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내지 말라
글/생명강가(2011.11.26)
오늘 RSG집회에서 누가복음 12장을 상고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자기 형제에게 형제간에 서로
유업을 나누도록 권면해 주실 것을 주문했다.
그 사람의 부탁은 어떤 면에서 정당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 타락한 이후로 형제간에도 재산을 두고
다투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은 조심하여 온갖 탐욕에서 자신을 지키십시오.
이것은 사람의 생명이 자기 소유의 넉넉한 데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라며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
형제와 재산을 나누지 않는 것도 탐욕을 부리는 것이지만
또한 정당하게 나누어 달라고 하며 형제와 다투는 것도
탐욕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보면서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탐심을 부리며 살고 있는지
빛 비춤이 있었다.
마태복음 5장 왕국 헌법에서도 주 예수님은
“누가 그대를 고소하여 그대의 속옷을 갖고자 하면
겉옷까지도 갖게 하고, …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왜 그토록 너그러우실 수가 있었을까?
오늘에서야 나는 그 주님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까마귀도 먹이시고 백합화도 아름답게 입히시는 주님께서
하물며 사람을 얼마나 더 귀하게 돌보시겠는가?
아마도 오병이어로 오천 명도 넘은 사람들을 다 먹이신
주님께서 알곡 한 알로 온 인류를 다 먹이시고도
남기실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일찌감치 사람의 어리석은 어떤 작은 탐욕이라도
마음에서부터 버리고자 한다.
50. 모세의 출생(출1:1-2:10)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들과 그 시대 사람들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 백성보다 많고 강한 것을 염려하여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여 학대하였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강성함을 인하여
그들을 노예로 삼았을 뿐 아니라 히브리산파에게 명하여
히브리 여자에게서 태어나는 모든 사내아이는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남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이고 여자의 생명은
특히 타락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사람의 쾌락을 위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바로가 했던 그 일은 오늘날 사탄이 하는 일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는 생명은 죽이고 있으며,
사람의 쾌락을 위하는 생명은 보존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 안의 믿는 각 사람들도 두 가지 생명을
다 갖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는 생명은 죽이고
사람의 쾌락을 위하는 생명은 살리게 될 것입니다.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드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므로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고
아기를 그 상자에 담아 나일 강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 섰더니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
하였습니다.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라고 물으니
바로의 딸이 좋게 여기고 아기를 그의 어미에게 맡기고
자기를 위하여 젖먹이는 삯까지 주었습니다.
그 아기가 자라서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었고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자의 생명도 각종 기능들,
즉 잉태하고 출산하고 돌보는 어머니의 기능,
지켜보고 추천하고 합당히 연결시키는 누이의 기능,
돕고 섬기는 시녀들의 기능,
불쌍히 여기고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바로의 딸의 기능 등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그분의 목적을 완성할 수 있도록
그들의 구원을 예비하는 많은 어머니들과 딸들과
여종들과 고귀한 공주들이 필요합니다.
49. 야곱의 장례식(창50장)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창49:29, 33)
요셉이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마추고
그의 수종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그 기간이 40일이 걸렸으며
애굽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70일 동안 곡하였습니다(1-2절).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장사할 때 성경은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가 그와 함께 올라가고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7, 9절)고 말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장례를 국장보다 더 장엄하게 존경 넘치도록
치루었음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좋은 땅에 대한 약속은 받았으나 그것을 얻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부활의 강한 표시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부활할 것을 기대하며 죽었고, 의심할 바 없이
이삭과 야곱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야곱은 어느 날 그가 그 땅을 상속받기 위해 일어나리라는
소망을 갖고 죽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요셉에게
그의 몸을 애굽에 버려두지 말고 조상들의 땅에
묻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고 요셉은 그에게 상처를 준 자들을 향하여
위로했습니다(15-21절). 그가 베푼 것은 어떤 은혜입니까!
상처받은 자가 상처를 입힌 자를 위로했기 때문에
그들은 왕국 안에서 기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요셉과 그의 형제들은 왕국 안의 백성을 대표합니다.
만일 요셉이 형들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했다면
그러한 왕국이 있기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백십 세에 죽으므로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는 것으로 창세기는 마쳐집니다.
그도 임종 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습니다(25-26절).
이것은 요셉도 역시 부활을 기대했다는 증거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죽음과 그의 존재가 애굽에서 입관됨으로 끝납니다.
이 책은 한 면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변화의 과정을 거쳐 그분을 표현하는 야곱과
다른 면으로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가지고 그분을 대표하는
요셉이라는 사람의 한 생명으로 결론을 짓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뛰어나며 얼마나 놀랍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