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본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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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를 본받아


글/생명강가(2007.2.15) 




벧전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장성교회에서는 2주간에 걸쳐 2006년 겨울 훈련 마가복음 결정연구 DVD집회를 마치고
이젠 아침부흥 추구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노예-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의 삶을
본받기 시작했습니다.

마가가 본 그분의 삶은 이 땅에서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는 노예의 삶이었습니다.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고 그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죽음의 십자가를 지기는 싫어할 뿐 만 아니라
대부분 십자가를 원망하며 그 길을 피해 간다는 것입니다(마7:11)


십자가...

주님의 십자가..

그리고 성도가 지고 가야할 자기 십자가..

왜?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뤘다'(요19:30) 말씀하시고서
또 다시 무언가 아직 부족하신 듯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8:34)
고 말씀하시고,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노라'(골1:24)고 말했을까요?


나는 한동안 그것을 의아해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은 지금 생각하니 연합된 영 안에 있었고

연합된 영은 우리가 구원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원하는 자에게 한 가지 한 가지 가르쳐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고전2:10).


그 중에서 바울을 통해 말한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는 그 유명한 십자가의 道가
메시지를 추구하면서 더 새롭게 깨달아 졌습니다.


십자가는 정말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하던 바울에게 있어서도

십자가가 날마다 부활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아~십자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우리가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십자가!


오~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

나에게 이런저런 환경이 있는 것도 생명안의 주님을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바울 형제님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6:14)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이 땅에서 여러 환경가운데 계신 형제자매님들..

특히 감당키 어려운 큰 고통가운데 있는 지체님들 힘내십시오!!

이 모든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롬6:5)

사실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면 이것저것 아무것도 생각하기도 힘들지만요..
아무튼 지체님들의 기도와 관심 그리고 위로가 필요한 분들이
우리주변에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오~ 주 예수여! 거룩한 지체들을 보호하시고

여러 환경과 시험을 기쁘게 받게 하시되(약1:2)

그러나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마6:13)!~ 아멘.


저는 가끔씩 나의 특이한 말버릇 때문에 집회에서 신언하다 지체들의 영을 침체시켜서 집회에 죽을 쑤어 놓는 일이 허다하다고 아내가 가끔 말합니다.

(문제는 정작 장본인인 나 자신은 지금도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처럼 잘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되는 지체님들도 용기를 내십시오.

바울 형제님도 곧 잘 신언에 실패하곤(고후11:6)? 하셨겠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을 부인하고 오히려 십자가를 통하여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충만함 안으로
힘써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엡3: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본이 되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곧 교회를 위하여 남겨진 십자가를 지고
따르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영광의 풍성을 누리게 하시고
우리를 속사람 안으로 능력으로 강건케 하시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건축케 하신 주님!


당신은 왜 그렇게 지혜로우신지.. 그 십자가가 정말 친근하고 달콤합니다.

오~ 주 예수여!!..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실제에 비하면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일 것입니다.
주님의 실제를 이렇게 조금만 맛보아도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는데,
그날의 주님은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오! 내 안에 계신.. 부요하신 주님!!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소금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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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금기둥

 글/생명강가(2007.2.5)




노아시대 때 40일간 홍수가 있었고

그리고 150여 일 동안 땅에 물이 창일 하였습니다.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는 물론

큰 불이나 작은 불씨도 다 꺼지고

심지어 거대하게 폭발하던 화산구들까지

적어도 6개월 이상은 물과 섞여져

담금질 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과학자도 아닌 사람이 이런 말 막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 6개월 이상 물과의 전쟁에서

화산구들에선 어마 어마한 소금기둥들이

세워졌을 것입니다.


홍수 후 꼭 화산구는 아닐지라도

웅덩이든 동굴 속이든

바닷물이 차올라 고여 있던 곳에는

염분만 남기고 서서히 땅에 스며들었거나

증발하여 소금덩어리만 남게 되었을 텐데

이런 소금은 오랜 세월 대부분 짠 맛이 없어진

쓸모없는 것이 보통입니다.



내가 등산 다닐 때 서울 근교 어느 산속에서

흘러내린 흙더미 속에 소금덩이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소금 덩이는 땅을 황폐하게만 할 뿐

정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요즘은 바닥이 단단해야 하는 테니스장 등에서

이런 소금덩어리를 가루로 만들어 뿌리고 나서

롤러로 다지면 풀도 나지 않고 공의 탄력이 좋아

즐겨 사용하기도하고 또 어떤 곳에선

그 소금 덩어리의 가운데를 파내고 전등을 설치하여

조형물을 만들어 팔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시대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맛 잃은 소금은 밉상덩어리의 표본이었던 가 봅니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눅14:34-35)



대부분 맛 잃은 소금 덩어리는

흙(세상)과 섞일 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맛을 잃어버린 것 아닐까요?

새삼 온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짠 맛이 톡톡 튀는

교회생활 안에서 함께 활력적으로 움직임이

얼마나 우리들 자신을 보호하는지..

오늘도 숙달되지 않은 신언준비로 새벽녘부터 잠을 설치는

우리네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목양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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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양 예찬

 글/생명강가(2006.11.28)



주일 집회 중에는 잠잠하던

아내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눈시울을 붉히며

지난 20여 년간 우리가정을 목양해온..

지금은 충청도 음성에서 회복의 간증을 지키고 계시는

70노령의 K형제님의 가정을 생각하면서

우린 다시 참다운 목양의 본에 대하여

누림을 교제하였습니다.


1986년 가을 이맘때쯤..

수원에서 신혼가정을 꾸민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우릿간의 한 쌍의 양을 돌보듯이

신기해하시며 온갖 관심을 보이시고

목양을 시작하신 K형제님 내외분은 보따리 행상을 하시며

살림이 넉넉지 않아 국수를 즐겨 드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형제님 댁에 우리를 불러 식사 할 때만은

비록 잡곡밥이나마 정성을 다해 귀한 손님 대접하듯

항상 사랑어린 애찬을 공급해 주시곤 했었습니다.


그때 나도 형제님의 가게 방에서 임대해 살면서

수원과 근교를 돌아다니며 기독교서적을 판매하던 터라

수입이 변변치 않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형제님이 우릴 부르셔서 하시는 말씀이

주안의 형제에게 세를 받는 것이 더 이상 합당치 않노라고..

빨리 저축해서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라 하시며

극구 세를 받지 않고 얼마동안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그 흔한 가스렌지 하나 없어서 석유곤로에

밥을 해 잡수시던 형제님네도 세 자녀가 모두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고 살림이 가장 어려운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조그만 바퀴달린 연탄화로를 안방 아궁이속 깊이

밀어 넣었다 뺐다 하는 것이 난방의 전부였던 추운겨울

우린 서로 모여앉아 아랫목 솜이불 밑에 손을 넣고

밤새는 줄 모르고 나누던 주 예수님 이야기는..

어느 날 아침 장독대에 쌓인 하얀 눈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으로 다가와 차곡차곡 쌓이는

그런 정겨운 목양을 받았습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 하던가?

아무튼 그 분들은 처음 복음으로 우릴 낳은 이래

지금까지 영적부모로서.. 지나온 시간들 속의

우리의 수많은 일들을 지켜 보시면서도

큰 바위처럼 꿈쩍 않고 옆에 서계시며 기도해 주시고

권면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분들이 ‘평생에 주를 위하여 한번만이라도

이사를 해야겠노라’고 10여 년 전 충청도 음성으로 이사하신 후

우리 또한 전라도 광주로 영광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호남 빈들에 왕국복음이 전파되고 금 등잔대의 간증이

다 서기까지,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린 필연처럼 그렇게 살아지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