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내재적으로 주님의 회복이 무엇인지 보아야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2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현재의 진리를 알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최신의 진리가 무엇인지 주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15장 16절의 말씀을 우리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중심적인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중심적인 진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 9절에서 바울은 집사들에게 순수한 양심으로 믿음의 진리를 알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진리는 먼저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비밀로서 두 가지 주된 방면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를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몸의 하나를 간증합니다.
주님의 회복은 요한복음 17장에서의 주님의 기도의 응답입니다.
주님은 또한 몸의 모든 지체들의 기능을 회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메시지 9번 하나님의 의도와 사탄의 계략과 주님의 회복
1.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의도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풍성과 함께 우리 존재 안에 분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일 아침 저녁으로 우리 안에 그분의 모든 풍성을 분배하셨습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을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을 전하는 위임을 가졌고
또한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을 열어 보여주는 위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두가지 악을 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팠습니다.
우리의 영 안에 원천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원천이 우리 안에서 솟아나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2. 교회는 여러 세기의 역사를 거쳐 하락되었기 때문에 복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와 표준에 따라 복원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올 때 회복의 시작입니다.
주님의 회복은 성경의 말씀에 아멘하는 것입니다.
서두의 교통에서 첫 째로 말할 것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 안에 있다고 말할 때?
물질적인 방식으로,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머무르는 것이 필요합니다.
특별집회와 훈련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과 본성과 역사에 있어서,
우리는 외적인 방식으로 회복 안에 있을 수 있지만
본질에 대해서는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의 회복을 어떤 조직체로 본다면 어려움을 일으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회복 안에 있어야합니다.
우리 주의해야 할 것은,
우리가 타락한 사람을 돌이킬 때 그들 안에 있는 것이 우리에게 또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회복 안에 있기 원합니다.
두번째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주의 회복을 아느냐를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명 안에서 주님의 회복을 알고 있습니까?
진리 안에서 알고 있습니까?
메시지 7,8번의 제목에서,
우리는 주님의 회복을 생명의 회복이락고 언급하지 않고
생명 안에서 주님의 회복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체험적으로 주님의 회복을 아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다룰 중점은 진리 안에서 주님의 회복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강조점은,
우리가 주님의 회복을 알 되, 진리 안에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 안에서 주님의 회복을 아는 것처럼,
진리 안에서 회복을 아는 것입니다.
주의 회복은 진리의 회복일 뿐만 아니라 진리 안에서 우리는 회복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빛이신 하나님의 비춤입니다.
빛이 비칠때 교리가 실재가 됩니다.
진리는 하나님 자신이 빛으로써 비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제의 자아에 대한 교통을 통해 교리만을 얻었을 수도 있고
약간의 지식을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힌 빛의 비춤 아래서 우리는 자아가 몸의 생활 안에서 나타났던 사례에서 우리는 보게됩니다.
우리는 교리에서 출발하여 신성한 빛의 비춤으로 인해 실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생수의 강들이 하나의 진리들임을 보아야 합니다.
교리에 빛을 더할 때 우리는 강들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생명을 진리없이 받을 수 없습니다.
생명과 영을 강조하고 진리를 모른다면
생명이 아닌 것을 따를 수 있습니다.
진리는 모든 것의 분별을 가져옵니다.
주님의 회복을 진리 안에서 알기 위해서
우리는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안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안에서 성경을 읽을 때
객관적인 가르침의 하나 하나의 항목이 실재가 되어
그 실재가 생명을 가져오게 됩니다.
주의 회복을 생명 안에서 진리 안에서 안다면
그 누구도 우리를 흔들 수 없을 것입니다.
1. 주님의 회복은 전적으로 생명과 진리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그분 자신이 생명이요, 진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회복은 활동이나 일이 아닙니다.
회복을 알기 위해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알아야 합니다.
2. 진리라는 단어는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실재가 되실 때 한항목 한항목이 진리입니다.
3.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요한복음을 알아야합니다
이 생명은 실재요 진리입니다. 한 인격입니다.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앙망해야합니다.
주님은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계시하기를 기뻐합니다.
저는 분명하게 주님께 긍휼을 구합니다.
주님은 영 안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계시하십니다.
우리가 생각 안에서 이해하는 교리와
빛의 비춤인 실재는 다릅니다.
우리는 얼마나 실재로 알고 있습니까?
4. 진리는 빛의 비춤, 곧 빛이신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말한다면 빛이신 주님이 표현될 것입니다.
저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모든 성도들과 교회들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이 사역의 말씀에 열려진 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회복을 변질시키지 말아야합니다.
진리는 우리 안으로 비추어진 삼일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빛의 성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깜짝놀라길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어둠 안에서 행함으로 그날에 부끄럼받길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서 우리 안에 어둠이 다 제해지길 원합니다.
주님을 앙망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원합니다.
5. 우리는 진리의 방식으로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내용인 진리는 교리와 빛 사이에 있습니다.
진리는 교리들 안에서 전달되고 그 영을 통해 실재화되는 실재입니다.
우리는 빛과 하나되고 연합될 필요가 있습니다.
빛의 아들들이 되며 빛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생명의 비춤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주님은 빛으로 오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빛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교회 생활 안에서 빛 안에서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본성과 본질 안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빛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빛과 연합되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의 기억과 느낌 속에 관통하소서!
우리의 동기, 의도, 모든 존재를 주님께 열기 원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우리 존재 안에 들어올 때 우리의 내적부분을 살핍니다.
저의 열망은 저의 온 존재가 빛으로 밝아지는 것입니다.
주의 회복을 위해서, 한국을 위해, 북한을 위해,
우리는 열리기 원합니다.?
어떤 어두움도 없이 빛과 연합하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교리들을 갖습니다.
주님이 빛을 비출때 교리들이 실재가 됩니다.
한 항목 한 항목이 우리에게 실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동기,의도가 주님께 굴복되어 주님께서 빛 비춰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의 빛 비춤을 향해 열어드려야 합니다.
6. 진리는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받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 자신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접촉할 때만 우리는 진리를 갖습니다.
아침부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접촉할 때 부흥됩니다.
어떤 가르침에서 하나님이 공급된다면 그가 말한 것은 단지 교리만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7. 진리를 아는 목적은 우리가 생명의 풍성과 넘침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모든 풍성은 진리 안에 있습니다.
각각의 진리가 생명의 풍성의 한 방면입니다.
생수의 강들은 생명의 여러 방면입니다.
생명의 넘침은 전적으로 진리 안에 있습니다.
진리가 많아질수록 생명이 많아집니다.
우리는 생명의 풍성을 가지고 만찬상에서 주님을 경배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서 나오는 생명수의 강으로 주님께 돌려드립니다.
8. 우리가 삼일 하나님과 성경을 알고 생명과 진리를 가지며 빛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참으로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문화와 다른 대륙에서 나왔지만?
주의 회복에 대한 공통된 인식을 가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저는 여러번 한국에 왔었지만 한국 성도들을 볼 때 놀랍습니다.
문제는 인도하는 형제님들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종류의 사람인가가 직접적으로 교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번 메시지에서 우리는 주의 회복이 무엇인가를 다시 상고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몇 가지를 보기 원합니다.
지난 5~10년 동안 기독교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를 대적했던 곳에서 이제는 우리를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집회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가장 합당한 집회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들을 때 이것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것입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잘 받아들이고 환영하고 있지만
우리가 수행하지 않을 때 문제가 있습니다.
주님의 회복이라고 했을 때 우리는 여러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보고 왔고 어떤 사람은 실행을 보고 왔습니다.
최근의 주님의 회복안의 축복을 이전에 본 적이 없습니다.
한국의 모든 도시에 지방교회들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복의 본성에 주의를 기울여야합니다.
지금 주의 회복 안에 새로운 세대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들은 주의 회복 안에서 어떤 위임이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주의 회복이 무엇인지를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중국땅에서 확산이 있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주님의 회복의 본성은 바뀌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중국땅에서 박해가 없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박해가 없어질 때 여전히 주의 회복의 본성을 유지학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로마제국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다가 인정했을 때 그 본성이 바뀐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메시지 7번의 제목은 생명 안에서 주님의 회복을 앎입니다.
요한은 교회를 빗나간데서 돌아오게 하기 위해 생명을 강조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생명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9장에서 '안다'라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눈먼 자를 언급하면서 주님은 바리새인들도 눈먼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회복을 우리는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회복을 생명의 방식으로 알기 원합니다.
주님의 회복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생명은 은사가 아니며, 일이 아니며, 지식이 아닙니다.
생명은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생명 아닌 다른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생명은 일이나 사건이 아니라 한 인격입니다.
우리는 또한 생명의 주관적인 면에서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하실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며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매일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 수 없는 생활을 그분을 의지해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회복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며 그들이 살 수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천연적인 방식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주님을 의지하여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생명을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이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십니다.
주의 회복은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자신을 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유일한 왕이신 그분이 그분 자신을 분배하심으로
그분의 행정을 수행하십니다.
하나님의 행정 안에서 교회를 돌보기 위해 우리는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머리 아래 통일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께 우리 자신을 열어드리기 원합니다.
지난 메시지 4번에서 장로들의 자격을 언급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이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부활 생명이신 그리스도 만이 이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 만이 이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디도서와 베드로전서에 계시된 장로직분의 여러 방면을 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체험할 때 삼중 방식이 있습니다.
첫 째는 지속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되어야 합니다.
둘 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성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 째는 우리는 주님과 하나되어 유일한 순교자이신 주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1. 바울은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근거하여 사도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떠나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소망입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생명은 소망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할 때 소망이 가득합니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서로 은사를 공급하여야 합니다.
감독은 반드시 의로우며 거룩해야 합니다.
감독은 반드시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른 신실한 말씀을 붙잡아
건강한 가르침으로 권유할 수 있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책망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권유하는 것은 많은 사랑과 돌봄과 관심이 있을 때 권유할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권유합니까?
건강한 가르침으로 권유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붙잡으려면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면에서 먹이고 한 면에서 싸워야 합니다.
삼일 하나님이 우리의 음식으로 한 면으로 공급하고
한 면으로 부정적인 것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배울 때 우리는 지방 교회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에 대한 주님의 긍휼을 생각해볼 때
저는 어려움이 있을 때 라이프스터디를 공부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 남아 있는 것이 우리를 지켜줍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누리는 것은 우리의 기쁨을 유지하게 해줍니다.
사역의 책들을 연구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누림을 얻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장로직분이 어렵지만 사실 그것은 누림입니다.
주님께 더욱 매달리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 진리로 조성되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연약한 사람들에게 공급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지배하지 말고 그들에게 먹여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고 약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해야 합니다.
장로직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오늘날 하나님의 증거는 장로들의 어깨 위에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가장 깊은 부담은 그분의 증거에 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으로 더 조성될수록 주님께서는 더욱더 모든 것을 질서있게 통일하시고
그분의 증거는 더욱 넘칠 것입니다.
계시록의 주된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로 예수님의 증거입니다.
그분의 증거를 위해 예수님의 생명으로 조성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왜 훈련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증거를 위해 있습니다.
2. 베드로 전서 5장의 장로들의 목양과 보상을 보기 원합니다.
장로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기쁨의 고난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운다고 말합니다.
이 어떠한 특권입니까?
교회를 사랑하시고 자기 자신을 교회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은 어떠한 특권입니까!
우리가 약하고 어린 형제를 목양하려고 할 때 여러분은 자동적으로 오는 영광을 미리 맛볼 것입니다.
보증하시는 영의 미리 맛봄과 완전한 맛봄이 있습니다.
우리가 목양하는 시간은 장차 올 영광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모든 장로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목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은 고기잡으러 간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만을 관심하였기 때문에 고기 잡으러 간 것입니다.
주님을 베드로에게 사랑하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
몸을 건축하고 그분의 모든 양떼에게 공급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실지로 순교를 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순교뿐 아니라 순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순교자의 삶을 살고 순교자로 죽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을 없습니다.
교회가 강한가 약한 가는 장로들의 충성과 신실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 생활을 어떻습니까?
우리는 첫 째가 되려하지 말고 양무리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장로직분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고 우리의 인격과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고 게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생명 안에서 합당한 사람이 되려면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충만되어야 하며
진리이신 그리스도로 조성되어야 하며
순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목양하십시오!"
주님은 자신의 혼 생명을 버리심으로 양들이 생명을 얻도록 했습니다.
우리의 혼 생명을 버릴 정도로 성도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많은 때 저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양무리를 위해서 혼 생명을 잃을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원합니다.
장로가 되는 것은 순교의 영을 요구합니다.
순교자가 되는 것은 교회를 위해 우리의 혼생명을 기꺼이 버리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순교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부드러운 돌봄으로 목양해애 합니다.
부드러운 돌봄은 모든 것을 포함한 돌봄입니다.
심방이 더 필요한 성도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포함한 돌봄으로 양 떼를 돌보는 것이 순교의 실재입니다.
우리는 억지로 하지말고 자원하여 감독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때에 우리는 억지로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합니다.
목자가 양 떼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양 떼를 돌보듯이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목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갈망과 방법과 영광에 따라 목양하는 것입니다.
매순간 우리는 그분을 체험해야 합니다.
우리는 비열한 수단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유혹을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우리의 목숨까지 기꺼이 주고자 하여야 합니다.
성도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양 떼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과 같은 수준에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어야 합니다.
?
오, 우리는 생명 안에서 합당한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지난 메시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행정을 보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의 전환점으로, 사람을 보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원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각자를 만지시기 원합니다.
메시지 4번과 5번은 장로들의 자격을 말합니다.
메시지 4번은 디모데전서를 다룹니다.
바울이 그의 사역을 시작했을 때, 교회를 세우고 건축하는 사역을 시작했을 때
장로들의 자격을 많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역 후기에 이르러서는 디모데서에서 장로들의 자격에게 대해 언급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진지하고 주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장로들의 자격에 대해 말할 때에 장로들의 능력보다 그들의 삶을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져주시기 원합니다.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울 사역의 후반부에 그는 자격조건을 언급합니다.
그는 이제 장로들의 자격을 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장로직분에 대한 기본원칙이라는 책을 읽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의 장로의 자격을 읽는다면 우리 모두는 자격이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1절부터 7절까지를 읽기 원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되고자 한다면 이러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구절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격들이 여기 열거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의 관찰결과 이러한 자격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격을 우리는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 자격은 주로 생명의 문제이며 인격에 관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격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능력보다 십자가의 공과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를 보여줍니다.
이 신성한 생명이 우리 안에서 운행합니다.
신성한 생명은 우리를 이러한 사람이 되게 할 것입니다.
로마숫자 1번은 이러한 자격조건이 부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부활 생명과 동역하고 협력하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5~7장의 왕국 헌법과 같습니다.
이 헌법은 천연적인 생명안에서 절대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의 부활 생명은 이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은 디모데 전서 전체 안에서 보아야 합니다.
디모데전서는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이 육체 안에서 나타나심을 언급하며,
장로의 자격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일하시어 우리가 주님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요구가 있지만,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안에 가장 높은 공급이 있습니다.
이 공급은 신성한 생명, 부활 생명입니다.
형제님들, 여러분이 이것을 믿습니까?
우리 안의 부활 생명이 우리로 하여금 높은 수준의 생활을 한다는 것을 믿습니까?
마태복음 5장 48절은,
하늘의 아버지께서 온전하신 것 같이 여러분도 온전케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 안에서 자랄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 안에서 더 자랄수록 하늘의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는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폭로하시고 더 빛을 비춰주시기 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이러한 소망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영광의소망이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주님 자신을 신뢰해애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께 돌이켜서 우리 안에 있는 생명에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우리 안에 주님이 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망을 가지고?
많이 기도함으로 주님과 동역해야 합니다.
?
2. 어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맡고 싶어한다면,
그는 선한 일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믿을 만 합니다.
?장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성격과 기질과 존재의 문제입니다.
순수한 동기로 장로가 되고자 하는 것은 불순한 동기를 가진 야심과 다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장로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지방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합당한 사람이 산출되어야 합니다.
장로가 되고자하는 열망을 가진 것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이러한 열망을 가진다고 다 장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생명이 자라야 합니다.
장로들은 성도들의 혼을 위해 깨어있도록 반드시 그들의 영을 훈련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내적 존재의 유익을 돌보아야 합니다.
3. 우리는 비반받을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보기에 나무랄 데 없어야 함을 말합니다.
여러분이 잘 못된 일을 했을 때 그 사람에게 가서 배상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난할 것이 없게 됩니다.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장로들은 절제해야 합니다.
신중하며 단정해야 합니다.
극단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신중하다는 것은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어 예민하며 분별이 있는 것입니다.
단정하다는 것은 규모있는 것, 곧 언제나 상황에 알맞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그네 대접하기를 즐거워하려면, 사랑이 필요하고 사람에 대한 관심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또한 장로는 가르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4. 장로들은 술을 즐기기 않으며, 구타하지 않고 너그러우며
다투지 않고,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5. 자기 가정을 잘 다스려야 하며,
매사에 정중함을 지녀 자기 자녀들을 복종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본이 되어야 하고
주님의 긍휼을 위해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좋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낙심하거나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죄들을 처리하고 십자가의 공과를 배워야 합니다.
교회를 돌보는 것은 주로 행정의 문제가 아닌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필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6. 믿은지 얼마 안된 사람은 ?감독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그가 교만으로 눈이 멀어 마귀가 받은 심판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7. 감독은 반드시 외부 사람들에게도 좋은 증거를 지녀야 합니다.
감독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정과 외부사람에게 올바라야 합니다.
의도,동기,성격,태도,말 행위가 올바라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이 장로가 되는 것을 미워합니다.
그는 우리를 손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모든 유혹에서 지켜주시고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여기에 전쟁이 있습니다
마귀는 교만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마귀는 모든 사람들을 파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부 사람들에게 좋은 증거를 지녀야 합니다.
* 그리스도께서 내적으로 비추시는 것이 그분께서 우리를 죽음의 어둠에서 구원하시는 것이다--사9:2, 마1:21-23, 4:16, 고후 4:6
마4:16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빛이 죽음의 땅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비추었다.
오늘의 읽을 말씀
누가복음 1장 78절부터 79절까지에서 사가랴는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여 돋는 해이신 그리스도께서 높은 곳에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둠 가운데서 걷고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이들이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빛 비춤을 받아들였고, 그 빛 비춤이 우리를 구원했다.
그리스도는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되시는 빛이시다(사 42:6하, 49:6하). 이사야서 49장 6절 하반절은 "내가 또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워, 너를 땅 끝까지 이르는 나의 구원이 되게 하겠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민족들의 빛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주셨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이 되시기 위한 것이다. 이 빛은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가져온다.(요9:5, 1:4,9, 8:12)
이것은 지난 사오 년 동안 교회사를 연구해 보고 여러 교파들의 통계들을 비교하면서 우리가 주님 앞에서 성경에 따라 우리의 길을 다시 고려한 다음 얻은 것에 대한 결론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요, 해야 할 일이며, 하나님의 신약 복음의 제사장들로서 가야 할 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먼저 신약의 복음의 제사장 체계를 회복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둘째로, 주님은 그리스도의 몸의 유기적인 본질을 회복하실 것이며 그 결과 각 지체가 살아 있고 그 영으로 충만하고 생명으로 충만할 것이다. 셋째로, 주님은 에베소서 4장을 회복하여 모든 은사 있는 이들이 성도들을 온전케 하여 사역의 일을 할 수 있게 할 것이다. 넷째로, 주님은 고린도전서 14장을 회복하심으로 모든 성도들이 신언자로서 주님을 위해 말하는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주님께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것을 이뤄 내실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적인면에서 볼 때 우리는 느슨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의 때를 지체시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는 천 년이 하루와도 같다. 결국 주님은 그분 자신이 추구하시는 것을 성취하실 것이다. 조만간에 주님은 그것을 이뤄 내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