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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팀씨 형제님의 교통 | ………태그연습
2010-10-06 , 0 vote , 0 sc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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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장로동역자 집회 참석하러 오신 팀씨 형제님로 인하여

계획에 없던 창천동집회를 열어 열린 가정들과 열고 싶은 가정들이 모였습니다..

 

아무 주제도 없었고 메시지도 없었으며 개요도 없는 집회였지만 

형제님의 이 집회가 얼마나 참석한 지체들을 만졌는지 모릅니다..

안배도 없이 다만 부담으로 나와서 인도를 하던 한 형제님이

"오늘 저녁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아무런 막힘없이 흐르기 원합니다"

라고 하는 기도대로 형제님을 통한 주님의 흐름은 정말 막힘이 없었습니다.

 

형제님의 교통은 시종 자연스러운 교통이었고 

첫번째 부담은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에 대한 것이고

두번째 부담은 동역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부담의 두가지 사례는 나비와 연어였고

두번째 부담의 두가지 사례는 듣는 귀와 트럭 그리고 또 하나는

달리기 선수를 골인장면이었습니다

 

첫번째 부담은

다음세대들에게 곤충이나 연어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여 주시면서

우리의 남은 힘있게 봉사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은 장년세대들에게

회복에서 얻은 모든 풍성을 젊은이들에게 모두 쏟아 부어주어야 함을 말씀했습니다.

 

나비는 수천마일을 날아 캐나다에서 맥시코까지 가면서 날아가다가 수명을 다해 죽으면서

알을낳고 새끼를 낳아 이 새끼가 또 날아가고 또 날아가다 수명을 다하면 또 새끼가 날아가고

이렇게 하여 목적지에 도달하는 나비는 원래의 나비가 아닌 수세대 이후의 나비임을 예을 들었고

 

연어는 자기가 태어난 강을 떠나 바다로 갔다가 태어난 곳에 돌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위험과

고난을 통과하여 결국 살아 남은 소수의 연어만이 자신의 새끼를 낳고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누구에게 부을 것인가 회복에서 얻은 유익을 주님 다시 오시는 세대에게

모두 남겨 줌으로서 이들이 주님의 다시오심을 예비하게 하여야 하지 않느냐는 부담입니다

모두가 아멘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우리가 혼자 하려고 하면 1~2년을 하다가 포기하게 되고 다시 하라고 하면

그것 다 해보았는 데 안된다고 이야기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반드시 동반자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몸의 원칙이다라고 하시면서 형제님은

고린도전서 12장 18절을 교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뿐께서 뜻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각각 몸 안에 두셨습니다.

이러한 일은 반드시 동역에 의하여만 이루어질 수 있고 이루어 진다 하였습니다..

 

정말 동역의 귀함에 대한 형제님의 교통은 실제가 있는 교통이었습니다..

형제님은 귀가 트럭이 오는 소리를 듣고 피하는 것이 단지 귀를 위한 것인가 몸을 위한 것인가?

몸의 지체들 중에 귀가 듣지 않으면 몸은 트럭에 치이게 된다

귀가 귀하지 않은 것 같아 보이지만 정말 귀하고 귀는 자신을 위하여 듣는 것이 아니다..

정말 자신을 돌아 볼 때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이었는지를 보게 되고 몸지체들의 귀함을

감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달리기에서 골인지점에 어떤 지체가 먼저 들어가면 그 제체가 영광을 얻는 것인가

아니면 몸이 영광을 얻는 것인가.. 자고할 수 있는 가 ..시기할 수 있는가...

 

형제님의 이러한 몸의 교통은 많이 들었던 교통이지만 형제님께서는 오스틴에서 나타난

몸의 동역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 안산에 나타난 몸의 교통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몸에 대한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은 몸의 느낌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이론이 아닌 실제를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지체들이 이를 공감하고 또 느꼈습니다

 

참으로 엄숙하다 느끼는 것은 언젠가 어떤 형제님의 교통에서 몸의 교통은 사단이 겁을 내지 않지만

몸이 나타나는 것은 사단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교통이 생각이 났습니다.

오스틴에 대한 많은 내용들을 들을 때 이는 캠퍼스 사역만이 주제가 아니라 몸의 동역이 주제이고

몸의 동역에 의한 몸의 실제가 나타나고 있음이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몸의 실제인 오스틴의 형제님들이 수년전 한국에 와서 몸의 실제를 교통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 오스틴의 H 형제님이 첫날 집회에서 교통 후 바로 그날 저녁 7자매님들이 주님 품에 가셨습니다  

다음날 아침 밤을 새우다 시피 주께 이문제를 가져가셨던 H 형제님이 강단에 나오셨습니다. 

형제님은 로마서 16장을 교통하셨습니다. 각 지체들에게 문안하는 이 바울사도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가 나타남을 말하고 바로 이 때가 사단 속히 발 아래 밟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이 이에 저항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참 의미가 깊다고 느꼈었습니다.

 

동역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참으로 동역하고 이로 인한 열매가 얻어지고 있는 실재를 보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운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로마서 8장으로 넘어 12장을 넘어 16장의 몸의 실제가 나타남이 얼마나 귀한지

 

화평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여러분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게 하기를 바랍니다(롬16: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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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인성이 있는 많은 사람을 보기 원한다 | ………태그연습
2010-10-06 , 0 vote , 0 sc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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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지방 교회들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세워진 널판들과 연결하는 띠들과 예수의 인성으로 조성됨으로써 합당한 은사들인 모든 지체들이 필요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세워져 있고 연결되어 있을 수 있지만 여전히 또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유용해야 한다.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지체들이 다 유용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그 몸에 은사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어떻게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오직 예수의 인성으로 조성됨으로써이다.

 

여러해 전에는 내게 이러한 빛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체험이 있었다. 주님을 찬양한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필요가 예수의 인성임을 본다.

과거에 우리는 일종의 어떤 은사들과 성령 침례로 인한 나타남들이 있고, 합당한 훈련으로 어느 정도의 성경 지식이 있으면, 그 후에는 분명히 우리가 유용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결국 예수의 인성이 없이 행한 것은 우리의 어떠함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윗치만 니 형제님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행한 것으로 십 이 인치를 쌓지만 그들의 어떠함으로 인해 또한 십 사 인치를 무너뜨린다고 말하곤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쌓은 것 이상을 무너뜨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떤 것도 행치 않는 것이 더 좋다. 우리는 우리의 성경 교리와 지식으로 어느 정도 건축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예수의 인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건축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손상시킬 것이다. 교회 생활에서 우리는 은사들, 소위 침례나 성경 지식보다도 예수의 인성이 훨씬 더 필요하다.

나는 성경에 대해 많은 지식이 없어도 오히려 예수의 인성이 있는 많은 사람을 보기 원한다.

 

윗트니스 리[예수의 인성과 그 몸의 은사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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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지방)교회 국제 특별집회 현장 전경 | ……… 사진
2010-10-04 , 0 vote , 0 sc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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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03  10:30AM  2010 [지방]교회 국제 특별집회

부산 벡스코 제1 전시장에서 국내및 국제 온지방에서 모여

우리의 중심과 실재와 생명과

모든것 되신 그리스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회복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 들의

기능을 회복 하는것...아멘 

 

 

창원교회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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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여름청대특집] 훈련생 전람 - 주예수 사랑합니다 | ……… 이미지
2010-10-04 , 0 vote , 0 sc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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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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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응답50가지 | ………신약성경
2010-09-30 , 0 vote , 3 sc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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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시기를
 오히려 원하고 계십니다.(요15:7,16)

2.성급한 태도를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자기 자신보다 우리를 더욱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때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때로는 느린 것 같고 때로는 응답이 없으므로
 불안 초조 가운데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3.회개부터 하십시오.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우리에게 죄악이 있을 때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4.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며 기도 하십시오.
 기도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이기때문에
 나의 욕망이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하여야 합니다.

5.하나님이 듣고 계시는 것을 믿으십시오.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그분의 성품의 일부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6.성령 안에서 기도 하십시오.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분이요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시는 기도의 영이십니다.

7.기도한 것을 받은 줄로 믿으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친히 약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은 기도의 생명입니다.(막11:24)

8.상한 심령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셨습니다(잠3:34).
 그리고 상하고 통회하는 자를 멸시치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시51:17)

9.감사함으로 기도 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것을 강조했습니다.
 (빌4:6)

10.용서한 후에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음에 분을 품고
 기도하는 것을 경멸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해 주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11.힘을 다하여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전심으로 기도하는 열정에 사로잡힐 때만
 하나님의 능력이 깃들게 되어 있습니다. (렘29:13)

12.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입술의 사람이 아니라
 무릎의 사람들에게 능력과 감화력을 더해 주십니다.
 그리고 무릎 꿇는 자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13.끈질긴 기도를 하십시오.
 열심히 없는 기도는 죽은 개로 벼룩을 사냥하는 것과 같고
 눈먼 매로 빈대를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눈18:7)

14.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근심, 초조, 불안, 낙심 가운데 기도하고, 기도한 후에도
 계속해서 근심, 초조, 불안, 낙심 가운데 살면
 영원히 기도 응답의 기쁨은 없습니다.(갈6:9)

15.끝까지 기도하십시오.
 끝까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이 깃들게 되어있고,
 능력이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창32:36)

16.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의 생활화, 생활의 기도화가 되면 당신의 짧은 기도에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삼상12:23)

17.순간 순간마다 기도하십시오.
 매순간 매순간 마다 깨어서 기도하는 자에게는
 사탄이 유혹하거나 시험할 겨를이 없습니다.(창24:63)

18.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육신의 부모님께 구체적으로 나의 필요를 요청하듯이
 하나님 아버지께도 구체적으로 기도해야만 합니다.(눅 11:5)

19.믿음으로 기도하십시오.
 믿음의 기도만이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움직일수 있는
 능력입니다.(약 1:6-8)

20.진실하고 솔직하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중언 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진실되고
 정직한 기도를 원하십니다.(마6:7)

21.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기쁘시게 한 자녀에게 모든 것을
 채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마6:33)

22.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작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게 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막14:36)

23.새벽에 기도하십시오.
 성경의 기사와 이적은 거의 다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늦게 하는 기도는 버린 기도입니다.(막1:35)

24.금식하며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 기도 하셨고,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금식 기도 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체험했습니다.

25.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조상들에게 약속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였습니다.

26.면벽 기도를 하십시오.
구약성경의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서 잘못을 뉘우치고
 기도하였는데 그의 기도는 벽을 마주한 면벽 기도였습니다.
 (역대하32:24-26)

27.찬송하면서 기도하십시오.
바울과 실라는 찬송으로
 옥문이 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감옥이 그를 가둔 것이 아니라,바울과 실라가 감옥을 가두었습니다.

28.깊은 기도를 하십시오.
 하늘의 해와 달을 멈출 수 있었던 여호수아의 능력은
 깊은 기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출33:11,수10:12)

29.반복하여 기도하십시오.
 반복의 기도는 물이 바위를 뚫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0.씨름의 기도를 하십시오.
 구약성경의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는 고통을 겪으면서도
 천사와 씨름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31.하나님으로 쉬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을 쉬지 못하게 하는 기도야 말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기도입니다.(사62:6,7)

32.물러서지 않는 기도를 하십시오.
 뒤로 물러가는 만큼 하나님의 능력과도 거리가 멀어집니다.(히10:38)

33.약한 것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약한 것을 강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약한 것을 통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34.기도와 무가를 동시에 만드십시오.
 구약성경의 느혜미야는 무기를 잡은 채 기도 하고
 싸우면서 성벽을 쌓았습니다.(느4:23)
 기도에는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35.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신약성경의 소경 바디메오는 눈을 뜨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부르짖었기에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마 9:27-31)

36.믿음의 밑그림을 먼저 그리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밑그림이 없는 기도는 무정란과 같습니다.
 
37.모호한 기도는 하지 마십시오.
 모호한 기도는 모호하게 응답 받게 되어있고
 구체적인 기도는 구체적으로 응답받게 되어 있습니다.

38.자기를 부인하는 기도를 하십시오.
 주님을 높이고,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 기도는
 기도 중의 최고 기도입니다.

39.기도의 동역자를 만드십시오.
 모세는 산꼭대기에 아론과 홀을 데리고 갔습니다.
 기도의 동역자가 있으면 넘어지더라도 힘이 됩니다.

40.점잔을 떨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끝장보는 신앙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41.교회 일을 앞장서서 하며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일하는 만큼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42.취할 정도로 기도하십시오.
 구약성경의 한나는 취할 정도로 기도했기에
 사무엘을 얻는 하나님의 응답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43.시간을 정하여 규칙적으로 기도 하십시오.
 예수님도 규칙적인 기도생활에 힘쓰셨고
 제자들도 시간을 정하여 놓고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하였습니다.
 (눅22:39,행3:1)

44.마음의 우상을 버리십시오.
 우상이란 하나님 외에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능력 있는 기도를 하려면
 "주님께서 절대적으로 내게 첫째인가?"하는 것입니다.

45.인색한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우물물은 퍼서 써야만 새로운 물로 채워지게 됩니다.
 기도의 새로운 능력을 날마다 체험하려면
 퍼주는 것이 습관화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마7:2)

46.의심하는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의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1:6,7)

47.분노심을 없애 버리고 기도하십시오.
 타인에게 분노심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의 귀를 막아
 자기의 간구를 못 듣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주의 마음은 기도의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막11:25)

48.열정적으로 기도하십시오.
 냉랭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불꽃에 물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49.겸비한 마음으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겸비하게 자신을 낮춘 자의 기도를 잘 들으십니다.
 (눅18:9-14)

50.뜻을 세운 기도를 사십시오.
 구약성경의 다니엘은 단지 기도만 열심히 한 사람이 아니었습 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뜻을 세운 기도였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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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교회형제님들께서(1구역)방문하셧습니다 |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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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교회형제님들께서( 부산교회1구역)방문하셨습니다 |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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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교회형제님들께서( 부산교회1구역)방문하셨습니다 |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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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교회형제님들 방문사진( 부산교회1구역) 입니다 |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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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회 지체들 사진입니다 |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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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교회형제님들(태종대투어) |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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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교회형제님들(태종대투어) | ………태그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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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교회형제님들과 (태종대투어) |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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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교회형제님들 (태종대투어) |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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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장로 동역자 섞임 집회에서의 교통 | ………태그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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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도 4월24일 부터 4월25일간 1박2일동안 250명의 형제님들이

충북 충주시 수안보 상록호텔에서 전국 장로 동역자 섞임집회를 가졌다.

오늘 아침에 현충일 집회 5번 메세지를 추구하면서

문득 그 집회에서 앤드류 형제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났다.

장로들이 교회들 안에서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통을 하시면서

이 형제님께서 대만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소개해 주셨다.

 

나는 우리가 매우 나쁜 전통으로 하락했다고 느낀다.- 우리는 너무 많은 관료제도를 가지고 왔다.

우리는 이 구조와 체계를 제거할 필요가 있고 우리를 자유롭게 살고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

주인 의식의 분위기가 필요하다.

교회의 소위 관리라는 것이 많은 성도들을 죽게 하는 이유가 되게 해서는 안된다. 

많은 때 우리가 더 관리하려 하면 더 많은 문제가 형제들과 자매들 가운데 있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집회소들 안에서 관리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

성도들로 섬기게 하라. 그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하라

모든 형제 자매들이 교회가 그들의 것이라고 느끼게 해야 한다.

성도들이 함께 모일때 여러분은 아빠들 엄마들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그들을 관리하려 하지 말고 그들을 먹이라

나는 모든 집회 장소들이 소위 관리라고 하는 것을 포기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교회의 진정한 기능은 먹이는 것과 목양하는 것이다.

지방교회들 안에서 장로들의 주된 일은 목양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진정한 관리는 사람들을 잘 먹이는 것에 있다.

한 나라의 시민이 잘 먹게 된다면 거기 아무 혼돈이 없으며

이것이 한 국가의 실제 관리에 있어서의 원칙이다.

먼저 사람을 먹일때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먹이는 것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관리의 계급제도는 사람들을 더 배고프게 만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관리를 제거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어떻게 되는지 볼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나쁜 습관을 형성해 왔는데

이것이 우리가 완전히 반대 편으로 돌이켜야 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다만 모든 책임을 내려 놓고 형제 자매들이 모이고 봉사하도록 하라. 거기에 혼란이 있는가 보라.

나는 집회소들 가운데 관리가 없다면 상황은 오늘 보다 훨씬 좋아 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오늘 많은 연장자들이 젊은이들을 과다하게 감금한다.

어떤 지방에서는 소위 장로들과 인도하는 이들이 너무 많은 사슬들을 감아 두었다.

성도들의 영은 충분한 공급을 받지 못하였고 충분히 자유를 받지 못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것을 해체해야 한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실  때 일꾼들과 장로들이 있었다.

그것은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이러한 위치들이 통제를 위한 체계나 조직이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완전히 해체 되어야 한다.

교회의 증가를 더디게 하는 것에는 두가지 부족함이 있다.첫째 목양이 부족하다.

양떼에게는 영적인 공급이 부족하다. 둘째는 감독은 적고 관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다.

교회를 관리 하는 것과 교회를 감독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관리 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일을 하는 것 즉 자신이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이다.

감독하는 것은 다른이 들이 그것을 하게 하고 책임을 갖게 하면서 당신은 그것을 살펴 보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교회 생활 안에는 관리 하는 것과 담당하는 것이 너무 많다.

인도하는 이들과 지역 인도자들과 그룹 인도자들은 모든 일을 그들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으며

성도들에게 그 일을 나누어 주지 않고 있다.

우리는 감독하는 길을 취하여 우리가 감독하고 있는 동안 모든 형제 자매들이 그 일을 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성도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우리가 그들을 지도해 줄 수있고

그들이 실수 할 때는 수정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다.

그들이 올바른 방식으로 하지 않을 때에는 그들을 권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전국 장로 동역자 섞임 집회 개요에서 발췌)

 

 

다니엘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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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바꾸심 | ………태그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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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3:7 요한은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침례 주는 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독사의 자손들이여, 누가 여러분에게 다가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 주었습니까?
(9) 여러분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 돌들에서도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일으키실 수 있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주전 200년경에 형성된 엄격한 유대인의 종교적 당파였습니다. 그들은 우월한 성결 생활, 하나님께 대한 헌신, 성경에 관한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사실상 그들은 가장된 행위와 외식으로 타락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유대교 가운데 또 다른 당파였습니다. 그들은 부활과 천사들과 영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침례자 요한과 주 예수에 의해 독사의 자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3장 9절에 있는 요한의 말은 그가 전파한 천국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출생한 사람들로 구성되지 않고 믿음에 의한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구성됨을 분명히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메시야의 땅에 속한 왕국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왕국입니다. 요한은 또한 그들에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는 하나님이 능히 돌들을 일으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요한의 말은 하나의 강한 지적이었으며 사실상 시대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예언이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천연적인 출생이 문제가 아니라 두 번째 출생 즉 영적인 출생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이 없는 돌로 태어났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분의 산 아들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상기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에 관한 한 우리는 생명이 없는 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죄에 관한 한 우리는 죄로 충만했고 죄 안에서 활동적이었습니다. 우리가 회개한 날 우리는 주 예수를 믿었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산 자녀들로 만드셨음을 인하여 주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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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교회&부산교회 섞임집회 |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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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훈련집회메시지5 | ………구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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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5

-R. K-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이라는 표적과

놀라우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밝혀줌

 

성경: 사 7:11-14, 8:8, 9:6-7, 63:16, 64:8

(사 7:11-14)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12)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13) 그 때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 8:8) 유다로 밀려들고, 소용돌이치면서 흘러, 유다를 휩쓸고, 유다의 목에까지 찰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께서 날개를 펴셔서 이 땅을 보호하신다.

(사 9:6-7)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7)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사 63:16)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여도, 오직 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옛적부터 주님의 이름은 '우리의 속량자'이십니다.

(사 64:8)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이 메시지를 통해서 우리는 기회를 잡아 어느 정도 전진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아는데서 전진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을 아는 것에 관하여,

호“6:2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 앞에서 살 것이다”.

“6:3 우리가 주를 알자. 애써 주를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여러분 여기서 본문을 볼때 여기에 여호와를 알기를 추구하자라고 말합니다.

2절은 주님의 부활에 관련된 구절입니다. 그분께서 삼일 만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틀 후에 살리신다고 할때, 이틀은 사실 어둠 가운데에 있는 낙심한 기간이지만, 이틀이 지난 후에 제 삼일에는 우리를 다시 살리십니다.

우리를 살리실 때 우리는 그분을 추구하게 되죠.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 부활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리라. 그분의 임재 앞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우리는 아직 신학적으로 학술적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 가운데 있는 사람으로서 그분의 임재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으킴, 이러한 부활에 근거하여 이러한 그분의 임재 안에 사는 것은 다만 그리스도를 알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구할 때 그분이 나오심, 영으로서 나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적시는 분으로서 나오시죠. 이러한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합니다. 그 뜻은 제가 느낄때 내 안에 내적인 그러한 동틈이 있다는 것입니다.

속에서부터 빛 비춤이 있어서 마치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신선케하고 깨끗게하는 공급하는 비와 같이 땅을 적셔서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우리가 이제 사 7장과 9장을 보게 될텐데, 우리는 거룩한 땅에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구절은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에 관해 가장 중요한 두 구절의 예언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저는 아주 엄중하게 말합니다. 이 특별집회의 특별한 개요를 볼때 우리의 영과 생각은 하나의 조절될 필요가 있습니다. 조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제가 말하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다만 영감을 위한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 메시지는 주님을 아는 것에 관한 체험하는 것을 추구 하는 것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여기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은 주님을 체험하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얻은 뒤에 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급히 체험하고자 한다면 저는 그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체험하고자 합니까?

엡1장에서 바울이 기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그분을 온전히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계시를 위한 기도이다. 그것은 부끄럼 없는 삼일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자하는 부끄럼 없는 기도였습니다.

그 후에 엠3장에서 그는 체험을 위해 기도했죠. 우리가 속사람 안에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영을 통해 강건케 되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거처를 정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빌 3장에 동일한 원칙으로 말합니다. 바울은 거기서 기꺼이 사실 그렇게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아는 지식의 탁월함을 인하여 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탁월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성경적인 방식으로, 객관적인 방식으로 그분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좋은 땅이신, 모든 풍성이신 그리스도를 다만 말씀 안에서 기름 바름으로 알지 못한채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신 8장에서 거기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탁월함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의 본을 따라서 우리가 그분을 알기를 원한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이럴때 우리는 참되게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의 기대는 주님께서 이 메시지를 통하여 우리를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난 사람들로서, 부활된 사람들로서, 그분의 임재 안에 사는 사람으로서 주님께 관한 이러한 이사야서의 계시를 통해 그분을 알고, 그분을 귀히 여기며, 사랑하며, 그분께 열어드리며,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을 누리며,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그 목적은 그분을 단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Ⅰ. 하나님의 경륜에 관하여, 구약의 역사서들과 신약의 성취 사이의 내재적인 연결은 이사야서 7장 14절과 9장 6절에 있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 자신께서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연합시키고자 하셨다는 것을 가리킨다?요 1:14, 눅 1:35, 마 1:18, 20.

이사야서에는 여러 왕들이 나오는데, 이사야는 선지자로서 그들과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앗시리아? 가 오만하게 그 성을 성취하겠다고 말할 때, 이사야에게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사야서에 있는 이런 신언은 특별히 7:14과 9:6에 있는 이러한 신언의 말씀은 구약의 역사서와 하나님의 경륜을 연결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9:6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얻었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이 구절들은 하나님 자신께서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신성과 인성을 연합시키고자 하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히 중점적인 강조가 있는 구절입니다.

바로 우리가 메시지 2번에서 말하고자 했던 그 하나님께서 이사야가 보았던 그 하나님께서 또한 그분에 관해서 벤슨 형제님이 신실한 말씀을 전해주셨죠. 이러한 하나님이 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한 아기가 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한 아들로 우리에게 주어지셨습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Ⅱ. 이사야서 7장 14절에는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이라는 표적이 있다.

(사 7:11-14)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12)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13) 그 때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A. 여호와는 유다 왕 아하스가 표적을 구하기를 원하셨다(사 7:10-25). 이 표적은 처녀에게서 태어나신 그리스도께서 도래하시는 것과 관련된다.

B.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바로 그분이 처녀에게서 태어나 인간 아기가 되실 것이고 그분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불리실 것이라고 예언했다?사 7:14.

1. 처녀가 한 아들을 잉태하고 낳는다는 표적은 창세기 11장부터 요한계시록 22장에 걸쳐 성경 전체를 포함한다.

여러분, 오늘 내일 테스트에 있을 그 문제에 한 가지라도 대답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개요의 이 첫 단락에 있는 이러한 내용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에 징조를 볼때 이 징조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제한된, 단진 주 예수님의 마태복음에 기록된 그러한 출생에 관한 그러한 징조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에 있는 모든 것, 창 11장부터 계 22장에 걸친 모든 항목들을 포함하는 징조입니다.

이 징조는 여전히 지금도 성취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집회에 있는 우리들은 바로 지금 여기서 물론 이것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단체적인 성취의 발전이요, 이 징조의 성취의 일부입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이라는 이 징조가 하나님께서 바빌론을 처리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고, 그리고 바빌론이 앞장서서 하나님과 그분의 권위를 대적했기 때문에 이 임마누엘의 징조는 바로 이 전쟁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이 전쟁의 요소 안에는 여전히 우리가 이 말씀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 가운데 하나의 존재가 있는데, 그는 이 징조가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것을 원치 않는 한 존재가 있습니다.

 

2. 이 표적의 실지적인 성취는 이사야의 아내가 한 아들을 낳은 것이었고, 궁극적인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육체 되심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중 본성, 곧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가진 아이로 태어나셔서, 결과적으로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셨다?사 8:3, 마 1:23, 눅 1:35.

저는 두 아들이 있는데 작은 아이가 태어날 때 사실상 제가 좀 도왔죠.

그런데 제가 인정해야 할 것은 그 아이들은 이중 본성을 가진 아이들은 아니었습니다. 아마 사탄의 본성을 포함한다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여기서 신성하고 인간적인 본성을 가진 아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박사들이 집 안에서 그 아기를 발견했을 때 그들은 엎드려 그 아기를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한 아기를 경배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 이 종교적인 상상에 의하면 구유에 갔다고 생각하지만, 그 박사들은 집으로 갔죠. 다시 말해서 어느 정도 이것은 신성하고 인간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그 아기를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인성을 내어버리고 신성만을 경배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그러한 이단이겠죠. 그러나 이 박사들은 아기 예수, 바로 두 본성을 가진 그 이중 본성의 아기를 경배한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이 이중 본성은 곧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가진 아이로 태어나셔서 결과적으로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되셨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궁극적인 성취 안에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다만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이름이 아닙니다.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명령할 때 그 이름을 예수라 부르라고 했습니다.

그가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분이시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체험한 사람들, 그들이 그분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는데 그분이 계신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이죠. 그분께서 오실 때 하나님이 오십니다. 그러므로 이 임마누엘의 실재는 실재의 영이 우리 안에 오셔서 단체적인 임마누엘을 산출하심으로 바로 단체적인 그리스도를 산출해서 우리가 어느 곳에 갈 때, 우리가 또한 주님의 이름 안에서 함께 모일 때,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말할수 있게 됩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C. 임마누엘의 땅(사 8:8)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신 임마누엘의 영토인 거룩한 땅, 유대 땅이다. 앗시리아 군대가 침범한 이 땅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천년왕국을 세우시기 위해 상속받으실 땅이며, 천년왕국은 그분의 두 선민, 곧 땅에 속한 백성인 선택받은 유대인들과 하늘에 속한 백성인 선택받은 믿는 이들로 이루어진다.

임마누엘의 땅을 말합니다. 이 요소에는 전쟁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요점에서 우리가 이 땅을 언급할 때 우리는 지리학적으로 말할 때 사실상 그 중동의 한 땅이죠. 언약에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따라 주신 땅이죠. 이 땅은 결국 하나의 경계가 있게 되는데, 그 땅은 임마누엘의 땅이라 불립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국제적인 관계에 관여하길 원치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예언의 말씀, 바로 임마누엘의 땅을 언급하는 이 말씀을 관심합니다. 그러므로 사 8:8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 8:8) 유다로 밀려들고, 소용돌이치면서 흘러, 유다를 휩쓸고, 유다의 목에까지 찰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께서 날개를 펴셔서 이 땅을 보호하신다.

오~임마누엘이여. 그의 땅. 주님의 회복은 마땅히 또한 견고하게 서서 유럽 땅에서, 당신의 땅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당신의 땅 임마누엘. 어떤 이들은 결정해서 이스라엘 땅을 멸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예언이 있습니다. 이사야서에 예언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 그들이 기도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럴때 하늘을 가르고 주님이 오셔서 그분이 무슨 일을 하실지 아십니까? 그분은 하늘을 가르고 그분의 군대와 함께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만간 우리가 이기는 이들 안에 들어간다면 우리는 임마누엘 땅에 가게될 것입니다.

 

D. 우리는 사탄이 바빌론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경륜을 대적하는 것과 관련해서, 처녀가 아들을 잉태하고 낳는 이 표적, 곧 그리스도의 육체 되심이라는 이 표적을 상고해 보아야 한다?사 13:1, 19, 14:4, 11-15, 21:9, 47:1, 48:20.

이것은 개요 안에서 우리가 좋아하는 어떤 구절, 부분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이 사실은 그 안에 전쟁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창 11장에 볼때 인류의 네 번째 단계의 타락이 있습니다. 그 때 인간정부가 세워지죠. 그래서 아주 능력있는 사람, 니므롯 같은 능력있는 자가 와서 다른 사람들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자신의 능력 안에 둡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사람들을 체계화하는데 단체적으로 하나의 사람의 통치 아래 들어가게 하죠. 그리고서 어떤 순간에 그들은 말합니다. ‘이제 우리가 탑을 쌓고 성을 만들자.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 이름을 내자.’ 이것은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요,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 개요 후반에 올때 그의 정부가 사실 하나님은 이러한 통치적인 행정 안에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게하고, 일시적으로 타락한 그러한 인류를 잠시 제쳐두고 부름받은 족속, 아브라함의 족속을 불러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반대가, 하나님과 그분의 경배에 대한 반대는 다 바빌론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1. 성경에서 사탄의 일의 결과는 바빌론이다. 사탄이 하나님을 대적한 것은 바빌론으로 시작했고 바빌론으로 끝마칠 것이다?창 11:1-9, 계 17?18장.

여러분, 단 2장의 큰 형상을 보죠? 거기에 느부갓네살이 금머리로서 또한 열발가락의 시대에, 바로 로마시대 바빌론의 본성을 가진 그 로마시대에 로마제국에 다시 바빌론이 시작됬죠. 그래서 적그리스도가 이 성 안에서 열왕을 따르게하고 이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 전쟁의 초점은 바로 임마누엘의 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서 말할 때 악한 정사와 권세들이 우리가 말하는 것을 무효화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것, 우리가 말하는 것을 무효화하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의 승천하신 그리스도께 간구합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묶은 것을 묶습니다. 우리는 계속 전진합니다.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고 바빌론과의 이러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임마누엘이 결국 이기실 것입니다. 또한 이 천년왕국의 때에 이 징조는 확장되어서 새 예루살렘으로, 궁극적으로 단체적인 임마누엘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때까지의 사이에는 하나의 분투하는 것이 있습니다.

 

2. 바빌론은 하나님을 분노하시게 하는 면에서 최악의 나라이며, 그 나라의 왕은 사탄과 하나였다(사 14:4, 11-15). 그러므로 바빌론은 인간 정부의 시작과 결론 둘 다로서 하나님의 첫째가는 원수이고, 하나님에 의해 철저히 심판받고 유죄 판결 받고 처벌받을 것이다?계 21:9, 렘 51:8-9, 계 14:8, 18:2.

하나님께는 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옛 창조라는 문제이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다섯 번째 오셔서 그분이 해결하셨습니다. 그분의 모든 것을 포함하신 죽음 안에서 처리하셨죠.

두 번째 문제는 인간정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륜을 성취하기 위한 합당한 질서를 이루시기 위하여 그분은 인간정부를 세우셨죠. 그러나 이 인간정부가 하나님을 배역하여 사람을 높이고 우상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정치적인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영 안에는 마땅히 하나의 정말 인간정부 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혐오하는 그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배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무질서하게 행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정복하고 바울이 로마 정부에 순종한 것처럼 우리도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만, 우리의 영 안에는 하나의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의 느낌이 있습니다.

미국을 볼때 1958년도에 비교해 본다면 정말 오늘날의 상황은 너무나 형편없습니다. 정말 공허하고 어리석고 공허하고 인간정부의 이러한 상태를 보게 됩니다. 서로 그러한 왕권을 놓고, 자기 권한을 놓고 싸웁니다. 그러므로 유럽에서 어떤 일이 결국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이러한 전체적인 독재적인 한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철저하게 심판하고 유죄판결하는 인간정부를 처벌할 것입니다.

 

3. 바빌론이 끝나는 것까지도 처녀가 임마누엘이라 불리는 아들을 낳는 표적에 포함된다?사 7:14, 8:8.

그러므로 이제 연습문제의 하나의 답변을 얻어갈수 있습니다. 여기에 바빌론이 있기 때문에 그 근원, 창 11장의 바벨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이것이 새 예루살렘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계 22장까지 가야합니다. 그럴때 새 하늘 새 땅에서 거기에는 마귀도 죄도 죽음도 이러한 전쟁도 없고 바빌론도 없습니다. 거기에 신부가 예비되고 신부가 나타나기 전에 바빌론은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서 하나님께서 바빌론을 처리할 때 우리는 큰 찬양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그 예언의 성취를 보겠습니다.

 

E. 이사야서 7장 14절에 있는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의 성취는 마태복음 1장 20절부터 23절까지에서 볼 수 있다.

1. 인간 처녀에게서 태어나신 아들이 임마누엘, 곧 사람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a. 하나님께서 처녀 마리아 안에 성령으로 나셨다?마 1:20.

천사들이 요셉에게 말했죠. ‘두려워말고 마리아를 데려 오십시오. 그 안에 낳은 그분은 성령으로 나신 분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그 이전에 사실 그 마리아에게서 아기가 태어나기 이전에 무언가 성령으로부터 신성한 것이 그 마리아 안에 태어났습니다. 놀랍습니다. 여기에 인간 남자는 배제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잉태가 있는데, 누가가 말한 거룩한 것이 이 안에 출생한 것입니다.

 

b.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아기는 ‘하나님-사람 아기’, 곧 신성하고 인간적인 아기였다.

2. 하나님 자신께서 오셔서 하나님과 사람 모두인 하나님-사람, 곧 여호와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되셨다?마 1:21.

하나님 그분이 오셔서 예수님이 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에수님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 하나님-사람 아기가 바로 두 본성, 이중 본성을 가진 이 아이가 바로 여호와 구원자이십니다.

 

3. ‘예수’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인 반면에, ‘임마누엘’은 사람이 부른 그분의 이름이었다?마 1:23.

a. 그분은 그분을 체험한 이들에 의해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 불리셨다.

잠시 여기서 말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서에서 알고 있는 바대로 주님의 외적인 그러한 모습을 살펴보죠. 그는 아름다운 모양이 없으셨죠. 저는 아주 경외하는 방식으로 말합니다. 사실 최선을 다해서 사실 사람들에게 매력이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나셨죠. 그는 적어도 일곱 자녀 중에 한 분이셨죠. 그 어머니는 마리아였죠. 그리고 네 형제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자매들은 복수로 언급되었고, 적어도 둘 이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또 그분은 목수로 일하셨죠. 그러므로 여기 그분에게는 아름다운 모양도 없고,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체험한 사람들은 비록 외적으로는 그렇게 매력적이지는 않았지만 사실 그분과 함께 있은 후에는 말할수 있었습니다.

‘오, 당신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우리와 함께 있을때 예수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이것이 하나의 원칙입니다. 우리는 아주 능력 있는 사람을 아주 아주 엄청난 능력 있는 사람으로 나타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아주 구변이 있고, 지성이 있어서 능력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외적으로 예수님의 인생을 살아냅니다. 아주 평범하고 어느 면에서 인간적인, 일상적인 생활을 하죠. 그러나 뭔가 신성한 한 분이 우리 안에 사십니다.

결국 사람들은 말하게 되죠. ‘아, 이 사람은 내 옆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는 말도 잘 하지 않고, 그런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것 같다.’이런 간증이 어떠한 간증입니까? 주님의 회복은 임마누엘입니다. 유럽에 가서 임마누엘로서 그곳에 가십시오.

그 경건치 않은 프랑스에 가서 임마누엘이 되십시오. 프랑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말할수 있게 합시다.

 

b. 주 예수님을 더 많이 체험할수록, 우리는 그분께서 임마누엘이시라는 것을 더욱더 알게 될 것이다.

때가 올때 이러한 상황,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때가 올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기 서서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저의 가장 큰 위로는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 안에 모인다면 나는 그들 중에 함께 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때 그 이름은 예수님의 이름이고,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함께 모여서 한 시간 동안 여러분이 그룹을 지어 추구할 때 여러분의 마음을 주님께 돌이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주님을 누리며, 결국 그럴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앞 줄에 있는 형제님들, 일주일 후에는 어디에, 한 달 후에는 어디에 있을 겁니까?

일년 후에는 어떤 사람은 연구하고, 어떤 사람은 일하고, 어떤 사람은 봉사하고, 어쨌든 제가 말할수 있는 것은 여러분과 주님은 항상 매일 함께 할 것입니다. 좋은 날이든 나쁜 날이든 기쁜 날이든 슬픈 날이든 빛나는 날이든 어두운 날이든 즐거운 날이든 슬픈 날이든 어떠한 날이든, 그분은 임마누엘이실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임마누엘이심을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이 노선에 따라 기도할수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필요한 체험을 주십시오. 당신을 알고 임마누엘로 알수 있는 그러한 체험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F. 실지적인 임마누엘, 곧 삼일 하나님의 임재는 실재의 영이다?요 1:14, 14:16-20, 고전 15:45하.

마 28:20, 우리가 말한 것처럼, 주님은 내가 항상 여러분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요 14장에서 내가 너에게 오리니, 바로 실재의 영이 너희와 함께 하리라. 그러므로 실지적인 임마누엘은 바로 지금 우리와 우리의 영 안에 계신 실재의 영입니다. 좋은 소식이죠. 임마누엘이 여러분의 영에 함께 하십니다.

 

1. 그분은 우리의 모임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 18:20, 28:20.

2. 그분은 오늘날의 임마누엘의 땅인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딤후 4:22, 사 8:6-8.

G. 임마누엘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다?빌 1:19.

1. 그분은 먼저 우리의 구주이시고(눅 2:11), 그 다음에 구속자이시고(요 1:29, 롬 3:24), 그 다음에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고전 15:45하),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을 포함하신 내주하시는 영이시다(요 14:16-20, 롬 8:9-11).

2. 사실상 신약 전체의 내용은 임마누엘이고(마 1:23, 18:20, 28:20, 계 21:3),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이 위대한 임마누엘, 곧 단체적인 그리스도의 한 부분이다(고전 12:12, 골 3:10-11).

전시간 훈련, 애너하임 훈련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사실 여러분의 체험이 이와 같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진지하게 어떤 사람과 함께 자신을 열고 교통을 할때 이러한 교통 가운데서 어느 정도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느끼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여러분이 교통하는 그 상대가 또 여러분 자신이 바로 위대한 단체적인 임마누엘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주의 회복 안에 교회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는 임마누엘입니다. 단체적인 그리스도이죠.

 

3. 임마누엘의 표적은 새 예루살렘으로 완결되는데, 새 예루살렘은 임마누엘의 집대성, 곧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의 총체일 것이다?계 21:2-3, 10.

제가 말하지만, 이것은 아주 차분한 순수하게 차분하게 흐르는 그러한 메시지입니다. 무엇이 계획되는지 그러한 가운데서 여러분은 느끼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지속적인 바로 임마누엘의 그 징조의 성취 아래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다만 마 1장에 나오는 그런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18장의 예수님이시오, 28장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지금 바로 단체적인 그리스도이신 바로 임마누엘이십니다.

 

Ⅲ. 이사야서 9장 6절과 7절은 놀라우신 분이신 그리스도를 밝혀준다.

우리가 이러한 구절이 어느 정도 익숙하기 때문에, 물론 우리는 익숙함을 의뢰하지 않죠.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A.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태어난 한 아기와 우리에게 주어진 한 아들로서 언급되신다?사 9:6.

(사 9:6-7)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7)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다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위대한 엄청난 발전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한 아이가 태어난 때로부터, 아들이 주어진 그때로부터 제가 어떤 아주 즐거운 구절, 어떤 기쁨의 복음 그러한 구절들을 제가 언급하곤 하는데, 요 3:16과 같은 구절들이죠.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제가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주실수 있으실까요? 여기 6절이 말합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다고 말하죠. 그러므로 아들은 바로 독생자이십니다. 이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죠. 여기에 중심적인 아주 중요한 항목이 있는데, 아들은 한 아기의 출생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아기는 바로 7:14에 언급된 그 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기서 ‘우리에게’라는 그러한 표현을 강조했는데, 여기에 사상이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며 또한 체험적인 것이라는 겁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은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어떠함, 그분의 존재와 행사가 다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어깨에 있는 정사를 메었죠.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하나님께는 두 체계가 있습니다. 우주를 운행하는 두 체계가 있는데, 하나의 체계는 은혜의 체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이 은혜의 체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죠. 우리를 또한 구속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그분 자신에게 돌리셔서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또한 화목하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 은혜의 체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형제자매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또 다른 체계가 있는데 그 체계는 바로 행정적인 체계입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가 아니라 천사를 창조하실 때 세우신 체계입니다. 그 행정적인 통치체계가 세워졌을때 하나님의 갈망은 이 신성한 정부가 이 땅에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또한 땅에서 배역이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부, 하나님의 통치가 세워질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 53장에서 말한 것처럼, 주님은 속죄제물로서 자신을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허물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 매 맞으셨습니다. 놀라운 그림이었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놀라운 그러한 구속은 그 후에 있는 유기적인 구원까지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오시기 위한 것입니다. 신성한 통치가 한 아기의 어깨 위에 놓여졌습니다. 또한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아주 필사적으로 긴급한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기꺼이 빛 비춤을 받아서 바로 하나님의 신성한 통치의 빛 비춤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것이 우리 가운데서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무효화할 정도까지 은혜를 이용하려는 태도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체계에서 그는 하나님 원하시는 바대로 그분은 행하시기 원합니다. 통치를 수행하기 원하심으로 이 땅에서 하나의 영역을 얻으심으로 그 안에서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즉시 보게 되는데, 바로 그분의 어깨 위에 정사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알고 존중하고 귀히 여기고 이것에 복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아기와 아들의 한 방면은 우리는 신성한 온 땅의 그 통치가 하나님-사람 아기 위에, 그 어깨 위에 주어졌고 그 아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목적은 그 정사, 그 통치가 그 안에서 그분은 기묘하신 놀라운 조언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 2장에서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엎드려 그분을 경배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저는 잘 모르지만, 거기에 하나의 느낌이 있었던 것이죠. 이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다. 이 아기가 하나의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것은 더 이상 진부한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한 아기가 태어났는데 그분의 이름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또한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영원하신 아버지이십니다.

1. ‘우리에게’라는 말은 이것이 교리가 아니라 체험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2. ‘우리에게’가 반복된 것은 강한 강조를 의미하며, 이 구절에 계시된 것은 모두 매우 직접적이고 주관적이며 체험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대한 것임을 보여 준다.

여러분 나에게 대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습니까? 이 아기가 여러분에게 주어졌습니다. 한 아들을 여러분에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을 안다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들이죠. 그분에게 구했을 것이요, 그분이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바로 지금 주고 계십니다. 바로 그분의 아들을 주고 계십니다. 그분이 그분의 독생자 외에 더 무엇을 주실수 있습니까? 이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아기의 출생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3. 그리스도는 아기, 아들,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아버지, 화평의 왕으로서 우리의 체험을 위한 분이시다?사 9:6.

우리 가운데 화평이 필요한 분이 있습니까? 화평을 갖기 위해 여러분에게 왕이 필요합니다. 바로 화평의 왕이시죠. 그분의 어깨 위에 신성한 통치가 있습니다. 그분이 이 통치가 확장될때 그분의 화평 또한 확장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기꺼이 신성한 통치가 우리 안에서 확장되도록 허락해 드린다면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집을 만드신다면 이 그리스도의 화평이 우리 마음 안에서 중재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을 위한 것들이죠.

B. 우리에게 태어난 아기는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신성하시고, 우리에게 주어진 아들은 신성하시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항목들이 나옵니다. 이 항목들은 이미 분명하게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죠. 그러나 여러분이 추구할 때 이 항목들에 초점을 맞추어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1. 신성한 아들께서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아기의 출생을 통해 주어지셨다?요 3:16.

요 3:16은 사 9:6의 성취입니다. 9:6에 하나의 예언이 있죠. 또한 요 3:16에는 그 성취가 나옵니다.

 

a. 이사야서 9장 6절에서 ‘아기’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함축하고 사람을 함축하며,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을 함축하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로 함께 연합된 것을 함축한다.

b. 인간 처녀에게서 태어나서 신성한 본성과 사람의 본성을 모두 가진 이 아기가 또한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신성한 본성 안에서 주신 아들이다.

이제 우리가 볼수 있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게 7:14과 9:6이 조화를 이루는가를 보게 됩니다.

 

c. 이사야서 9장 6절에 있는 태어난 아기가 7장 14절에 있는, 처녀에게서 태어나시고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신 분이다.

다음 항목을 저는 사랑합니다. 우리가 이 영을 만졌죠.

 

2. 영원하신 아버지는 우리에게 한 선물을 주셨는데, 그 선물은 하나님-사람이 되신 그분의 아들이었다?요 3:16, 4:10, 롬 6:23, 요일 5:11-12.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십니까? 그분은 다만 우리에게 보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직접 주실수 없죠. 하나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신성한 잉태, 바로 한 처녀의 태의 잉태가 필요하고, 아홉 달 동안 거기서 형성되는 것이 필요하고 그리고 출생이 필요하죠. 그리고서 성장하셔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따라 볼때 결국 그분은 장성한 한 사람이 되셨죠. 그리고서 33년 반이 지난 후에 그분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 제물로서 구약의 제물의 성취로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그 예표를 바로 놋뱀의 예표를 완성하기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리신 후반부 세 시간 동안 그분을 보셨을때 그분은 사랑하는 아들로 보지 않으시고 하나의 뱀으로 보셨습니다. 예표의 성취를 위한 뱀이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들이 바로 그분의 몸에 옮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의롭게 심판하시고 죽음에 넘기시고 우리의 대속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날 때 모든 부정적인 것, 온 우주 가운데 부정적인 것들이 다 끝났습니다. 그럴때 대적이 일어나서 이러한 정사와 권세가 달려들어서 그분 바로 그리스도를 둘러 쌌습니다. 그럴때 거기에 전쟁이 십자가에서 일어났습니다. 바로 궁극적인 아들을 주시는 그 일을 방해하기 위해 그가 나타났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 벗어버리시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부끄럼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럴때 우리의 사랑스런 하나님-사람은 마지막으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여 당신의 손에 나의 영을 맡깁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숙이시고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C.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기의 이름이고, 영원하신 아버지, 곧 신격에서의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이다?사 63:16, 64:8, 요 5:43, 10:30, 14:10, 26.

영원하신 아버지가, 사실 조지 워싱턴이 이 나라의 아버지다. 에디슨이 발명의 아버지다. 전기의 아버지다. 이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런 표현들은 가리워진 눈 먼 전통적인 신학자들의 말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결코 이사야서를, 사 9:6을 합당하게 받으려하지 않았고, 받으려하지 않으려는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들이 성경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이것은 해석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분명하다. 이것의 내용은 분명하지 않느냐’라고 말하죠. 제가 들어볼때, 동역자들이 긴장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그는 뭔가 그 단어가 의미가 그대로 그 안에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조적인, 그 내용, 그 단어 안에 이미 그대로 담겨져 있다라고 말하죠. 그러므로 분명하다는 것이죠. 사실 그 말은 그 의미 그대로입니다. 바로 아기의 이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그 아들의 이름이 영원하신 아버지입니다. 그러므로 삼일성에 관해 말할 때 우리는 아주 전혀 다른 바로 전통적인 조직 신학과는 다른 관점을 취합니다. 사실 전통적인 조직 신학은 그러한 분리시키는 원칙을 따르죠. 그러므로 말합니다. ‘아, 아들이 아버지라고 말한다면 신격의 삼일성의 셋을 혼동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지만, 분별해야 한다’라고 말하죠. 그러나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이것을 포함하는 원칙을 따릅니다. 서로 간에 포함된 원칙, 이 원칙에 따라 말하자면 아버지, 아들, 영은 물론 구분되죠. 신격 안에서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구분되지만, 그러나 그들은 결코 분리될수 없는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우선은 사람들이 존중하는 그런 사랑스런 형제님들을 폭로하기를 원치는 않지만, 그러나 어쨌든 사 9:6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쓴 책을 보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영원하신 아버지에 대해서 말할 때 아버지와 아들은 분리되었다라는 표현을 그의 책에서 말했습니다. 저는 말합니다. ‘이것은 이단이다. 당신은 신격을 나누고 있다. 그것은 사실상 삼신론이다. 당신이 개인적으로 삼신론자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의 신학은 그러하다.’그러므로 우리는 당분간 몇 분 동안 사 9:6을 바로 요한복음 전체의 관점에서 그것을 보겠습니다. 특별히 요 14장이죠. 우리는 결코 독립된 이런 한 구절을 가지고 성경의 말씀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구절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할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심지어 이단들이 행하는 방식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많은 여러 구절을 가지고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죠. 또한 온 성경의 문맥을 따라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빛 가운데서 우리는 결국 담대하게 말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인 것처럼 이 아들은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D. 이사야서 9장 6절은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아들이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계시한다.

1. 이사야서 9장 6절에서 아들은 두 가지 주된 의미를 가진다.

a. 첫 번째 의미는 그분께서 인간 처녀에게서 태어나 인간 처녀에게 속한 아들이시라는 것이고, 두 번째 의미는 그분께서 또한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시라는 것이다?사 7:14, 마 1:23, 눅 1:32.

이 말은 천사가 마리아에게 했던 말이죠. ‘너에게 태어나신 분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하셨습니다. 여기서 잠시 부록의 말씀을 하겠습니다. 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말할 때 사실 여러분 하나님-사람의 생활이라고 말할 때 여러분, 우리가 가장 높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고 부름 받을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지극히 높으신 분의 많은 아들들을 언급했죠.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복제와도 같습니다. 한 분의 높으신 분의 아들이 있을뿐 아니라, 많은 아들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순과 열매가 재생산을 우리에게 가져왔기 때문이죠.

 

b. 마리아의 아들로서 인간 본성을 가지신 아들은 태어나셨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로서 신성한 본성을 가지신 아들은 마리아의 아들의 출생을 통해 주어지셨다?눅 1:31-33.

그러므로 이 현대 신학자인 자유주의 신학주의자들, 또한 모든 교파들, 모든 신학교의 교수들, 여러분들은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이 처녀로부터 출생을 통해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에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요셉은 결코 주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주 예수님의 아버지는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분은 그분의 아들의 신성하고도 인간적인 아이의 출생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c. 이 놀라우신 아들은 인간적인 근원에서 태어나셨고 신성한 근원으로부터 주어지셨다. 그분은 인간적이시면서 동시에 신성하시다?요 3:16, 갈 4:4.

2. 이사야서 9장 6절에 따르면 우리에게 주어지신 아들은 영원하신 아버지, 영원의 아버지, 곧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시라고 불리신다.

이제 적절한 때에 DCP에서는 아주 놀라운 탁월한 아주 합당한 사람의 마음을 관통시키는 아주 완전한 기사를, 사 9:6에 관해서 출판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이 가르친다고 말하는 그러한 말씀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이 말씀을 전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DCP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DCP를 공급하고 함께 서 주십시오. 그들을 덮어주시고 이러한 전쟁에서 그들이 행할수 있도록 도우십시오. 이제 그 기사가 마지막으로 준비되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a. 신격에서의 아버지는 영원 아버지이시고, 이 구절에 따르면 아들 또한 영원 아버지, 곧 영원하신 아버지이시다.

b. 영원하신 아버지, 곧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시다.

우리의 소책자에 하나의 말씀이 있는데, 이형제님이 삼일성에 관한 진리를 해방한 그러한 소책자의 말씀입니다. 그 소책자에서 이형제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1970년대에 진리 논쟁의 가운데 있었죠. 그 제목은 이 어떠한 이단인가? 두 신성한 아버지, 두 생명주는 영, 그리고 세 하나님이라니. 다시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 덴 형제님이 아주 잘 알고 계시죠. 우리는 4개월 동안 신문에 우리의 글을 실은 적이 있습니다. 멜로리랜드라고 하는 그러한 단체와 싸웠죠. 사실 멜로리랜드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사실 그 단체를 본 사람이 있습니까? 멜로리랜드 신학교가 있었는데 어쨌든 그때 우리 동역자들이 함께 모여서 기사를 썼습니다. 그리고 기사를 계속 실었죠. 결국 우리는 아주 예민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는데, 결국 우리는 거기서 끝나게 되었죠. 그래서 또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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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동역자 형제님들 방문 애찬준비 (접대 준비중인 자매님들) | ………신약성경
2010-09-29 , 0 vote , 0 scr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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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하면 착각하기가 쉬우며, 환상을 사실로 여겨 결국 망상적이 된다 | ………태그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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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chch.kr/yoon/20499.html

 

[벧전5:5] ‥청년들은 연장한 이들에게 복종하고, 모두가 서로를 향해, 겸손으로 허리를 동여매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것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게 보이는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망상적이게 된다. 오바댜서 3절은, 자기를 속이는 가장 큰 원인이 교만임을 보여준다. 자기를 속여 망상적인 데 이른 사람은 아마 다 교만한 사람일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만일 고의로 사람 앞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고 지위를 얻고자 사람을 한 번 두 번 속이기 시작한다면, 그는 자기가 자신을 속이는 데 이르게 되며 결국 망상적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일단 교만하면 자기에게 무엇이 있고 또 무엇을 얻었다고 착각하기가 쉬우며, 점점 이 환상을 사실로 여겨 결국 망상적이 된다. 형제 자매들이여. 부디 교만을 작은 죄로 생각지 말라. 교만은 매우 쉽게 사람을 망상에 빠뜨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기를 배워야 한다.  (벧전 L/S)

 

 교만은 자아의 또 다른 표현이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자신을 알지 못할 때, 자신을 마땅히 알아야 할 그 이상으로 본다. 누구든지 스스로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자처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높게 인식하며,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느낀다면,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높게 보는 사람이고 교만한 사람이다. 모든 교만한 사람들은 다 사람들이 자신을 높게 말해 주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 아래 복종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사람은 언제나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는 늘 사람들이 자신을 높이기를 원한다.

(웟치만 니 전집 36권, 60권 에서)

 

 교만은 또한 자랑하는 것이다. 당신은 공개적으로는 자랑하지 않을 지 몰라도, 당신의 영적인 분량과 역량과 수완을 은밀하게 자랑할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랑한다. 『내가 가진 분량을 보라. 당신의 분량이나 역량이 나의 것과 비교가 되는가?』심지어 별로 분량이 크지 않은 사람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여전히 자랑한다. 그러므로 교만은 당신 자신을 높이고 다른 이들을 멸시하는 것이다.   (주님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주는 사랑의 말, 38쪽)

 

 교회는 모든 사람을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든다. 만일 당신이 대단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교회에 오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당신을 위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모든 사람을 굉장한 사람으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그러한 단체에 가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만유의 으뜸이신 그리스도만을 높이기를 원한다. 그리스도만이 중요한 분이시다.  (진리메시지, 81쪽)

 

 여러분이 오래도록 주의 손 안에 매우 유용할 것인지의 여부와 지속적으로 축복을 가져올 것인지의 여부는 여려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순수한가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야심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하며, 교만은 반드시 여러분의 발 밑에 있어야 한다. 야심이 있어서도 안되며, 지위에 대한 생각, 교만, 자존, 자만이 있어서도 안된다(장로훈련Ⅳ,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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