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모리아 산(창22장)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고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뜻입니다(마27:46).
이 세상에서 가장 기구한 운명이 있다면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아들의 운명일 것입니다.
백 세에 얻은 귀한 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기 위해 밤새 뜬 눈으로 지새웠을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이 모리아 산을 오르며
나누는 대화는 우리의 마음을 저밀게 합니다.
“나의 아버지여!”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나이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 하시리라.”
백 세가 훨씬 넘은 늙은 아브라함이
번제 나무를 지고 따르는 건장한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의 나무 위에 놓았다는 것은
아들 이삭은 아버지 뜻에 절대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예표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죽이려하는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죽음의 길을 떠난 지 사흘째 날에 이삭을
드렸을 뿐 아니라 그를 다시 얻었습니다. 따라서
셋째 날은 확실히 부활의 표시입니다(고전15:4).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
즉 은사, 영적축복, 일, 성공 등 그 어떤 것이라도
다시 그분께 드리는 죽음의 시험을 겪어야 합니다.
결국은 그것은 부활 안에서 우리에게 다시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해 대속물인 어린양을
준비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17절)
아브라함은 두 범주의 백성을 갖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하늘의 별과 같은 백성인
하늘에 속한 자손, 즉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들이고
다른 하나는 바닷가의 모래와 같은 백성, 즉
참 유대인들은 땅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백 세에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고
이삭이 난지 팔일 만에 아브라함은 그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이삭의 출생은 어떤 영적 의미가 있습니까?
이삭의 출생은 아브라함의 천연적인 힘이나
아브라함의 때에 따라 된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천연적인 힘으로 하나님보다 앞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를 낳으려고 시도했으나
그의 천연적인 힘이 생산해낸 모든 것은
하나님께 저절 당했습니다.
이삭이 자라서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때 하갈의 소생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므로
사라는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이 종의 아들이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낳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우리가 낳은 이 그리스도는 자라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뿐 아니라 교회생활에서도
우리에게는 형상을 이룬 장성한 그리스도의 표현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조롱했다는 것은
성경적인 의미로 볼 때 이것은 심각한 일이며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한 것을
그분의 백성이 사백 년 동안 핍박당하기
시작한 때로 생각하셨습니다(창15:13, 행7:6).
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서 4장 29절에서
“그러나 그 당시에 육체를 따라 난 사람이
그 영을 따라 난 사람을 핍박한 것같이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고 말합니다.
예표에서 하갈은 첩으로서 율법을 상징하고,
이스마엘은 육체의 노력을 상징합니다(갈4:24, 29).
우리는 육체의 힘으로 율법을 쫓아 행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담대히 쫓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이스마엘을 붙잡고 우리의 선한 행위를
포기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자라고
형상을 이루실 때 우리도 담대히 우리 안의 율법과
노력을 포기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