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여..
글/생명강가
친구여..
이 무슨 황당한 소식인가?
자네도 별수 없이 고아가 되었네 그려!
자네 잘못했을 때 ‘이놈!’하고
등짝 때려 줄 사람이 없으니
이젠 자네나 나나 동격이구먼..
이사람, 그런데 자네는..
그 어머니 언제 업어 보았는가?
자네의 어리광에 행복해 하시는
어머니의 웃음을 언제 보았는가?
행여 그런 기억이 없다 한들
슬퍼하지는 말게나..
미련하고 불손한 이놈도
그것도 우연히 한 번..
가벼운 그 어머니 업고서
치아도 없으신 입 벌리고
좋아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다네.
잘 해드린들 이렇게 아쉬운 걸
무덤덤히 지내는 이들이 더 낫지 않겠나?
그리운 내 어머니를 두고
누가 그렇게 담담할 수
있으련지 모르지만 말일세.
어이! 친구여..
언젠가 자네 어머니를 처음 뵈었는데
어찌 두 번은 안 된단 말인가?
친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고
자네 자랑스러워하더니만
그 말 다 겉치레 아니었나?
친구의 어머님을 위해 손잡고
우리 주 예수님께 기도 한 번 못해준
내가 무슨 하나님의 일군이란 말인가?
다행히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믿고
안식하셨다하니 죄스런 마음 조금 덜하지만
구원받은 성도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지는데 있어서
우리의 상호 돌봄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 점은 자네와 나는 주 앞에 공범일세.
어이! 친구여..
얼마 전 나 미국 다니러 가던 날
자넨 동남아 다녀온다 했던가?
이사람, 바쁘게 사는 게 무슨 자랑인가?
이젠 어머님 영전 앞에서 보겠으니
나는 무정한 아들 친구가 되었구먼.
솔로몬 왕도 인생이 헛되다 했거늘
우리가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하듯
이리 바쁘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자네 모친께서 믿었다는 그 예수님께
자네 마음의 한 공간에도 내 드림이 어떤가?
예수께서 자네 인생에 참여하는 그 날
자네 일생의 최고의 날이 될 것을 확신하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부탁하네. 그러나 두려워하지는 말게
다만 “주 예수여!”라고 진심으로 부르게나
살아계신 주께서 자네를 구원하실 것이네
-영광 작은 구석에서 모친을 그리워하며 친구가-
쇠고기 파동
글/생명강가(2008.6.10)
얼마 전 미국 현충일 특별집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달라스에 사시는 형제님들께 부탁해서 미국에 다녀온 기념으로
간단한 선물로 텍사스산 알로에 액을 몇 병 준비했습니다.
그날 마켓에서 작은 아들놈이 좋아하던 쇠고기 육포도
두어 봉지 곁들여 사오게 되었는데 돌아와서
그것을 광주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아들의 자취방에다
잘 챙겨 먹도록 두고 왔습니다.
그날 저녁, 아들놈에게 전화가 와서 광우병이 어쩌고 하며
지금이 어느 때인데 미국산 쇠고기를 먹느냐며 야단입니다.
그때서야 내가 세상에 둔감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불과 일 년여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 사는 저의 막내고모가
애들 좋아한다고 즐겨 보내주던 것인데..
그 후 일주일 만에 다시 찾아간 아들의 자취방에
봉지만 뜯어진 채 육포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서운했지만
육포를 빈 반찬통과 함께 싸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난히 산이 많은 지리산 기슭에서 태어난 나는
1962-3년경 4월에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하여 집 울타리 너머
파랗게 돋아나는 ‘독새풀은 왜? 못 먹지?’를 생각했었고..
일명 보리 고개라고 하는 그 시기에는 어느 집이나
곡식이 거의 바닥나는 시기여서 한 달 후쯤 보리를 추수하여
세 배로 갚겠다고 해도 양식 한 됫박을 빌리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나는 사흘을 굶고 나니 힘이 쭉 빠지고
종일 햇볕이 드는 방 안에 누워만 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당시 아들이 귀했던 우리 집안에 남동생 살리겠다고
밥 동냥까지 나갔다는 둘째와 셋째누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웃다가 울다가 그때의 살아온 정담을 나누더니만
요즘은 그 이야기만 꺼내면 창피하다며 손사래를 칩니다.
그래서일까?.. 나는 결혼해서부터 지금까지 음식물을
함부로 버리는 것이 싫었습니다. 아내와 그것 때문에 잘
다투기도 했었지만 남은 음식 뒤치다꺼리를 하다보니
가족들 중에 하이에나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요즘은 농약을 많이 하니 과일을 주의해서 먹어야
한다고는 하나 나는 이것저것 따지면 세상에 먹을 것 없다며
과일을 껍질째 먹기가 일쑤고 부득이 껍질을 깎아야 하는 것은
거의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얇게 깎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내가 그렇게 사는 또 하나는 성경말씀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로마로 향하는 4차 전도여행 중
폭풍을 만나 배가 파선되고 몰타라는 섬에 가까스로
도착했습니다. 그때 나뭇가지 속에서 나온 독사에 물렸으나
그는 아무 해도 받지 않았던 것처럼 부활생명을 사는
오늘날 믿는 이들은 사실 깨끗이 잘 씻어먹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존해 주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연일 시끄럽습니다.
촛불시위다, 과잉진압이다, 누구의 잘못이냐 등
그 책임소재를 놓고 정치인과 농어민, 언론인, 시민, 학생,
이제는 종교인들까지 가세하며 그 무질서와 혼동이
정말 염려스러울 정도입니다.
우리에서 이처럼 먹는 문제가 큰 이슈가 될 것이라면
이참에 인간 시초부터 그 먹는 문제에 파동을 일으킨
사탄을 규탄하고 공평한 하나님의 나라가 하루빨리 도래할
수 있도록 대국민촛불시위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성경의 지혜를 알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사회의 허물을 두고 누가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이럴 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그분이 우리 온 존재가 되기까지 생명의 양식으로
먹고 누리다 보면 언젠가 우리는 생명수강가에서 달마다
열두 번 과실을 맺는 생명나무로 살 것입니다.
달음박질
글/생명강가(2008.4.3)
영광에 복음친구 중 헬스장을 운영하며
매 주말만 되면 40~50Km를 달리고 또 어떤 때는
100Km이상을 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꿈은 요즘 사람들답지 않게 너무나 소박한데
그것은 가끔 주기적으로 각지에서 개최하는 42Km
마라톤 대회에서 3시간 30분대를 돌파하여
본인의 최고기록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두고 매일 틈나는 대로 달음질을 하고
주말만 되면 영광-홍농간 새 도로를 왕복하여 달리기도 하고
음식, 수면 등을 규칙대로 철저히 조절하여
체력을 최상의 상태로 보강하고 단련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일주일 혹은 2주에 한 번 그를 방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므로 새 생명으로 거듭난 그를
영적으로 더욱 자라게 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만날 때 마다 느끼는 것은 그가 달리기를 하듯
나는 얼마나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사는지
점검하면서.. 사실 상당한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형제님을 생각하며 성경 안에서도
달음박질 하는 이들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성경 구절들이 있지만 마음에 와 닿는
몇 구절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먼저 눈에 얼른 띄는 구절이 시편19:5-6입니다.
여기에는 신랑이 해처럼 달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아가서에는 신부가 신랑을 향하여 달려가는
모습도 있었습니다(아1:4).
“왕이 나를 그의 방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라...”
그들은 왜 달렸을까요?
누가복음15:20처럼 하나님이 실패한 사람들을 향하여
달리시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믿는 이가 주를 향하여
어떻게 달리는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하박국2:2-3)
하나님께서는 속히 이를 종말을 예고하시며 선지자를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깨어서 신속히 달리라는 말씀입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경주자들이 달리는 중간에 쪽지를
하나씩 집어 들고 그 쪽지속의 내용을 달리는 가운데
신속히 숙지해 그대로 행하는 게임과도 같습니다.
고린도전서9:24-25에는 경주자의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함을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붙잡기 위해 달리십시오.
경기에서 이기려고 다투는 사람마다 모든 일에 자제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질 월계관을 받으려고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것을 받으려고 합니다.”
또한 이사야서40:30-31은 영적 달리기를 하는 경주자에게
꼭 필요한 새 힘을 얻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 하리로다”
그러나 달리기를 하는 경주자들은 한 가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사도는 갈라디아서5:7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달음질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음을 언급하고
주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생명의 말씀을 들고
계속 전진하기를 격려 했습니다.
“여러분은 잘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방해하여, 진리를 믿지 못하게 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하였습니까?”
“… 그것은 내가 지금 달려가는 것이나 전에 달려갔던 것이
헛일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갈2:2하)
“생명의 말씀을 밝히십시오. 그래서 내가 헛되이
달리지 않았고 헛되이 수고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하도록 해 주십시오.”(빌2:16)
바울사도는 주님을 향한 달음질의 마지막 목표는 순교함,
곧 자기 자신이 주께 전제로 부어질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잘 달린 경주자들에게 보상으로 주어질 의의 면류관을
언급하므로 모든 믿는 이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달려갈 길과 내가 주 예수님께 받은 사역,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엄숙히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나의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행20:24)
“나는 이제 부어지고 있으며 내가 떠날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나에게
그것을 보상으로 주실 것인데, 나에게만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4:6-7)
이러한 사도의 고백을 들을 때 눈물나도록 고맙습니다.
왜냐면 그러한 사도들의 삶이 혼 생명을 부인하고 달리려는
오늘날 우리의 삶과 동일하므로 때로는 홀로 떨어진 듯
두렵고 약한 우리를 격려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각처 어디에선가 달리고 있을 성도들..
‘속히 오시리라’(계22:20)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어쩌면 이 시간 어디쯤에선가 사랑하는 연인만 생각하고
달려오고 계실 노루와 사슴 같은 주님이실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 내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아가서2:8-9)
오! 내 사랑하는 주님만 계시다면 의의 면류관이 없다 해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 날에 고난의 흔적들을 맞춰보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것(계7:17, 21:4)만으로도
충분한 위안이 되겠습니다.
오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