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은 형 에서에게 보낼 예물을 택하여
그것을 떼로 나눠 거리를 두고 각각 종들에게 맡기고
가는 길에 에서를 만나거든
“주의 종 야곱이 자기 주 에서에게 보내는 예물이라”
고 말하게 하였습니다. 야곱은 여전히
마하나임의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신의 방법으로
먼저 예물 공세로서 형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자 했습니다.
그가 얍복 나루에서 그 예물들을 그의 앞서 보내고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나루를 건네고
모든 소유를 다 건네고 난 후 야곱 홀로 남았는데
이때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보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죄인과는
씨름을 하시지 않는데, 야곱과 씨름 하신 분은 천사가 아닌
사람의 모양을 입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고(행7:2),
후에 그를 방문하시고 그와 식사를 하셨습니다(창18장).
그러나 야곱의 이 체험은 하나님의 나타나심도 아니요,
주님의 방문도 아닌 그분의 다루심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항시 야곱과 함께 계셨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씨름을 하셨으나 그를 이길 수 없으므로
그의 환도뼈를 치니 위골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을 돌이켜 볼 때, 우리가 야곱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거나 스스로 계획하고 자존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지 못하신다는 뜻입니다.
환도뼈의 힘줄은 온 몸에서 가장 강인한 힘줄로서
사람의 능력 있는 부분과 천연적인 힘을 나타냅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었으나 날이 새려 할 때까지
그가 하나님을 놓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일생에서
자신의 환도뼈가 꺾일 때서야 가장 견고히 하나님을
붙들었음을 의미하고, 이때 비로소 그의 이름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게 됩니다.
야곱은 자기와 씨름하시고 자기를 축복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깨닫고,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치신 후 해가 그 위에 떠올랐으며,
그는 빛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는 하늘의 빛 비춤 아래 있었지만
절뚝거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런 사람이 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관심을 외부적인 죄와 범과나
세상적인 것들을 다루는 데만 기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외적인 생활이 바뀌는 것을
관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천연적인 생명을 만지고
다루심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노정에 해가 돋고
빛이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향하는 길을 계속 진행하더니
길에서 하나님의 사자들을 만나게 되어 말하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하고서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습니다.
마하나임은 ‘두 진영’ 혹은 ‘두 군대’라는 뜻으로
이런 광경을 야곱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의심할 바 없이 그를 안심시키고 그를 강하게 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의 보호를
신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을 죽이려했던 에서를 만나는 일이
두려웠으므로 그가 본 것을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여전히 자신의 노력을 더 신뢰하고 있었으며,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에서의 살육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아내들과 자녀들, 그리고 나머지 그의 소유를
두 무리로 나누었습니다.
야곱에게는 강한 자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연약한 자들, 곧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밖에는 없었는데, 이것은 영적인 의미가 풍성합니다.
그분은 그분과 하나 된 사람들, 그분께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거인들’을 원하지 않고
다만 연약한 자들과 순수한 어린이들을 원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었던 원칙은
이는 싸움이 그들 손에 있지 않고 그분의 손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8절에서 주님은 빌라델비아 사람들이
‘적은 능력’을 가졌다고 말씀하셨고,
그분은 미약하나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는
그 절대성과 신실함을 칭찬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함에 있어 마하나임이 아닌
너무 자신의 역량으로만 가득하다면 우리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야곱은 그의 권속을 두 무리로 나눈 후에도
여전히 평강이 없으므로, 여느 때와는 달리 기도합니다.
그는 라반의 압제하는 손길아래 있던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기도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9절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기도하였고(12절),
그의 천연적인 강함 가운데서도 이렇게 조금씩
마하나임을 이끄시는 하나님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시고 그를 인도하시며
그분이 약속하신대로 하나님의 축복아래 두셨기 때문에
그는 부요하게 되려고 속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외관상으로는 야곱이 속임수를 성공시켜 그러한 부를 얻은 것 같지만,
사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축복의 손길입니다(10-12절).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이 자신을 투기하고
라반의 안색이 전과 같지 아니함을 보고
그의 아내들을 설득하여 조상의 땅, 자신의 족속에게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것은 야곱을
가나안으로 귀향하도록 안배하신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어느 날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사이에
야곱이 일어나 자식들과 아내들을 낙타들에 태우고
그 거취를 라반에게 고하지 않고 가만히 떠났습니다.
우리는 야곱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왜 당당히 떠나지 못했을까를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사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관해 말하기는 쉽지만
우리의 체험 상 그것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교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성숙과 믿음의 분량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야곱은 20년 간 다룸을 받았지만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오히려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드라빔마저 훔쳐 나오므로
야곱은 큰 곤경에 빠질 뻔하였습니다.
드라빔은 사당의 우상이 아니라 가정의 수호신과 같은
우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 가운데에도
여전히 우상이 있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뒤늦게 야곱이 도망한 것을 알아챈 라반은
그의 형제들을 이끌고 7일 길을 쫓아가 길르앗 산에서
그들 일행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밤에 하나님께서 라반에게 현몽하시길
야곱에게 선악 간 말하지 못하게 하시며 라반을 제한시키시므로
서로 화해하고 야곱은 계속 그 시험의 땅을 떠나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모든 시험에는 일정한 기한이 있는데
그 시험의 목적이 달성되면 하나님께서 그 환경을 풀어주시기
때문에 라반도 그를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라반과 그와 관련된 모든 환경들을 통해
야곱은 어느 정도 변화는 받았지만, 그러나 28장에서
꿈에 보았던 하나님의 집을 위한 합당한 건축 재료로서
온전케 되기 위해서는 이제 시작일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