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왕국의 묘사(출18장)
모세의 장인이며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가
모든 소식을 듣고 모세가 돌려보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리고 광야에 들어와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진 친 곳에 이르렀습니다.
모세가 나가서 그 장인을 맞아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고하니, 이드로가 여호와께 찬미하고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므로 이스라엘에게 교만히 행하는
그들을 이기셨도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네 방면으로 묘사된 왕국의 그림을 봅니다.
첫째,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를 패배시킨 후
하나님의 왕국이 임한다는 것을 계시합니다.
둘째, 그러고 나서 이드로와 같이 하나님을 찾고 있는 이방인이
그분을 경배하기 위해 나올 것임을 지적합니다.
셋째, 왕국이 임할 때 교회는 왕국에 참여합니다.
교회는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배척당하던 동안 이방 땅에서 얻은
그의 아내 십보라로 대표되었습니다(출2:13-22).
넷째, 왕국의 권위와 질서에 관한 묘사를 보게 됩니다.
이튿날 모세가 백성을 재판하느라 앉았고
백성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의 곁에 선 것을 보고
이드로가 모세에게 방침을 이르되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길 간구하면서 백성 가운데서 그를 도와 함께 일할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오십부장과 십부장들을 임명하도록
적극적으로 제의했습니다.
왕국의 권위와 질서에 대하여
출애굽기 18장과 신명기 1장의 기록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무거운 짐과 괴로운 것과 다툼의 문제들을 말함으로써
그분의 왕국에서 백성들 사이에 좋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인 반면, 민수기 11장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백성의
심각한 반역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들 간의 관계를 돌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께서 이스라엘의 칠십 장로들 위에 임하여
그들이 선지자들이 되게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민11:16-17).
이에 모세가 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들을 택하여
그들로 백성의 우두머리,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니,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되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오고 모든 작은 일은 스스로
재판하였습니다. 신약에서도 같은 원칙으로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집사를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6:3).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 안에는 무질서가 전혀 없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서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
질서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글/생명강가(2008.10.3)
예수께서 몸을 돌이키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이여,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우십시오..”(눅23:28)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할 때
로마 군인들은 시골에서 올라와 힘깨나 써 보이는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웠고
어떤 여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는 아무도 대신 질 수 없는.. 오직 주님
만이 유일하게 지실 수 있는 자격이 있으시고(막10:38-39)
또한 여인들도 주님을 위해서보다는 오히려 그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해서 통곡했어야 했었습니다.
그 당시는 그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겠지만
그러나 그 날(눅23:29)이 닥치면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
이 말씀을 대하면서 나는 주의 일에 대하여
너무 신령해지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베드로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나는 베드로 형제님이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실수가 많았던 것이 꼭 우리와 같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 형제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신앙고백을 하고 난 이후에 주님은 그에게
교회에 대한 이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과
제3일에 부활하실 것도 알려주셨습니다.
이때 성경은 기록하기를
베드로가 그분을 붙잡고 한 쪽으로 가서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이 일이 결코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며 책망하기 시작하였다.(마16:22)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기 쉬운 말이니까 그렇겠지만 사실은
피조 된 사람이 창조주 하나님을 꾸짖는 꼴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 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과연 우리는 상상이라도 하겠습니까?
오늘날 믿는 이들 중 교회 안팎에서 너무나 쉽게 정죄하고
서로에 대하여 불신하며 함부로 말하기가 일쑤입니다.
이들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대변인처럼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성경에서는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아2:15)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와중에서도
그것을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며 눈물 흘리며 기도하지만
과민 대응하는 베드로처럼 교회를 정화시키려는
주님의 손길을 막는 자들도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남의 다리 긁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음성의 형제님이 생각납니다.
항시 바람 잘날 없던 우리에게 그분은 한결 같았습니다.
그분은 절대 누가 옳고 그름을 판가름 하려 하시지 않고
이유도 원인도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김형제 힘들지요? 그 일로 형제가 주님과 가까워졌나요?”
하시고 나서 함께 기도하시자고 하십니다.
언젠가 한 번은 봉사자 집회에 불만을 품고 다툼이 있을 때
형제님이 오셔서 똑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나는 봉사집회에서 합당한 실행을 위하여 장로형제님께
말대꾸는 하였지만 내가 틀림없이 옳았다고 맹세하며,
나는 주님과 아주 가깝다고 대답해버렸습니다.
그러나 형제님께서 함께 기도 하시자고 하실 때..
나는 도저히 기도 할 수가 없어서 결국 형제님들을 미워했던 것을
눈물로 회개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리고 장로형제님께도 나의 잘못을 고백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이 그때 당시는
왜 그렇게 힘들고 어려웠던지 그때만 생각하면
괜히 죄송스럽고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과 권위에 속한 것임을 볼 때
하나하나 내려놓고 나는 조용히
주님을 앙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생명강가(2008.10.2)
영광 홍농읍에 소재한 사랑의 집에는
노인들이 열 댓 분 살고 계신다.
오늘 모처럼 귀한 전통 우리 차 한 잔씩
다과와 함께 대접해 드리며
사람 사는 이야기나 나누고 오리라 생각하고
집에 아껴둔 지리산 녹차 한 봉지와
노인들 좋아하시는 과자 몇 봉지 사서
잰걸음으로 사랑의 집으로 향했다.
가던 길에 홍농 헬스장에 들러
헬스장을 운영하는 복음친구 C형제를 만나
마태복음 5장 RSG를 마치고 나왔던 터라
나의 영이 맑고 기분이 좋았다.
사랑의 집에 들어서자 여느 때처럼
꾸밈없이 반겨주는 노인들..
준비된 찻잔이 없어 그냥 종이컵이었지만
따뜻한 물에 지리산 녹차를 정성껏 대접했다.
씁쓸하고 곰국향기 나는 녹차가
가난한 노인들에게 무어 맛이 있으랴만
일부러 두세 번 나누어 따르는 물소리에
격 없이 소리 한자리 내 놓으란다.
이삼 년 전
그들을 위해 판소리 몇 곡 배웠건만
가사가 길고 어려워 호남가를 시작해 놓고
입만 주절거리고 웃고 있으니
자진해서 마무리까지 지어주시고
이어서 쑥대머리, 진도아리랑까지 부르시는
92세 노인이 계시다.
에라, 내친김에 일어나 덩실덩실
엉덩이춤까지 추고 쉰 살된 아들과 같이
그분들 앞에서 재롱을 피웠으니
모두들 파안대소하고
아! 얼마만인가? 그분들과 나는 오랜만에
잃어 버렸던 웃음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웃고 있는 우리는
어쩐지 속으로는 울고 있으니..
그것을 무어라 표현하기가 어렵다.
아무튼 그렇게 마음이 통했던지..
그 92세 되신 노인이 나에게 다가오셔서
귀속 말로 “짜장면이 먹고 싶어”하신다.
“.....??”
아! 어머니께서 잠드신 이후..
그분들을 찾은지 거의 만 3년 만에
평소에는 얼싸안기도 하고 반갑게 맞이 하시지만
그러나 늘 손님 대하듯 미안해만 하셨다.
그러나 오늘은 친 아들에게 말하듯 편하게 말씀하신다.
자식, 손자 먹이려고
일부러 “소화가 안 된다.”고 하시며 뒤로만 물러서시던
어머니께서 어느 날 쌈지 돈을 꺼내시더니
겸연쩍게 “짜장면이 먹고 싶다.”하시고
웃으시던 생각이 난다.
그때 이 후로 어머니와 나는 틈만 나면
가는 곳이 우리만 알고 다니는
진월동 뼈다귀 해장국집이었다.
아들이 발라주는 고깃국 맛이 어머니께는
제법 솔솔 했던 것이다.
오후 네 시 반, 우리 모두는
짜장면으로 저녁식사를 해결하기로 하고
주문한 음식이 오기까지 약 한 시간 동안
나에게 저녁 예배를 인도해 달랜다.
기독교 영향아래 운영되는 사랑의 집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극구 사양을 하였으나 이구동성으로
요청을 하니 더 이상 피할 수도 없었다.
우리의 집회방식과는 조금 다르지만
찬송 몇 곡 선곡하고, 사도신경 외우고
나는 마태복음 5장의 왕국헌법을 펼쳤다.
오던 길에 RSG하며 새롭게 은혜로 부딪쳐 온
말씀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이 놀랍고도 비밀스런 왕국의 비밀을
어떻게 이 기력 없는 노인들에게 전할 것인가?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말씀은 한 구절만 읽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온전하게 되십시오.(마5:48)
그리고서 우리는 하늘을 날았다.
내 생전에 말씀을 나누면서 이렇게 달콤하고
힘이 있어 본 적은 드물었다.
지금까지..
마음 안에서 하나 되었던 우리는
곧 영 안에서도 모두 하나가 되었다.
목회자 세미나에서와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독교인들을 향할 때면 꼭 놀랍게도
특별한 기름부음이 있었다.
그분들은 이 집회가 끝나면 그 전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바로 잊어버릴 줄 안다.
그러나 그분들의 영이 소생하는 것을 나는 느꼈다.
주님께 감사한다. 아멘, 할렐루야!
“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왕국헌법은 율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엄격하면서도 완전하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온전하게 되십시오.’
나는 종교인들과 같이 온전하게 되는 행위에
중점을 둘 수 없었다.
어느 누가 형제를 향하여 화를 내 본 적이 없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어느 누가 게헨나 불 못의 심판에서
안전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우주 가운데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오직 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뿐이시다.
율법 앞에서도
아무도 의롭다 할 사람이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은혜시대에 이 왕국헌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 ‘하늘의 아버지’가 계심을 찬양 드린다.
나는 그 아버지의 생명주심에 중점을 두었고
거듭남으로서 그 생명을 받은 우리가
생명의 자람과 그 생명의 법칙에 의해 저절로
장차 아버지처럼 온전케 됨을
어린 아이의 비유를 들어가며 전하였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열매를 저절로 맺듯이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아들은 계속 먹고 자람으로
언젠가는 아버지처럼 온전해 질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충분히 공급 받고 자라기 위해서는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는데
영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
애통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긍휼히 여기는 사람들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들
어쩌면 여기 계신 분들이 이러한 조건을 갖춘
가장 좋은 환경에 계신 것이라며 진심으로 위로해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