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사람들은 늘~ 생각을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사물들을 향해
돌이키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한 무리의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려면 반드시 생각을
돌이켜서 하나님을 주목하거나
혹은 하나님께 속한 사물들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묵상"하는 것은 '영에 둔 생각(롬8:6)' 입니다.
다비는 '내가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을 달콤하게 여긴다'(시104:34) 라고 번역할 수 있어서,
묵상은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사람에게도 달콤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즐거워 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시1:2)'
라는 말씀은 구약의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묵상,
교통의 삶을 살 수 있나요?
여기에 우리의 온 존재가 다 협력해야 합니다.
교통이란?
물론 생각을 영으로 돌이켜
생명이신 하나님을 만지는 것이지만,
주도하는 것은 생각도, 의지도 아닌 "감정"입니다.
주야로 묵상한다 것은
묵상하는 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늘 교통을 하는 사람은
분명히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고
하나님을 달콤하게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에 대해 사랑이 없다면,
그에게 하나님을 묵상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부모가
아무리 공부하도록 강요해도
별로 효과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감정이 싫어한다면 생각은 능력이 없어집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만 사랑하는데
그에게 말씀을 묵상하라고 말한다면
그는 묵상하자마자 잠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를 권면하고 강요하여
하나님을 사모하게 할 지라도
그는 시도를 해보겠지만,
그 일을 가장 고통스러운 일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하나님의 미치도록 사랑한다면,
그에게 하나님 외의 것에 대해 말하면
그는 관심도 없을 것이지만,
하나님에 관해 말한다면 그는 즉시 받아들이고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교통을 훈련할 때 당연히
생각을 영으로 돌이켜서 묵상해야 하겠지만,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우리가 그분을 향하고 그분을 갈망하며,
그분을 사랑하도록 긍휼을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 만져져서
하나님의 사랑의 격려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달콤함으로 감동받을 때,
비로소 그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사랑과 교통을 말해주는 아가서는
"사랑이 있어야 교통이 있다."
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교통과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우리가 자신과 또는 자녀들에게,
또는 목양하는 사람들에게 친밀하고 애정어린
주님과의 교통을 강조하고 격려하지만
지금까지 잘 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그분의 연인들인가? 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경건한 구약의 성도들은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사물들을
줄곧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인데,
그것도 갈급한 마음과
즐거운 마음으로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믿는 이들인
우리가 가져야 할 감정인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우리에게 그분을 향한 사랑과 갈망을 주시기를,
또한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라이프스터디>를 읽을 때
머리를 사용하여 읽지 말고...
반드시 영을 사용하여 읽어야 합니다.
기도로 읽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너무 바빠서 처리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면,
음식을 먹을 때 늘 생각이 없이 먹고,
먹고 나서는 무얼 먹었는지
곧 잊어버릴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주의하든 주의하지 않든 상관없이,
음식을 먹었다면 좋은 것이고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만일 식탁에 앉아서
이 음식에 어떤 영양분이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먹어야 할지
연구만 하고 먹지 않는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성경이나 영적 서적을 읽을 때,
머리를 사용하여 연구만 하지 말고
영을 사용하여 기도로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머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아와서
영적인 일에서나,
교회의 일에서도 자연스럽게
머리를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이 연구하려고 하지 말고,
하루 24시간 중에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매분 매초" 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신간. 끊임없는 기도와 영안에서 삶. 3장)
*피곤하게 어떻게 이렇게 살아?!
그러나 천연적인 타고난 생명으로 사는 것은
익숙해져서 우린 자연스럽게 하루를 삽니다.
만약 우리 존재에서 영이 가장 강하다면
우린 자연스럽게 영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될 때까지
인간생명을 부인하고
신성한 생명을 사는 것을
많은 훈련을 통해 재조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함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만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방식이지
결코 생명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외적인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 자신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는 말씀은 있지만 내가 없고,
빛은 있지만 영이 없다.
계시는 있지만 생명이 없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교회 안에서 집회를 해 왔지만,
이렇게 수 년 동안 집회를 하고 나서
이런 집회가 우리에게 '틀'이 되어
우리를 오늘날의 상태로
만들어 갈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습관적인 생활방식'일뿐
참되게 생명을 살아 낸 것이 아니고,
영화를 보러가지 않았고
이런저런 일들을 하지 않았지만,
매 순간 영 안에서 살며 주님을 접촉하고
매 순간 주님과 한 영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가 화를 내지 않거나,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지 않는것과
심지어는 십자가의 파쇄와도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것과는 별개의 일입니다.
교회생활 안에 있는 우리는
오랜기간 집회를 함으로
좋은 성품을 함양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사람을 연단하는 좋은 용광로이지만
아무리 연단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금욕주의에 가깝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8시간을 제외하고
남은 16시간동안 1시간30분 정도를
주님 안에 살고 하나 된다면,
그 사람은 '우수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이렇게 계산해 보면 다만 주님께 고개숙여
"주님! 오늘 제가 살아낸 생활은
일종의 교회생활의 방식일 뿐이었고
그림을 그린 것이었을 뿐,
그 안에 생명이 없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활동해야 하고
생활해야 하며 또한 봉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영 안에서 해야하고
우리는 반드시 이 일을 "훈련"해야 합니다.
다만 집회 중에 부르짖으며
영을 해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반드시 '개인적인 일상생활' 가운데
영 안에서 살며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오직 이것 만이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생활입니다.
(신간. 끊임없는 기도와 영 안에서 삶. 1장)
*주님! 솔직하게 시인합니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줄곧
이런 방식으로 집회하고 생활해 왔습니다.
또 다른 종교인의 생활이 되지 않도록
주님께 긍휼을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