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하나님은 목적과 뜻과 계획이 있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창조하셨다. 계시록 4장 11절은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주의 뜻으로 인하여 만물이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라고 말한다. 헬라어의 ?인하여?라는 말은 여기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만물은 우연히, 뜻밖에, 혹은 어쩌다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은 만물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1.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
1) 목적
골로새서 1장 16절부터 18절까지는 다음과 같다.????만물이 다 그를 통하여 그에게로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전적으로 그의 아들을 위한 것인데, 이는 그의 아들이 만물 안에서 높이 올려지고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격의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기 때문에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다(골2:9). 그러므로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 하나님이 또한 나타나신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아들이 영광을 얻고 그분 자신이 표현되는 것이다.
2) 방법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라(bara)?인데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무언가 있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존재하게 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은 창조를 이루셨는가? 창조의 수단은 무엇이었는가? 히브리서 11장 3절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장 3절 또한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지어진 바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다(시 33:9).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없는데서 그의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또 한면으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히브리서1장 2절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우주를 만드셨다고 말한다. 골로새서 1장 15절과 16절은 또한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며(요 1:1, 14), 이 둘은 하나이다.
3) 과정
욥기 38장 4절 부터 7절까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먼저 하늘들과 그 안에 있는 만물과 그 안에 거하는 천사들을 창조하셨다. 살아 있는 생물들이 거하는 땅은 두번째로 창조되었다. 욥기 38장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에 별들과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미 그곳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 구절은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이 줄로 측량되었으며 모든 것이 질서 있고 뛰어나게 아름다왔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쁨으로 소리를 발하였었다. 그 때에는 죄의 그늘이나 혼돈의 자취를 우주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모두가 밝고 아름다왔었다. 이것은 창조자가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가를 보여 준다.
4)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창조
시편 19편 1절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말한다. 비록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은 피조물을 통해서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깨달을 수 있고 따라서 핑계할 수 없다(롬 1:20). 그러므로 창조를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창조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의 회복과 전진된 창조
창세기 1장2절 하반부는 1절에서 완성된 원초의 창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손상입은 것을 회복하려 하셨고 무엇인가 전진된 창조를 하려고 하셨다. 2절은 ????그리고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게 되었고????(히브리어 참조)라고 시작한다. ?그리고?는 두 가지 사물을 연결시키는 접속사이다. 앞의 것이 지나가고 두 번째 것이 온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서 원래에 하나님 의해 창조된 아름다운 우주가 파괴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2절 하반부부터 2장 2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파괴된 우주를 회복하시는 것과 그분의 전진된 창조를 보여준다. 창세기 2장 4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들을 만드시던 때에 하늘들과 땅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와 하나님의 회복을 모두 보여 준다. 이 구절의 뒷부분은 하늘들과 땅이 창조된 때를 언급하고 있다. 하늘들이 먼저 언급되고 땅이 나중에 언급된 것과 여기서 사용된 동사가 ?창조되었다?임을 주의하라. 이 구절의 앞부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들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땅이 하늘들보다 먼저 언급되었으며, 사용된 동사도 ?창조되었다?가 아닌 ?만들어졌다?이다.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와같이 창조한다는 것은 무(無)에서 유(有)을 산출하는 것이며, 만든다는 것은 존재하는 물질을 가지고서 무언가 다른 것을 산출하기 위하여 작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뒷부분은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를 가리키며, 앞부분은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들을 회복하심을 언급한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3절부터 1장 끝까지에서 하나님은 땅과 하늘들을 만드셨다. 9절과 10절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세 째 날에 땅을 회복하셨음을 보게 된다. 땅은 이미 존재하여 있었고 물 밑에 잠겨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 째 날에 땅을 회복하신 것이다. 또한 네 째 날에 하나님은 궁창, 즉 하늘들을 회복하셨다. 그러므로 회복에 있어서는 하늘들과 땅이 아니라, 먼저가 땅이요 나중이 하늘들이었다.
1) 생명의 순서에 따른 하나님의 전진된 창조
하나님의 전진된 창조에 있어서, 그분은 생명의 단계에 따라 만물을 창조하셨다. 먼저 그분은 생명 없는 것들을 창조하셨고, 나중에 생명체를 창조하셨다. 생명체를 창조하실 때에도 그분은 가장 낮은 생명부터 시작하여 한 단계 한 단계씩 전진해서 가장 높은 생명에까지 이르렀다. 먼저 그분은 감각 없는 생물, 즉 나무와 풀과 꽃과 같은 식물의 생명을 창조하셨다. 이것들은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은 지각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은 가장 낮은 것이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은 동물의 생명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또한 물고기나 새처럼 알을 낳는 동물의 생명과 같은 가장 낮은 생명부터 시작하셨다. 이 동물들의 생명에는 지각이 있지만 그다지 높지는 않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땅 위의 가축과 짐승처럼 새끼를 배는 동물들을 창조하셨다. 새끼를 배는 동물들은 알을 낳는 동물들보다 더 높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들은 지각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지각은 더욱 높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장 높은 생명이다. 사람은 또한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은 지각을 소유하고 있다.
2) 과정
창세기 1장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와 전진된 창조를 이루시는 데는 엿새가 소요되었음을 보여 준다. 첫날에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운행하셨다. 그 위에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빛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둘째 날에 하나님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셨다. 이것은 그분이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을 분리하셨음을 의미한다. 세째 날에 땅이 물에서부터 분리되었다. 하나님은 물 위에 역사하사 물을 가두고 제한시켜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 이것은 예레미야 5장 22절에서 말하듯이 마치 하나님께서 물의 경계선을 그으신 것과 같다. 마른 땅이 드러난 후에 하나님은 더욱 전진하여 식물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네째 날에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 같은 발광체를 회복 하시고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셨으며, 또한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은 각기 종류대로 물속에 생명체와 공중에 새들을 창조하셨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가축과 기는 것들과 짐승들과 같은 땅위의 생물들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사 만물의 중심이 되게 하셨다.
3.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의 생명
1)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사람
사람은 가장 높은 창조된 생명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졌다(창 1:26-27). 사람 외에는 다른 어떤 피조물도 형상과 모양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가장 높으며,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사람은 그분의 계획을 위하여 예비된 가장 좋은 그릇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안에서 사람이 그분의 생명을 소유해서 그의 아들의 형제들이 되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 시에 사람으로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갖게 하셨다. 형상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같은 속 부분을 언급한다. 무형(無形)의 사람을 이루고 있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사고와 의견과 사랑과 같은 인간의 기능은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의 형상은 또한 그분의 속성의 특성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그분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 안에서 그분의 미덕의 속성을 따라 창조함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미덕들을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이 소유한 것은 다만 형상일 뿐 실제는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과 내용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로움이 이러한 사람의 미덕들을 채우고 풍성하게 하여 실제가 되는 것이다. 모양은 유형(有形)의 사람을 이루고 있는 바깥의 몸을 가리킨다. 사람의 바깥 몸은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양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성육신되기 이전에도 그분은 종종 구약에서 사람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창18:2,16-17, 삿13:9-10, 17-19).
A.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표현하게 함
하나님의 회복과 전진된 창조의 주된 목적은 사람, 즉 단체의 사람을 얻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창 1:26-27).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은 단체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한 사람 아담 안에서 단체적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고, 아담은 단체적으로 집합적인 사람이었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우리 모두가 창조되었다.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단체적인 사람을 자신의 형상 안에서 자신의 모양을 따라 지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게 하셨다.
B.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게 함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통치하게 하자????(원문참조)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단체적인 사람을 창조해서 자신의 통치를 수행하게 하셨다(창 1:26-28). 통치하다는 단어는 단지 권위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통치는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의 왕국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a. 하나님의 대적을 처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목적의 첫 번 째 방면은 그분의 대적, 즉 기는 것으로 예표된 사탄을 처리하는 것이다(창 1:26). 성경에서 기는 것은 귀신과 마귀와 사탄 같은 것이다. 성경은 사탄을 예표하기 위하여 뱀을 사용한다(창 3:1). 계시록 12장 9절에서 사탄은 ?옛뱀?이라고 불리운다.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에서 그분은 오직 한 목적, 즉 자신을 표현하는 목적만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사탄의 배역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또 다른 목적, 즉 대적을 처리하는 목적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해서 자신을 표현하게 하셨고,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사 그분의 대적을 처리하게 하셨다.
b.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의 두 번 째 방면은 땅을 회복하는 것이다(창 1:26-28). 사람은 땅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정복하게 되었다. 정복한다는 것은 이미 그곳에 대적이 있으며, 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땅을 정복하고 회복해야 한다.
c. 하나님의 권위를 가져오기 위하여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의 세 번 째 방면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져오는 것이며 땅 위에 하나님의 권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땅 위에 나타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수행해야 한다.
2) 세부분 - 영, 혼, 몸 - 으로 창조된 사람
하나님은 사람을 세부분-영, 혼, 몸-으로 창조하셨다. 처음에 하나님은 땅을 흙으로 사람의 몸을 지으셨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사람의 몸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는데, 이것이 사람 안에 영이 되었다. 생명의 호흡인 영이 사람의 몸 안에 들어왔을 때, 혼이 생성되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사람은 보이는 몸이 있고, 내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이 있으며, 그 둘 사이에 혼이 있다. 몸은 밖에서 물질적인 세계의 사물을 접촉한다. 영은 안에서 영적인 세계의 일들을 접촉한다. 중간에 있는 혼은 몸과 영 사이에서 정신적인 세계의 일들을 접촉한다. 영은 우리 전존재 중 가장 깊은 부분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수신기이며, 하나님과의 모든 영적인 일들을 접촉하는 기관이다(요 4:24, 롬 1:9).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느낌과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느낌과 깨달음, 그리고 우리 양심의 비난이나 승인과 같은 것들 이 영의 기능이다. 몸의 느낌으로 우리가 물질적인 세계를 실제화하듯이 우리는 다만 영으로서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을 실제화할 수 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지으신 것이다(슥 12:1, 욥 32:8). 우주 안에서 동일하게 중요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그것은 하늘들과 땅과 사람의 영이다. 하늘들은 땅을 위하고, 땅은 사람을 위하고, 사람 속에 있는 영은 하나님을 위한다. 하나님은 땅을 위하여 하늘을 창조하셨다. 하늘이 없다면 땅은 아무것도 자라게 할 수 없다. 땅은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을 담도록 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며 사람의 중심은 그의 영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만일 사람안에 영이 없다면 사람은 빈 껍데기일 것이다. 이 땅 위에 사람이 없다면 땅은 공허할 것이며 사람에게 있어서 하늘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땅을 섬기고, 땅은 사람을 섬기며, 사람은 하나님을 담기 위하여 영을 가지고 있다.
3) 선하고 올바르게 창조된 사람
전도서 7장 29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올바르게 지으셨다고 말한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의 창조의 손으로부터 나왔을 때, 그는 비뚤어지거나 악하거나 더럽혀지지 않았었으며, 올바르고 선하고 순수했었다. 그 당시에 사람은 죄와 부패함과 흠이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심히 좋게? 생각하셨다(창 1:31).
4) 인간의 생명은 단지 창조된 생명임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지만 그의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과는 달리 창조된 생명일 뿐이었다. 사람이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도 또한 창조된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하지만 사람의 생명은 일시적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거룩하고 영광스럽지만 사람의 생명은 기껏해야 순수하고 선할 뿐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은 없다. 비록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의 영에는 하나님의 생명도 하나님의 본성도 없다. 사람은 다만 하나님의 창조물일 뿐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을 소유하지는 않았다.
4. 하나님이 사람을 생명나무 앞에 두 사 사람이 하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게 하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분은 거룩한 생명을 사람 안에 넣지 않으셨다. 대신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사람이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선택하여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을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 생명나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나타내고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사망의 근원인 사탄을 상징한다. 이 두 나무는 우주 안에 있는 두 근원을 상징한다. 많은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를 생명나무 옆에 두지 않으셨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분은 영광의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분이다. 그분은 사람이 자신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보다 그분은 사람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셨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두 나무 앞에 두신 것은 이러한 원칙에 따른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을 선택하여 하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은 뒤에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성경을 알아야 한다. 이 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인식해 왔는데, 그것은 아무도 성경을 모르고서는 주님을 잘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유산은 한편으로 보이지 않는 성령이고, 또 한편으로 성경이다. 한편으로 성령은 우리 안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 밖에 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두 면에 있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안에 성령만 있고 밖에 성경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쉽사리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밖에 성경만 있고 안에 성령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활력이나 생기가 없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안의 추진력과 밖의 철로를 필요로 하는 기차와 같다. 이 두 방면-안과 밖의 방면-이 함께 협력할 때 기차는 움직일 수 있고, 심지어 매우 잘 달리게 된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과 우리 밖에 있는 성경에 대해서도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안에는 성령으로 채워지고 또한 밖으로 성경을 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생생하고도 안정되며, 또 활기차고도 정확한 사람이라 불리 울 수 있을 것이다.
1. 성경의 기원
1)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임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이다(딤후 3:16). 이것은 성경이 사람의 사고나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그 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과 말씀을 그분의 영을 통해서 기자의 속으로, 또 기자로부터 호흡해 내신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분의 냄새를 전달해 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 곧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호흡이신 말씀을 통해서 매일 그분을 접촉하고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호흡하신 것이므로 성경의 어떤 말씀도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없다.「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했다」(벧후1:21)는 말씀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사람이 그 영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말하도록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었고, 또한 하나님 속으로부터 말한 것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입을 통해서 사람 속으로부터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사무엘하 23장 2절은「주의 영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다윗이 한 것이었다. 그는 그가 우리에게 한 말이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며, 그의 혀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다. 성령이 그를 통하여 말할 뿐만 아니라 그의 혀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의 입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왔던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다.
3) 성경은 신언자들과 아들 안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임
구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히 1:1-2). 그러므로 구약에서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든지 신약에서 주 예수로 말씀하셨든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4) 성경은 성령의 계시임
「그러나 실재의 영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모든 실재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말씀하시며 장차올 일들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16:13). 여기서 주님의 말씀도 또한 그 영이 오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이 말하고 기록한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열려진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주님의 말씀은 그분이 승천하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진 신약의 모든 책들이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것들의 거룩한 권위가 주님에 의해 인정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2. 성경의 기능
1) 주 예수에 대하여 증거함
성경의 첫 번 째 기능은 주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요 5:39). 주 예수님은 성경의 주제이며 내용이고, 성경은 주 예수에 대한 설명이자 표현이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시며,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는 그 실제로서 산 말씀이신 주 예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교리와 공허한 문자에 불과하다. 산 말씀이신 주 예수님은 그분의 표현으로서 기록된 말씀을 가지셔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비밀스럽고 알기가 어려우며 모호하여 붙잡기 힘든 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안에 분명하고 명확한 설명과 명백한 계시가 있으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알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2)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함
성경의 기능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한 방면은 주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방면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 성경은 주 예수를 증거하고,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받고 건축되게 한다. 우리에게 대한 성경의 첫번째 기능은 우리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이다(딤후 3:15).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과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알게 한다.
3) 사람을 거듭나게 함(벧전1:23)
성경은 사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신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경의 말씀을 우리 안에 받아들일 때 그것은 생명의 씨와같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거듭나게 된다.
4) 믿는 이들의 영적인 젖이 됨(벧전 2:2)
우리가 처음 구원받을 때에는 영적인 일에 대해서 충분하고 분명한 이해가 없다. 그러므로 새로 거듭난 믿는 이들은 순전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 갓 태어난 아이들처럼 성경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영적 생명은 자랄 수 없고,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로 머물게 된다(고전 3:1-2).
5) 믿는 이들의 생명의 떡이 됨(마 4:4)
마치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영양분을 필요로 하듯이 영적인 생명 또한 영양분을 필요로 한다. 영적 생명의 영양분은 성경의 말씀으로만 공급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생생하고 강하게 되려면 우리는 떡에만 의존할 수 없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 즉 성경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음식으로 받아서 그것을 먹어야 하고(렘 15:16), 심지어 성경의 말씀을 음식보다 더욱 중하게 여겨야 한다(욥 23:12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자랄 수 없다.
6) 믿는 이들을 온전케 함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인내와 격려와 소망을 줄 수 있다(롬 15:4). 또한 성경은 우리가 훈계를 받고 깨어 있어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경고가 되는 많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전 10:11). 그러므로 거듭난 이후로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로 온전케 한다(딤후 3:16-17).
3. 성경의 저자와 기록 장소와 기록 연대
1) 구약
구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3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들은 적어도 32명이다. 그들 중에는 학자와 정치가와 군인이 있었고, 또한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가 있었으며, 목동과 농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몇몇은 이방인이었다. 구약은 여러 장소에서 기록되었는데, 어떤 것은 시내 산에서 기록되었고, 어떤 것은 광야에서, 어떤 것은 가나안 땅에서, 어떤 것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어떤 것은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다.
2) 신약
신약은 마태복음으로부터 계시록까지 27권으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하였다. 마태는 낮은 신분의 세리였지만 그는 주님의 열 두 사도 중 하나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복음서는 아마도 유대 지방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하였다. 마가는 매우 평범한 제자였다. 그의 복음서는 아마도 로마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는 이방인 의사였다. 그의 복음서는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기록하였다. 요한은 교육받지 못한 갈릴리 어부였지만 주님의 열 두 사도 중의 하나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복음서 또한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도 의사 누가가 기록하였다. 이 책도 또한 이방 땅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로마서에서 히브리서까지는 모두 열 네 권의 책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바울에 의하여 쓰여졌다. 그의 모든 책들은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고, 어떤 책들은 로마의 감옥에서 쓰여졌다.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기록하였다. 야고보는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다(갈 1:19). 그는 또한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기둥이었지만(갈 2:9), 유대교의 배경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서신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베드로 전서와 후서는 베드로가 쓴 것이다. 베드로 역시 교육받지 못한 갈릴리 어부였지만 열 두 사도 중 첫 번 째 사도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두 서신은 모두가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한의 첫 번 째와 두 번 째와 세 번 째 서신은 요한이 쓴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다. 유다서는 유다가 기록하였다. 그도 또한 주님의 육신의 형제였다(유 1, 갈 1:19). 그의 서신은 유대 지방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계시록도 또한 사도 요한이 기록하였다. 이 책은 아마도 밧모섬이라고 하는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기록 연대
구약의 처음 몇 권-모세 오경-은 거의 기원 전 1500년경에 기록되었으며,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기원 전 400년경에 쓰여졌다. 그러므로 구약 39권의 전부가 완성되기까지는 1100여 년이 소요되었다. 신약의 첫 번 째 책인 마태복음은 서기 37년과 40년 사이에 기록되었으며,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서기 94년과 96년 사이에 쓰여졌다. 그러므로 신약은 50년 이상에 걸쳐 완성되었다. 따라서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가 완성되는 데에는 1500년 내지 1600년간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
4. 성경의 완성 -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정
1) 구약
A. 모세 오경
구약에 있는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은 오랜 동안 유대인들에 의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책이며 절대적인 거룩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인정되어 왔다. 그것은 이 책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되었고,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조상들에 의하여 여러 세대 동안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B. 이외의 책들
구약의 다른 책들은 그 가치와 권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받았다. 여러 세대를 거쳐 오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 중 어떤 이들 이 모세 오경에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자 하는 영감을 받았다. 그들이 기록한 책들은 상당한 기간의 시험이 지난 후,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이 인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글에 권위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457년에 율법 학자 에스라는 모세 오경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던 권위 있는 기록들을 모아서 구약의 형태로 편성하였다.(그러나 두 권의 책-느헤미야, 말라기-은 그 당시 기록되지 않았었으므로 제외되었다) 권위 있는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와 이방의 역사학자들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에스라 이후 유대인 중에 대공회라고 불리우는 일단의 율법학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편집과 검토를 했는데 이 일은 기원전 400년에 완성되었다. 그들이 확정한 구약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책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원전 400년에 구약의 기록이 완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이 확정되고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70명의 학자들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했던 기원 전 277년 까지는 구약의 모든 책들의 확립되었음에 틀림없다.
2) 신약
A. 복음서
복음서와 구약은 초기의 교회 집회에서 자주 읽혔다. 그러므로 신약의 책들 가운데서 사복음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B. 이외의 책들
사도들이 지나간 후, 어떤 이들이 자신들을 다른 사도들과 동등하게 생각하여 책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혼돈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의 인도자들, 소위 교부들은 사도들의 모든 기록을 모아서 그것들을 복음서와 같은 위치에 두었다. 폴리갑의 순교가 있은 바로 뒤에 모든 교회들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와 베드로 후서와 요한 이삼서와 유다서와 계시록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신약에 대한 관점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일곱 책이 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일곱 권의 책이 분명히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쓰여 졌고 거룩한 권위와 가치가 있었으므로 오랜 기간의 시험이 지난 뒤인 주후 397년에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에서 열린 회의에서 각 교회의 인도자들은 이 일곱 권의 책을 신약의 일부로써 인정하였다. 그들은 또한 신약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이 27권으로 이루어짐을 선포했다. 그러므로 카르타고 회의가 열었던 주후 397년에 이르러 신구약을 포함하는 완전한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인정되고 확증되었다.
5. 성경의 주제와 중심사상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창조하셨으며, 사탄은 반역하고 손상시켰고, 사람은 타락하고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구속하시고 건축하신다.” 라고 말할 수 있고 성경의 중심사상은 위대한 비밀(엡5:32)인 그리스도와 교회이다.
질문
1) 성경의 기원은 무엇인가?
2) 성경의 기능은 무엇인가?
3) 성경의 주제와 중심사상은 무엇인가?
중심요절: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이며,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의로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이 공과는 가장 배우기 어려운 공과이다. 또 이것은 하루 아침에 배워지는 것도 아니다. 실로 많은 나날을 거쳐야만 믿는이들은 자기의 육체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가장 좋은 것 가운데에도 더러움이 섞여 있음과, 혹은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18절)라고 한 말에 동의하도록 하나님은 그로 로마서 7장의 체험을 많이 갖게 하신다. 이 말하기를 배우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믿는이들은 많은 고통스러운 실패를 거치지 않을 때에 항상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천백번의 실패를 거칠 때에야 비로소 스스로 의롭다 하는 모든 것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 ―육체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렇다고해서 종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심판은 끊임없이 이어져야만 한다.
언제든지 믿는이들이 자기를 심판하지 않고, 육체를 무용지물로, 가장 형편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조금이라도자기를 영화롭게 한다면, 하나님은 그의 찌끼를 불태우기 위하여 부득불 그로 불을 통과케 하신다. 스스로 낮추고 자신을 더러운 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역사를 그치지 않으신다. 육체의 영향력에서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자기를 심판하는 마음도 한 순간도 쉴 수 없다. 그렇지 않을 때 다시 육체의 자랑 안에 떨어지게 된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음이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우리가 죽음의 단계를 버리고서는 결코 부활의 단계로 들어 갈 수 없다. 부활 생명을 얼마나 체험하는가는 당신이 얼마나 죽음을 체험하는가에 달렸다. 오, 죽음은 모든 것의 기초이다, 사람은 진보할 수 있어도 이 기초를 잃어버릴 수는 없다. 만일 육체가 죽어야 한다는 이 사실을 견고히 붙잡지 않는다면 부활하고 승천한 생명도 헛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육체가 더 이상 우리를 미혹할 권리가 없을 정도로 신령하고 진보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대적은 우리로 십자가의 경계를 떨쳐 버리고 외형적인 신령함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육에 속한 사람의 많은 말, 즉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지금 나는 어떠어떠합니다. 더이상 과거와 같이 행하지 않습니다.』라는 말들은 누가복음 18장 11,12절의 기도 소리와 같다. 이들은 육체를 벗었다고 생각할 때에 육체에 의해 속임을 당하게 된다. 우리는 늘 주님의 죽으심 안에 거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받은 뒤에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성경을 알아야 한다. 이 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인식해 왔는데, 그것은 아무도 성경을 모르고서는 주님을 잘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유산은 한편으로 보이지 않는 성령이고, 또 한편으로 성경이다. 한편으로 성령은 우리 안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 밖에 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두 면에 있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안에 성령만 있고 밖에 성경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쉽사리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밖에 성경만 있고 안에 성령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활력이나 생기가 없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안의 추진력과 밖의 철로를 필요로 하는 기차와 같다. 이 두 방면-안과 밖의 방면-이 함께 협력할 때 기차는 움직일 수 있고, 심지어 매우 잘 달리게 된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과 우리 밖에 있는 성경에 대해서도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안에는 성령으로 채워지고 또한 밖으로 성경을 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생생하고도 안정되며, 또 활기차고도 정확한 사람이라 불리 울 수 있을 것이다.
1. 성경의 기원
1)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임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이다(딤후 3:16). 이것은 성경이 사람의 사고나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그 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과 말씀을 그분의 영을 통해서 기자의 속으로, 또 기자로부터 호흡해 내신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분의 냄새를 전달해 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 곧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호흡이신 말씀을 통해서 매일 그분을 접촉하고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호흡하신 것이므로 성경의 어떤 말씀도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없다.「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했다」(벧후1:21)는 말씀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사람이 그 영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말하도록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었고, 또한 하나님 속으로부터 말한 것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입을 통해서 사람 속으로부터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사무엘하 23장 2절은「주의 영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다윗이 한 것이었다. 그는 그가 우리에게 한 말이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며, 그의 혀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다. 성령이 그를 통하여 말할 뿐만 아니라 그의 혀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의 입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왔던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다.
3) 성경은 신언자들과 아들 안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임
구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히 1:1-2). 그러므로 구약에서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든지 신약에서 주 예수로 말씀하셨든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4) 성경은 성령의 계시임
「그러나 실재의 영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모든 실재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말씀하시며 장차올 일들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16:13). 여기서 주님의 말씀도 또한 그 영이 오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이 말하고 기록한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열려진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주님의 말씀은 그분이 승천하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진 신약의 모든 책들이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것들의 거룩한 권위가 주님에 의해 인정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2. 성경의 기능
1) 주 예수에 대하여 증거함
성경의 첫 번 째 기능은 주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요 5:39). 주 예수님은 성경의 주제이며 내용이고, 성경은 주 예수에 대한 설명이자 표현이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시며,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는 그 실제로서 산 말씀이신 주 예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교리와 공허한 문자에 불과하다. 산 말씀이신 주 예수님은 그분의 표현으로서 기록된 말씀을 가지셔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비밀스럽고 알기가 어려우며 모호하여 붙잡기 힘든 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안에 분명하고 명확한 설명과 명백한 계시가 있으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알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2)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함
성경의 기능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한 방면은 주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방면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 성경은 주 예수를 증거하고,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받고 건축되게 한다. 우리에게 대한 성경의 첫번째 기능은 우리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이다(딤후 3:15).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과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알게 한다.
3) 사람을 거듭나게 함(벧전1:23)
성경은 사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신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경의 말씀을 우리 안에 받아들일 때 그것은 생명의 씨와같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거듭나게 된다.
4) 믿는 이들의 영적인 젖이 됨(벧전 2:2)
우리가 처음 구원받을 때에는 영적인 일에 대해서 충분하고 분명한 이해가 없다. 그러므로 새로 거듭난 믿는 이들은 순전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 갓 태어난 아이들처럼 성경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영적 생명은 자랄 수 없고,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로 머물게 된다(고전 3:1-2).
5) 믿는 이들의 생명의 떡이 됨(마 4:4)
마치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영양분을 필요로 하듯이 영적인 생명 또한 영양분을 필요로 한다. 영적 생명의 영양분은 성경의 말씀으로만 공급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생생하고 강하게 되려면 우리는 떡에만 의존할 수 없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 즉 성경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음식으로 받아서 그것을 먹어야 하고(렘 15:16), 심지어 성경의 말씀을 음식보다 더욱 중하게 여겨야 한다(욥 23:12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자랄 수 없다.
6) 믿는 이들을 온전케 함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인내와 격려와 소망을 줄 수 있다(롬 15:4). 또한 성경은 우리가 훈계를 받고 깨어 있어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경고가 되는 많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전 10:11). 그러므로 거듭난 이후로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로 온전케 한다(딤후 3:16-17).
3. 성경의 저자와 기록 장소와 기록 연대
1) 구약
구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3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들은 적어도 32명이다. 그들 중에는 학자와 정치가와 군인이 있었고, 또한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가 있었으며, 목동과 농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몇몇은 이방인이었다. 구약은 여러 장소에서 기록되었는데, 어떤 것은 시내 산에서 기록되었고, 어떤 것은 광야에서, 어떤 것은 가나안 땅에서, 어떤 것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어떤 것은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다.
2) 신약
신약은 마태복음으로부터 계시록까지 27권으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하였다. 마태는 낮은 신분의 세리였지만 그는 주님의 열 두 사도 중 하나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복음서는 아마도 유대 지방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하였다. 마가는 매우 평범한 제자였다. 그의 복음서는 아마도 로마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는 이방인 의사였다. 그의 복음서는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기록하였다. 요한은 교육받지 못한 갈릴리 어부였지만 주님의 열 두 사도 중의 하나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복음서 또한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도 의사 누가가 기록하였다. 이 책도 또한 이방 땅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로마서에서 히브리서까지는 모두 열 네 권의 책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바울에 의하여 쓰여졌다. 그의 모든 책들은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고, 어떤 책들은 로마의 감옥에서 쓰여졌다.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기록하였다. 야고보는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다(갈 1:19). 그는 또한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기둥이었지만(갈 2:9), 유대교의 배경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서신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베드로 전서와 후서는 베드로가 쓴 것이다. 베드로 역시 교육받지 못한 갈릴리 어부였지만 열 두 사도 중 첫 번 째 사도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두 서신은 모두가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한의 첫 번 째와 두 번 째와 세 번 째 서신은 요한이 쓴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다. 유다서는 유다가 기록하였다. 그도 또한 주님의 육신의 형제였다(유 1, 갈 1:19). 그의 서신은 유대 지방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계시록도 또한 사도 요한이 기록하였다. 이 책은 아마도 밧모섬이라고 하는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기록 연대
구약의 처음 몇 권-모세 오경-은 거의 기원 전 1500년경에 기록되었으며,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기원 전 400년경에 쓰여졌다. 그러므로 구약 39권의 전부가 완성되기까지는 1100여 년이 소요되었다. 신약의 첫 번 째 책인 마태복음은 서기 37년과 40년 사이에 기록되었으며,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서기 94년과 96년 사이에 쓰여졌다. 그러므로 신약은 50년 이상에 걸쳐 완성되었다. 따라서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가 완성되는 데에는 1500년 내지 1600년간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
4. 성경의 완성 -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정
1) 구약
A. 모세 오경
구약에 있는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은 오랜 동안 유대인들에 의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책이며 절대적인 거룩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인정되어 왔다. 그것은 이 책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되었고,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조상들에 의하여 여러 세대 동안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B. 이외의 책들
구약의 다른 책들은 그 가치와 권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받았다. 여러 세대를 거쳐 오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 중 어떤 이들 이 모세 오경에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자 하는 영감을 받았다. 그들이 기록한 책들은 상당한 기간의 시험이 지난 후,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이 인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글에 권위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457년에 율법 학자 에스라는 모세 오경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던 권위 있는 기록들을 모아서 구약의 형태로 편성하였다.(그러나 두 권의 책-느헤미야, 말라기-은 그 당시 기록되지 않았었으므로 제외되었다) 권위 있는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와 이방의 역사학자들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에스라 이후 유대인 중에 대공회라고 불리우는 일단의 율법학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편집과 검토를 했는데 이 일은 기원전 400년에 완성되었다. 그들이 확정한 구약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책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원전 400년에 구약의 기록이 완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이 확정되고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70명의 학자들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했던 기원 전 277년 까지는 구약의 모든 책들의 확립되었음에 틀림없다.
2) 신약
A. 복음서
복음서와 구약은 초기의 교회 집회에서 자주 읽혔다. 그러므로 신약의 책들 가운데서 사복음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B. 이외의 책들
사도들이 지나간 후, 어떤 이들이 자신들을 다른 사도들과 동등하게 생각하여 책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혼돈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의 인도자들, 소위 교부들은 사도들의 모든 기록을 모아서 그것들을 복음서와 같은 위치에 두었다. 폴리갑의 순교가 있은 바로 뒤에 모든 교회들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와 베드로 후서와 요한 이삼서와 유다서와 계시록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신약에 대한 관점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일곱 책이 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일곱 권의 책이 분명히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쓰여 졌고 거룩한 권위와 가치가 있었으므로 오랜 기간의 시험이 지난 뒤인 주후 397년에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에서 열린 회의에서 각 교회의 인도자들은 이 일곱 권의 책을 신약의 일부로써 인정하였다. 그들은 또한 신약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이 27권으로 이루어짐을 선포했다. 그러므로 카르타고 회의가 열었던 주후 397년에 이르러 신구약을 포함하는 완전한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인정되고 확증되었다.
5. 성경의 주제와 중심사상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창조하셨으며, 사탄은 반역하고 손상시켰고, 사람은 타락하고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구속하시고 건축하신다.” 라고 말할 수 있고 성경의 중심사상은 위대한 비밀(엡5:32)인 그리스도와 교회이다.
질문
1) 성경의 기원은 무엇인가?
2) 성경의 기능은 무엇인가?
3) 성경의 주제와 중심사상은 무엇인가?
중심요절: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이며,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의로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살전2:4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아서 복음을 위임받게 되었습니 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 는 것입니다
골 1:5 그러한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들에 쌓아둔 소망에 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소망은 여러분이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 에서 들은 것입니다.
주님의 회복의 네 가지 기둥은 진리와 생명과 교회와 복음이다. 진리는 우리 에게 생명을 가져다주과 생명은 교회를 산출하며, 교회는 복음을 전할 책임을 진다.
오늘날 교회의 유일한 위임은 진리를 내용으로 하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다. 진리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점을 말해 준다. 그 중점은아버지, 아들, 영이신 삼일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 부분의 사람인 우리 안으로 그분 자신을 분배하시 어, 우리의 죄들이 용서받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변화되기 위해 하나님 의 생명을 받아들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 자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 이자 복음이다. 우리는 진리를 배워야 한다.
오늘날 주님의 복음이 널리 퍼지지 못한 원인은 우리가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다 진리는 복음이다. 우리가 각처에서 진리를 말한다면, 사실상 각 처에서 복음 을 전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복음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전환하여 모든 성도들이 진리를 말 하고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께 그분의 갈망을 이 룰 수 있는 대로를 열어 드릴 것이다.
복음과 진라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진리가 복음이고 진리를 전하 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사람들에게 멸망에서 벗어나 천 국에 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번영이나 평화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 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들어오시어 죄인들 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를 원하시고, 이 하나님의 아들들은 교회의 조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지체들이며, 그러한 지체들은 교회 안에 있고 이 교회는 각 지방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그들은 지방 교회들 안에서 교회생활을 할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복음을 전할 마음이 있을지라도 진리를 모른다면, 사람들에게 말하 려고 입을 열자마자 곧 할 말이 없게 될 것이다. 두세 문장을 말한 후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할 말이없을 것이고 사람들은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반드시 진리를 배워야 한다. 복음 의 말씀이 진리이다. 진리의 말씀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를 배워야 한다. 이 제부터 우리가 진지하게 진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두 두 달 안에 어떻게 복 음을 전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실상 진리를 말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참된 복음 전파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말하는 것이 복 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합당한 방식으로 진리를 배워야 한다.
인간 사회의 문명화와 진보는 결과적으로 사람 속에 끊임없는 공허만을 남겨 주 었다.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높은 진리들만이 이러한 공허를 채워 줄 수 있다. 그러 므로 우리른 진리를 설명하고 전할 수 있을 정도로 진리를 부지런히 연구할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 이것이 참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것은 높은 복음 전파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일을 위임하셨다고 말 했다.(딤전2:7). 같은 방식으로, 이 위임은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졌다. 나는 우리가 모두 이 위임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가르치기 바란다.
당신이 자신을 의지해 사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의지해 사느냐는 매우 중요한 관건이다. 당신이 만약 자신을 의지해 산다면 이는 구원받기 전과 다를 바가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와 분별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을 의지해 살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약 그리스도를 의지해 사느냐 혹은 자신을 의지해 사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 선택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 선택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만약 그분을 의지하여 살지 않고 여전히 어려움 속에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이 방 안에 전등이 있으나 스위치를 켜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럴 때 전력회사는 우리를 어떻게 도울 수 없다. 지금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지해 사느냐 또는 그리스도를 의지해 살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지난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2박3일동안 성경진리 사역원에서 455명의 성도들이 모여 오늘날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관한 내용을 대만 동역자 형제님을 통하여 교통해 주셨다. 지난 10월19일부터 2박3일동안 동말레이지아에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신성한 움직이심을 주제로 아시아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관한 특별한 교통을 가지신 것을 전달해 주셨다. 우리의 하나님은 여전히 움직이시고 계신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이기에 하나님의 움직이심 안에서 움직이어야 한다. 구약은 하나님의 움직이심의 역사였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통해 움직이셨다. 신약에서 그분의 성육신은 가장 큰 움직임이셨다. 그분의 부활과 승천안에서도 움직이셨다. 사도행전에서는 제한 없이 움직이셨다. 우리가 움직일때 눈이 열리게 된다. 이번에 네덜란드에서 53개의 국가에서 성도들이 10시간에서 15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모였다. 하나님은 21세기에서도 움직이고 계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동참해야 한다. 1960년대에는 생계를 위해서 피난갔지만 이제는 복음을 위해 가야 한다. 타고난 사람은 움직이는 것을 좋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느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1980년대에 선교사의 숫자가 미국 다음으로 한국이 많았다. 누가 아시아에 갈 것인가? 누가 주의 회복을 아시아에 가져 갈 것인가? 동남아 154개의 민족이 살고 있다. 그 곳에 주님의 회복이 높은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날마다 오늘날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동참해야 한다. 세계의 역사는 다섯방면으로 변화 되고 있다. 1.구심점이 서양에서 동양으로바뀌고 있다. 2. 21세기 기독교의 중심이 서양세계에서 아시아 남미주 아프리카로 바뀌고 있다. 3.또한 과학이 발전하고 사람이 살기 좋을 수록 진리에 대한 보편적인 갈망이 일어나고 있다. 4.전통적인 기독교는 철저히 파산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수가 천이백만에서 팔백만으로 해마다 칠천명씩 교회를 떠나고 있다. 5.지금 지구는 지구촌이다. 그러므로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가 드림팀이 되어 몸의 길을 가야 한다. 1985년도이후 미군이 철수한 이후로 베트남에 사천명의 성도들이 있다. 아시아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1. 70억의 세계 인구중 삼분의 이가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2. 아시아지역 복음 전파가 가장 적다. 3. 아사아 지역이 주의 회복이 강력하다. 4. 아시아의 신흥국가가 높은 복음에 열려 있다. 5.아시아가 곡식이 휘어졌으므로 지금이 수확하기에 좋은 때이다. 6. 아시아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나라이다. 그러므로 아시아를 복음화, 진리화, 교회화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가야 하는 가? 1. 기도가 강화되어야 한다.아시아에서의 주님의 움직이심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여년전 러시아를 위해서 기도 한 결과 지금 200여개의 교회가 산출되었다. 2. 복음 확산을 위해 사람이 가야 한다. 몽골에 7개의 교회가 있다. 동역할 성도가 필요하다. 네팔,캄보디아,라오스, 베트남, 스리랑카, 방글라데쉬, 인도, 중동, 파키스탄등에 단기간이라도 가야 한다. 3. 재물이 가야 한다. 주님의 움직이심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한다. 후방에서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후에 하나님의 정하신 길에 대하여 남가주에서 사용한 파워 포인트를 보여주셨다. 어떻게 하나님의 정하신 길을 수행 할 것인가? 어떻게 교회 생활을 실행 할 것인가? 어떻게 집에서 교회 생활을 할 것인가를 교통해 주셨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세가지 중점은 진리를 모든 성도들 안으로, 교회생활을 가정안으로, 복음을 우리의 생활 안으로 가져가야 한다. 교회 생활을 가정에서 하는 것의 고려사항으로 몸이 유기체라면 모든 지체가 살아있어야 한다. 그들이 유능하든 유능하지 않든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집에서 교회 생활은 기도, 돌봄, 나눔, 열매맺음의 생활이지 집회가 아니다. 세포가 건강하면 몸이 건강해 진다. 리 형제님의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세 중점은 1.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2.집회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오라고 하는 것에서 가는 것으로 이것이 유기적인 실행이다. 무엇이 가정을 여는 것인가? 먼저는 모이기 위하여 거실을 열고, 식사하기 위하여 주방을 열고, 같이 살기 위하여 침대방을 여는 것이다. 열린 가정의 기능은 무엇인가? 1. 기도(요16:24) 2. 돌봄(요17:13) 3. 나누어줌(요일1:4) 4. 열매 맺음(요15;11,8) 교회 생활의 80%가 집에서 모여야 한다. 고려해야 할 세가지 1.관념의 전환이 필요 2. 제도를 바꿈 3. 실행이 바뀌어야 한다.
"성경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마4장4절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것만 기준을 한다면 인간은 동물과 별반 다를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먹고 즐기고 사는데에만 치중하려 합니다. 부끄러운 존제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유욕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자기의 것을 만들기 위해 살아 가는지도 모르겟습니다. 사람의 소유에 대한 욕망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것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살이 있는동안 관리를 하는것에 불과 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소유를 교훈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가져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왕국 입니다. 이세상에서의 삶은 잠시 머무는 쉼터일 뿐입니다. 영원한 새예루살렘 과 천년왕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즐거운 하루 되세요. 아멘~!
(마 5:8절)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볼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 주님을 뵐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아무나 볼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오로지 마음이 깨끗한 자 만이 볼수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자에게는 언젠가 심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것이지만, 보이는 자에게는 따뜻한 사랑의 하나님으로 다가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으로, 복락의길,영생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내가 내 아버지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요 20:11-18).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 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 24:13-16).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저희가 강권하여 가로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눅 24:25-32).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요 21:1-24)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로부터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주 예수님에 대해 두 종류의 다른 인식을 가고 있다. 한 종류는 육신 안에서 주 예수를 아는 것이고, 또 한 종류는 성령 안에서 주 예수를 아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니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 5:16)고 말했다. 또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 안에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신다"(갈 1:15-16, 원문 참조)고 말했다. 이 구절들은 오늘 우리가 무엇에 따라 주 예수를 알아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 이제 성경의 구체적인 몇 가지 예를 들어 주 예수에 대한 두 종류의 인식이 무엇인가를 보기로 하자.
막달라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인식
막달라 마리아가 주 예수님의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을 때 "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아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기묘하게도 이제 마리아는 몸을 돌이켜 보았으나 그녀가 여러 해 동안 보고 따라 왔던 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왜 마리아는 전부터 알아온 주님을 이제는 조금도 모르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육신 안에 계셨던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바라고 얻고자 한 그 몸은 이미 이땅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육체 안에서 그분을 알았던 모든 사람은 부활하신 후의 그분을 알지 못한다. 주님은 마리아가 아는 주 예수가 아니라 그녀가 알지 못하는 주 예수가 되셨고, 더이상 역사상의 주 예수가 아니라 영 안에 살아 계신 주 예수가 되셨다. 그분은 육신 안에 살아 계신 주 예수가 아니라 이제는 성령 안에 거하신 주 예수가 되셨다. 마리아가 본래 육신대로 주 예수를 알았으나 이제는 그러한 방법으로 그분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마리아의 귀도 잘 들리지 않고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전에 마리아의 귀는 주님을 알았다. 이제 그녀의 귀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 귀로는 주 예수를 알 수 없다. 이전에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누구인 줄을 알았다. 오늘 그녀의 눈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으로는 주 예수님을 알 수 없다. 오늘 마리아는 변하지 않았지만 나사렛 사람 예수는 변하셨다. 마리아는 여전히 이전의 마리아이지만 오늘 나사렛 사람 예수는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이전의 귀와 눈과 이해력이 오늘에 와서는 쓸모없게 되었다. 이전의 방법으로, 이 땅에 거하며 육신 안에 거하신 주 예수를 아는 것은 가능했지만, 부활하시고 영에 속하며 하늘에 속하신, 성령 안에 거하시는 주 예수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변함은 마리아쪽에 있지 않고 주 예수님에게 있었다. 주 예수께서 변하셨기 때문에 마리아도 변해야만 변화된 주 예수를 알 수 있다. 마리아에게는 새로운 계시가 있어야만 주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질 수 있다.
후에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놀랍다. 주님이 마리아라 부르시니 마리아는 그분인 줄 알았고 계시를 얻게 되었다.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는 주님이 마리아에게 "내가 예수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주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주 예수님이 마리아라고 부를 때 자기 이름을 기억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랍오니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주 예수는 그녀에게 어떠한 일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고, 단지 마리아라고만 부르셨다. 그러나 마리아는 속에서 분명해졌다. 속에서 아는 것이 바로 계시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큰 원칙, 즉 계시는 귀나 눈이나 이해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귀와 눈과 이해력 외의 어떤 기묘한 것에 의해 아는 것임을 보아야 한다. 이 기묘한 앎이 바로 계시이다. 마리아는 주님을 안 후에 즉시 주님의 제자들에게 달려가 말해주었지만 그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의 주님에 대한 인식
주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중 둘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들이 만난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했다. 그 일은 마리아가 말한 주 예수에 관한 일이었다. 그때 주 예수님은 친히 그들을 가까이 하셨다. 그러나 혼미케 된 그들의 눈은 보활하신 주님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육신 안에 계셨던 주 예수님을 아셨지만 부활하신 주 예수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부활을 기묘한 일이라 생각하고 믿지 않았다.
주 예수님은 그들과 대화를 하며 교리를 들려주셨다. 주님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지만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성경의 교리를 깨달았고 감동을 받아 속에서 마음이 불같이 뜨거워졌지만, 여전히 주 예수를 알지 못했다. 이것은 교리와 계시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성경을 알았지만 주님을 몰랐고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알았지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다.
해가 져서 엠마오에 가까웠을 때 그들은 주님께 함께 유하시기를 강권했다. 함께 식사를 할 때 예수님이 떡을 그들에게 나누어 줄 때에야 그들의 눈이 밝아져 비로소 그분인지를 알았다. 이것은 주 예수에 대한 사람의 지식에 두 종류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한 종류의 지식은 성경이 사람에게 보여주는 지식이고 또 한 종류의 지식은 주 예수께서 사람의 눈을 열어줌으로 주어진 지식이다.
어떤 사람은 성경에 익숙하고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있지만 주 예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성경의 교훈을 알 뿐 아니라, 주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하므로 주 예수를 안다. 이 두 가지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기독교에 성경이 있을 뿐 아니라 개인의 계시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성경이 없다면 이 세상에 기독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계시가 없으면 우리 개인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의 한가지 문제는 전수된 지식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한 사람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귀에 전달되고, 한 사람의 머리로 이해한 것이 또 다른 사람의 귀에 전달된다. 전수된 지식이기 때문에 모두가 교리요 교훈뿐이다. 우리는 성경 지식만 있고 주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엠마오로 향한 두 제자는 벌써부터 성경을 알고 있었다. 주님이 길에서 그들과 대화를 갖고 그들에게 성경을 해석해 줄 때 그들의 마음은 뜨거웠지만 여전히 주님을 알지 못했다. 주님에 대한 내적 인식만이 참된 인식이다. 당신은 주님에 대하여 내적 인식을 갖고 있는가?
일곱 제자의 주님에 대한 인식
어느 날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두 아들과 또 다른 제제들이 함께 모였을 때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하니 그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전에 고기를 잡을 줄 알던 사람이 주님을 따르다가 이제 다시 돌아가서 잡으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룻밤 내내 고기를 잡았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더 기묘한 것은, 날이 밝았을 때 주 예수님이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신 줄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 사람의 눈으로는 부활한 주 예수를 알 수 없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는 항상 주 예수와 함께 있었고 나다나엘은 가장 먼저 주님을 알았었다.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었지만 주님은 특별히 그에게 나타나 보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다. 제자들에게는 다른 체험이나 다른 능력이 있어야 주님을 알 수 있다.
주 예수님이 그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제자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물을 던지자 고기가 많아서 들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주님의 품 안에 누워 있었던 요한은 주님이신 줄을 알고 베드로에게 "주시라"고 말했다. 시몬 베드로는 주시라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에 뛰어내렸다.
그들은 좀전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고 주님을 보았지만 주님을 알지 못했다. 이제 홀연히 알게 되었고, 기묘하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앎이 바로 기독교이다. 이러한 앎은 요동치 않는, 내적으로 보고 아는 것이므로 속에 힘이 있다. 이러한 앎은 제드로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었다.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었다. 예수님은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중에 한 사람도 "당신은 누구요?"라고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분이 주님인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 말이 모순된다고 느끼지 않는가? 만일 그들이 그분이 주님인 줄을 알았다면 그분이 누구인가를 물어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감히 묻지 못한 것이다. 감히 묻지 못했다는 것은 모를 뿐 아니라 두려웠기 때문에 감히 묻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중 "감히 당신이 누구냐고 물을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고 또한 "주신 줄 아는고로"라고 말했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밖으로 알지 못하지만 속으로 안다는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지를 제자들이 밖으로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속으로는 그분이 주신 줄을 알았다. 그분의 모양을 보거나 그분의 음성을 들어도 모르고 머리로는 그분이 누구인가를 물어야 하지만, 속으로는 물을 필요없이 그분이 주신 줄을 안 것이다.
당신은 주님에 대해서 모른다로 말하면 정말 모르고, 분명하다고 말하면 아주 분명한 체험이 있는가?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다. 많은 일에 대해서 당신은 미묘하다고 느끼고 어떻게 된 일인지를 모르지만, 또 한면으로는 매우 분명하다. 이것을 계시라고 한다. 계시는 속에서 분명한 것이요, 속에서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에 따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다. 계시에 따라 주님을 아는 자가 복이 있다. 오직 이러한 사람만이 주님 앞에서 능력을 얻을 수 있고, 주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외적인 지식을 내적인 계시에 대치될 수 없다. 우리는 주님에 대하여 내적인 인식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 당신이 속에서 알 때에는 누구도 당신을 요동케 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눈을 열어 주사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하시도록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머리와 귀와 눈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육신 안에 계신 주 예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앎은 우리에게 별 쓸모가 없고 별 힘이 되지 않는다. 참으로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 속에 계시하심으로 우리가 속에서 분명해지고, 속으로 알고, 깨닫고, 그분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기를 간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