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는 그의 나이 오백 세가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습니다.
사람들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궁금할 것입니다. 구약에서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렀으므로(욥1:6, 2:1)
그들은 유다서 6절과 7절을 근거하여 볼 때
그들은 타락한 천사들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이고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모든 생각이 항상 악함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어
마음에 근심하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을 홍수로서
지면에서 멸하시기로 작정하시므로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이르셨습니다.
방주의 규모는 이러했습니다.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었고, 상, 중, 하층으로
잘 짜 맞춘 많은 조각들로 각각 칸들을 막고
하늘을 향한 유일한 창이 하나 있었으며
방주의 안팎에는 역청으로 칠하였습니다.
신약에 따르면 방주 전체는
개인적인 그리스도일 뿐 아니라
여러 조각들로 이루어진 단체적인 그리스도인
교회를 예표하고(벧전3:20-21, 고전12:12),
그 교회는 하늘로만 통하는 창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방주가 완성되자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와
노아의 가족과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셨습니다.
땅에 홍수가 있을 때에
노아의 나이 육백 세이었고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여호와께서 명한 모든 생물들을 그 종류대로
방주에 이끌어 들인 후 방주 문이 닫혔습니다.
방주 안으로는 오직 하나의 문과 하나의 입구가
나 있는데 이 하나의 문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로 들어감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의 예표입니다.
사십 주야를 비가 내리고 땅의 샘들이 터지니
방주가 물위에 떠다니고 물이 땅에 더욱 넘치므로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기게 되자
땅 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사람과 함께 죽고
오직 노아와 그의 가족만 살아남았습니다.
방주는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 안에서 홍수를 통과한 것이
오늘날 우리가 침례 받은 것의 예표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습니다(벧전3:20-21).
홍수의 물은 그들을 타락한 세대에서 구원하고
그들을 분별시켜 새로운 시대에 이르게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람들의 타락 가운데서도
한 사람, 곧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세대를 열고 일하신다는 증거입니다.
8.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창5:21-24)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아담의 계보, 열 세대 중
하나님과 삼백 년을 동행하고 들림 받은 에녹만이
사망에서 벗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실지로 사망을 이긴 생명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에녹이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그가 육십 오세에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예언하였고
유다서 14절과 15절에서는
“주님께서 그분의 수많은 거룩한 이들과 함께 오셔서,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시어,
경건하지 않은 모든 이들이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행위에 대하여,
그리고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님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말에 대하여,
그들을 유죄 판결하실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던 것과 관계됩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는데
므두셀라는 ‘저가 죽으면 그것(홍수)가 오리라’
라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홍수는 므두셀라가 죽은 그 해에 임했습니다.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으며(25절),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았습니다(28절).
그리고 노아가 600세였을 때 홍수가 왔으므로
이 세 숫자를 합하면 969인데 므두셀라가 죽은
나이와 일치합니다.
에녹은 자신이 예언을 한 후,
밤낮으로 그 예언을 묵상했을 것이며, 그 기대로 인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그분을 중심과 모든 것으로 취하는 것이며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면 그것은
우리가 하향 길을 걷고 있다는 뜻입니다(눅24:15).
그러면 그분이 우리와 동행하셔야 합니까?
우리가 그분과 동행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타락의 장소로 내려갈 때에는
주님도 많은 경우 우리와 함께 내려가십니다.
그러나 에녹은 휴거되기까지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여 올라가기만 했습니다.
7. 가인과 아벨(창4:1-15)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때때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 중 한 가지, 여호와는 왜 가인의 제물은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시는가의 문제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짐승을 식물로 주시지 않으셨으므로, 사람의 생계를 위해서
땀 흘러 농사하는 가인이 더 현명해 보이고
양을 치며 어쩐지 빈둥거리기만 하는 아벨은
무능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우리의 영적 생활을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생계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만
여호와께 나갈 때만큼은 그분의 의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피가 있는 제물을 주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한 일은 여호와의 구원을 거절하고
주제넘게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드린 것입니다.
그는 부모가 들려준 여호와의 복음의 말씀을 주의하지 않고
자신의 수고와 노력의 산물을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즉, 가인은 자신이 드린 제사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여
여호와의 복음을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관념에 따른 종교를 발명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특징은 인간의 노력과 방법으로
여호와를 위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입니다(롬10:3).
그러나 여호와의 구원의 길은 인간이 벌거벗었음으로
그들에게는 어린양의 덮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여호와의 의이신 그리스도를 취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고전1:30, 빌3:9).
아벨은 여호와의 이러한 관심을 주의했기 때문에
부모의 말에 따라 양의 새끼와 그 기름진 것을 드렸고
여호와께서 그것을 기쁘게 열납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 없이 자신의 의를 세우는 종교인 가인은
참된 믿는 이를 상징하는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므로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으며 반대로
아벨은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