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여름훈련 메세지11번 우리는 그리스도의 두번째 오심과 시대의 완결을 위해 말라기에 나타나신 치료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합니다.
먼저 시대의 표징들을 반드시 보아야 하는데 이것은 주로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과 관련이 있고 사람이 살고잇는 온땅에 왕국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관련 있습니다!!
또한 그분의 다시오심을 위해 치료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방면에서 주로 우리가 치료받아야 할 것은 특별히, 망상-곧 자기 기만에서 치료되고 구원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자기가 하는 생각이나 일이 완전히 틀렸을지라도 자기 스스로는 완전히 옳다고 믿는것인데 그것은 사탄의 어둠의 권세아래 있는 사람들의 특성이며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교만하고 진리를 받지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요구받는것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2012 여름훈련 메세지10번 학개의 신언의 중심 사상은 '여호와의 집' 곧 '아버지의 집'이 '건축' 되어야 영광이 충만하게 될것 이라고 말 합니다 자기의 집만 관심하는 것에서 자신의 소위(所爲)를 살핌(학1:4,이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板壁)한 집[paneled-up house=벽과 지붕에 각종 장식을 한 널판을 붙인 화려한 집을 뜻함,]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학1:7-8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지라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로인하여 기뻐하고 또 영광(榮光)을 얻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 하였느니라, )으로 '나의 아버지의 집'에대한 참된 관심이 일으켜지길 원합니다!!
여름 휴가 계획들 많이 짜고 계실텐데요. 그 여름 휴가지를 멋진 동영상으로 담아보면 어떨까요? 그냥 캠코더로 찍는 것 말고 사진을 이용해서 만드는 동영상이죠
요즘 타임-랩스가 큰 인기입니다. 애니메이션 기법을 이용해서 DSLR로 찍은 고품질, 고해상도의 사진을 쭉 이어붙여서 만드는 영상물들이 꽤 인기가 있죠. 이거 완죤 노가다입니다. 한장한장 찍고 그걸 동영상으로 한 프레임 한 프레임 붙이는게 쉬운일은 아니죠. 거기다 그냥 사진을 찍는 게 아닌 달리샷까지 추가해서 찍는 경우가 많아서 서서히 서서히 카메라을 줌아웃 하면서 찍을려면 정말 세심함과 노력이 필요 합니다.
David Kosmos Smith
는 2011년 아내의 고향인 리투아니아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긴 휴가(3개월) 동안 유럽 각지를 돌아 다니게 되었는데 그 유럽의 풍광을 멋진 타임-랩스 동영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약 3만장의 사진을 이용해서 5분짜리 유럽의 멋진 풍광을 담았는데 넋을 놓고 봤네요. 유럽이 아름다운것은 잘 알지만 고해상도의 동영상으로 보니 안구정화가 됩니다.
꼭 전체화면으로 해 놓고 보세요. 정말 멋진 동영상입니다. 위 동영상은 JPG로 변환 시켜놓고 아도비 프리미어 프로등으로 편집해서 만든 영상입니다. 저도 이런 것 따라하고 싶은데 하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아니 하는 방법은 대충 알겠는데 용기가 안나네요. 명동거리에서 삼각대 놓고 한장 한장 찍어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은 아틀란타의 풍광을 타임-랩스로 담고 있다고 하는데 서울도 이런 기법으로 담아보면 어떨까 합니다.
갈2:19 下......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생명과,복음에 소홀히 하지 않으며 .영광스런 복음을 전하는자 되길 소망합니다.
복음이 우리 개인의 것이 아님을 알게 하소서. 아멘
형제님 방문에 감사를 드립니다
행9:3~4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한 줄기의 빛이 그를 두루 비추므로, 그가 땅에 엎어졌다. 그러자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하는 음성이 들렸다.
오늘의 만나
단체적인 ‘나’는 주 예수님과 그분의 모든 믿는이로 이루어졌습니다. 사울에게는 이 계시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단으로 여긴 길에 속한 스데반과 또 예수님을 따르는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이 사람들을 박해할 때에 이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분과 연결되어 그분과 하나였지만,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박해한다고 생각했을 뿐, 하늘에 있는 누군가를 건드린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놀랍게도 하늘에서부터 음성이 있었는데, 사울이 박해하고 있는 분은 바로 그분 자신이요, 그분의 이름은 곧 예수라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울에게 있어서 두주 가운데 독특한 계시였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주 예수님과 그분을 믿는이들이 위대한 한 사람 -놀라운 ‘나’- 이라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비밀인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그의 장래의 사역을 위해 그에게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었고, 그의 독특한 사역을 위하여 견고한 기초를 놓은 것이 분명합니다.
4:12 이것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게 하려는것,곧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4:13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믿음에서의 하나와 하나님의 아들에관한 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에 이르게하고 , 또 충분히 성장한 사람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의 충만의 신장의 분량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붙잡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곧 머리이신 분 안으로 자라야 합니다.
4:16 온 몸은 그분에세서 나온 그 풍성한 공급을 해주는 각 마디를 통하여, 그리고 각 지체의 분량에따라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통하여 함께 결합되고 함께 짜여집니다. 그래서 몸이 자람으로써 사랑 안에서 스스로 건축되는 것입니다.
B,우리는 생명 안에서 몸을 알아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계신 그리스도에 의해 형성됩니다. 이 생명이 우리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거듭난 그 순간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가 받아들인 생명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것 입니다.)
2. 생명안에서 몸을 아는것은 우리가 생명을 체험하고 영적으로 성장한 결과 이다. 몸을 아는것은 그렇게 빨리 이루어 지는것이 아닙니다. (몸을 깨닫기 위해서는 생명의 체험과 , 성장이 필요합니다.)
a. 몸을 알고 몸의 실제를 접촉 하려면 반드시 생명의 체험과 생명의 성장에 있어서 진보 해야 합니다. 주님 제 안에서 자라 소서 ,생명의 체험 안으로 인도하여 주시길 .간절한 기도가 필요 합니다.
b. 영적 생명에서의 넷째 단계에 도달한 후에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비밀을 알수있습니다. 이 형제님은 <생명의 체험> 이라는 책에서 네 단계 를 말씀하셨습니다.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계=,거듭남으로 과거를 일소 해야 합니다.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의 분량에 따라 기능을 발휘 하는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인식해야 합니다. (2),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단계=. (외적인처리, 헌신이 필요함= ,죄처리,세상,양심,.... 기름부음과,가르침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인식해야합니다. (3),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단계,= 1육신처리함, 2,자아 처리함 3,타고난 성분 처리함, 4,성령의 징계를 받아들임, 5,영의 처리함-주로 양심을 처리함 6,성령으로 충만됨 이 필요합니다. (4),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완전히 자라셔서 성숙에 이르는 단계=입니다 생명의 체험의단계=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장에 이르러는것, 몸을 인식하고,승천을 인식하고, 다스리고,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러야 합니다.
넸째 단계에 도달한 후에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비밀을 알수있습니다. 몸을 알고, 몸안에서 살려면, 우리의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성품을 처리해야 합니다. 몸을 본사람은 세상이 바뀌어 보이며,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변혁 될 것입니다. 영적인 것들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될것입니다. 모든것이 다 몸이 존제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오직 육체가 처리되고, 자아가 버려지고, 타고난 성분이 파쇄 될 때에만, 몸의 실제를 만질수 있습니다. 3. 몸을 아는 것은 개인주의를 처리 하는 것입니다. 4. 몸을 안다는 증거들은 우리가 개인주의적일 수 없습니다. 그분의 귄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막 14:4, 5).
허비란 무엇인가? 허비는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준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1실링을 주면 족한데 그에게 1파운드를 주었다면 이것은 허비이다. 만일 두 량(兩)이면 족한데 한 근(斤)을 주었다면 그것은 허비인 것이다. 만일 어떤 일을 삼 일 만에 할 수 있는데 그 일에 오 일 또는 한 주간을 사용한다면 바로 허비이다. 허비란 작은 일을 위해 너무 큰 대가를 지불했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분수에 넘치게 받았다면 이것이 바로 허비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우리가 지금 말한 것을 함께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그것은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마리아가 행한 일과 같은 일이 그곳에서도 있기를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 뜻은 사람이 마땅히 그분에게 와서 자신을 그분께 허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 허비하는 것에 관하여 우리는 두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는 유다의 각도이고(요 12:4-6) 다른 하나는 다른 제자들의 각도(마 26:8, 9)이다. 이제 이 두 가지를 합해서 보기로 하자.
열두 제자들은 모두 그것을 허비라고 생각했다. 유다는 예수님을 ‘주’라고 칭한 적이 없었으며, 그가 주님께 부어지는 어떤 것도 다 허비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하다. 향유뿐 아니라 심지어 물도 허비인 것이다. 여기서 유다는 이 세상을 대표한다. 세상 사람 눈에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것은 완전히 허비이다. 그분은 그들에게 사랑을 받은 적이 없고 그들 마음속에서 그분이 자리를 차지하신 적도 없기 때문에 그분에게 무엇을 드리든지 그들은 모두 허비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만일 누구누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서 상당히 성공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의 눈에 상당한 재간이나 타고난 소질과 자질이 있는 사람이 주님을 섬기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사람이 주님을 섬기는 것을 아주 아깝게 생각한다. 그들은 “이렇게 유용한 사람이 이처럼 허비되다니!”라고 말한다. 나 개인의 예를 드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주후 1929년에 나는 상해로부터 내 고향 복주로 돌아왔다. 어느 날 나는 몸이 너무 쇠약해서 지팡이를 짚고 길을 걷고 있었다. 거리에서 나는 전에 나를 가르쳤던 대학 교수를 만났다. 그는 나를 찻집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함께 들어가 그곳에서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자네가 대학에 다닐 때 우리는 자네를 매우 주시해 보았고 장래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네. 그런데 오늘 이런 꼴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네라는 말인가? ” 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러한 노골적인 질문을 했다. 내가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정말 큰 소리로 한바탕 울고 싶었던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사업, 나의 건강,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나에게 전에 법률을 가르쳤던 이 교수님이 “자네는 이렇게 아무 일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아무 발전도, 아무 자랑할 만한 것도 없이 계속 지낼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내 몸에 거한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나는 그때 내 일생 중 처음으로 이 말씀의 의미를 참으로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내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내 생명을 부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내 혼 안에 영광이 충만하게 되었다. 당시 내 몸에 정말 성령의 영광이 충만하였다. 나는 얼굴을 들고서 아무 보류함 없이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택한 길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나의 교수에게는 주님을 섬기는 것은 완전히 허비였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님의 가치에 대한 참된 평가를 갖게 하는 복음의 목적인 것이다.
유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허비라고 느꼈다. “우리가 이 돈을 다른데 잘 이용할 수 있지 않느냐? 이 땅에는 가난한 사람도 많은데 왜 이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자선 사업을 하든가 가난한 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봉사를 하지 않는가? 왜 실제적인 행동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는가? 왜 그것을 예수의 발 앞에 붓는가?”(요 12:4-6 참조). 세상 사람들의 견해는 언제나 다음과 같다. “왜 당신의 생명을 더 가치 있게 쓰지 않는가? 당신은 더 좋은 일을 할 수 없는가? 주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그러나 만일 주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면 어찌 허비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분은 이러한 섬김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내가 그분의 포로되기에 그분은 합당하시고 내가 그분만을 위하는 것을 받기에 그분은 합당하시다! 세상 사람이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님은, “저를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로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말하게 두라. 우리는 여전히 온당하게 이 입장에 서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참된 일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내게 대해 한 것만이 참된 일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눈이 열려서 우리 주님의 참 가치를 아는 것보다 그분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말할 뿐 아니라 거기다가 화까지 냈다.
성경은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마 28:8, 9)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서 가장 많은 은혜를 얻으려는 아주 일반적인 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는 것은 이 점에 있지 않고 이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 보겠다. 내 일생에서 내게 도움을 가장 많이 주었던, 수년 동안 알아왔던 한 자매님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그녀와 왕래하는 몇 년 동안 비록 많은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정말 그녀는 주님께 쓰임을 받았었다. 당시에 나는 주님이 그녀를 쓰시지 않을까봐 마음이 매우 조급했다. 나는 항상 혼자서 “왜 그녀는 나아가서 집회를 인도하지 않고 다른 지방에 가서 사역하지 않는가? 작은 한 마을에 거하니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로 그녀가 허비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때때로 그녀를 보러 가서 나는 외치다시피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 같이 주님을 아는 사람이 없고 당신처럼 성경을 산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당신은 주위의 필요는 모르십니까? 왜 밖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하지 않습니까? 여기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정말 시간과 힘을 허비하는 것이고 돈을 허비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 가장 첫째 되는 일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가 그분에게 쓰임 받기를 바라시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또한 하나님은 내가 누구에게 적극적이지 말라고 권하거나 세상의 긴박한 필요를 직면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것을 금하신다. 여기서 주님도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고 분부하셨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중요시하느냐에 달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볼 때, 나는 주님께서 참으로 사랑스런 그 자매님을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그녀를 통하여 복음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 훈련받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자매님을 인하여 나는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이다! 그러면 비결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베다니에서 주 예수님이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실 때 모든 봉사의 기초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즉, 당신의 모든 소유에 더하여 당신 자신까지도 그분에게 완전히 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분이 당신에게 하도록 허락하신 것이 이것이라면 당신은 이것을 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첫째 되는 문제는 ‘가난한 자’가 도움을 받았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이 만족하셨는가에 있다. 우리는 많은 집회를 인도하고 많은 복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일 관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을 했는가에 있지 않다. 이것은 그분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보이는 결과로 측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주님께서 가장 관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발 앞에 있는가’와 ‘그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가’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옥합과 같이 가장 귀한 것이고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사랑스런 것일지라도 -내가 말하지만 이것은 십자가를 거쳐서 흘러나온 생명이다-
온전히 주님께 드려야 한다. 주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며 가장 얻고자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끊임없는 봉사를 그분께 드린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 그분 자신인지 아니면 봉사인지를 발견하도록 잠시 우리의 봉사를 보류하신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292-298쪽)
장마철 건강관리 잘 하시구요.....매사에 즐겁고 희망찬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옵고
얼마나 많은 비가 올려고 하는지...하루종일~하늘이 컴컴하네요.
장마가 적당히 끝나면 좋을려만...
벌써 주말이 시작이네요. 비 소식에~내일은...방콕하실거죠?...
약간 더운듯 하나 평온한 밤 되셔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