 죽은 남편이요
주 안에서만 살게 된 남편임을 말할 것이다.
평소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례에 대하여 그다지 시급히 문제 삼지 않으셨지만
모든 이스라엘 집에 양 피를 발라야 하고
바로 왕의 아들로부터 모든 장자들을 치는
엄중한 하나님의 통치를 집행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은
더 이상 모세의 아들에 대한 무할례를 방관할 수 없었다.
할례는 또한 하나님께 거룩히 분별되는 것으로
집 안에서 낳은 자는 물론이고 이방에서 사 온 종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남자는 다 행해야 했었다(창17:12).
누구든지 나에게 오는 사람이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혼 생명까지 미워하지 않는다면,
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눅14:26)
사실 그것은 혼 생명을 잃는 문제로서
가족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기보다는
모든 가족을 할례로 말미암아 거룩히 분별하여
하나님의 소유로 드려지게 해야 한다.
엄격히 말해서 우리 자신은 물론 모든 가족까지
죽음(버려짐)을 통하여 거룩히 분별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교회에 합당치 않게 된다.
더욱이 주님의 부르심에 있어서
이 시대를 전환하고 왕국시대를 맞이하려는
교회 가운데 이기는 자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 남편이요, 피 아내, 피 부모,
피 자녀, 피 형제자매로 불리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처리 되어야 할
우리의 육체와 혼 생명을 일찌감치 죽음에 두는
지혜로서 매 순간 그 영을 따라 순종해 감으로
그 날 영광 가운데 서리라 다짐해 본다.
그리고 지금 닥치는 시련들이 쓰지만
정말.. 사랑한다.
영적 코메디
글/생명강가(2008.10.21)
22년 전 주님을 영접하고 나서부터 비로소
성경을 생명의 방식으로 대하면서 나는 성경 안의 행하신
주님의 명쾌한 질문과 답변을 기분 좋게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바로 요한복음 9장의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그 사람을 보고서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랍비님, 누가 죄를 지어서 이 사람이 눈먼 이로 태어났습니까?
이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의 부모입니까?”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무슨 좋지 않은 환경이나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 분명 누구의 죄 때문 일 것이라고
생각 하는가 봅니다.(행28: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이 나타나기 위한 것입니다.”라고 하시며
그를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묻고 그를 바리세인들에게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바리세인들도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 없어
그에게 직접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라는 분께서 내 눈에 진흙을 발라 주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십시오.’라고 하여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이 대답을 수천 번 한다 해도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하면 할수록 더욱 신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세인 중에 어떤 이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닙니다.”하고 또 다른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그들 가운데 분쟁이 생겼습니다.
지금부터 십오륙 년 전 기독교 서적을 취급하던 때 일입니다.
경기도 군포시에 순복음 신학교가 있었는데 하루는 그곳에서
복음서원 서적을 가판대에 진열하고 전시 판매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학생들 중 한 무리가 “왜 이단서적을 교내에서 파느냐?”고
항의를 해 오고, 그 옆에서 책을 구입하던 또 한 무리는
“왜 워치만 니가 이단이냐? 이단이 그런 생명의 말씀을 펼 수 있느냐?”며
우리를 옹호하여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체험하고 눈을 뜬 사람에게는 너무나 분명하고 쉬운데,
그렇지 못한 교리와 관념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혼돈과 억측만
무성하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결국 그들끼리 해결점을 못 찾고
문제의 당사자인 그 눈뜬 이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대의 눈을 뜨게 하였으니 그대는 그가 어떤 사람
이라고 말하겠소?” 그러자 그가 “그분은 신언자이십니다.”라고
거침없이 대답하였습니다.
그의 확신에 찬 단순한 답변에 할 말을 잃은 유대인들은
하나마나한 질문이었음을 후회하고 속이 씁쓰름했을 것입니다.
안식일과 교리에 빠져 여전히 예수를 이단일 것이라고 단정한 그들은
이제 그의 부모까지 불러들여 다시 확인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아이였던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모르고, 또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가 장성 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 할 것입니다.”
사실 그의 부모는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그 유대인들이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영적 희극과 같았습니다.
예수님 한분을 가운데 두고 서로 이해가 얽힌 각 사람들이
가지각색의 내면세계를 표출해 내는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눈먼 이였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 그를 회유하여
종교적으로 매듭지으려고 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오. 우리는 그 사람이 죄인인 줄을 압니다.”
라며 그들은 설득하였으나 그는 그것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나는 그분께서 죄인이신지 아니신지 모르지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전에는 눈먼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본다는 것입니다.”라며 여전히 사실만을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 사람이 그대에게 무엇을 하였소?
그가 어떻게 그대의 눈을 뜨게 하였소?”라며 재차 다그쳐 물었습니다.
진흙에 침을 발라 눈먼 이의 눈에 바른 주님의 이상한 행위를
영적 소경이었던 그들로서는 오히려 그것을 미신적인 사술로
트집을 잡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이미 말 하였는데도 듣지 않더니,
왜 다시 듣고자 합니까? 여러분도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말은 그가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여 억지로 그 사실을 왜곡시키려는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빗대어 빈정대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T.V 코메디 프로를 보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웃기는 이야기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한편은 예수님을 시기하고 모함하여 죽이려는 유력한 종교 지도자들이고,
그 상대는 눈멀고 길거리에서 구걸하던 약한 거지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보면서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코메디 작가는
분명 우리 주님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이없이 당한 유대인들이 그에게 욕을 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는 젊잖게 이런 식으로 기록되었지만
“네 놈은 그 사람의 제자이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은 어디서 굴러온 자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아마 그들이 혈기를 부리며 그 이상의 고약한 욕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영적 싸움에서 혈기를 부리는 것은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그는 이 기회를 붙잡고 이제 마지막 말로 완승을 합니다.
“그분께서 내 눈을 뜨게 하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께서 어디서 오셨는지 모른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몹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시간이 시작된 이래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이의 눈을
누군가가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이분께서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으셨다면,
아무것도 하실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나는 도대체 누가 거지이고 누가 권세자인지 모르겠습니다.
소경되었던 자가 생명의 말씀에 순종하고, 빛을 본 이후에
오히려 영적인 권세자가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의 생각에 죄로 말미암았으리라는
죽음 같은 환경이 오히려 주님의 산 말씀과 함께
권세 있는 바리세인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각각 헤어나기 어려운 환경가운데서
주님의 산 말씀을 의지하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혼 생명을 기꺼이
잃어버리고, 그날에 영광스런 생명으로 보상받기 원합니다.
더불어 우리의 약함이 주의 강함이 되기를 사모합니다(고후12:10).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