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요셉의 인내와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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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요셉의 인내와 지혜(창44장-45:15)


 




창세기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오직 성숙한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요셉의 인내와 지혜를 보게 됩니다.

그 당시 요셉은 사십 세이었지만 그의 영적인 생명은

성숙되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탁월한 지혜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과정에서도

그는 생명의 성숙함을 따라 자신을 조절했습니다.


요셉이 그의 청지기에게 명하여 다시 형제들 각인의 자루에

돈을 넣고 특별히 베냐민의 자루에는 자신의 은잔을 넣으므로

이번에는 그들을 도적으로 몰아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다시 붙잡혀 온 형제들은 여전히 요셉을 몰랐고, 다만

자신들에게 닥친 상황만을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애굽 사람들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오직 요셉만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늘날도 상황은 동일합니다.

세계정세와 모든 일들은 유엔이나 특정나라의 통치자가 아닌

오직 주 예수님만이 그 진행되는 상황을 알고 있습니다.

이 일로 요셉의 열한 형제가 모두 요셉 앞에서 엎드렸으니

그들은 그때 요셉의 꿈을 상기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에게 발생하는 이러한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자신을 형제들에게 밝히는 결정적인 요인은

그의 형제들 중 변화된 유다의 말과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말째 아우를 보살피고 자신이 희생되고자 하는

그의 순수한 영은 요셉을 깊이 감동시켰고,

요셉은 형제들도 공과를 배웠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목석처럼 감정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종 드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통곡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감정정인 사람이 어떻게 몇 달 동안 그 감정을

억제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성숙의 표시입니다.

만일 우리가 눈물과 웃음과 화를 통제하는 것을 모른다면

그것은 생명이 어리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성숙함의 절정은 놀라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고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던 것입니다(창45:7-8).


비록 요셉은 형제들에게 악한 대우를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환경에 대한 합당한 인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이나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자신을 두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은

결국 선을 이루기 위함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함으로써

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니다.”(롬8:28)




43. 요셉과 그의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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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요셉과 그의 형제들(창42:26-43장)

 

요셉15.jpg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다룸에 있어서

그들을 일부러 정탐자들로 몰아세운 것은

그들로 하여금 정탐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들의 신분과 그들이 한 아버지의 열두 형제임을 밝힘으로

잃어버린 요셉을 기억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셉은 형제들 중 자신을 향하여 가장 잔혹했을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두고 그들이 참으로 정탐꾼이 아니며

참으로 한 형제들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부러 그들의 말째 아우를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돌아가는 길에 가족들이 궁핍할까봐

그들이 지불한 각인의 돈을 그들이 산 곡식자루에

몰래 도로 넣어주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형제들은 그러한 요셉의 사랑을 몰랐듯이

오늘날 이스라엘 나라도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도

역시 그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야곱은 절대 베냐민만은 애굽으로 데려갈 수 없다고 하였으나

그 땅에 기근이 심하여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이 떨어지니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하면서 자신의 환경에 굴복했습니다.

더욱 지난번 양식 값을 포함하여 두 배나 돈을 가져가도록 하는

그의 태도는 예전의 남의 것을 탈취하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보았으며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에게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시대의 끝에는 그리스도께 돌아가게

될 것임을 예표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두 번째 애굽에 왔을 때,

요셉은 형제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람이 돈과 나귀를 빼앗고 자신들을

그의 노예로 사로잡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가 요셉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리스도를 주목하기보다

우리 자신과 돈과 나귀만을 주의하는 수건들에 가리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알아볼 수 있는 암시들을

창세기 43장에서만 여러 군데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루 속의 돈 때문에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요셉은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23절)고

그들이 믿는 신에 대하여 각별히 말하였고,

요셉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29절)고

했습니다. 또한 요셉이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잔치할 때,

그 형제들을 장유의 차서대로 앉혔습니다.(33절)

마지막으로 요셉이 음식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다섯 배나

더 주므로 이러한 암시들을 그들이 조금만 주의했더라면

“분명히 이 사람은 요셉이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42. 요셉의 꿈이 성취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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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요셉의 꿈이 성취됨(창41:46-42:25)


 





요셉은 애굽에서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의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교회를 묘사하는 세 아내, 즉 하와와

리브가 그리고 아스낫을 봅니다.

아담의 아내인 하와는 교회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온

그리스도의 일부임을 묘사합니다.

하와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생명과 본성에서 동일하고

결국에는 그분과 함께 한 몸이 될 것을 예표합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부르심 받고 택하심 받은 자,

그리스도와 한 근원에서 나온 자인 교회를 묘사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여자 아스낫을 아내로 취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거절당하신 동안,

이방세계에서 취하신 교회를 묘사합니다.

거절당하신 그 시기에 그리스도는 이방세계에 오셔서

그곳에 머무르셨고 이방세계에서 교회를 얻으셨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므낫세는 하나님께서 요셉의 모든 괴로움을 잊게 하였다는

것으로 교회가 산출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괴로움을

잊으신 것을 선포하실 것임을 계시하고,

에브라임은 하나님께서 요셉이 수고한 땅에서 창성하게

하셨다는 것으로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열매를

산출할 때, 그리스도께서 기쁘게“모든 열매를 보라!”고

선포하실 것을 계시합니다.


애굽 땅에 요셉이 예언했던 대로 일곱 해 풍년에 이어

온 지면에 기근이 있어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양식을 나누니

애굽 백성뿐 아니라 각국에서도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그때 야곱의 아들들도 양식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내려와

요셉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양식이 오직 요셉이 있는 곳에만 있었다는 것은

양식이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만 있음을 예표합니다.

다시 말해서 만족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 있어도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근 아래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 계시기 때문에 교회는 만족의 땅과

만족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양식과 양육과 만족은

오직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만 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형제들이 양식 때문에 요셉에게 돌이켜야 했듯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리스도께 돌이키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에게 와서 절할 때, 요셉은 그들을

알았으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 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자기의 꿈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서도 절제를

잃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침착하게 그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는 영의 다스림 아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온 땅을 다스리는 자신의 신분을 쉽게 드러내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드러내지 않고 훈련시키듯이

그들을 시험하고 훈련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냉철한 행동은 형제를 향한 비밀스런 사랑에

기초를 두었습니다(창4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