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기2011-10-30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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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하고 안식하신지 2달 쯤 되었을까? 나는 집회 후에 형제님의 묘소에 가보리라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형제님께서 살아 생전에 몸이 편찮으신 분이었던 탓에 장례 때는 교회에서 장례를 치루도록 가족들에게 미리 유언하시라고 당부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었다. 그래도 주님께 기도로 의탁하고 그 당부를 했어야 했었다. 갑자기 형제님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그 때는 이미 늦었다. 교회가 형제님의 장례를 치룰 수도 있다고 가족들과 상의했으나 수많은 친족과 법성포 굴비 연합회 상조회 사정 때문에 정중히 거절 당했다. 우리는 장례 첫날 마지막 추모집회만 갖고 물러서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장지까지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따라 우리의 주일집회 참석 인수도 매우 적었다. 형제님이 아버지처럼 살아계실 당시에는 형제님 앞에서 감히 누구도 서로 얼굴을 붉히거나 불평하는 것을 서로 자제했었는데 요즈음은 걸핏하면 딴청을 부리고 집회까지 소홀히하고 있으니 참으로 우리의 영적 생명이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지 새삼 느끼게 된다. 내가 함평으로 이주 한다는 것이 그렇찮아도 적은 수의 형제자매들에게는 부담스럽고 불평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인도하심 인지 참으로 이 일로 우리를 축복하실 것인지 기도하는 사람은 적다.
집회가 끝나고 이기석형제님 묘소방문에 대한 광고를 하였더니 그래도 참석한 지체들 전원이 따라 나섰다. 우리는 하얀 국화꽃 한다발을 준비해서 남양굴비 사업장으로 찾아갔다. 마침 아내되시는 김00자매님이 기꺼이 가게를 비우고 손자 자운이를 데리고 법성포 인근의 형제님 묘소가 있는 공원묘지로 우리를 안내해 주셨다. 지방마다 묘를 쓰는 방법이 다양하겠지만 이곳은 땅 위에 관을 놓고 그 위에 봉분은 덮어 놓은 것 처럼 1인당 꼭 땅 한 평만 차지하도록 하여 빽빽히 묘를 써 놓았다. 묘를 찾기는 좀 힘들겠지만 경제적이어서 좋아 보인다. 한 여름을 지내고 잔디가 잘 뿌리를 내린 형제님의 묘소에서 우리는 형제님이 즐겨부르던 찬송, '교회생활은 아름다워'를 불렀다.
형제님을 생각하니 모두다 목이 메어 찬송을 부르다 자꾸만 끊긴다. "새 예루살렘~ 새 예루살렘~ 안식과 만족" 오늘따라 왜 그리도 새 예루살렘이 사모되는지 형제님이 그립고 주님이 그리워 말없이 다들 울고만 있었다. 금방이라도 비시시 웃으시며 일어나 앉아서 우릴 반갑게 맞아주실 것 같아 나는 "형제님 이제 깨 벗고 칼 찬 기분 아니지요~" 소리 지르며 분위기를 바꿔보려 하지만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다 같이 기도하며 남은 가족을 선하게 인도해 주실 것을 주님께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서 나는 형제님을 따로 만났다. 그리고 "형제님 당신은 지병으로 힘드시고 또 많이 외로우셨지요? 그러나 그 힘듦이 주님을 찾게 하였고, 그 외로움이 주님께 더욱 나갈 수 밖에 없는 축복이었던 것을 이제 알고 계시지요?" 형제님은 "진짜 그래라우"라고 대답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