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형님


잔잔한 시냇가 2011-11-17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mdhsk2545/34868.html
 

가족 이야기-형님

글/생명강가(2007.6.20)





우리 가족은 3남 5녀로 8남매입니다.

우리 어릴 적엔 부모님까지 열 식구가 한 이불 밑에서

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요즈음은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 중 우리 3형제는 위로는 형님이 아홉 살 차이,

아래로는 막내가 네 살 차이가 납니다.

나이 차이가 많은 형님은 좀 대하기가 어려웠고

막내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왔기 때문에

나에게는 더 친근할 터인데도 내가 스물일곱 살 되던 해에

주님을 영접하게 된 후 예수 믿기를 권면해도 듣지 않고

세상으로 치우치는 동생은 본의 아니게 갈 길이 다른

사람들 마냥 언제부터인지 관계가 소홀해지고

나보다 1년 먼저 주님을 영접한 형님은 의지가 되고

친근감이 더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젊은 시절, 누구보다도 고생을 많이 하신 형님은

초등학교 졸업장을 어렵게 받았다고 합니다.

공부도 잘 못하셨지만 아버지께서 벌목, 산길 토목공사를

주로 하셨기 때문에 어머니마저 함바(현장식당)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렸을 적 기억으로도 형님은 몸이 약하시고

상당히 수줍음 많은 청년시절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형님은 몇 번이나 무작정 상경을 하여 고생만 죽도록 하고

때로는 거지가 되어 험악한 밑바닥 인생을 살았노라고

가족들이 모이기만 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웃기도록

지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시곤 합니다.


그래서일까.. 형님은 일찌감치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젊은이들이 꺼려하는 야채장사를 천직으로 알고

니어카를 끌고 옛 용산 도매시장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 가락동 도매시장까지 다니며 야채를 받아와서

뚝섬 종점과 공단지역(지금은 건대전철역 주변)에서

때로는 이리저리 쫓겨 다니시며 행상을 하기를

30년이 넘게 꾸준히 그 일만 해 오셨습니다.


새벽 4시면 일어나서 일과를 시작하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겨우 집에 돌아오는 삶을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반복하지만

자신의 못남에 비하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돈이 한 푼도 없이 한쪽 다리마져 골수염으로 수술까지

받아야 할 때, 누구인지도 모르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자신을 살려달라고 구하다보니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그 후 형님은 술도 끊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백만 원짜리

중고차 1톤 트럭을 사면서부터 더 열심히 일하셔서

니어카로 한 번 일할 시간에 채소를 두세 배로 싣고

다녀도 조금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틈틈이 전도를 하시며

주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일하셨답니다.



형님이 하시던 은혜로운 간증 중 한 가지만 하겠습니다.

그날도 가락동에서 야채를 가득 싣고 찬송을 부르며

잠실대교를 넘어오는데 몇 일전 감자를 연 이틀이나

도매시장에서 무리하게 사 왔는데 이것을 어떻게 파나

걱정했었지만 마치 사람들이 감자만 먹고 살 것처럼

오는 사람마다 몇 박스씩 사가더니 금새 기적처럼

그 많은 감자를 다 팔게 되었답니다.


요즘 들어 주님의 살아계심과 돌보심이 부쩍 더 느껴져

마치 주님께서 형님만 사랑하시는 것처럼 감동이 되어

자꾸만 흐르는 눈물 때문에 도저히 운전을 못하겠기에

주차해서는 안 되는 잠실대교 한 쪽에 차를 세우고

주님께 받은 은혜가 감당할 수 없으니 반만 달라고 기도하며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돌아왔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장사는 뒷전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도만 하고 왔는데

채소는 다른 날보다 더 빨리 팔리고 들어오셨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복음전파가 주업이 되고 장사는 부업으로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형님이지만 같은 성도로서 그런 형님이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정말 형님이 변해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전에는 서울에서 명절 때 시골에 내려오시면

아버지를 바로 대하여 보지도 않고 묻는 말에만

‘예’나 ‘아니요’라고 대답만하다 서울로 올라가시곤 했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난후 아버지께 얼마나 친근하게 잘하시는지

가끔 용돈을 받아든 아버지의 그 기뻐하시는 모습은

옆에서 보는 우리까지 행복하게 하였습니다.


나는 어쩌다 서울에 다니러 가면 형님이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고 싶어 덤벼보지만 3일이면 입술이 붉히고

1주일이 채 못 되어 몸살을 앓습니다.

그런 힘든 일을 어떻게 30년이나 해 오셨는지

형님이 존경스럽고 그분이 하시는 수고의 반만 해도

이 세상에서 못 이룰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형님은 아직 교회생활을 회복하지는 못하셨지만

부모님 살아생전에 지난 10여년 이상 명절 때마다

고향을 찾아다니며 자동차 속에서 함께 누렸던

주님의 신성한 생명이 우리를 늘 새롭게 하였습니다.

당시 나도 교회생활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말씀으로 합당히 교제하는 방법이 서툴렀지만

그때 조금씩 터득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열 대 여섯 시간씩 걸리는 고향 길에서

우리는 밖의 환경과 상관없이 오히려 차가 밀릴수록

더욱 열띤 말씀의 교통이 우리를 삼층 천으로 이끌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감옥에서 주님을 누리고 기뻐하며

찬송하였던 것처럼 우리형제도 그렇게 누렸습니다.


그러다 6년 전 나는 광주대학교 부근에

형님이 매입해 놓은 땅에 원룸을 짓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그때 교회에서 나는 선포하기를 “저는 집을 짓기 위해

광주에 왔지만 나의 참된 본업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건축하는 것입니다.”라고 담대하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 후 많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원룸사업을 잘 성공시켜

그 형님의 그늘아래 약 이삼 년 동안 장성과 영광을 다니며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도 갖게 되었습니다.

형님도 그것을 기뻐하시며 남은 여생을 복음전하며

그렇게 살고 싶다고 늘 말씀하시더니 정말 작년 말경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기하기 힘든

평생 생업을 내려놓고 광주로 내려 오셨습니다.


형님이 그 일을 그만두고 내려오시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사탄은 평생 세상에 종노릇해야 현명하다며

회유하는 방해가 극심했습니다.

형님의 낙향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나오듯

힘들게 내려오셨기 때문에 나는 기쁨 속에서도

악한자의 훼방하는 불똥이 어떻게 튈지 모르는 상황에서

형님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형님이 오시므로 나의 복음사역에 탄력을 주실 것인가요?

아니면 오히려 중단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것인가요?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하며

나는 다만 주님을 앙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만약에 복음사역을 중단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하고

그동안 나의 그늘막이 되어준 형님께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이후로 어떠한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추호도

형님과 형수님께 조금이라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음이

전도자의 옳은 자세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6개월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어둠의 세력은 여전히 형님의 가정을

계속 흔들고, 최근에는 형님의 친구이시며 과거에

목사의 일을 했던 형님이 함께 영광에 오셔서

우리의 복음집회에 참석하시고 난후 변론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느냐? 네가 하나님이냐?

우리가 너에게 경배해야 되겠구나?”고 하시며

그날 밤 계속 역정을 내시더군요..

경배의 대상인 ‘신격’이 아닌 그 생명과 본성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이 될 것이라고 하여도 말입니다.


나도 처음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신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어려웠던 점을 감안하여 이해하려고 하지만

어제, 그 일로 형님 가정에 크게 가정불화가 일어났다고 하니

걱정스럽고 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한 자는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하여 진리를 숨기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요10:33~36)


오늘날 기독교는 누구나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을 믿지만

그분이 아버지와 하나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과 쟁론하기 위해서 이사야 9장 6절

말씀을 인용은 하지만 지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위의 성경은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신(神)이라’하였는데

과연 그 신(神)은 천사들을 말하는 것일까요?..

왜? 사람들은 이러한 신화 사상을 이단들이나 휘두르는

헛소리 정도로만 치부하게 만들까요?

왜? 사람들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말씀(벧전1:23)과

우리가 영접한 생명주는 영(고전15:45)은 하나님의 영보다는

격이 낮은 수준의 다른 영을 받은 것처럼 겸손한 척 할까요?

왜? 사람들로 하여금 분을 내게 하면서 사단은 이 진리를

끝까지 숨기려는 것일까요?


개역성경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양자의 영은

정말 의붓자식처럼 하나님과는 전혀 본질이 다른 영을

받았다는 뜻인가요? 8장 14절과 23절에 나오는 양자는

본래 아들이 아니었지만 아들의 자격(son ship)을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의붓자식처럼 씨가 다른

자식이 아니고 갈라디아서 4장 5~6절에서 언급하듯

‘양자의 영’을 ‘아들의 영’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요한복음 12장 24절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음을 말합니다. 여기서 한 알은 그리스도이시고

많은 열매는 모든 믿는 이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육신 하신 예수님과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는

생명과 본질상 똑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히 2:11~12)


아멘,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것은..

우리가 신격에 참여하거나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과 똑같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약 경륜의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사탄은 마지막 발악으로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감추고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겸손한 미덕을 부추겨(마 16:23)

계속 가련한 죄인들의 상태로 묶어두려는 계책입니다.


그동안 많이 힘든 형님의 가정이 십자가를 통과하므로

사실 지금의 본인들이 가장 복된 자들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말했듯이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움으로서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장성한 믿음 안으로 들어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비둘기와 까마귀


잔잔한 시냇가 2011-11-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mdhsk2545/34841.html
 

비둘기와 까마귀

글/생명강가(2007.6.5)





비둘기는 비둘기처럼 생겨서 비둘기이고

까마귀는 까마귀처럼 생겨서 까마귀인가 봅니다.

맨 처음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 아담을 보고

하나님이 좋아하셨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노아시대 때 홍수가 끝나갈 즈음

비둘기와 까마귀가 처음 기록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방주 안에서 함께 구원받은

무리 중에 끼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짐승을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시고자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홍수로 타락한 세상을 심판하셨고

방주 안에 있는 생명체만 남기셨습니다.

물론 방주는 세상으로부터 분별된 오늘날의

교회를 예표합니다.


그러나 그 방주 안에서 까마귀가 나오고

노아의 둘째아들 함이 나오고 바벨탑을 쌓은

인류가 나왔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먹고 홍해를 지나 애굽에서 구원되어 나왔으나

그 가운데는 술주정꾼도 있었을 것이고

살인자나 도둑놈도 있었을 것이며

별의별 패역한 자들이 다 끼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까마귀처럼 죽은 세상의 시체를

접하고도 그것을 오히려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즉, 하나님 없이도 여전히 세상에 속하여

자신들의 배만 위하며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까마귀는 부정한 새로 분류될 뿐만 아니라(신14:14),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전쟁할 때 외에는 거의 단독적인

삶을 즐기며 사는 새로서 그 우는 소리도

자세히 살펴보면 하늘을 향해 惡惡거립니다. *^^*


그러나 비둘기는 생명 있는 씨앗을 먹고 살며

온 지면에 사망의 물이 있으므로 접촉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결한 사체가 떠도는

죽은 세상을 잠시도 의지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분별된 삶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를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 비둘기는 생명을 가져오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생명의 땅을 찾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 씨앗 또한 거듭난 성도들뿐만 아니라

먹고 떨어진 부스러기로 이듬해에 또 싹이 나서

이방 죄인들까지도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하는 듯합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2:14)


비둘기는 대부분 함께 무리지어 사는 생명으로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우는 소리는 언제나 기도하듯

求求거리는 그 모습이 영락없이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네 교회생활을 보는 듯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2:10~13)


여기에서 추운 겨울을 통과하고 꽃들의 향기와

결실이 있는 계절에 비둘기의 소리를 듣고 움직이시는

우리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계절에

우리의 삶도 진지하게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두 짐승을 통한 하나님의 깊은 교훈하심은 다

깨달을 수 없지만 죽음의 세상에서 취하는 모든 것은

언젠가 다 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썩지 아니할 씨로 된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벧전1:23)을 취하며

주님 없이는 너무나 연약한, 아니, 도저히 살 수 없는

우리 지체들이기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주님을 따라 움직여 보렵니다..



당카


잔잔한 시냇가 2011-11-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mdhsk2545/34840.html
 

당 카

글/생명강가(2007.5.25)



“하나님!.. 저에게는 아직 새 차도 부담스럽고요,

저에게 봉고9 중고차 한대만 주시면 먼저 교회학교

어린이 봉사하면서 책일(기독서적 보급)도 할 수 있겠는데요..”하며

생각만 하고 있는데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즉시 응답해 봉고9 중고차를 주셨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수원교회에서 처음 교회학교를 시작했던 때의 일입니다.

그 때 아직 코 흘리게 어린 지체들이 지금은 결혼을 했던지

몇몇은 아직 늦게 대학을 다니고 있기도 한답니다.

그 중에서 지금은 전 시간훈련을 마치고 전국 중고등부

봉사를 맡고 있는 C형제는 유난히 방황하던 청소년기를

기도로 얻은 이 차와 함께 움직이며 잘 통과 했습니다.


그 당시 교회에 아직 봉사차량이 없던 시절입니다.

무척이나 나를 따르던 C형제가 어느 날 와서 하는 말이

“형제님 이 차의 이름을 ‘당카’라고 지었어요.”하기에

“‘당카’가 무슨 뜻이야?”하고 물었더니

“예수님을 태운 당나귀”라 하더군요.


그 차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있었습니다.

중고등부 학생 지체들이 움직일 때마다 승차정원에 상관없이

이 차를 타고 다녔었고 교회학교나 내가 속한 지역에서

쓰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도 무던하시지..

당나귀를 타실 것이면 당나귀 어미를 탈 것이지

왜 하필이면 새끼당나귀를 타시고 구설수에 오르셨을까?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까지도 다 아는 “지고 가는 당나귀”

이야기도 못 들으셨을까? *^^* 하지만 요즘 와서야

그것은 우리의 기우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주님을 체험한 그 당나귀에게는

예수님을 태웠던 일이 그리 어려웠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광스러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29~30)


사람들은 나 자신부터 얼마나 어설픈 지식으로

편견에 사로잡히는지.. 그때는 천방지축 어린형제였지만

그 봉고차가 ‘당카’로 보였다면 놀라운 일이기에

오래도록 그 말이 내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후 3년쯤 그 봉고차로 봉사를 하고 나서

새 차를 구입할 시기가 되었는데

나는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을 잠깐 하였습니다.

수원교회가 이젠 역량이 있으니 교회차량을 구입하도록

나의 차량봉사부담은 이제 내려놓는 것이 좋겠다고..

그리고 나도 남들처럼 작은 승용차 한 대 사서

가족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고 싶다고..

그래서 값싼 승용차를 골라 내 의도대로 신청했는데

그날부터 계속 영 안에서 주님과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향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 몸 안의 지체는 영원한 그 지체이듯이

지체의 기능 또한 세월이 지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라고..

덧 부쳐 몸의 은사에는 졸업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나는 주님께 승복할 수밖에 없었고

나름대로 유초등부 봉사에서 중고등부 봉사로 옮기려던

계획까지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즉시 자동차회사에 전화를 하여

12인승 승합차로 변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15년간 그 차는 교회의 발이 되어 최선을 다하다

그 기능이 다하여 광주에까지 와서 폐차시켜야 했었는데

그 때는 눈물이 났습니다.

생명체는 아니지만 나에게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고

그 용도가 다 할 때까지 거룩히 분별된 자동차였기에

정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또 일러 가라사대 …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출30:22~29)


영광에서는 침술치료와 함께 복음집회를 25회째 마쳤습니다.

그동안 영광에 있는 노인복지시설 사랑의 집에서 눈치를 보며

승합차를 빌려 어렵게 어렵게 차량운행을 했었는데,

어제는 비록 중고차이지만 새로 구입한 멋지고 편안한

15인승 승합차로 첫 운행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영광교회

간증이 선포되고 교회가 강화되기까지

이 차는 7~8년간 활력적으로 동역해 줄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나는 그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사66:20~21)


이를 위해서 그동안 기도와 헌금으로 함께 해 주신

호남권역 교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몸의 하나와 교회의 회복을 위해 신속히 일하고 계시는

주님과 더욱 동역하므로 보답코자 합니다.

전국 96개 미 회복된 지방교회를 위해 기도하실 때

영광을 위해서도 꼭 기도부탁 드립니다.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