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의 생활을 유지하려면 물과 공기와 음식 등과 같은 기본적인 요소들이 필요하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생활에서 기본적인 요소들이 없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영적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 중의 하나가 바로 그리스도의 피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효능과 가치를 분명하게 알지 못한 사람은 아직 정상적인 신앙의 길에 접어들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육신 안에 타락한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 안에는 중요한 세 인격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사람과 사탄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이 세 인격에 관련된 세 방면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첫번째는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는 것이고,
두번째는 우리의 양심에서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며,
세번째는 사탄에게 고소를 당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큰 문제이다. 어떻게 이 문제들을 해결하겠는가?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피?이다!
1.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
죄는 항상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킨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즉시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범죄하기 전에는 항상 하나님을 누리고 그분과 친밀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큰 간격이 생겼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어떤 죄를 범하면 즉시 하나님과 당신 사이에 큰 간격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또한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사람의 죄들을 묵인하시지 않는다. 이사야 59:2은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분의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말한다. 죄를 짓는 것이 심각한 까닭은 그 죄가 하나님 앞에 기록되어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시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지만, 당신의 죄들은 미워하신다. 죄들이 남아있는 한 하나님은 결코 당신과 함께 하실 수 없다.
로마서 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고, 그 결과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우주 가운데 무엇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당신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아무리 많이 울고, 뉘우치고, 행위를 개선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 있는 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당신의 죄들을 제거할 수 없다.
유월절 밤에 하나님은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셨다(출12:13).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기도하고, 뉘우치고, 선한 행위를 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시고, 다만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 기둥에 바르라고 명령하셨다. 그 유월절 어린 양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요1:29). 어린 양이신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죄들이 다 해결되었으며, 하나님은 이제 우리를 넘어가신다.
그러면 당신이 구원받은 후에 생활 속에서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거리를 느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만 그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예수님의 피가 그 죄를 가져갔다는 사실을 믿으면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원문 참조, 요일1:9). 당신이 죄들을 자백할 때 즉시 당신과 하나님 사이의 모든 거리가 사라진다.
여기서 어떤 느낌을 기대하거나, 특별한 느낌이 없다고 해서 염려하지 말라.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당신이 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고 넘어가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 안에서 그 피를 볼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이 그 피로 만족하셨음을 믿고 기쁨과 평강을 누렸다. 또한 일 년에 한 번 있는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속죄소에 피를 뿌리기 위해 혼자 지성소 안으로 들어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그 피가 뿌려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피는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영광의 요구를 만족시켜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하늘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셔서 우리의 모든 죄들을 씻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그분 자신의 피를 뿌린 것을 예표한다(히9:12).
오늘날 누구도 하늘에 올라가서 그 피를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성경의 분명한 말씀을 통하여 그 피가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히12:24).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좋은 느낌을 요구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만족하시는데, 당신의 요구가 하나님의 요구보다 더 높다는 말인가? 다만 이렇게 기도하라. 오 하나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모든 죄들을 씻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그 피로 만족하신다면 저도 만족합니다.
2. 양심에 있는 죄의식
죄를 지은 두번째 결과는 양심 안에 죄의식이라는 무거운 짐이 생기는 것이다. 양심의 죄의식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의 고통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이 양심의 고통이다. 어떤 사람은 술을 먹고 양심의 고통을 달래 보려고 하지만 취하면 취할수록 양심은 더 생생하게 살아난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른다 해도 양심의 고통은 일생 동안 사라지지 않고 당신을 괴롭힐 것이다. 그럴 때 많은 사람들은 선한 행위를 함으로 양심의 가책을 덜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선행을 베풀어도 과거의 죄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양심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양심의 죄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만이 당신의 양심에 있는 죄의식을 씻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양심의 모든 거리낌을 다 씻고 하나님 앞에 평강을 누리게 한다.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가 이미 당신의 모든 죄들을 용서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때 당신의 양심은 평강을 얻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 죄를 범하여 양심에 죄의식을 느낄 때마다 다만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이렇게 기도해 보라. 오 하나님, 내가 오늘 범한 죄를 용서하소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가 범한 죄의 대가를 이미 다 지불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주여, 바로 지금 나는 내 양심으로부터 죄의 얼룩을 씻는 주님의 보혈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피를 의지해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다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은 오늘 무엇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왔는가? 선한 행위와 승리를 근거로 나왔는가? 어제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에 당당하게 주님 앞에 나왔는가? 이런 것들은 결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이다.
성경에서 용서하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면 우리의 모든 죄들을 잊어버리신다. 예레미야 31:34은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문제는 당신이 하나님보다 기억력이 더 좋다는데 있다. 하나님이 이미 잊으신 것을 그분께 다시 상기시키지 말라. 또한 양심의 가책을 충분히 당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기다림이 피의 능력을 더 강하게 하지 않는다. 어디에 있든지, 언제든지, 양심 안에 죄의식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보혈을 요구할 수 있다.
3. 사탄의 고소
그러나 때로는 당신이 자백하고 주님의 피를 적용한 후에도 계속해서 평강이 없고, 속에 나쁜 느낌이 남아 있을 때가 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리스도의 피로 충분치 않은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근원은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에게서 오는 것이다. 사탄이라는 이름은 원래 ?고소자(Accuser)?라는 뜻이다. 사탄은 우리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들을 계속해서 고소한다. 집회에 올 때 주님은 ?일어나서 기도하고 찬양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사탄은 ?네가 무슨 양심으로 일어나 찬양할 수 있단 말이냐? 네가 어제 저녁에 아내에게 한 짓을 벌써 잊었느냐? 네가 무슨 얼굴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속삭인다. 사탄의 고소보다 더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 무력하게 하는 것은 없다. 사탄의 고소하는 속삭임에 넘어가는 즉시 당신은 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느낀다. 또한 사탄은 간교하게도 그의 고소가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당신을 속인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사탄의 고소를 이길 수 있는가? 요한계시록 12:10-11은 "우리 형제들을 고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고소하던 자가 쫓겨 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사탄의 고소를 이기는 유일한 근거는 ?어린 양의 피?이다. 이 피가 이미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다 해결했으며, 주님이 이미 보좌 옆에서 나의 중보자가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입의 간증하는 말로 사탄을 이겨야 한다. 이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죄에서 이미 우리를 깨끗케 하셨고, 이 피가 이미 사탄을 이겼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사탄의 모든 입을 막기에 충분하다! ▣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와 그분의 큰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그분이 이루신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것은 어려운 질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이다.
신약에서만 믿음이라는 단어가 150번 사용된다. 이 단어가 계속해서 반복되고 강조되는 이유는 믿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다른 종교에서는 믿음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나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았고, 공자 또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다른 어떤 성인들의 글에서도 자신을 믿으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함을 150번이나 반복해서 말한다. 믿음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물론 신약 성경에는 다른 것 즉 회개나 침례나 천국이나 행위 등과 같은 것들도 언급하지만 그 빈도는 믿음보다 훨씬 작다.
1. 믿음의 정의
먼저 믿음이란 말의 의미를 살펴보고, 믿음의 정의를 내려보기로 하자. 놀라운 것은 신약에 믿음이 150번 언급되고, 구약에서는 더 많이 언급되지만 믿음의 정의를 내린 구절은 하나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이 말을 무심코 지나치면 믿음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조심스럽게 이 정의에 관해 생각해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서 ?실상?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 적어도 수년 동안을 노력했다. 적어도 십여 종류의 성경을 대조해보고, 또한 헬라어를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인 후에 나는 이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한 후에도 그것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다비역 영어 성경에서 가장 적당한 단어를 찾아냈다. 다비(J. N. Darby)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탁월한 권위자이다. 그는 ?실상?이라는 단어를 ?실체화(substantiating)?라고 번역했다. 실체화란 무엇인가? 실체화란 본질을 깨닫게 하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책상의 본질은 나무이다. 당신은 책상을 볼 때 그것의 본질이 나무임을 깨닫는다. 이 능력이 바로 ?실체화?이다.
2. 오관(五官)의 기능
우리 주위의 세계는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지닌 무수한 물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우리 안에도 많은 형상들과 물질이 있어서 그들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안의 세계와 밖의 세계 사이에는 끊임없는 상호 교류가 있다. 바깥의 세계의 자극이 안의 세계로 전달되고, 안에 있는 세계는 밖에 있는 세계에 반응한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바로 우리의 오관(五官)이다. 이 오관을 통하여 바깥 세계의 자극이 우리 안으로 전달되어 어떤 인식을 낳고, 또한 같은 오관을 통하여 안에 있는 것들을 바깥 세계에 전달한다. 사람에게서 오관을 제거한다면 바깥 세계에 있는 것이 우리 안으로 전달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 주위에는 여러 가지 색깔들이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는 기관인 눈이 없다면 이러한 색깔을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색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색깔을 실체화시키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장님에게 하얀 눈이 참 아름답다고 말하면, 그는 도대체 하얀 것이 무엇이냐고 말할 것이다. 이 세계에는 수많은 색깔들이 있지만 그 색깔들은 오직 눈의 실체화시키는 능력을 통해서만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눈이 없는 사람의 세계에는 아무 색깔도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귀가 없다면 소리는 우리에게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 밖에도 우리의 미각(味覺)과 후각(嗅覺)을 통해 받아들여지는 것들도 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어도 미각과 후각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와 같이 오관의 기능은 밖에 있는 객관적인 것들을 우리 안으로 전달하여 우리의 주관적인 체험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깊이 설명해 보자. 청색(靑色)은 하나의 본질이다. 그것은 언제나 청색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을 볼 때 당신의 눈은 청색을 당신 안으로 전달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실체화이다. 그럴 때 당신은 청색이라는 색깔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우리는 매일매일 수많은 것들을 실체화하고 있다. 지금 당신의 눈은 이 메시지에 인쇄된 글자들을 실체화하고 있다. 지금 하늘에는 구름이 있고, 따스한 햇볕이 감각을 통해 당신 안으로 실체화되고 있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바깥 세계와 접촉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믿음을 가리켜 ?바라는 것들을 실체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3. 믿음의 기능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기 위해 하나님은 이 단어를 선택하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인 것들?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이것들은 당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어떻게 영적인 것들이 당신 안으로 실체화될 수 있는가? 여기서 믿음이 작용한다. 여기 향기로운 꽃이 있다. 당신이 코를 가까이 대면 그 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겠지만, 감기에 걸려서 코가 막혀 있다면 그 향기를 알 수가 없다. 꽃은 분명히 향기를 내고 있지만 당신에게는 그 향기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눈은 보는 기관이요, 귀는 듣는 기관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모든 영적인 것들을 우리 안으로 실체화시키는 기관이다. 믿음이 없다면 모든 영적인 것들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이 된다. 영적인 것들은 실제적인가 아닌가? 그것은 오관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으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들을 짊어지셨고, 오늘날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성령 안에 계신다. 그러나 당신은 이것을 어떻게 실체화시킬 수 있는가? 오관은 이런 면에서는 쓸모가 없다. 영적인 문제들에 관한 한, 우리의 눈은 멀어 있고, 귀는 막혀 있으며,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는 굳어 있으며, 모든 감각 기관들도 마비되어 있다. 오관을 사용한다면 당신은 하나님도 없고, 그리스도도 없으며, 죄 사함이나 그리스도의 구속 같은 것들은 모두 허무한 이론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남 따위는 다 미친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본질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당신에게 실체화하는 능력이 없을 뿐이다.
가령 어떤 장님이 "색깔 같은 것은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경치나 색깔은 모두 환상이요,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당신은 그의 말을 믿겠는가? 그의 주장은 눈 먼 사람의 주장일 뿐이다. 당신은 이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영적인 말들, 곧 죄 사함이나 영생이나 거듭남 같은 것들은 다 공허한 말장난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은 이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적인 우주가 있듯이 영적인 세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영적인 세계를 보고 듣는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다. 이 능력이 바로 믿음이다. 추상적으로 보이는 영적인 세계의 일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실체화될 수 있는가? 믿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당신은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영적인 일들이 당신에게 실제가 될 것이다.
오관은 물질적인 세계에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실체화시키고, 믿음은 영적인 세계에 있는 것들을 우리에게 실체화시킨다. 이것은 오관과는 다른 감각이다. 이제 문제는 당신이 이 믿음을 사용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내 앞에는 탁자가 있다. 이 탁자는 눈을 통해 나에게 실체화된다. 그러나 나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내 눈에 보이는 탁자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이루신 구속(救贖), 나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 그분과 내가 함께 부활한 것 모두가 실제이다. 이 사실들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들을 보아왔다. 이 사실들은 믿음이라는 유일한 감각을 통해 실제가 된다.
4.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임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예비하셨고, 완성하셨다. 그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성령 안에 넣으셨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게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가능하다. 믿음은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실은 오관이 하는 일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귀는 들음으로 소리를 받아들이고, 눈은 봄으로 색깔과 형태를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죄들을 짊어지시려고 피를 흘리셨다. 이것을 믿을 때 당신은 이것을 받아들인다.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우리가 그분과 함께 부활한 것 모두가 믿음을 통해 우리 안으로 받아 들여 진다. 이것이 믿음의 기능이다.
5. 믿음은 동의가 아님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혼동할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믿음은 동의가 아니다. 믿음은 살아 있는 것이지만, 동의는 단지 생각의 차원이다. 지적(知的)인 동의를 통해 영적인 세계의 일들을 인식하려는 것은, 소리를 보려고 하고, 색깔을 맛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동의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과 화합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논박하지 말고, 다만 믿음을 사용하여 그 말씀을 당신 안으로 받아 들이라. 그러면 당신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생명 주는 영이시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신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지 믿음으로 그분을 접촉하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 방안에 전기가 설치되어 있으므로 스위치를 올리기만 하면 불이 들어오듯이, 믿음의 스위치를 올려서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즉시 당신은 구원받는다.
당신은 십여 년 동안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교리와 이론들을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나 그것들을 생각 속에 담았을 뿐이다. 이것은 지적인 동의이지 믿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당신은 타락한 죄인일 뿐이다. 당신은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 ?나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나는 그분이 십자가에서 나의 죄들을 짊어지신 것과, 옛 사람을 못 박으시고, 새 생명을 주신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때, 당신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볼 수 있고, 그분을 접촉할 수 있으며, 당신 안에서 구원이 성취될 것이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단순한 동의가 아니다.
6. 믿음의 능력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참으로 그분을 믿었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당신 안으로 들어온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만 감정의 효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감정의 효과가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리스도의 효능이다.
나는 이전에 정부 기관의 한 고관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이전에 단지 기독교를 인정하는 사람이었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믿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일어난 한 가지 일로 인해 내가 옛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정부의 고관들이 다니는 테니스 클럽의 회관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테니스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클럽에 많은 돈을 맡기고 다니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최근에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어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클럽에 많은 돈과 물건들을 두고 떠나 버렸습니다. 그들이 떠난 후에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돈과 물건들은 자연히 내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러 오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것에 관해 나에게 따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왠지 나는 그 물건들을 가질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주소를 하나하나 찾아서 그 물품들을 다시 돌려보냈습니다. 이런 일은 이전에 한 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나서 나는 분명히 변했습니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접촉한 사람은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접촉할 때, 모든 더럽고 어두운 죄들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그분의 부활 생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믿음에 의해 이 모든 것들은 우리 안에서 실제가 된다.
우리의 생활이 바뀔 뿐 아니라, 이 믿음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분을 위한 복음전파 자와 순교자로 만드는 위대한 능력이 들어 있다. 믿음 안에 있는 이 능력은 저항할 수 없으며 제한할 수도 없다. 그것은 사람으로 기꺼이 주님을 위해 고난받게 하고, 위험을 무릅쓰게 하며, 결국은 순교까지 하게 한다. 이러한 모든 능력은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접촉할 때, 그분의 모든 것이 우리 안으로 전달된다. 할렐루야! 믿음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
우리가 구원받은 뒤에 영적으로 성장하려면 성경을 알아야 한다. 이 천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인식해 왔는데, 그것은 아무도 성경을 모르고서는 주님을 잘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 유산은 한편으로 보이지 않는 성령이고, 또 한편으로 성경이다. 한편으로 성령은 우리 안에 있고,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 밖에 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두 면에 있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안에 성령만 있고 밖에 성경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쉽사리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밖에 성경만 있고 안에 성령을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활력이나 생기가 없이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마치 안의 추진력과 밖의 철로를 필요로 하는 기차와 같다. 이 두 방면-안과 밖의 방면-이 함께 협력할 때 기차는 움직일 수 있고, 심지어 매우 잘 달리게 된다.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성령과 우리 밖에 있는 성경에 대해서도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당신이 안에는 성령으로 채워지고 또한 밖으로 성경을 안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은 생생하고도 안정되며, 또 활기차고도 정확한 사람이라 불리 울 수 있을 것이다.
1. 성경의 기원
1)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임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이다(딤후 3:16). 이것은 성경이 사람의 사고나 사람의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며, 그 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과 말씀을 그분의 영을 통해서 기자의 속으로, 또 기자로부터 호흡해 내신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분의 냄새를 전달해 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가장 큰 즐거움, 곧 우리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호흡이신 말씀을 통해서 매일 그분을 접촉하고 맛볼 수 있다는 것이다.
2)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호흡하신 것이므로 성경의 어떤 말씀도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 없다.「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했다」(벧후1:21)는 말씀은 이중의 의미가 있다. 첫째는 사람이 그 영의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말하도록 인도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었고, 또한 하나님 속으로부터 말한 것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입을 통해서 사람 속으로부터 말씀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사무엘하 23장 2절은「주의 영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다윗이 한 것이었다. 그는 그가 우리에게 한 말이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며, 그의 혀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했다. 성령이 그를 통하여 말할 뿐만 아니라 그의 혀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의 입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나왔던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다.
3) 성경은 신언자들과 아들 안에서 하신 하나님의 말씀임
구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고, 신약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우리 주 예수 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히 1:1-2). 그러므로 구약에서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든지 신약에서 주 예수로 말씀하셨든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4) 성경은 성령의 계시임
「그러나 실재의 영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모든 실재 안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듣는 것만 말씀하시며 장차올 일들을 여러분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요 16:13). 여기서 주님의 말씀도 또한 그 영이 오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이 말하고 기록한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열려진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주님의 말씀은 그분이 승천하신 후에 그분의 제자들에 의해 쓰여진 신약의 모든 책들이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것들의 거룩한 권위가 주님에 의해 인정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2. 성경의 기능
1) 주 예수에 대하여 증거함
성경의 첫 번 째 기능은 주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다(요 5:39). 주 예수님은 성경의 주제이며 내용이고, 성경은 주 예수에 대한 설명이자 표현이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시며, 성경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에는 그 실제로서 산 말씀이신 주 예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교리와 공허한 문자에 불과하다. 산 말씀이신 주 예수님은 그분의 표현으로서 기록된 말씀을 가지셔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비밀스럽고 알기가 어려우며 모호하여 붙잡기 힘든 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안에 분명하고 명확한 설명과 명백한 계시가 있으므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알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2)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함
성경의 기능에는 두 방면이 있다. 한 방면은 주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방면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한편으로 성경은 주 예수를 증거하고,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받고 건축되게 한다. 우리에게 대한 성경의 첫번째 기능은 우리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것이다(딤후 3:15).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방법과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 얻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알게 한다.
3) 사람을 거듭나게 함(벧전1:23)
성경은 사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사신 하나님의 생명을 담고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경의 말씀을 우리 안에 받아들일 때 그것은 생명의 씨와같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심는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고 거듭나게 된다.
4) 믿는 이들의 영적인 젖이 됨(벧전 2:2)
우리가 처음 구원받을 때에는 영적인 일에 대해서 충분하고 분명한 이해가 없다. 그러므로 새로 거듭난 믿는 이들은 순전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는 갓 태어난 아이들처럼 성경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영적 생명은 자랄 수 없고,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로 머물게 된다(고전 3:1-2).
5) 믿는 이들의 생명의 떡이 됨(마 4:4)
마치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영양분을 필요로 하듯이 영적인 생명 또한 영양분을 필요로 한다. 영적 생명의 영양분은 성경의 말씀으로만 공급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생생하고 강하게 되려면 우리는 떡에만 의존할 수 없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 즉 성경의 말씀에 의지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음식으로 받아서 그것을 먹어야 하고(렘 15:16), 심지어 성경의 말씀을 음식보다 더욱 중하게 여겨야 한다(욥 23:12하).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자랄 수 없다.
6) 믿는 이들을 온전케 함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인내와 격려와 소망을 줄 수 있다(롬 15:4). 또한 성경은 우리가 훈계를 받고 깨어 있어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경고가 되는 많은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전 10:11). 그러므로 거듭난 이후로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로 온전케 한다(딤후 3:16-17).
3. 성경의 저자와 기록 장소와 기록 연대
1) 구약
구약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3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들은 적어도 32명이다. 그들 중에는 학자와 정치가와 군인이 있었고, 또한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가 있었으며, 목동과 농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몇몇은 이방인이었다. 구약은 여러 장소에서 기록되었는데, 어떤 것은 시내 산에서 기록되었고, 어떤 것은 광야에서, 어떤 것은 가나안 땅에서, 어떤 것은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어떤 것은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다.
2) 신약
신약은 마태복음으로부터 계시록까지 27권으로 되어 있다.
마태복음은 마태가 기록하였다. 마태는 낮은 신분의 세리였지만 그는 주님의 열 두 사도 중 하나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복음서는 아마도 유대 지방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마가복음은 마가가 기록하였다. 마가는 매우 평범한 제자였다. 그의 복음서는 아마도 로마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하였다. 누가는 이방인 의사였다. 그의 복음서는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은 요한이 기록하였다. 요한은 교육받지 못한 갈릴리 어부였지만 주님의 열 두 사도 중의 하나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복음서 또한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사도행전도 의사 누가가 기록하였다. 이 책도 또한 이방 땅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로마서에서 히브리서까지는 모두 열 네 권의 책인데, 이것들은 모두가 바울에 의하여 쓰여졌다. 그의 모든 책들은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고, 어떤 책들은 로마의 감옥에서 쓰여졌다.
야고보서는 야고보가 기록하였다. 야고보는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였다(갈 1:19). 그는 또한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의 기둥이었지만(갈 2:9), 유대교의 배경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의 서신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베드로 전서와 후서는 베드로가 쓴 것이다. 베드로 역시 교육받지 못한 갈릴리 어부였지만 열 두 사도 중 첫 번 째 사도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두 서신은 모두가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요한의 첫 번 째와 두 번 째와 세 번 째 서신은 요한이 쓴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다. 유다서는 유다가 기록하였다. 그도 또한 주님의 육신의 형제였다(유 1, 갈 1:19). 그의 서신은 유대 지방에서 쓰여졌을 것이다. 계시록도 또한 사도 요한이 기록하였다. 이 책은 아마도 밧모섬이라고 하는 이방 땅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3) 기록 연대
구약의 처음 몇 권-모세 오경-은 거의 기원 전 1500년경에 기록되었으며,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기원 전 400년경에 쓰여졌다. 그러므로 구약 39권의 전부가 완성되기까지는 1100여 년이 소요되었다. 신약의 첫 번 째 책인 마태복음은 서기 37년과 40년 사이에 기록되었으며, 마지막 책인 계시록은 서기 94년과 96년 사이에 쓰여졌다. 그러므로 신약은 50년 이상에 걸쳐 완성되었다. 따라서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가 완성되는 데에는 1500년 내지 1600년간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
4. 성경의 완성 -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인정
1) 구약
A. 모세 오경
구약에 있는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은 오랜 동안 유대인들에 의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책이며 절대적인 거룩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책이라고 인정되어 왔다. 그것은 이 책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계시되었고, 모세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조상들에 의하여 여러 세대 동안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B. 이외의 책들
구약의 다른 책들은 그 가치와 권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받았다. 여러 세대를 거쳐 오는 동안 하나님의 백성 중 어떤 이들 이 모세 오경에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자 하는 영감을 받았다. 그들이 기록한 책들은 상당한 기간의 시험이 지난 후,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이 인정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글에 권위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457년에 율법 학자 에스라는 모세 오경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던 권위 있는 기록들을 모아서 구약의 형태로 편성하였다.(그러나 두 권의 책-느헤미야, 말라기-은 그 당시 기록되지 않았었으므로 제외되었다) 권위 있는 유대의 역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와 이방의 역사학자들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에스라 이후 유대인 중에 대공회라고 불리우는 일단의 율법학자들이 있어서 그들이 편집과 검토를 했는데 이 일은 기원전 400년에 완성되었다. 그들이 확정한 구약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책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원전 400년에 구약의 기록이 완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약이 확정되고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70명의 학자들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했던 기원 전 277년 까지는 구약의 모든 책들의 확립되었음에 틀림없다.
2) 신약
A. 복음서
복음서와 구약은 초기의 교회 집회에서 자주 읽혔다. 그러므로 신약의 책들 가운데서 사복음서는 교회가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B. 이외의 책들
사도들이 지나간 후, 어떤 이들이 자신들을 다른 사도들과 동등하게 생각하여 책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혼돈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초기 교회의 인도자들, 소위 교부들은 사도들의 모든 기록을 모아서 그것들을 복음서와 같은 위치에 두었다. 폴리갑의 순교가 있은 바로 뒤에 모든 교회들은 히브리서와 야고보서와 베드로 후서와 요한 이삼서와 유다서와 계시록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그들의 신약에 대한 관점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일곱 책이 성경에 포함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견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일곱 권의 책이 분명히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쓰여 졌고 거룩한 권위와 가치가 있었으므로 오랜 기간의 시험이 지난 뒤인 주후 397년에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에서 열린 회의에서 각 교회의 인도자들은 이 일곱 권의 책을 신약의 일부로써 인정하였다. 그들은 또한 신약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 같이 27권으로 이루어짐을 선포했다. 그러므로 카르타고 회의가 열었던 주후 397년에 이르러 신구약을 포함하는 완전한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인정되고 확증되었다.
5. 성경의 주제와 중심사상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창조하셨으며, 사탄은 반역하고 손상시켰고, 사람은 타락하고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그리스도는 구속하시고 건축하신다.” 라고 말할 수 있고 성경의 중심사상은 위대한 비밀(엡5:32)인 그리스도와 교회이다.
질문
1) 성경의 기원은 무엇인가?
2) 성경의 기능은 무엇인가?
3) 성경의 주제와 중심사상은 무엇인가?
중심요절: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신 것이며,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의로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분명히 계시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서신 가운데서 두 권의 책 -로마서와 에베소서-을 귀하게 여긴다. 로마서는 죄인, 즉 타락된 인간인 우리의 상태에서 시작되지만, 에베소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끌어 들임으로 시작된다. 로마서 1장에서는 죄인들인 우리의 상태를 볼 수 있으나, 에베소서 1장에서는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는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선한 기쁘심」이라는 구절이 에베소서 1장에서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5, 9절).
하나님에게는 선한 기쁘심이 있다. 이 선한 기쁘심은 그분의 마음의 갈망이다. 영원 전에 하나님은 홀로 계셨다. 우리는 그 영원 전이 어떠했는지를 상상할 수 없으나, 에베소서 1장에서는 우주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에게 마음의 갈망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분에게는 선한 기쁘심이 있었다. 그분이 원하셨던 것은「아들의 자격」(갈4:5)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아들의 명분이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의 명분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예정이 구원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에베소서에 따르면 영원 전에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있었던 첫 번째 생각은 구원이 아니었다. 그분의 첫 번째 생각은 아들의 자격이었다. 하나님은 그분의 피조물이 타락할 것을 미리 아셨다. 타락 때문에 구원의 계획이 있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아들의 자격을 위하여 뜻한바 된 것이다. 하나님의 갈망은 많은 아들들을 낳는 것이었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장 18절과 3장 16절에서의 하나님의 독생자는 부활을 통하여 맏아들이 되었다(행 13:33). 맏아들은 다른 아들들이 뒤따른다는 것을 내포한다. 하나님의 맏아들인 그리스도에게는 수백만의 형제들이 있다. 이 모든 아들들은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제들이다(요 20:17, 히 2:10-12). 하나님의 예정의 목표는 구원도 천당도 아닌 아들의 자격이다(엡 1:5).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은 이 시대에서뿐 아니라 영원 가운데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수많은 아들들을 갖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목적 - 그분의 계획(엡1:9)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에 근거하여 그분에게는 목적이 있었다(엡 3:11).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기쁘심에 따라 만들어졌다. 에베소서 1장 9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세우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분이 갈망하신 것에 따라 계획을 세우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선한 기쁘심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셨다.
3. 하나님의 경륜 - 그분의 행정적인 배열(딤전 1:4)
경륜(Economy)이란 헬라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영어화된 단어이다. 그것은 가정의 법, 또는 가정의 행정을 뜻한다. 디모데 전서 1장 4절에서는 이 단어가 배열, 계획, 행정, 경영으로 쓰였다. 구약에서 바로의 집에는 어떤 집안 관리와 배열이 필요했으며 요셉은 그 경영을 담당하는 위치에 앉게 되었다. 그가 한 일은 주로 풍성한 식량을 배고픈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었으며(창 41:33-41, 54-57), 나누어 주는 그것이 분배였다. 바로의 집에서의 경영은 풍성을 백성들에게 분배하는 경륜이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주로 바울이 사용했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누가복음 16장 2절부터 4절에서 주님이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언급하실 때 사용되었다. 요셉은 바로의 청지기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의 임무는 청지기 직분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의 청지기 직분은 바로가 소유한 풍성한 식량을 분배하는 것이었다.
1) 그분의 경륜
이「경륜」이라는 단어는 주로 어떤 사람의 풍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계획, 행정, 경영을 의미한다(엡 3:2, 1:9, 3:9). 바울은 하나님에게 그분의 풍성으로 공급해야 할 대가족이 있다고 생각했다. 에베소서 3장 8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분배하도록 위임하셨다고 말한다. 이 풍성은 하나님의 가정 안에 있다. 측량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분배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도들(베드로, 요한, 야고보, 바울)을 청지기로 임명하셨다. 분배란 하나님의 가정 관리임을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에게는 대가족이 있다. 이 가정에서 그분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가족들에게 분배하는 어떤 행정과 계획과 경영이 필요하다.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분은 그분 자신을 그들 안에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분의 아들들을 만드신다.
2) 그분의 분배함
에베소서 1장 10절과 3장 9절에서 오이코노미아(oikonomia)라는 단어는 가정 관리에 대해 쓰였는데, 그것은 그분 자신을 그분의 택한 백성들 안에 분배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에베소서 3장 2절, 골로새서 1장 25절, 고린도 전서 9장 17절에서는 같은 단어가 바울의 청지기 직분을 언급한다. 청지기 직분이라는 단어는 분배함의 의미로 쓰였다. 청지기라는 단어는 베드로 전서 4장 10절에서 사용되었는데, 그곳에서는 우리 모두가 선한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분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풍성한 각양 은혜는 그것을 분배하는 많은 청지기를 필요로 한다. 이 분배하는 일이 그들의 청지기 직분이다. 오늘날 우리의 청지기 직분은 바울의 것과 똑같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요, 그분의 계획이요, 그분의 행정이다.
4.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엡 1:4,5)
하나님에게는 선한 기쁘심이 있었고,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따라 그분은 계획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선택하셨는데, 그것은 세상의 기초를 세우기 전의 일이었다(엡 1:4, 벧전 1:1-2). 우리는 그분의 마음의 갈망이요, 그분의 선한 기쁘심이다. 하나님의 기쁘심은 달이나 해나 하늘이나 땅에 있지 않다. 그분을 만족시키는 것은 그분의 택한 백성이다. 우리는 그분의 선한 기쁘심이요, 그분의 계획은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선택하신 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예정하셨다(엡 1:5, 롬 8:30). 다비(Darby)의 새 번역 성서에는 에베소서 1장 5절에 있는 이「예정했다」는 단어를「미리 점찍어 놓았다」로 번역했다.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에 여러분을 점찍어 놓았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을 벗어날 수 없다.
5. 하나님의 창조(창1:26)
하나님의 선한 기쁘심, 그분의 계획(배열, 행정, 경륜), 그분의 선택, 그분의 예정 후에 하나님은 창조를 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기록은 매우 간결하다. 겨우 두 구절뿐이다. 창세기 1장 26절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고, 다음 구절은 모세의 기록이다. 이 두 구절 속에 세 가지 중요한 요점이 들어 있다.
1) 거룩한 삼일성
엘로힘(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복수이며, 하나님은 그분의 대화에서「우리?와「우리의」라는 대명사를 사용한다.「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나님을 가리키는 그 대명사는 복수이다. 이것이 거룩한 삼일성을 내포함을 깨닫기는 쉽다.
첫째로 거룩한 삼일성은 사람의 창조를 생각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었다. 다른 것들을 창조하는 데 있어서는 그러한 대화가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창조에 있어서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의 초점이었다.
2)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된 사람의 창조
두 번째로,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졌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는「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한다. 형상은 내면적인 것을 의미한다. 모양은 밖의 표현을 말한다. 여러분은 골로새서 1장 15절을 언급할지 모른다. 그곳에서는 그리스도를「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밖의 모양을 가질 수 있는가? 그것은 비밀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서 창조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요 비밀이다. 심지어 타락된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기묘하다(시 139:14). 우리는 기묘한 존재이다.
3) 하나님의 표현을 위하여
세 째로,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형상과 모양은 둘 다 표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그분은 거룩한 생명을 사람 안에 넣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실 때까지는 거룩한 생명이 창조된 사람 속에 부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그분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다(요 3:16).
4) 세 부분으로 된 사람
하나님은 어느 날 그분이 사람 속에 들어가시고 사람은 그분 자신을 받게 되리라는 의도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로마서 9장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이 하나의 그릇임을 계시한다. 컵이 물을 담는 그릇인 것처럼,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어졌다. 창세기 2장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만들었는지를 말해준다. 먼저 그분은 흙으로 사람의 몸을 지으셨다. 그 후에 그분은 흙으로 된 이 몸의 코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고, 사람은 산 혼이 되었다. 여기 이 한 구절에 몸과 혼과 생명의 호흡이 있다. 창세기 2장 7절에 나오는 호흡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가 잠언 20장 27절에서는「영」으로 번역된다. 그곳에서는「사람의 영은 여호와의 등이라」(축어역)고 말한다. 이것은 아담 속으로 들어간 그 생명의 호흡이 사람의 영이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만드는데 두 가지 재료가 사용되었다. 즉 흙과 생명의 호흡이다. 흙은 몸이 되었고, 생명의 호흡은 영이 되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졌을 때 한 가지 부산물이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이 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에서 사람이 세 부분, 즉 영과 혼과 몸으로 되었다고 말한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자기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담을 수 있게 한 것이다.
5) 중요한 부분 - 사람의 영
비록 사람이 창조될 때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은 없었지만, 하나님은 영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사람 속에는 영이 있고」(욥 32:8) 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음식을 받도록 입과 위를 가진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받을 수 있는 영을 가진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을 받는 우리의 수신기는 우리의 영이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주 예수님은「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실제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영만이 영을 예배할 수 있다. 하나님 자신이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로 그분을 예배할 수 있게 하는 분명한 목적을 위하여 영을 가진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분께 예배하는 것은 그분을 접촉하고 그분과 대화하고 그분을 받는 것을 포함한다. 그분은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옴으로써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는, 그 영이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 안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고린도 전서 6장 17절에서는「주와 합하는 자는 한영」이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과 사람의 영이 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을 때 이 거룩한 하나님의 영은 우리 영 안에 들어오신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들의 자격이고, 아들의 자격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함으로 이루어진다. 이 분배함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요한복음 3장 6절에서는「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그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한다. 여기 다시 두 영이 있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 영 안에서 그 영이신 하나님으로 거듭나는 것이지 우리 부모로부터 거듭나는 것이 아니다. 스가랴 12장 1절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세 가지 중요한 것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영이라고 말한다. 거기에서는 여호와를「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사람의 영을 지으신 자」라고 말한다. 하늘은 땅을 위해 있고, 땅은 사람을 위해 있고,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있다. 우리는 그분의 형상을 따라 그분의 모양대로 그분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우리에게는 그분을 받을 수 있는 영이 있다. 거룩한 영이신 그분은 우리 사람의 영 안에 들어와, 우리를 그분의 표현이 되도록 그분의 아들들로 만드셨다. 이것이 그분의 계획이다. (출처: 성경의 기본계시)
우리 하나님은 목적과 뜻과 계획이 있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창조하셨다. 계시록 4장 11절은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주의 뜻으로 인하여 만물이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라고 말한다. 헬라어의 ?인하여?라는 말은 여기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만물은 우연히, 뜻밖에, 혹은 어쩌다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그분은 만물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셨다.
1.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
1) 목적
골로새서 1장 16절부터 18절까지는 다음과 같다.????만물이 다 그를 통하여 그에게로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전적으로 그의 아들을 위한 것인데, 이는 그의 아들이 만물 안에서 높이 올려지고 영광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신격의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안에 육체로 거하기 때문에 아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체현이다(골2:9). 그러므로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 하나님이 또한 나타나신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아들이 영광을 얻고 그분 자신이 표현되는 것이다.
2) 방법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하시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라(bara)?인데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무언가 있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는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존재하게 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은 창조를 이루셨는가? 창조의 수단은 무엇이었는가? 히브리서 11장 3절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장 3절 또한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지어진 바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다(시 33:9).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없는데서 그의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또 한면으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히브리서1장 2절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우주를 만드셨다고 말한다. 골로새서 1장 15절과 16절은 또한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지음을 받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며(요 1:1, 14), 이 둘은 하나이다.
3) 과정
욥기 38장 4절 부터 7절까지는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을 계시한다. 하나님은 먼저 하늘들과 그 안에 있는 만물과 그 안에 거하는 천사들을 창조하셨다. 살아 있는 생물들이 거하는 땅은 두번째로 창조되었다. 욥기 38장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에 별들과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미 그곳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 구절은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땅이 줄로 측량되었으며 모든 것이 질서 있고 뛰어나게 아름다왔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모든 하나님의 아들들이 기쁨으로 소리를 발하였었다. 그 때에는 죄의 그늘이나 혼돈의 자취를 우주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은 모두가 밝고 아름다왔었다. 이것은 창조자가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가를 보여 준다.
4)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창조
시편 19편 1절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말한다. 비록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은 피조물을 통해서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깨달을 수 있고 따라서 핑계할 수 없다(롬 1:20). 그러므로 창조를 주목함으로써 우리는 창조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하나님의 회복과 전진된 창조
창세기 1장2절 하반부는 1절에서 완성된 원초의 창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회복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손상입은 것을 회복하려 하셨고 무엇인가 전진된 창조를 하려고 하셨다. 2절은 ????그리고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게 되었고????(히브리어 참조)라고 시작한다. ?그리고?는 두 가지 사물을 연결시키는 접속사이다. 앞의 것이 지나가고 두 번째 것이 온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서 원래에 하나님 의해 창조된 아름다운 우주가 파괴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2절 하반부부터 2장 25절까지는 하나님께서 파괴된 우주를 회복하시는 것과 그분의 전진된 창조를 보여준다. 창세기 2장 4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들을 만드시던 때에 하늘들과 땅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와 하나님의 회복을 모두 보여 준다. 이 구절의 뒷부분은 하늘들과 땅이 창조된 때를 언급하고 있다. 하늘들이 먼저 언급되고 땅이 나중에 언급된 것과 여기서 사용된 동사가 ?창조되었다?임을 주의하라. 이 구절의 앞부분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들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땅이 하늘들보다 먼저 언급되었으며, 사용된 동사도 ?창조되었다?가 아닌 ?만들어졌다?이다. 우리가 이미 지적한 바와같이 창조한다는 것은 무(無)에서 유(有)을 산출하는 것이며, 만든다는 것은 존재하는 물질을 가지고서 무언가 다른 것을 산출하기 위하여 작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뒷부분은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를 가리키며, 앞부분은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들을 회복하심을 언급한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나님은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3절부터 1장 끝까지에서 하나님은 땅과 하늘들을 만드셨다. 9절과 10절을 읽어 보면 하나님께서 세 째 날에 땅을 회복하셨음을 보게 된다. 땅은 이미 존재하여 있었고 물 밑에 잠겨 있었으므로 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 째 날에 땅을 회복하신 것이다. 또한 네 째 날에 하나님은 궁창, 즉 하늘들을 회복하셨다. 그러므로 회복에 있어서는 하늘들과 땅이 아니라, 먼저가 땅이요 나중이 하늘들이었다.
1) 생명의 순서에 따른 하나님의 전진된 창조
하나님의 전진된 창조에 있어서, 그분은 생명의 단계에 따라 만물을 창조하셨다. 먼저 그분은 생명 없는 것들을 창조하셨고, 나중에 생명체를 창조하셨다. 생명체를 창조하실 때에도 그분은 가장 낮은 생명부터 시작하여 한 단계 한 단계씩 전진해서 가장 높은 생명에까지 이르렀다. 먼저 그분은 감각 없는 생물, 즉 나무와 풀과 꽃과 같은 식물의 생명을 창조하셨다. 이것들은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은 지각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은 가장 낮은 것이다. 그리고나서 하나님은 동물의 생명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또한 물고기나 새처럼 알을 낳는 동물의 생명과 같은 가장 낮은 생명부터 시작하셨다. 이 동물들의 생명에는 지각이 있지만 그다지 높지는 않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땅 위의 가축과 짐승처럼 새끼를 배는 동물들을 창조하셨다. 새끼를 배는 동물들은 알을 낳는 동물들보다 더 높은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들은 지각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지각은 더욱 높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장 높은 생명이다. 사람은 또한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은 지각을 소유하고 있다.
2) 과정
창세기 1장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회복의 역사와 전진된 창조를 이루시는 데는 엿새가 소요되었음을 보여 준다. 첫날에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운행하셨다. 그 위에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빛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둘째 날에 하나님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셨다. 이것은 그분이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을 분리하셨음을 의미한다. 세째 날에 땅이 물에서부터 분리되었다. 하나님은 물 위에 역사하사 물을 가두고 제한시켜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 이것은 예레미야 5장 22절에서 말하듯이 마치 하나님께서 물의 경계선을 그으신 것과 같다. 마른 땅이 드러난 후에 하나님은 더욱 전진하여 식물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네째 날에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 같은 발광체를 회복 하시고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셨으며, 또한 빛과 어둠을 나누셨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은 각기 종류대로 물속에 생명체와 공중에 새들을 창조하셨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가축과 기는 것들과 짐승들과 같은 땅위의 생물들을 각기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사 만물의 중심이 되게 하셨다.
3.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의 생명
1)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된 사람
사람은 가장 높은 창조된 생명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졌다(창 1:26-27). 사람 외에는 다른 어떤 피조물도 형상과 모양에 있어서 하나님을 닮지 않았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 중 가장 높으며,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사람은 그분의 계획을 위하여 예비된 가장 좋은 그릇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안에서 사람이 그분의 생명을 소유해서 그의 아들의 형제들이 되도록 예정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 시에 사람으로 그분의 형상과 모양을 갖게 하셨다. 형상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같은 속 부분을 언급한다. 무형(無形)의 사람을 이루고 있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사고와 의견과 사랑과 같은 인간의 기능은 하나님을 닮았다. 하나님의 형상은 또한 그분의 속성의 특성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그분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 안에서 그분의 미덕의 속성을 따라 창조함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미덕들을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게 하셨다. 그러나 사람이 소유한 것은 다만 형상일 뿐 실제는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과 내용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거룩함과 의로움이 이러한 사람의 미덕들을 채우고 풍성하게 하여 실제가 되는 것이다. 모양은 유형(有形)의 사람을 이루고 있는 바깥의 몸을 가리킨다. 사람의 바깥 몸은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양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성육신되기 이전에도 그분은 종종 구약에서 사람의 형태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창18:2,16-17, 삿13:9-10, 17-19).
A.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표현하게 함
하나님의 회복과 전진된 창조의 주된 목적은 사람, 즉 단체의 사람을 얻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창 1:26-27).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은 단체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류를 한 사람 아담 안에서 단체적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고, 아담은 단체적으로 집합적인 사람이었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 우리 모두가 창조되었다.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단체적인 사람을 자신의 형상 안에서 자신의 모양을 따라 지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게 하셨다.
B.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게 함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형상 안에서 우리의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통치하게 하자????(원문참조)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단체적인 사람을 창조해서 자신의 통치를 수행하게 하셨다(창 1:26-28). 통치하다는 단어는 단지 권위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 통치는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영역으로서의 왕국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a. 하나님의 대적을 처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목적의 첫 번 째 방면은 그분의 대적, 즉 기는 것으로 예표된 사탄을 처리하는 것이다(창 1:26). 성경에서 기는 것은 귀신과 마귀와 사탄 같은 것이다. 성경은 사탄을 예표하기 위하여 뱀을 사용한다(창 3:1). 계시록 12장 9절에서 사탄은 ?옛뱀?이라고 불리운다.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에서 그분은 오직 한 목적, 즉 자신을 표현하는 목적만을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사탄의 배역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또 다른 목적, 즉 대적을 처리하는 목적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해서 자신을 표현하게 하셨고,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사 그분의 대적을 처리하게 하셨다.
b.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의 두 번 째 방면은 땅을 회복하는 것이다(창 1:26-28). 사람은 땅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정복하게 되었다. 정복한다는 것은 이미 그곳에 대적이 있으며, 전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땅을 정복하고 회복해야 한다.
c. 하나님의 권위를 가져오기 위하여
사람에게 통치권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의 세 번 째 방면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져오는 것이며 땅 위에 하나님의 권위를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땅 위에 나타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수행해야 한다.
2) 세부분 - 영, 혼, 몸 - 으로 창조된 사람
하나님은 사람을 세부분-영, 혼, 몸-으로 창조하셨다. 처음에 하나님은 땅을 흙으로 사람의 몸을 지으셨다. 그리고서 하나님은 사람의 몸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으셨는데, 이것이 사람 안에 영이 되었다. 생명의 호흡인 영이 사람의 몸 안에 들어왔을 때, 혼이 생성되었다. 그러므로 외적으로 사람은 보이는 몸이 있고, 내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이 있으며, 그 둘 사이에 혼이 있다. 몸은 밖에서 물질적인 세계의 사물을 접촉한다. 영은 안에서 영적인 세계의 일들을 접촉한다. 중간에 있는 혼은 몸과 영 사이에서 정신적인 세계의 일들을 접촉한다. 영은 우리 전존재 중 가장 깊은 부분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수신기이며, 하나님과의 모든 영적인 일들을 접촉하는 기관이다(요 4:24, 롬 1:9).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느낌과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느낌과 깨달음, 그리고 우리 양심의 비난이나 승인과 같은 것들 이 영의 기능이다. 몸의 느낌으로 우리가 물질적인 세계를 실제화하듯이 우리는 다만 영으로서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을 실제화할 수 있다. 사람의 영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지으신 것이다(슥 12:1, 욥 32:8). 우주 안에서 동일하게 중요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그것은 하늘들과 땅과 사람의 영이다. 하늘들은 땅을 위하고, 땅은 사람을 위하고, 사람 속에 있는 영은 하나님을 위한다. 하나님은 땅을 위하여 하늘을 창조하셨다. 하늘이 없다면 땅은 아무것도 자라게 할 수 없다. 땅은 사람의 생존을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을 담도록 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이며 사람의 중심은 그의 영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만일 사람안에 영이 없다면 사람은 빈 껍데기일 것이다. 이 땅 위에 사람이 없다면 땅은 공허할 것이며 사람에게 있어서 하늘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땅을 섬기고, 땅은 사람을 섬기며, 사람은 하나님을 담기 위하여 영을 가지고 있다.
3) 선하고 올바르게 창조된 사람
전도서 7장 29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올바르게 지으셨다고 말한다. 사람이 처음 하나님의 창조의 손으로부터 나왔을 때, 그는 비뚤어지거나 악하거나 더럽혀지지 않았었으며, 올바르고 선하고 순수했었다. 그 당시에 사람은 죄와 부패함과 흠이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심히 좋게? 생각하셨다(창 1:31).
4) 인간의 생명은 단지 창조된 생명임
비록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지만 그의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과는 달리 창조된 생명일 뿐이었다. 사람이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도 또한 창조된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영원하지만 사람의 생명은 일시적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거룩하고 영광스럽지만 사람의 생명은 기껏해야 순수하고 선할 뿐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은 없다. 비록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을 가지고 있지만 사람의 영에는 하나님의 생명도 하나님의 본성도 없다. 사람은 다만 하나님의 창조물일 뿐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생명을 소유하지는 않았다.
4. 하나님이 사람을 생명나무 앞에 두 사 사람이 하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게 하심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분은 거룩한 생명을 사람 안에 넣지 않으셨다. 대신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사람이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선택하여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람을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 생명나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나타내고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사망의 근원인 사탄을 상징한다. 이 두 나무는 우주 안에 있는 두 근원을 상징한다. 많은 사람들은 만일 하나님께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를 생명나무 옆에 두지 않으셨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그분은 영광의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분이다. 그분은 사람이 자신을 선택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보다 그분은 사람이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셨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두 나무 앞에 두신 것은 이러한 원칙에 따른 것이며,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을 선택하여 하나님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원래의 창조가 창세기 1장 1절에 언급된 것을 보았다.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우리는 또한 1절과 2절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한 것도 보았다. 즉 하나님의 원초의 창조는 파괴되고,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게 되었다. 이것은 사탄의 반역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땅 위에 내린 심판의 결과였다. 이제 사탄의 기원과 반역을 보자.
1. 사탄의 기원
사탄은 대적자를 의미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왕국 밖의 하나님의 원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부터의 하나님의 대적이다. 원수(enemy)는 하나님의 왕국 밖에 있는 적을 가리키지만 대적(adversary)은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부터의 적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었던 사탄은 외부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이다.
1) 원래 가장 영화로운 천사장이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완전한 그룹이었음
그 사탄은 땅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사였다. 욥기에서는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았을 때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이 기쁨으로 소리쳤다고 말하고 있다(욥 38:4-7). 이것은 하나님께서 땅을 창조하기 전에 천사들을 창조하셨음을 증거한다. 에스겔서 28장에서 우리는 사탄이 천사들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모든 천사들의 머리인 가장 높은 천사장임을 보게 된다.
에스겔서 28장 12절 부터 14절 까지는 다음과 같다. “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감람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이 성경 구절들은 사탄이 반역하고 타락하기 전, 우주에서의 그의 위치를 설명해 준다. 13절은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라고 말한다. 문맥에 따르면 이것은 아담이 있었던 에덴이 아니었다. 이 에덴은 땅 위에 있던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산에 있던 것이었다. “각종 보석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그는 보석으로 덮여 있었다.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고대에서 소고와 비파와 같은 악기들은 왕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탄이 왕이었고 우주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주 예수님조차도 그를 ‘이 세상의 주관자’라고 부르셨던 이유이다(요 12:31). 사도 역시 그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불렀다(엡 2:2). 누가복음 4장 5절과 6절은 이것을 확증한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주님이 이것을 부인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은 언제 이 모든 것을 사탄에게 주셨는가? 이것은 분명히 아담 전 시대인 아담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하나님은 사탄을 우주의 머리로 삼으셨고,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손아래 두셨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의 주관자가 되었다. 그의 위치와 지위는 너무도 높은 것이었기 때문에 천사장인 미가엘까지도 그에 대해 훼방하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하였다(유 1:9). 미가엘은 천사장들 가운데 하나였다(단 10:13). 그가 사탄을 감히 꾸짖지 못했던 것은 사탄의 지위가 그의 지위보다도 더욱 높은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2) 원래는 하나님이 창조한 빛나는 천사였음
이사야서 14장 12절은 사탄이 ‘계명성[라틴어 루시퍼(Lucifer)]'이었다고 말한다. 계명성이 별들 가운데 인도적인 별이듯이 사탄은 모든 천사들 중 으뜸이었음에 틀림없다. ‘아침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그가 일찌기 우주의 아침부터 존재하였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사탄은 우주의 가장 일찍부터 계명성처럼 빛나는, 천사들의 으뜸이었다. 사탄의 기원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룹이었고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했다. 그는 왕권을 가졌을뿐만 아니라 제사장 직분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에게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의 위치와 직위를 박탈당했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여 그분의 제사장과 왕들이 되게 하시며, 사탄의 위치와 직위를 차지하게 함으로써 사탄을 부끄럽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
2. 사탄의 반역
에스겔서 28장 15절은 사탄이 지음을 받던 날부터 그의 길이 완전하였다고 말한다. 물론 하나님은 악한 사탄을 창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선하고 완전한 천사장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어느 날 이 천사장, 즉 기름부음받은 이 그룹은 하나님께 반역을 일으켰다.
1) 반역의 원인
사탄은 그의 마음속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 반역했다(겔 28:17).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고 교만하여졌다. 그는 자신의 영화로움을 바라보았고, 이 영화로움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죄를 범하고 불의한 행동을 하는 일에 사용함으로써 그의 지혜를 더럽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것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은 항상 우리를 교만에 빠지게 한다. 교만은 사탄의 반역의 원인이었다.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모든 천연적인 미덕들과 영적 은사들이 마귀에 의해서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일에 사용될 수 있다. 사도 바울조차도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고후 12:7). 교만한 마귀는 여전히 땅 위를 다니면서 그가 삼킬 수 있는 교만한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주 예수님은 이 점에 있어서 좋은 본이셨다. 사탄은 자신을 높였지만 주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다”(빌 2:8). 그러므로 주 예수님은 사탄을 정복하셨고 사탄은 주님과 상관이 없다(요 14:30).
2) 반역의 목적
사탄의 반역의 목적은 자신을 높여서 하나님과 동등해지려는 것이었다. 이사야서 14장 13절과 14절에서는 사탄이 다섯번이나 “내가.. 하리라”.고 말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내가 하늘에 올라.. 내가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내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내가)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사탄은 하나님과 동등해지기를 원했었다. 그것이 그가 하나님을 반역한 목적이었다.
3) 반역의 과정
사탄은 하나님의 권위를 전복하려는 악한 의도로 하나님께 반역을 시작했다(겔 28:15-18, 사4:13-14). 그가 반역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휘하에 있었던 천사의 많은 무리가 함께 반역했다. 계시록 12장 4절과 9절에서 우리는 하늘의 별들의 삼분의 일, 즉 천사들의 삼분의 일이 그를 따랐음을 보게 된다(계시록에서 별들은 천사들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서 주 예수님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언급하셨다. 에베소서 2장 2절에서는 사탄을 ‘공중의 권세 잡은 주관자’라고 표현하며, 에베소서 6장 12절은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에 관하여 말한다. 이 정사와 권세는 사탄의 휘하에서 아담 이전의 우주를 지배했던 천사들이다. 사탄이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대부분의 그의 천사들이 그의 반역을 추종하여 타락한 천사들, 즉 악한 영들이 되었다. 오늘날 우주 가운데 선한 천사들과 악한 천사들인 두 종류의 천사들이 있다. 선한 천사들은 하나님 편이며, 악한 천사들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사탄과 연합하였다.
그 때 땅 위에 있던 생물들도 사탄의 반역에 동참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물로 그들을 심판하셨고, 그들은 땅 위의 귀신들이 되었다. 그의 거처는 물속이다. 사람의 몸은 또한 그들의 일시적인 거처이다. 마태복음 12장 43절은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라고 말한다. 이것은 귀신의 거처가 물속에 있음을 보여 준다. 만일 그들이 물을 찾지 못하면 그들은 사람의 육신의 몸을 일시적인 처소로 삼는다(마 12:44, 45). 귀신들은 어째서 물속이나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하는가? 이 문제를 면밀히 연구한 뒤에 펨버는 원초의 창조가 있은 후 얼마 있다가 사탄과 그의 천사들이 반역을 일으켰다고 추측하였다. 또한 펨버는 아담 이전의 시대에 땅 위에 생물이 존재했었고 그들도 함께 하나님께 대항하여 사탄의 반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성경의 기록으로부터 추측해 냈다.
그러므로 사탄과 그의 타락한 천사들과 이 생물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 이들은 몸을 잃어버리고 몸이 없는 영들이 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귀신들은 육신의 몸 안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물은 귀신들이 살아야 하는 깊음이 되었다. 펨버는 이 깊은 물 아래에 소위 무저갱이 있다는 것도 입증하였다. 깊은 물은 귀신의 거처이다(마 8:23-27, 28-32). 아담 이전의 시대에 악한 천사들과 생물들은 사탄을 따라 하나님께 대해 반역하여 사탄의 왕국을 이루었다. 그 영역은 땅과 공중을 포함하는 이른 바 세상이다. 오늘날 사탄의 왕국 안에서 공중에는 악한 천사들이 있고, 물속에는 귀신들이 있고, 땅 위에는 타락한 인간들이 있다.
3. 반역의 결과
1) 사탄이 하나님에 의해 심판받음
사탄의 반역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왔다.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어떠한 반역도 용납하실 수 없었다. 사탄이 반역한 뒤 즉시 하나님은 그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셨다(겔 28:15-18, 사14:15).
2) 하늘들과 땅이 심판받음
하늘들과 땅도 분명히 사탄의 반역으로 인하여 더럽혀졌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네가 네 모든 성소를 더럽혔음이여!”라고 꾸짖으셨다. 그러므로 하늘들과 땅도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욥기 9장 5절부터 7절 까지는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시고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이러한 사건의 기록을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은 아담 세상 이전에,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하늘들과 땅을 심판하실 때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하늘들은 빛을 내지 못했으며, 땅은 흑암으로 덮였다. 하나님은 땅을 물에 잠기게 하심으로 심판하셨다. 그래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고” 깊은 물 아래 잠기어 어둠으로 잠기게 되었다(창 1:2).
이사야서 45장 18절은 “하나님께서 땅을 혼돈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미국 표준역 참조). 욥기 38장 4절부터 7절까지는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그 도량을 정하시며”,“그 위에 준승을 띄우시며”, 그때에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다.” 고 말한다.
이것은 그분이 땅을 질서 있게 창조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새벽별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열광하며 노래하였고, 모든 천사들이 그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기쁨으로 소리를 발하였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절이 아닌 1장 1절에서 발생하였음에 틀림없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다면 어떻게 새벽별들이 노래하며 천사들이 기쁨으로 소리를 발할 수 있었겠는가?. ‘혼돈’과 ‘공허’라는 두 단어가 구약에서 함께 사용될 때마다 그것들은 항상 심판의 결과를 가리킨다(렘4:23,사 34:8-110).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은 무엇이든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다. 깊음 위에 있었던 흑암은 또한 그 때의 우주가 심판받았음을 보여 주는 표시이다. 왜냐하면 흑암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출 10:21-22, 계 16:10).
3) 반역한 천사들과 귀신들이 심판받음
하나님께서 사탄과 그 아래 있던 우주를 심판하셨을 때, 그를 따랐던 천사들과 그 당시에 사탄의 반역에 가담했던 땅 위의 생물들을 모두 심판하셨음에 틀림없다. 심판을 받은 후, 반역한 천사들은 공중의 악한 영의 세력이 되었고(엡 6:12), 생물들은 형체 없는 영들, 즉 귀신들이 되어 심판받은 물 속에서 살게 되었다.
4.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집행
비록 사탄과 반역한 천사들과 귀신들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지만 그 심판이 아직 집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늘날 여전히 활동하며 일하고 있다. 오늘날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참소하기 위하여 여전히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욥 1:6-12, 2:1-7, 계 17,12:10). 그는 여전히 땅 위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으며”(벧전 5:8), 여전히 사람들의 생각을 혼미하게 하는 일을 하며(고후 4:4),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사람들을 속인다(고후 11:14). 우리가 그의 궤계를 몰라서는 안 되며(고후 2:11),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해야 한다(엡 4:27).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해야 한다(벧전 5:8-9).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필요가 있다(엡 6:11-17).
사탄이 반역한 뒤에 하나님은 즉각 그분의 심판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주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육신으로 나타나셨다(요일3:8).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집행이었다. 주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원수의 권세를 능가하는 권위를 주셨다(눅 10:19). 제자들이 귀신들을 쫓아낼 때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졌다(눅 10:17-20).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주님은 마귀를 멸하셨다(히 2:14). 그분은 옛뱀의 머리를 깨뜨리셨다. 이제 주님의 몸인 우리는 이 집행을 계속하여 뱀의 꼬리를 멸해야 한다. 교회의 심판을 집행하는 역사를 통해서 마귀는 땅으로 던져질 것이고, 그의 천사들은 그와 함께 쫓겨날 것이다(계 12:9). 나중에 그는 묶여서 무저갱에 던져질 것이다(계 20:2-3). 결국 그는 ‘불못에 던져질’ 것이다(계 20:10). 그때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집행은 완성될 것이다. <진리공과 1단계 1권>
만일 뱀이 와서 사람을 속이거나 유혹하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타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혹하는 뱀은 사탄의 화신(化身)이다. 사탄이 유혹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는 의문을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다.(창3:1,4) 사탄은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말했으며, 계속해서 그는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거짓말 시켰다. 사탄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나자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었다. 오늘날도 사탄을 똑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유혹한다.
2. 여자가 머리의 지위를 취함
사람이 타락한 또 하나의 원인은 여자가 머리의 지위를 취한 것이다.(창3:2-3,6) 원래 하나님은 아담을 머리고 창조하셨고 하와는 아니었다. 하와의 머리는 아담이었다. 하와가 뱀에게 미혹당한 이유는 그녀가 머리의 지위를 취하여 그녀 스스로 결정함으로 사탄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우주가운데 유일한 머리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거절하고 머리의 지위를 취할 때 사탄에게 속임을 당할 것이다.
B. 과정
타락의 과정에 있어서 첫 번째 단계는 사람이 그의 영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영을 따라 살 때 사람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된다. 두 번째 단계는 혼을 사용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몸의 행동이었다. 혼을 사용할 때 몸은 자연히 따라 오게 된다. 그녀가 실과를 따 먹은 것은 몸의 행도이다. 매일의 생활에서 우리는 영을 사용해야 한다. 다음에 혼을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혼만 사용한다면 머리의 지위를 취하게 되고 우리의 혼이 주도권을 잡게 된다.
C. 결과
타락의 첫 번째 결과는 혼이 오염되고 부패하여 점령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와는 지식나무를 먹기 전에 이미 그녀의 생각은 오염되어 있었다. 그녀가 뱀과 얘기했을 때 뱀의 관념이 그녀의 생각에 스며들어 그녀의 생각을 더렵혔다.
두 번째 결과는 몸에 사탄이 성분이 더해짐으로 그 본질이 변하여 육체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 사람이 몸은 순수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 육체가 된 것이다.
세 번째 결과는 사람이 영이 죽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을 향해 그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사람의 영이 죽었을 때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하나님을 접촉하거나 교통할 능력이 없었다.
네 번째 결과는 타락한 사람이 죄인으로 짜여진 것이다.(롬5:19)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죄라고 부르는 요소가 사람 안에 주입되었다. (롬5:12) 우리는 죄인으로 짜여져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죄를 짓는 것이다.
다섯 번째 결과는 타락한 사람이 정죄받은 것이다.(롬5:18)정죄는 아담뿐 아니라 온 인류를 포함한다.
여섯 번째 결과는 저주가 들어온 것이다.(창3:17-19) 죄진 것은 사람인데 모든 피조물들이 탄식하면 진통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다 사람의 타락으로 들어온 저주의 항목들이다.
일곱 번째 항목은 사람이 낙원에서 쫓겨난 것이다.(창3:23-24)
여덟 번째 결과는 죽음이다.(창3:19, 롬5:1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 15:22)
Ⅱ. 타락의 두 번째 단계
A.배경
범죄한 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자신들을 감추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사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창3:15) 아담이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즉시 그이 아내를 하와라 불렀다.(창3:20) 하와는 ‘산자’를 의미한다. 그 후에 창세기 4장 1절은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 가인은 ‘얻은 자’를 의미한다. 하와의 관념에 따르면 가인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약속된 여자의 씨였다. 이러한 배경가운데서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로 그분의 구원을 얻었어야 했다. 그러나 사람은 다시 타락했다.
B. 원인
가인은 하나님의 구원의 길로부터 돌아서버린 후 타락의 두 번째 단계를 초래했다.
1. 마귀의 획득
가인이 계속 타락하게 된 한 가지 이유는 마귀가 그를 안에서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창세기 4장의 시점에서 가인을 더욱 더 타락하게 한 자는 사탄이었다. 가인의 타락은 교활한 자에 의해 사주된 것이다.
2. 사람이 주제넘게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스스로 버림
하나님은 사람에게 희생 양의 가죽을 입혀 주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다.(창3:21) 그러나 가인은 주제넘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받지 않았다. 그는 사탄을 따랐다. 이것이 사람이 더욱 타락하게 된 이유였다.
C. 과정
1. 자신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섬김-사람의 관념에 따른 종교를 발명함
가인은 자신의 의견에 따라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물을 드렸다. 아벨은 그의 대속물인 희생의 피를 흘려 드림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따랐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봉사와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방법을 거절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제물을 드렸다.(창4:3-5) 가인은 종교를 발명해 낸 것이다.
2. 사람의 분냄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알고 가인은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창4:5) 이것은 그의 관념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 결과이다.
3. 사람이 그의 형제를 죽임
창세기 4장 8절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기서 볼 때 가인은 처음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시작했다가 결국 살인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요한복음 16장 2절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행하느냐 자신의 의견에 따라 행하느냐이다. 우리의 관념에 따라 행한다면 결국 살인에 이를 것이다.
4. 사람의 하나님께 대한 거짓말과 오만함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4:9) 하나님께 대한 가인의 대답은 거짓말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오만한 자임을 보여 준다. 가인은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그이 오만함을 드러냈다.
D. 결과
두 번째 단계의 타락의 결과로서 하나님은 더 큰 저주를 선포하셨다. 즉 사람은 땅을 경작하지만 땅이 그에게 효력을 주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인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쫓겨나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4:11하,12,14) 결국 가인과 그 후예들은 하나님 없는 문화를 발명했다. 이 문화는 자존을 위한 성을 쌓는 것과 생계를 위해 육축 치는 것과 오락을 위해 음악을 발명한 것과 방어를 위해 무기를 발명한 것 등을 포함한다.(창4:17, 20-22) 하나님을 잃어버렸으므로 사람은 하나님 없는 문화를 발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타락의 결과이다.
Ⅲ. 타락의 세 번째 단계
A. 원인
첫 번째 타락에서는 하나님의 적이 사람의 밖에 있었고, 두 번 째 타락에서는 이 적이 사람 안에 있었다. 이제 적은 또 다른 단계를 취하여 사람을 더욱 더 타락하게 했다.
1. 악한 영들이 사람과 혼합함-타락한 천사들이 불법적인 결혼을 통해 사람가 결합함
창세기 6장은 하나님이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이다. 욥기 1장 6절과 2장 1절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웠음을 말해준다. 사람의 딸들과 결혼한 천사들은 유다서 6절 7절에 기록된대로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않은 자들이었다. 타락한 몇몇 천사들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의 몸을 취했다. 그들은 사람의 딸들과 불법적인 결혼을 이루었다. 인간의 본성과 악한 영들의 혼합체가 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홍수로 인류를 심판하기로 작정하셨다.
2. 사람이 육체가 됨
창세기 6장 3절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다투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타락이 첫 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그의 영을 사용하지 않았고, 타락의 두 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자신의 뜻을 따랐으며, 그의 혼으로 살았다. 타락의 세 번째 단계에서 사람은 타락한 몸을 오용하여 육체가 되었다. 온 인류가 육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종 노아에게 나타나시어 그분이 모든 세대를 땅과 함께 멸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창6:11-13)
B. 과정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정욕 가운데 빠져 살았으며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다.(창6:5) 하나님조차도 더 이상 참으실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 것이었다.(창6:11-13)
C. 결과
먼저는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서 떠나셨다. 주님은 “내 영이 영원히 사람과 다투지 아니하리라”(창6:3)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은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그 다음으로 홍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다. 노아의 가족 외에는 모두 홍수에 몰살되었다.(창7;19-23)
Ⅳ. 타락의 네 번째 단계
A. 원인
타락의 각 단계에는 두 가지 요인들이 있다. 첫째 요인은 사탄이고, 둘째 요인은 사람이다.
1. 사탄의 선동
타락의 네 번째 단계에서 사탄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권위를 열국을 만드는 데에 그리고 열국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하도록 선동하는 데에 이용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공공연하게 반역하는 상태에 떨어졌다.
2. 인류의 반역
당초 사탄의 타락에 있어서 그의 의도는 하나님의 권위를 뒤엎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타락한 인류 가운데 와서 사람 안에 똑 같은 생각을 주입시킴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여 일어나도록 선동했다,
B. 과정
첫 번째 단계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려는 음모였다,(창11:3-4)
두 번째 단계 사람의 수고로 흙으로 벽돌을 만드는 것이었다.
세 번째 성을 건축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 단계 하나님을 거절한다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탑을 세운 것이었다. 마지막 단계는 그들이 하나님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낸 것이다.
C. 결과
먼저는 하나님이 그들을 흩으시기 위해 오셨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더 이상 같은 언어를 갖지 못하도록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세 번째로 혼란이 들어온 것이었다. 바벨은 혼란을 의미한다. 이것은 저주와 심판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은 아담의 족속들을 포기하실 수밖에 없었다.
요 약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사람은 매우 선하고 죄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대적인 마귀에 의해 선악을 아는 지식의 나무의 실과를 따 먹도록 속임을 당했다. 따라서 그는 타락했고 죄인이 되었다. 한 면으로 그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으며 또 한 면으로 그는 사탄의 악한 본성을 그 안에 갖게 되었다. 사람이 타락한 본성은 그이 후손들로 하여금 또 다시 계속 타락하여 마침내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하고 일어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극도로 타락했으며, 하나님께 버림당했다.
질문
1. 사람의 각 단계의 타락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2. 언제 죄가 사람 안에 들어왔는가?구약의 사실들과 신약의 구절 들을 들어 설명하라
3. 언제 사람은 하나님의 정죄를 받았는가? 구약의 사실들과 신약 의 구절들을 들어 설명하라.
마25:2~4 그들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현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을 가져갈 때에 기름을
가져가지 않았으나, 현명한 처녀들은 등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만나
마태복음 25장은 우리에게 그릇 안에 기름을 예비한 슬기로운 처녀를 보여 줍니다. 그들은 대가를 지불하여 자신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대가를 지불하여 기름을 사서 자신을 예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 곧 하나님 자신을 표징합니다. 기름을 사는 것은 대가를
지불하여 하나님 자신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사든지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예비하려면 반드시 더 많이 성령을 얻어야
하며 하나님을 얻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의 결혼에 대한 일을 처리할 때, 대가를 지불하여 자신의 관점을 내려놓고 자신의 방법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좀더 엄격하게 말한다면 자신의 관점과 방법을 깨뜨려서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관점과 방법 안에 들어오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대가를 지불하여 기름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있어서 그렇게 대가를 지불하여 하나님께 지위를 내어드리고 기회를 드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 충만되고 점유될 것입니다. 우리 안은 기름으로 가득할 것이며, 성령으로 가득할 것이며, 하나님 자신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으로 충만될 그때가 바로 당신과 내가 성숙할 때이며 하나님의 건축이 완성될 때입니다.
출처 : 그리스도인의 생명이 성숙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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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그녀의 돈이 다 떨어졌다. 이때 그녀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제게 한마디 말씀해주소서,저는지금 당신께 천원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한마디 말씀을 구합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시편 23편의 한 단락의 성경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다. 그녀가 얻은 말씀은 바로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였다. 이때 그녀는 넘치기는 커녕 완전히 비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므로 다음과 같은 시를 쓸 수 있었다.
내 목자이신 여호와가 있으면 항상 넉넉하다네!
수많은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항상 넉넉하다네!
돈을 관리하는 하나님이 계시면 항상 넉넉하다네!
이시를 쓴 다음 그녀는 그것을 한 친구에게 보내 주었다. 그녀의 친구는 한동안이 지난후에 다음과 같이 답장을 띄웠다. "너의 시를 읽으니 하나님께서 참으로 너에게 복 주셨으리라 고 생각한다.
너는 정말 넉넉한것 같구나" 그러나 사실 그녀에게는 한 푼도 없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었는가 ?
아니다. 이틀 후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 그녀에게 공급하셨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근원이 있는지를 알게될 것이다.
까마귀도 여러분에게 공급할 것이고 시냇물의 공급도 있을 것이다.
밀가루 한 줌밖에 남지 않은 과부도 여러분에게 공급할 것이다.
이러한 공급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하늘의 창문을 열어 하늘에서 여러분을 공급하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역사는 이미 다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말씀도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
하니님의 말씀의 본질은 바로 성령이다. 무릇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사람에게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의 실재를 더하는 책음을 지신다.
성경의 창세기에서 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강이 흘러나와 네 방향으로 흘러 온 땅을 적셨다. 성경의 마지막, 요한 계시록에는 불 못과 물의 성이 있다. 물의 성, 새 예루살렘에는 생명수의 흐름이 있으며, 이 생명수의 강이 온 도시, 온 성을 적시며 흐른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목이 말랐을 때 하나님께서는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셨다. 그 반석에서 생수가 흘러나왔다. 시편 46편 4절에서는 한 시내가 있어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하나님의 성소를 기뻐한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과 함께 주님과 교회를 섬겨본 일이 있을 것이다. 마음이 매우 무거운 자매님과 함께 섬겨본 일이 있는가? 아주 슬퍼하는 한 분, 깊은 속에 좌절감이 가득한 한 분이 있다. 무엇이 그 자매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가? 만약 여러분이 강물 안에서, 그 흐름 안에서 섬긴다면, 이 강은 우리 안에 시내가 되어 흐를 것이다. 온 성을 기쁘게 할 것이다. 한 봉사자에게서 흐른 그 흐름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된 봉사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봉사하기 위해 어떤 곳에 도착했을 때, 정말 마음이 무거운 상태로, 다만 의무감을 가지고 할 수 없이, 그것을 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있기 때문에 섬기기 위해 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그곳에 왔을 때, 한 자매님이 내가 어려운 상황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만 부드럽게 생수를 내게 흘러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개월이 지난 이후에 여러분이 봉사하러 왔을 때, 여러분 자신이 그 흐름을 누리고 있지만, 그 자매님은 아주 무거운 마음으로 오게 될 수도 있다. 그 때는 여러분이 그 자매님에게 흘러 보낼 차례이다. 어떤 때는 두 사람이 모두 흐름을 가지고 올 경우도 있다. 서로에게 흘러 보내는 것이다. 유리창을 닦으면서 흘러 보내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닦으면서 찬양할 수도 있다. 이것이 봉사이다. 나는 화학이라든지 과학을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우리에게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러 나라와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많이 한다. 그 곳의 성도들은 나를 잘 돌보아 준다. 나는 항상 한 가지만 요구할 것이 있다고 말한다. 나에게 생수가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금요일 저녁에 서울 전시간 훈련 센타 숙소에 들어갔을 때, 테이블 위에 많은 좋은 것들과 함께 물병들이 놓여 있었다. 그 물병들을 바라볼 때 나는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쿠키가 없어도 괜찮지만, 커피나 차가 없어도 괜찮지만, 또한 과일 캔디를 안 먹어도 괜찮지만, 물은 없으면 안 된다. 그것은 깊은 필요이다. 생수의 필요가 우리에게 있다. 지난 이틀 동안 오후 시간에 중요한 교통을 했다. 내일 오후 시간에 많은 도시로 복음 확산의 부담을 갖게 될 것이다. 사실 교회가 없는 도시란 황무지와 같다. 생명나무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생수를 흘러 보내기 위해 교회가 없는 도시들로 가야한다. 나는 강조하면서 또 반복하겠다. 그 영은 좋은 땅이다. 좋은 땅은 물의 땅이다. 시내와 샘이 흐르는 땅이다. 샘이 흘러나오는 땅이다. 흘러 솟구치는 땅이다. 나는 저녁 먹기 전에 내 속에서 생수의 흘러넘치는 것을 체험했다. 나의 영 안에 흘러넘침이 있었다. 다만 샘만이 아니라 샘의 땅이 나에게 있었다. 우리는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르지만, 우리의 영 안에 이러한 샘이 완전히 해방될 때,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된다. 우리 안에 원천이 있다. 또한 이 영은 좋은 땅으로서 우리 안에 시내와 샘과 원천의 땅이 되신다. 나는 물의 기능, 특별히 생수의 영적인 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 생수의 다섯 가지 기능에 대해 말해보겠다. 첫 번째, 이 물은 우리를 공급한다. 계시록 22장에서 생명나무는 생명수가 흐르는 강 좌우에 자라는 걸 보게 된다. 사실 이 나무는 강가에 심겨진 것이다. 그래서 나무에 생명수가 공급된다. 두 번째, 이 물은 우리를 신선하게 한다. 우리가 신선케 되는 것은 너무나 좋은 것이다. 이 물이 신선케 한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몇 차례 여러분이 나의 영을 신선하게 했다고 언급했다. 아마 여러분이 피곤한 상태로 섬기러왔을지라도 생수를 체험하고 누릴 때 신선하게 된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새로워지고 신선해진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남편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당신, 봉사하러 가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소? 이번 주는 너무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소? 나도 당신을 염려했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이오?”이제 여러분이 남편을 신선하게 할 차례이다. 메시지를 전할 필요는 없지만, 다만 “어떤 자매님과 제가 생수의 흐름을 함께 누렸답니다.”라고 말하면 된다. 그리고 “지금 함께 저하고 누리시겠어요? 함께 주님의 이름을 불러보시죠.” 하면서 생수를 함께 누리면 된다. 세 번째 기능은 만족하게 하는 것이다. 목마름이란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는 열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결혼을 한 부부가 그들이 결혼한지 한 8년이 되었다고 하자. 부부는 함께 있으면서 아주 즐거워한다. 그러나 한 가지 예외가 있다. 이 자매가 참으로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 한나와 같은 심정이다. 다른 모든 방면에서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깊은 속에 만족이 없다. 그 자매는 엄마가 되고 싶어 한다. 나는 주님께서 그 자매에게 아이를 허락하시기 바란다. 그러나 주님이 허락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주님은 참되게 우리를 만족케 하시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목마름이 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향한 열망을 의미한다. 젊은 형제님들이 중년의 나이가 되면,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떤 갈증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일생, 인생을 생각하면서, 젊은 날의 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어떤 꿈도 이루어지지 못했다라고 느낀다. 자신의 인생이 절반을 넘어섰다는 것에 대하여 깊은 속에 만족이 없다. 생수는 우리의 모든 목마름을 만족시킨다. 스포츠카를 산다고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젊은 사람처럼 꾸민다고 하더라도 만족이 없다. 여러분에게는 다만 물이 필요하다. 네 번째, 물은 우리를 씻어준다. 이 씻음은 물두멍에서의 씻음으로서 땅에 속한 모든 접촉으로부터 우리를 씻어준다. 우리가 땅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가 비록 세상적이지 않을 지라도, 세상을 접촉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물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우리에게서 씻어준다. 또한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어줄 수 있다. 예를 들어서, 목요일 저녁에 형제님들이 봉사를 하러 온다. 형제님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교통난을 뚫고 직장으로 일하러 갔다가 일하는 동안 많은 압력을 받는다. 그 형제님은 어렵게 퇴근하여 집에 도착하면 많은 복잡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좀 해결하고 난후 봉사 교통 시간이 되어 집회소에 오면 누군가가 그의 발을 씻어주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에베소서 5장에 따르면, 이 발 씻음 아래 있는 물이 신진대사적으로 우리를 씻는다고 말한다. 먼저는 주름들을 제거해 준다. 자매님들은 더 이상 자신의 코를 고친다든지 하는 성형수술이 필요 없다. 생수가 우리의 모든 주름을 제거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상처를 치료해준다. 우리에게 상처의 흔적이 있을 때 그것을 제거해 준다. 다섯 번째 기능은 이 물은 우리를 다스린다. 새 예루살렘에는 어린양-하나님의 보좌가 있다. 그곳에서부터 생수의 흐름이 흘러나온다. 하나님은 흐름을 통해 다스리신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 흐름을 통해 온 땅을 통치하실 것이다. 여러분은 이 물이 다스린다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생수의 강의 흐름이 하나님의 권위를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에게 ‘생수의 흐름, 보좌로부터 흘러, 그 권위를 온 땅에 가져온다.’는 좋은 찬송이 있다. 이 항목들이 물의 주된 기능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물이 가득한 땅으로 누릴 필요가 있다. 이 땅은 바로 삼일 하나님이 흐르시는 땅이다. 그러면 이 땅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 땅은 지금 우리의 영 안에 있다. 흐르시는 삼일 하나님이 생수로 흐르는 이 땅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가 영 안에서 살 때 이 물의 땅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서 이 복음이 흘러나갈 것이다. 기도는 우리를 통해 흘러나갈 것이며, 우리를 통해 목양이 흘러나갈 것이다. 찬양도 흐를 것이다. 찬미가 흐를 것이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는 시내와 샘과 원천이신 삼일 하나님이 흐르는 땅에 살고 있다. 결코 목마름이 없다. 물! 물! 물이다. 여기에 시내, 샘, 원천, 삼일 하나님이 흐르신다. 주님을 찬양한다. 아멘. 이것이 우리를 새롭게 한다. 우리를 공급한다. 우리는 물로 씻어진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항상 산꼭대기에 머물기를 원한다. 우리는 항상 변화산에 그대로 머물기를 원한다. 우리는 ‘아! 나는 그곳에서 빛나는 하나님과 머물고 싶다. 아!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곳, 왜 내가 여기에 머물지 않겠는가?’라고 원할지 모르지만 산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우리는 이집트로 내려와야 한다. 그런데 낮은 곳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계곡 안에는 마귀가 있다. 귀신들린 사람들이 있다. 그 계곡은 누구도 그 상황을 다룰 수 없는 수 많은 일들이 있다. 귀신의 원칙은 배역이다. 그 상황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느 날은 변화산 꼭대기에 있다가 점차적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계속 내려가게 된다. 우리가 전에는 가장 높은 곳에 있었지만 어느 날 아주 깊은 골짜기에 있게 된다. ‘오, 너무나 깊다’라고 생각되는 아주 긴 골짜기, 어두운 골짜기에 있게 된다. ‘이것을 어떻게 건너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좋은 땅에 이 물은 먼저는 산에서 골짜기로 흘러간다. 우리는 모두 오르락내리락, 내리락오르락 하는 생활을 살고 있다. 예를 들어, 20여년 결혼생활을 하신 분들, 오르막이 있지 않았는가? 또 내리막도 있지 않았는가? 오르락내리락! 하루는 남편이 올라갔다가 다음 날은 또 아내가 올라간다. 때로는 두 사람이 모두 올라가기도 하고 두 사람 모두 내려오기도 한다. 사실 많은 경우 우리는 산에서보다는 골짜기에 있을 때가 많다. 형제자매님들! 골짜기가 오기를 기도하지는 말라. 물을 위해 기도하라. 지금 나의 기도는 나로부터 정말 생수의 흐름이 흘러나가길 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 시간 이후 집에 가거나 또 직장에 가시게 되면, 그곳에 골짜기가 기다리고 있다. ‘주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생수를 원한다고 기도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의 기도에 지금 응답하고 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사실 그 강의 근원은 산에 있지만, 강 자체는 계곡을 따라 흘러간다. 그러므로 “물을 얻기 원한다면, 물이 있는 곳에 너를 좀 넣어줘야 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각양의 환경이 필요하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우리가 좋은 땅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 좋은 땅은 물의 땅이요, 이 좋은 땅의 시내와 샘과 원천을 이길 수 있는, 능가할 수 있는 환경은 없다. 웟치만 니 형제님이 20년 동안 골짜기에 계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곳에 물이 있었다. 그 물이 그분에게 흘러갔다. 또한 그분을 통해 흘러나왔다. 형제님이 말하기를 “나는 나의 기쁨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다. 나는 여러분이 좋은 땅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 좋은 땅에는 한국처럼 산이 많다. 또한 산이 있는 곳마다 골짜기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짜기에도 있게 되고, 산에도 있게 될 것이다. 고린도 후서 6장을 읽어보면, 바울은 모든 종류의 상황에 처해있었다. 사도 바울은 적어도 네 차례 파선 중에 보냈다. 고린도 후서에서 그는 세 차례 파선했다고 말했다. 바울은 말하기를 밤낮을 깊음 가운데 보냈다고 말한다. 그가 수영을 잘 했는지 모르겠다. 그가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르지만, 사도행전에 보면, 네 번째 파선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바울은 그 배의 갑판에 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여러분, 기운을 내십시오.”라고 말한다. 여러분 그것을 생각해 보라. 2주가 지난 후에 이 죄수가 모든 사람에게 기운을 내라고 말하는 상황이다. “여러분 가운데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이고, 배만 잃을 것입니다. 내가 속해 있고 또 내가 섬기는 하나님, 그분의 천사가 바로 이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였습니다. … 여러분은 오늘까지 십사 일째 기다리고 기다리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어 왔습니다.” 죄수인 바울은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모든 사람이 용기를 얻었다. 바닷물로 가득한 상황에서 그 배 안에 또 다른 생수의 흐름이 있었다. 그때 바울이 다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배를 내리고서 도망치려고 했을 때, 그는 “이 사람들이 배에 남아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순종했다. 이 물이 다스리고 있었고,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고 있었고, 공급을 주고 있었다. 이것이 어떠한 봉사인가? 어떤 사람이 배에서 내려서 아팠을 때 바울이 고쳐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왔을 때 고쳐주었다. 그곳에 물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 지금 우리 가운데는 실제 물질적인 배에서의 파선의 상황에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생을 볼 때, 사실 많은 파선을 체험하게 된다. 때로는 우리의 교회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 갑판 위에 시내와 샘과 원천의 땅에 사는 한 사람이 우리 가운데 서서 말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우리는 이 영의 적셔짐 아래 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 메마름이 없다. 여러분은 지금 적셔져 있는가? 아니면 지금 메마른가? 우리는 이 물로 여러분을 섬긴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방식이다. 우리는 서로를 씻어주고, 서로를 공급하고, 서로를 주님의 다스림 안으로 이끌어 간다. 이 시내와 샘과 원천을 어떻게 누리는지 세 항목을 말하겠다. 처음 두 가지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 항목은 어느 정도 진보된 항목이다. 첫 번째, 우리는 다만 그 영을 마셔야 한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라. 주님은 우리 모두를 한 영 안에서 마시게 하셨다. 우리는 다만 그 영으로 조금 적셔질 수 있다. 다만 조금 마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마실 때 우리 속에 들어온다. 두 번째, 우리는 그 영을 마신 후에는 말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몇 분 동안 말할 기회가 있다. 우리가 말할 때 우리로부터 생수가 흘러나간다. 우리에게 흘러나가는 것과 흘러들어오는 것이 서로 맞아야 한다. 호스가 수도꼭지에서 물을 흘려보내는데, 마지막 끝에서 잠궈 버리면 호스에 물이 들어가다가 흘러 나가지 못하게 된다. 그럴 때 압력이 가득 차게 된다. 흘러보내지 않으면 우리 속에는 압력이 차게 된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압력이 우리 안에 있다. 그런데 집회에서 신언을 하고 보니까 ‘어, 이제 해방되었다.’ 그런 느낌이 있다. 그래서 물을 흘러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 물을 흘러보내라. 세 번째, 참된 사역과 관련된 항목이다. 모든 온전케 된 지체들의 온전케 함이다. 광야에 반석이 있었다. 이 반석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때 모세는 이 반석을 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럴 때 이 반석에서 물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생명을 해방하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방면이다. 주님의 회복 안에서 우리에게는 이렇게 매 맞은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된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필요하다. 주님의 옆구리가 찔렸을 때,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구속을 위한 주님의 고통에 참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생명을 해방하기 위한 주님의 고통에 참여할 수는 있다.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의 회복이 세력을 얻으려면, 적어도 몇몇의 성도들, 자매님들일지 형제님들일지 모르지만 깨어진 반석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된 성도들이 필요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침을 당하지만, 더 많이 침을 당할수록 더 많은 흐름을 흘러보내게 된다. 그것에 대해 더 많이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흐름을 갖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2011년 6월 전국 봉사자 온전케하는 훈련 메시지 -
훈련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타고난 방식으로 하지 않는 것을 배우도록 돕는 좋은 길이다. 우리에게는 타고난 인간 생명이 있다. 그래서 이 생명으로 모든 일을 타고난 방식으로 행한다. 그러나 교회생활 안에서, 또 어떤 봉사 안에서 결코 우리의 타고난 방식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 어떻게 타고난 방식으로 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우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은 항상 우리의 타고난 존재를 만진다. 예를 들어, 골프를 배우고자 한다고 하자. 그런데 한 번도 쳐본 일이 없다. 골프 클럽을 가지고 골프채 가운데를 붙잡고 공을 치려고 한번 해 보라. 아마 그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골프를 치는 법을 아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골프채를 잡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서 있는 방식도 옳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또 골프채를 잡는 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것이 훈련이다. 그것은 골프에 관한 책을 읽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우리가 경기하는 방식으로 훈련을 받는 것이다. 내가 만약 한국어를 배우기로 결심했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형제에게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부탁한다고 해보자. 그 형제는 몇 마디를 해줄 것이다. “감사합니다.”이렇게 가르쳐 줄 것이다. 나는 “감사합니다.”이런 정도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 훈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한국어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매우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한국어를 말하는 것을 교정해주면, 마음을 상하는 그런 사람이 있다. 아마 어떤 자매는 그 소리를 듣고 울지도 모른다. “어떤 남자분이 저를 때리려고 했습니다.”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훈련이기 때문에 또한 주님의 영이 우리를 훈련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존재의 어느 부분을 만지시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그것은 참된 축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먼저 이것을 깨닫고 주님께서 우리의 교사시요, 우리의 주이심을 시인해야 한다. 우리는 배우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기꺼이 주님께 만져지기를 원해야 한다. 베드로도 훈련받을 필요가 없었겠는가? 베드로는 아버지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계시를 받았다. 또한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도 들었다. 그러나 그 얼마 되지 않아서 어떤 사람들이 와서 베드로에게 질문을 했다. “그대의 선생님은 성전세를 내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내십니다.”이렇게 대답했다. 그때 주님께서 다시 베드로를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시몬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땅의 왕들이 누구에게 관세나 인두세를 받습니까? 자기 아들들입니까, 남들에게서입니까?” 베드로는 말하기를 “남들에게서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면 아들들은 면제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들이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세를 바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마음 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너는 먼저 낚시를 하러가서 먼저 잡는 고기 입속에 동전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 동전을 가져다가 너와 나를 위해 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어떠한 훈련인지 보았는가? 주님은 다만 베드로에게 가르치실 수만 없었다.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이 계시를 기억하라”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산에서 본 계시가 무엇인지를 기억해라.”이렇게 하지 않으시고, “내가 아들이기 때문에 나는 세를 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베드로야, 너는 대답을 잘못 했다.”그것은 가르침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교정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낚시하러 보내셨을 때에는 그가 첫 고기를 잡을 때까지 얼마나 기다렸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훈련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이와 같은 훈련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우리 모두에게는 훈련이 필요하다. 마태복음 25장에 따르면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에는 몇 가지 주된 방면이 있다. 첫 번째,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처녀들이다.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그분의 발 앞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또한 우리는 그분을 섬기는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주님을 섬기는 마르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는 선택이 없다. 하나님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미 결정지어 놓으셨다. 주님께서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을 때 그분은 우리를 이미 소유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노예이다. 바울은 이것을 완전히 인식했다. 노예의 방면은 우리의 봉사를 위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 그의 봉사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우주적인 교회의 방면이 아니라 지방교회의 방면에서 언급하는 것이다. 지방교회 안에서 모든 일은 매우 실재적인 것들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일들은 물질적인 영역의 일들이다. 이 모든 물질적이고 실재적인 일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우리는 모든 실재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모임을 가질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이 없다면 합당한 교회생활을 가질 수 없다. 그런데 이 요점에서 인상을 받아야 할 한 가지 중요한 항목이 있다.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 지방교회는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다. 지방교회는 필요한 절차라고 할 수 있다. 지방교회 안에서 우리에게는 실재적인 봉사가 있다. 대다수는 물질적인 봉사이다.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를 돌보는 봉사는 실재적이고도 물질적인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봉사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들로 섬기겠지만, 이 봉사 안에 봉사의 본질이 빠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자매님이 유리창을 닦는 봉사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이 하는 것은 유리창을 닦는 일이다. 그 일을 모두 마치면 그냥 집으로 간다. 예를 들어, 다른 두 자매님이 동일한 일을 하기 위해 유리창을 닦기 위해 왔다고 생각해 보자. 외적으로 볼 때 동일한 일을 하고 있지만, 이 자매님들은 매일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누리는 분들이다. 그 결과 그분들이 함께 섬기기 위해 모였을 때, 또한 그들이 섬기는 과정 중에 함께 그리스도를 누린다. 그들이 아마 찬송을 부를 수도 있고, 기도를 함께 할 수도 있고, 또한 교통을 나눌 수도 있다. 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극도로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모든 실재적인 봉사들이 이 목적을 위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방식으로 유리창을 닦겠는가? 혹은 카펫에 진공청소기로 청소할 때 어떤 방식으로 하겠는가? 피아노를 치는 봉사, 의자를 놓는 봉사, 애찬을 준비하는 봉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에게 선택이 놓여있다. 북미주에 어떤 한 지방에 아주 귀한 한 부부가 있다. 그 남편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장로직분 안에 있는 형제이다. 또한 그 아내는 봉사에 있어서 매우 신실하고 활동적인 자매님이다. 그분들은 모두 약 70세 정도 되셨다. 아마 적어도 두 분 모두 43년 이상 교회생활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자매님의 봉사는 완전히 타고난 것이다. 그 자매님은 다른 자매님을 결코 참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과 동역하지도 못하고, 다른 자매들에게 자기가 일을 혼자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을 한다. 그리스도 없이 40여년을 섬겨오셨다. 이러한 봉사는 종교적인 단체에서의 봉사와 다르지 않다. 세상에서의 봉사와 동일한 것이다. 이 자매님에게 주님께서 긍휼을 주시기 바란다. 나는 그 자매님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하나님의 목표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 것을 통해 건축되기 때문에, 우리가 실재적인 봉사를 행할 때마다 우리의 존재의 본질이 되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섬겨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섬기는 많은 자매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매우 실재적인 일, 아주 중요한 섬세한 일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분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청소년처럼 그렇게 날아다니는 분들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서 인간적인 분들이다. 그들의 실지적이고 물질적인 봉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예를 들어, 한 자매님이 점심식사를 준비한다고 하자. 그러한 과정 중에 자매님은 주님과 함께 그 일을 한다. 그럴 때 봉사 안에서 자매님은 주님과 함께 섬기시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실재적이고 물질적인 봉사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 사람들을 고용해서 유리창을 닦게 하지 않는가? 우리는 사람들을 고용해서 청소하게 하면 된다. 또한 다른 가정부를 고용해서 아이들을 돌보게 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의 방식은 그런 일이 아니다. 우리는 노예로서 섬겨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으로 섬기고 있는가? 어떤 형제님들은 함께 책임을 지는 형제들로서 동역하기 위해 모였다. 그런데 모일 때 육체 안에 모인다. 사실 육체 안에 그냥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모든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그들은 모일 때 그리스도 없이 모인다. 마치 육체 안에 있는 사람들과 같다. 부도덕하다는 그런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다만 육체 안에서 머무는 것이다. 육체 안에서 생각하고, 사고하고, 다른 사람이 자기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 이것은 엄중한 문제이다. 사실 이러한 상황에서 화를 낸 형제님은 집에 가서 그냥 머무는 것이 낫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에 ‘집에 가서 머물라’ 이렇게 말을 할 수 없다. ‘아, 자매님, 그냥 집에 가시죠.’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함께 가정 안에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의 봉사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는 오직 주님만이 알고 계신다.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의 실제적인 봉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는 기회라는 생각을 해보았는가? 주님께서는 “내가 너의 발을 씻기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들도 서로의 발을 씻겨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여기서 발을 씻는 것의 영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신선하게 해야 한다. 서로를 돌봐주어야 한다. 서로를 목양해야 한다. 서로를 격려해주어야 한다. 서로를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요소가 되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봉사의 본질이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예표인 좋은 땅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의 부담은 그 사역의 말씀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체험과 누림에 있다.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해 체험하고 누리는 것이다. 다만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체험하고 누린 그리스도가 우리를 봉사 안으로 인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36년 전, 1974년 봄에 있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의 막내아들이 아직 유아로서 애나하임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집회가 끝난 후에 그 아이를 데리러 갔다. 그 때 얼굴이 환하게 밝고 기뻐하는 한 자매님이 막내아들을 데리고 오셨다. 나는 지금도 그 자매님의 얼굴에 있던 은혜를 기억하고 있다. 그 자매님이 가졌던 그 기쁨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자매님은 위트리스 리 형제님의 자매님이었다. 아마 오늘날 가장 체험 있고 가장 영적인 주님 앞에서의 한 자매님이실 것이다. 그런데 이 자매님이 어린아이를 섬기고 있었다. 그래서 이 젊은 아버지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고 계셨다. 주님께서 그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아마 주님은 우리가 아이를 위해 갈아주는 기저귀는 기억하지 않을지 몰라도, 아이들에게 몇 병의 우유를 주었는지 주님이 기억하지 않으실지 몰라도, 적어도 이러한 것들을 기억하실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일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한 것을 주님은 기억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분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한다. 또한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누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삼일(아버지, 아들, 영)이신 것을 알고 있다. 이 셋은 동시에 존재하며 상호 내주하신다. 아버지는 감추어 계신 분이시오, 아들은 하나님의 나타나심 곧 하나님의 표현이시다. 또한 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는 분이시다. 이제 그분은 하늘에서의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 영은 우리의 체험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체험은 사실 그 영에 대한 체험이다. 이 영은 바로 삼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용되신 것이다. 우리는 그 가나안 땅의 예표를 알고 있을 것이다. ‘아, 여기에 좋은 땅이 있다. 이것 은 밀의 땅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다. 보리의 땅이다. 역시 그리스도다. 이러한 무화과와 포도의 땅이다. 모두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한 분이시다. 오, 얼마나 놀라운 그리스도가 계시는가?’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여전히 객관적인 항목들이다.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지 못했다. 마치 식탁 위에 놓인 음식과도 같다. 이 영, 모든 것을 포함하신 영이 그리스도를 우리의 체험이 되시게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13~14절의 그 영에 관한 각주가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들에게 이르게 하고, 그 약속하신 그 영을 우리가 믿음을 통해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은 좋은 땅이었다. 좋은 땅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이다. 이제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 영이시다. 이 말은 그리스도 곧 우리에게 실재화된 바로 좋은 땅이라는 뜻이다. 여기 가나안 좋은 땅이 있다. 여기에 풍성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육체가 되심으로 오셨다. 그분은 이 예표의 성취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포함한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체험하는가? 그분은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셨고, 이제 모든 것을 포함하신 복합되신 생명주시는 영이 되셨다. 이 땅이 그리스도요, 그리스도가 이제 그 영이시오, 그러므로 그 영이 이 좋은 땅의 실재인 것이다. 이 말은 우리에게 그 영에 대한 이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명기 8장에서 좋은 땅에서는 우리에게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고 말한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예표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이 예표를 성취하셨다. 바로 하나님-사람 그리스도가 좋은 땅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그분을 그 영으로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는 그 영이시다. 이제 그 영이 우리의 영 안에 오셨다. 그 영은 좋은 땅으로서 그리스도의 실재이시며, 이제 그 영은 우리의 영과 연합되셨다. 이것은 좋은 땅이 지금 우리의 영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열쇠이다. 이 모든 체험은 영 안에서, 영을 통해, 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영은 실재의 영이시오, 이 영은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시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포함한 분이시며, 그분은 바로 좋은 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좋은 땅을 체험할 때, 그 영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어떠함과 그분이 소유하신 모든 것, 그리스도께서 도달하시고, 성취하신 모든 것이 지금 그 영 안에 있다. 갈라디아서 3장 14절의 2번 각주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의 물질적인 방면은 좋은 땅이었으며, 그 땅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그리스도는 결국 모든 것을 포함하신 생명주시는 영으로 실재화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영의 복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복과 일치한다. 사실상 그 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체험 가운데 실재화되신 분으로서 좋은 땅이시다.”라고 말한다. 이 좋은 땅은 다만 객관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 그분 자신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살고 움직이는 영역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분명히 좋은 땅이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체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물이 컵 안에 있다면 체험할 길이 없다. 우리의 체험은 주관적인 것이다. 물을 마실 때 이 물이 주관적이 된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좋은 땅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객관적이시다. 우리가 이분을 우리의 땅으로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의 체험이 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해 주님은 모든 것을 포함한 영이 되셔야만 한다. 이 좋은 땅은 우리가 누리기 위한 하나님의 풍성의 공급이시다. 이제 여러분 모두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겠다. “이제 좋은 땅이 어디에 있는가?” 좋은 땅은 우리 안에 들어오신 우리의 영이 되신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이것을 인식할 때에만 그것을 이상으로 계시를 가질 수 있고, 이상으로 체험을 가질 수 있다. 1954년 8월에 그리스도는 내 안에 들어오셨다. 그러나 나의 인식은 너무 부족했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후에야 나에게 영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주님의 영이 나의 영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때 나의 관점은 여전히 좁았다. 이제 우리는 갈라디아서 3:14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복이 하나의 예표인 것을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그 예표의 성취이시다. 또한 그 영은 그리스도의 실재화요 실재이시다. 이제 그리스도의 실재화이신 그 영이 우리의 체험에서 볼 때 그 좋은 땅이 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한 가지를 볼 수 있다면, 우리의 봉사, 우리의 생활이 바뀌기 시작할 것이다. 신명기에서 좋은 땅에서는 여러분에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고 말한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 그 영 안에서 우리에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영 안에 머물러야 하고, 우리의 영을 훈련해야 한다.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서 그 영께서 우리의 영과 연합되셔서 그리스도의 실재화가 되심으로 우리의 체험 안에서 좋은 땅이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보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매우 단순해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체험 안에서 좋은 땅, 그 영이시다. 신명기에서 ‘여기 시내가 있다, 이 땅에는 그냥 샘이 몇 개 있다. 여기에 원천이 좀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땅은 바로 시내의 땅이다’라고 말한다. ‘이 땅은 샘의 땅이다. 원천의 땅이다.’ 라고 말한다. 어디에 가나 물이 있다고 말한다. 여러분에게 생수가 필요한가? 여기에 원천이 있다. 샘이 여기 있다. 여기에 강이 있다고 말을 한다. 삼일 하나님이 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시내와 샘과 원천의 체험 안에서 섬겨야만 한다. 이 자매님이 막내아들을 돌려주셨을 때, 그 자매님은 흘러넘치고 계셨다. 생수의 샘이 흘러넘치고 있었고, 자매님의 영을 통해 내가 마실 수 있었고, 그 자매님은 그때 시내와 샘과 원천으로 섬기고 계셨다. 그때 함께 섬겼던 모든 자매님들이 축복을 받고 있었고, 공급을 받고 있었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매님은 거기서 어떤 모양새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아, 나를 보시오. 내게 원천이 있다. 내게 샘이 있다.” 이렇게 말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곳에서 아이를 돌보고 계셨다. 다만 그분 안에서 계속해서 생수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매님이 좋은 땅 안에 계셨기 때문이다. 이제 좋은 땅은 우리의 영 안에 오신 그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그 영 안에 있다. (2011년 6월 전국 봉사자 온전케하는 훈련 메시지 1 R. K 교통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