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이스마엘 상인들에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니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이 그를 노예로 샀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시므로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그 집의 가정총무를 맡으니
여호와의 복이 그 집에 임하였습니다.
여기서 스스로 계시고 영원히 계시는‘여호와’란
이름을 언급한 것은 요셉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임재 안에서 요셉은
어디에 있든지 주님의 축복과 함께 은총을 입었습니다.
주님의 축복은 항상 그분의 주권아래서 번영을 수반하고
요셉과 연관된 모든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다움을 보고
그 주인의 아내가 날마다 그에게 동침할 것을 요청하나
그는 유혹을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 득죄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여인이 또 요셉의 옷을 붙잡고 끌어들이려하자
그는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 일로 보디발의 아내는 거짓말로 그 옷을 내보이며
그 주인에게 고하기를“당신이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 들어왔으나 소리를 지르니 도망하였다.”
고 하니, 그 주인이 노하여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당시 애굽인은 민족적 우월감 때문에 외국인, 특히
히브리인을 멸시하였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히브리인’이라고 한 것도 문제의 핵심을 민족 차별이라는
왜곡된 주제로 돌려 자기의 치부를 숨기는 동시에
요셉의 혐의를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감옥에서 요셉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두 행악자를
예표하는 두 범죄자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은 복귀되었고, 한 명은 처형당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사망의 고통 속에서 두 죄인들 사이에서 못 박히셨고
그들 중 한 명은 구원받았고, 다른 한 명은 멸망당했습니다.
요셉은 감금되어 있는 동안, 그의 꿈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는 믿음과 담대함을 가졌습니다.
그는 자기의 꿈에서 본 어떤‘곡식 단들’로 둘러싸이는 대신
‘애굽의 것들’에 둘러싸여 여전히 감옥에 있었지만
두 관원장의 꿈이 자신의 해석대로 이루어졌을 때
자신의 꿈도 확실히 실현될 것이라는 확증을 갖고서
그는 격려 받고 더욱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생활 안에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담대함을 가지고 우리의 환경과 상관없이
‘교회생활은 놀랍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우리가 믿는 고로 말하노라”
(고후4:13)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담대하게 우리가 본 이상과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라는 사람의 딸에게서
세 아들, 즉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았습니다.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 이름이
다말이었습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셨고, 이스라엘의 관습대로
둘째 아들 오난이 형수에게 들어갔으나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고
일부러 땅에 설정하니 여호와께서 그도 죽인지라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수절하고 친정집에 가 있어서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얼마 후 유다의 아내가 죽고,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양털을 깎으니
소식을 들은 다말이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은 연고이었습니다.
그녀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녀를 보고
창녀로 여겨 그녀에게 나아가“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하니
그녀가 말하길“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시렵니까?”
유다가 말하되“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러므로 그녀는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를 약조물로 받고서
허락하니 그녀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습니다.
다말의 이 행위는 시아버지와 근친상간을 했으므로
윤리적으로 말하자면 지탄받을 만한 끔찍한 일이고
아무도 이것을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코 그녀는 선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의로웠습니다.
잘못은 그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기보다
더 의로웠다고 인정한 유다에게 있었습니다(26절).
다말은 장자권을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는 결코 이 축복을 그저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장자권을 갖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얻는
중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시아버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여 보니
쌍태를 가졌는데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므로 산파가
장자의 표시로 그 손에 홍색 실을 매어 두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다른 형제가 먼저 나오는지라
그를 베레스라 부르고 그의 형, 곧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습니다.
다말과 베레스는 결국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었습니다.
창세기는 장자권이 이동할 수 있음을 계시하는
네 차례의 기록(에서에게서 야곱에게로, 세라에게서
베레스에게로, 르우벤에게서 요셉에게로,
므낫세에게서 에브라임에게로)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신약에서는 장자권이 이스라엘에게서
교회로 이동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이기는 하였지만(출4:22) 불신으로 인하여
장자권을 잃었습니다(마21:28-32, 롬11:20).
38. 팔려가는 요셉(창37:12-36)
세겜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는 형들과
양떼가 다 잘 있는지 돌아보고 오라는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보냄을 받은 요셉은 헤브론 골짜기를 떠나
세겜을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결국 요셉은
도단에 이르러서야 형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형제들을
섬겼음을 의미하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분의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시려고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다(요6:38-39).
이 점에 있어서도 요셉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멀리서 그들이
요셉을 알아보고 서로 이르되“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그를 죽여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하니 르우벤이“그의 피는 흘리지 말자”
하여 그들이 채색 옷을 벗기고 빈 구덩이에 던지니
마침 이스마엘 족속, 미디안 상인들이 오는지라
유다가 그의 형제들을 설득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
그들에게 은 이십에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요셉을 죽이려고 음모를 꾀하고 있었던 사람들은
도적이 아니라 그가 섬기던 육신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미움과 배척은 오히려 요셉에게
그가 생명의 단으로 세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도록 오셨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그분을 미워하여 그분을 거슬렸으며
심지어 죽이고자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이 요셉의 채색 옷을 취하고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 아버지에게로 가져다가 거짓으로
이르기를“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하매 야곱은 그것을 알아보고 완전히 낙담하여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하며 애통하니 아무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며 슬피우는 야곱에게
이 다루심은 매우 깊고도 개인적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요셉이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구절이 없으나
그러나 요셉의 일생은 그분의 일생의 복사판이었습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배반당하고 팔렸습니다.
만일 그들이 요셉을 경시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진실로 그를
곡식 단이나 별로 여겼다면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원칙 면에서 주 예수님께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분께서 우주 가운데 가장 존귀하고 가치 있는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는 은 삼십에 그분을 팔았고
(마26:15, 출21:32), 그의 백성은 생명의 구주를 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