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
글/생명강가(2006. 10. 6)
5년 전 나는 광주대학교 앞에
원룸 두 동을 예쁘게 설계하여
손수 집을 지었습니다.
그때쯤..
아직 가족은 수원에 있던 터라
시골에서 어머니가 옆에 와 계셨습니다.
'밥해주마'고..
사실은 아들과 함께 있고 싶었겠지요.^^
저의 고향이 이쪽입니다.
그런데.. 전기밥솥에 정말? 밥만 하시고
찌게나 반찬은 거의 제가 다 했답니다.
(그때 어머니의 연세가 80세였던가?)
우리 어머니는
하두 고집이 쎈- 분이라^^
현장 앞 콘테이너 임시숙소에 계시면서
위험하니 공사장 부근엔 얼씬도 못하시게 하여도
인부들 물병은 도맡아 챙겨 오시는 등
시키지 않는 일을 손수하십니다.
휴~ 지켜보는 제가 더 조마조마 해서
어머니는 몸집이 똥똥하신 분이라
제가 뒤에서 손깍지를 껴안아다 놓으면
고래고래 두 주먹을 뒤로 휘두르십니다.^^
항시 제 곁에서 조수처럼
내 자동차 옆 좌석에 타고
어디든지 함께 다니고 싶어 하시던 분..
그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습니다.
오늘은 추석이라고
고향을 찾아 왔던 차량행렬들이
어느새 다시 돌아가는 모습들로 바뀌지만
그들의 모습이 부러워만 보입니다.
어머니 없는 추석을 지내고
나는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린 듯
과수원에서 감을 수확해 와도
어머니처럼 행복해 하는
사람이 없기에 더욱 허전합니다.
오늘은 제가 무척이나
감상적이 되어 버렸는데요.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어머니의 빈자리는
아무도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심코 마주 대하게 되는
아내나, 자녀나, 부모나, 형제나..
모두가 다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하물며
몸의 지체들인 주 안의 형제들의 존귀함이랴..
또 하물며
빛이요, 공기요, 생수이신 주님의 존귀함이랴
주 예수 없는 삶이란?
사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말꺼리도 안되는 어리석은 소리겠죠?^^
야곱에게 딸이 더럽혀지고 아들들이 문제를 일으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하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아직 천연적인 자아가 강하여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방법을 더 신뢰하던 야곱은
자녀들로 인하여 평강과 평안을 잃은 후에야
벧엘로 올라가는 것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둘 수 있었습니다.
보통 우리는 어려운 환경 안에 있지 않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헛되이 말씀하실 만큼 어리석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야곱 일행이 세겜에서부터 이동하기 시작했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벧엘에 이르러 야곱이 거기에 단을 쌓고
이번에는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처를
얻고자 하는 분이심을 깨달았음을 뜻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야곱의 반응을 봅니다.
첫째, 야곱은 그의 가족들과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2절).
이것은 우상들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명했습니다(2절).
이것은 우리의 전 존재를 정결케 해야 함을 말합니다.
셋째, 그들의 의복을 바꾸라고 했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2절, 엡4:22-24).
넷째, 야곱은 모든 신상과 귀고리를 묻었습니다.
이것은 우상들뿐만 아니라 자기를 미화하는 것을
처리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섯째, 원수들을 두렵게 하였습니다(5절).
이것은 우리가 교회 생활을 위하여 모든 이방 신들과
자기 미화와 가증스러운 장신구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꿀 때,
마귀들이 두려워하리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모든 것을 철저히 정리한 후, 야곱과 그에게 속한 사람들은
벧엘로 올라가서 단을 쌓았습니다(3, 6절).
오늘날 우리도 참된 헌신의 단을 쌓고 실제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교회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일깨우심에 반응해야 합니다.
밧단아람에서 시작한 야곱의 여행은
그토록 염려했던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온 에서와는
오히려 극적으로 상봉하여 형제우애를 나누었을 뿐이고
계속 진행하여 숙곳을 거쳐 세겜성에 이르렀습니다.
야곱 일행은 성 앞에 장막을 칠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 은 일백을 주고 샀으므로 거기에 장막을 치고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그가 장막생활을 시작하고
제단의 간증을 갖기 시작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가라 하셨지만
그는 숙곳에서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우릿간을 지으니
그곳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기 위한 합당한 장소가
아님을 깨닫고, 다시 요단을 건너 세겜까지 이르렀으나
여전히 거기서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그즈음 야곱의 고명딸 디나가 그 땅의 여자를 보러 나갔다가
하솔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근심하고 있었으나
세겜이 야곱의 딸을 사랑하여 서로 통혼할 것을 요청하며
그들의 딸들도 야곱의 아들들에게 주어 한 민족이 될 것을
제의해 오니,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을 속여 말하기를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으니
너희 중 모든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고 우리처럼 되면
우리와 너희가 함께 거주하고 한 민족이 되리라”
그것을 좋게 여긴 하몰과 세겜이 성에 있는 모든 남자로
할례를 받게 하였고, 제 삼일에 그들이 고통 할 때에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하몰과 세겜을 비롯하여 그 성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또한 그 성을 노략하였습니다.
이일을 두고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의 칼을 잔해하는 도구라
하며 그들의 모의를 저주했습니다(창49:5-7).
야곱이 직면한 이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딸은 더럽혀졌고, 그의 아들들은 사람들을 속여
그들을 죽이고 노략질함으로 온 땅에 냄새를 풍겼습니다.
이것이 부르심 받은 자의 기록이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증인의 기록이란 말입니까?
왜 이 모든 일들이 야곱에게 일어났습니까?
디나, 열한 명의 아들들, 살해된 모든 자들은
한 사람 야곱을 온전케 하기 위한 희생제물 이었습니다.
아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케 하실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 야곱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그 안에서 그와 함께,
그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