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경륜의 적용(6)- 싸움꾼이 되라!


진리의 언덕 2014-01-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1194.html
일부 믿는 이들 가운데 한 가지 잘못된 관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떠한 공격에도 반응하지 않고, 침묵하고, 
당하고, 피해를 감수해야 바르게 믿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이런 관념이 생기게 된 것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빰도 돌려대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도 가 주라는 주님의 권면들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영화나 교회역사 기록을 통해 사자에게 먹혀 죽을지언정 
저항하지 않았던 순교자들에 대한 어떤 인상을 가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 이런 권면이 있고 이런 것이 믿는 사람들의 한 방면의 특성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이 모두 항상 이래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표준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그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또 다른 방면의 믿는 이의 특성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싸우는 자로서의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에게도 어린양으로서 묵묵히 희생당하는 면이 계신 반면(요1: 
29), 유다 지파의 사자(계5:5 )로서의 방면도 있으십니다(창49:8-9). 
유대지파의 사자로서의 주님이 일곱 인으로 봉인된 책을 펴고 인을 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데 있어서 '싸우는 사자'로서의 자격이 요구된다 
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입니다. 사실은 이 두 가지를 고루 갖출 때 균형잡힌 
믿는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가 선한 싸움을 싸워왔다(have combated)고 말하고(딤후4:7), 
디모데에게도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했습니다(딤전1:18,6:12). 
그렇다면 이 선한 싸움의 실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왕국의 수립을 
위해 우리의 공통대적인 사탄과 그의 어둠의 왕국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탄이 눈멀게 한 가리워진 생각(관념)과 싸우는 것입니다. 
더 실제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경륜-그리스도 자신을 사람 안에 분배함으로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것-을 보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면 손해나 
손실이 오는 세력과의 싸움입니다. 


이제 이러한 실례를 고후10:1-6 을 중심으로 조금 더 살펴 보겠습니다. 

1. 발단 

바울이 심혈을 기울여 복음을 전하고 양육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경륜과 다르게 가르치는 어떤 사람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래서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할 만큼 서로 아끼고 사랑하던 관계가 
서서히 식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을 비난하며 '편지들은 중하고 
힘이 있으나 직접 만나보니 몸도 약하고(고전2:3, 고후13:4)직접 만나서 말을 
들어보니 언변도 없다(contemptible)고 깍아 내렸습니다(고후10:10). 

자. 우리가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침묵하며 묵묵히 
기도만 하고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그래 당신들 말이 다 맞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내가 못나서 그러니 이해해 달라. 만일 내가 당신들을 돌보는 일에 
더 이상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후임자를 물색해 보라 이렇게 해야 할까요? 

더구나 그들은 몸이 약한 것, 말이 시원치 않은 것 등등 생각하기에 따라 
인신공격에 가까운 내용들을 문제 삼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찌하든 성경은 
이 대목에서 사도 바울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명하고 자신을 공격하는 핵심부 
요새를 강타하는 식으로 반응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바울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 

첫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깍아 내리는 것이 거짓사도(또는 사단의 
일군 또는 지극히 큰 사도)(고후11:13, 15, 5)의 영향을 받은 결과임을 간파 
했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일군이 조종한 일에 대해 '십자가와 죽음'으로 착각된 
침묵과 무대응은 곧 영적 패배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수고하여 얻은 
사역의 열매(성도들)가 훼손 당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사도성의 권위가 훼손됨으로 앞으로 그들에게 사역할 문이 닫히는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권익의 훼손으로 이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자기 집에 든 도둑이 가족을 해치고 기물을 손상시키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이 미덕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반복해서 저지르는 
사람에게 이것도 가져 가라고 하고 저것도 집어준다고 주님의 인격이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 도둑이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더 나아가 주인에게 용서를 빌도록 
돕는 것이 참으로 그를 위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진리와 비 진리 사이에 끼어서 
방황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성도들의 상태로 확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즉 나만 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비진리를 진리로 착각하고 세월을 허비하 
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약간의 저항과 반대가 있더라도 무엇이 진리인지를 
담대하게 밝히는 것이 참으로 그분들을 위한 태도가 될 것입니다. 공연히 다른 
사람들 괴롭히거나 분란만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당신이나 잘 믿으라 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울의 태도와 다른 것입니다. 


3. 바울의 공격적인 조치 

그는 몸이 약하고 말이 시원치 않다는 공격에 대해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I be rude in speech),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 라고 반박했습니다 
(고후11:6). 그리고 '왜 너희들은 외모로만 사람을 보냐.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고 믿는다면 우리도 그리스도께 속 했으니 이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촉구했습니다(고후10:7). 

그러나 이런 공방이 일반적인 말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전쟁이며 바울의 
승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내용이 성경으로 우리에게 읽혀질만큼)은 
그가 육체대로 싸우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그리고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부수려고 함이 아니요 세우려는 
목적으로 변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이나 기독교계 변증 분야에도 말 잘하는 사람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가 논리와 언어구사에 있어서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을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외관상으로는 어떤 토론에서 판 정승을 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때 육체 안에서 자신의 천연적인 지혜를 사용하고 상대방을 파하려는 
(destruction)의도로 싸움으로 그 결과는 하나님의 권익과 무관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다소의 사울이 그런 자 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살지 않고 그리 
스도의 미덕으로 변증한 바울의 말은 싸우고 변명한 내용조차도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합니다. 


4. 바울의 공격 목표 

하나님의 경륜의 수행을 위해 임명된 사도바울의 고후 10장에서의 공격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람의 변화 받지 못한 생각 또는 관념 
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견고한 진'(strongholds)이라고 말했습니다(4절). 
더 풀어서 말한다면 이것은 생각에서 파생된 '모든 이론'(reasonings),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 심지어 (변화받지 못한) '모든 생각들'(every 
thought)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빌2:14, 딤전2:8, 사2:11-12, 고후11:3, 3:14, 사6:9-10등의 
본문을 깊이 묵상해 보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실제로 사탄(이 세상 신)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thought,노에마 3540)을 
혼미케 하여(hath blinded) 복음을 받지 못하게 방해합니다(고후4:4). 
그리고 이방인들이나 이방인들처럼 사는 성도들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vanity) 
을 따라 살게 조종합니다(엡4:17, 2:2). 

사탄은 겉으로 보면 허여멀겋고 말쑥한 신사도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영적인 
방면에 대해서는 총명이 어둡고 무지하여 마치 바보처럼 반응하게 합니다. 
다른 방면에서는 주님의 은혜를 누리고 영적 체험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경륜에 
관련된 방면에 있어서는 고집 센 말과같이 완고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한 편으로 계시의 빛이 비취어 깨닫도록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필요 
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 바울처럼 그들의 참 상태가 무엇인지를 말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고후10-13장).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사례가 생각납니다. 

진리에 밝은 한 형제가 우연한 기회에 집회소에 들른 모 교단 강도사와 
대화를 하게 되었답니다. 생각지 않게 이야기가 길어져서 둘은 그 형제님 
집으로 갔고 밤새도록 진리에 대해서 얼굴을 붉히는 지경에 가도록 토론했답니다. 
그 중에 하나는 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고 
선택된 특정인만을 위해 피흘려 죽으셨다는 주장을 했답니다. 당연히 그 진리에 
밝은 형제는 우리 구주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사실을 설파했습니다. 
서로 자기가 아는 성경 구절들을 찾아 들이대며 격론을 벌이다가 새벽 녁에 
그 강도사는 주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사실을 성경을 통해 받아들이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상태에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번은 교파에서 신학을 하고 전도사를 하다가 교회생활을 하게 된 형제님하고 
같은 소그룹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신실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도 
'쎄게'하는 매우 좋은 형제였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어려움은...이 형제님은 
자기는 사람이 쓴 책은 안 읽고 성경 만 읽는다는 것을 고집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신학교에 있을 때도 주석 책은 절대 안 봤다며 사람이 쓴 모든 책을 
거부했습니다. 얼른 들으면 틀린 것이 없어 보입니다. 성경만을 읽는다는데 나무 
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경만 읽는 그 형제님에게서 나오는 신언의 
말 내용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성경 본문만을 외워서 인용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어떤 나름대로의 해석적인 관점을 제시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 형제는 엉뚱한 
해석을 내 놓기도 했습니다. 지체들은 인내하면서 품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성질 급하거나 참으로 그 형제를 위하는 지체들은 찾아가서 그의 태도가 취우친 
것임을 알려주기를 몇 해 째.... 지금은 매우 균형 잡힌 달콤한 형제님이 되어 
계십니다. 

사실 이 문제는 그 형제님이 사도 행전 8:28-31에서 빌립과 이디오피아 내시의 
대화만 잘 이해했어도 쉽게 해결될 문제였습니다. 


위 두 가지 사례는 사람 안에 한번 굳어진 어떤 관념은 참으로 강력한 진과 
같아서 그것을 더 큰 빛으로 깨뜨리지 않으면 계속 그를 가리우는 수건이 되어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리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고후3:14-15). 
그리고 그 배후야 흑암의 권세를 가진 영적 실체들이지만 실제로는 어떤 어떤 
사람들과의 싸움임을 보여 줍니다. 


사실 개인적인 영성만을 관심하거나 적당히 믿는 사람에겐 싸울 일이 
많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번거롭고 고단한 수고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단 주님자신을 사람들에게 공급함으로 우주가운데 한 몸을 
건축하시려는 하나님의 갈망과 하나되어 보십시오. 그리고 이 일의 성취를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다 바치겠다고 서원해 보십시오. 그리고 실제로 생명을 관심하고 
주님 이외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며 생명의 흐름을 막는 것들을 제거하고자 
한다면 '영적 싸움'이 실감날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진도가 나갈 수 있는지'도 뼈저리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우며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를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는 '다윗의 사자' 닮은 
꼴들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5)-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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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어느 바리톤 음색의 대중 가수가 불렀던 노래처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이상이 없는 사람에겐 '인생은 나그네 길'일 뿐입니다. 
그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그냥 삽니다. 그들에겐 인생은 마치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도 같습니다. 

오늘도 주일 집회가 끝나고 플러턴 교회 제 2집회소 건축현장을 둘러보면서 
최근에 연결되어 교회생활하시는 한 형제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컴퓨터 관련 일을 하시는 형제님이신데 예전에는 사는 의미가 없어서 직장갔다 
오면 집에서 양주 마시면서 TV나 비디오를 보고 또 일하러 가고 집 사람하고 
싸우고 하는 것의 반복이었답니다. 그러나 UCLA에 다니던 딸이 교회에 연결되면서 
아빠인 그 형제님도 교회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왜 사는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해 
지니까 사는 맛이 난답니다. 그야말로 성질이 불같으셨던 형제님이 천주교에 
다니는 아내를 교회생활로 인도하기 위하여 요즘은 깊은 십자가의 죽음을 누리고 
계십니다. 똑똑하고 안에 든 것 많은 사람을 얻는 비결은 예전에 그런 사람이 
자신을 비워서 주님을 담고 주를 사는 본을 묵묵히 보여 주는 것임을 그 형제님 
은 알고 계셨습니다. 자기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질그릇으로 지어진 사람이 사는 목적은 그 안에 보배이신 주님자신을 
담는 것이라는 간단한 이치를 깨닫게 되면 이렇듯 인생의 목적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 동안은 나름대로 가치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추구하고 담아왔지 
만 주님자신과 비교해 보니 그 모든 것들이 땅에 속한 것이며 결국엔 썩어질 
것(배설물)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없거나 너무 
나 부족함을 보게 되고, 남은 인생을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얻고 더욱 풍성히 
얻는 이 한 가지 일에 초점을 맞추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며 우리도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왜 사느냐고 묻거든 웃지요.' 라는 어떤 시인의 말은 뭔가 고상한 의미가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목적과 이유를 선명하게 말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근본과 처지와 사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다음에 볼 출애굽기는 우리에게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선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40장이나 되는 출애굽기를 이 짧은 지면에 다 옮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개념을 파악하거나 전달할 때 나무를 보는 방면과 숲의 방면이 있는데 
여기서는 전체를 조망하는 '숲'의 방식으로 요약하여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출에굽기는 무슨 내용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사람마다 나름대로 다양한 답변을 
할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한 신실한 성경교사가 요약하여 제시한 다음과 같은 
정의를 좋아합니다. 즉 출애굽기는 '노예'된 사람이 '구속되고 구원'받아 나와 
'인도'받고 '계시'받아 '성막을 건축'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단락을 나누어 보자면, 

1) 노예 됨(출 1장) 
2) 구속, 구원됨(2장-15:21) 
3) 인도 됨(15:22-18장) 
4) 계시 받음(19-34장) 
5) 성막 건축(35-40장)이 될 것입니다. 


이제 각 항목 별로 조금씩 살을 붙여 보겠습니다. 


1. 애굽에 살면서 바로의 압제 아래 노예됨(1장)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이 총리대신 하던 시절엔 애굽에서 대접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가 시작될 즈음엔 요셉도 죽고 그를 아는 왕도 
죽었습니다. 오직 그냥 먹고 살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감독들의 
지시아래 바로의 국고성을 짓는데 동원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괴로와 했으며(1:11), 애굽 사람이 그들을 학대하고 
괴롭게 하는 것이 여호와께도 보였습니다(3:9). 


사람이 살다보면 괴로운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여 인생을 쏟아부어 한 일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애굽은 세상이고 
바로는 세상의 임금인 사탄을 의미하는데(요12:31)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수고는 
다 이 처럼 바로의 국고성을 건축하는 일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 
나라는 장차 바벨론 성으로 발전되었다가 일시에 무너져 멸망할 한 갖 티끌에 
불과합니다(단2:35). 자신이 한 일이 언젠가는 흔적없이 사라질 허무에 불과하다 
면 그것을 위해 허비된 시간들도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실은 오늘 날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방황과 괴로움은 육신이 힘든 것도 있지만 
심리세계에서 겪는 갈등이 더 그들을 괴롭게 합니다. 이것 저것을 가져보고 
맛보지만 그 깊은 속에 있는 공허와 허무함은 가시지 않음으로 그것이 그들을 
더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파스칼이 말했던 사람 안의 깊은 곳의 그 채워 
지지 않는 공간이 그들을 괴롭게 합니다. 일본에서 노벨상을 받을 만큼 유명했던 
한 소설가는 자살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상식적인 반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약 3500년 전에, 그것도 이역 만리 이집트 땅 부근에서, 이스라엘 민족 
에게 일어났던 이야기가 21세기에 동방의 나라에 살고 있는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맞습니다. 다만 옛사람의 영역에서만 본다면 출애굽기는 남의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방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즉 신약의 말씀을 따라 말하자면, 허물과 죄로 (우리의 영)이 죽어 있는 사람은 
(엡2:1)은 지금 한국 땅에 살고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도 영적인 시각 
에서 본다면 그는 애굽에 사는 사람이며 바로의 노예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이 세상의 유행을 따라 살며 (본인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지시아래 그들 안에서 역사하는 영을 따라 불순종의 
아들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것에는 순하고 말을 잘 듣다가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는 이상하게 이유를 대고 토를 달고 삐딱하게 
나갑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다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자기 좋은대로 
생각하고 자기 좋은 대로 결정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을 뿐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 중에는 악한 것도 있지만 매우 선하고 심지어 윤리적으로 칭찬받을 만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속에서는 참 만족과 안식이 없고 공허하고 
참 자유함이 없습니다. 앞서 소개했던 컴퓨터 전문가 그 형제님이 돈 많이 벌고 
미국 사람들 상대로 교육시키고 남 부러울 것 없는 집안이지만 사는 목적을 몰라 
방황했던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오! 우리가 다 한 때는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열려 구속과 구원을 맛보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2. 모세를 통해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구속과 구원을 체험함(2-15장) 

출애굽기 2장부터 주욱 넘겨 보니까 등장인물들이 여럿 나오더군요. 그러나 
그 중심인물들은 역시 모세와 바로였습니다. 물론 모세의 배후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지요. 이 단락의 상당 부분이 바로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려는 모세의 역할에 대해 할애 되었습니다. 

이 대목도 그냥 보면 과거지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를 따라 
모세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주 예수님의 예표로, 바로는 세상 임금인 
사탄으로 본다면 그 의미가 한층 새롭습니다. 

출12:7은 (어린양의)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라고 하고 13절은 '내가 그 피를 볼 때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피는 어린양이신 주 예수님의 
구속의 피를 상징합니다. 8절은 '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라고 합니다. 여기서의 양고기는 우리 안에 생명으로 들어 
오신 주 예수님을 상징합니다(골3:4, 요6:57). 

즉 예수의 구속하는 피와 예수의 부활 생명만이 우릴 바로의 학정에서 
그리고 애굽에서 구출할 수 있으십니다. 홍해를 건너와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출애굽기 15장도 역시 영적으로 볼 때 우리의 체험입니다. 



3. 인도를 받음(15:22-18장) 

위 부분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온 후 광야에서 머무는 동안 
모세의 인도르 받은 대목입니다. 그런데 조금 자세히 보니 그들이 문제삼고 
원망을 한 내용들이 다 먹는 문제와 연관된 것이었습니다. 물 달라. 배고프니 
먹을 것 달라. 고기 먹고 싶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있습니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말도 있고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 치사하게 먹는 것 가지고 그렇게 난리 
법석을 떠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일이 참으로 작은 일은 아닙니다. 

어떤 형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진리와 생명으로 무장할 기회를 얻기 위해 전시간 
훈련을 가고자 할 때 그러면 그후 먹고 사는 일은 어찌 될 것인가 하는 고려가 
한 번쯤은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요즘 교계 뉴스를 보면 덕망이 있어 보였던 
목회자가 퇴직금 문제 때문에 교인들을 실망시켰다는 뉴스도 있고 월급 문제, 
사택 문제, 자녀 학비 지원문제 등 돈 문제로 인해 갈등이 있는 경우가 종종 
보도됩니다. 우리가 다 이러한 시험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할 때 모세는 
이 문제를 여호와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 
으로 상상할 수 없는 기묘한 방법으로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체험 
들이 어느 정도씩은 다 있을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4. 계시를 받음(19-34장)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40년 동안 모래 사막 위로 이리 저리 몰려 다니면서 
별일이 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 대목은 땅에 속한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되'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가 될 것, 계명, 율례 등도 
말씀하셨지만 주로 성막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를 계시하셨습니다. 

오늘 날 많은 분들이 '계시 받았다'고 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직접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내놓는 이야기들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주된 내용이 성막에 관계된 것이라는 사실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주지 하다시피 성막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예표입니다. 
그리고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자와 교사같은 주의 종들이 해야할 일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임을 볼 수 있습니다(엡4:11-12). 

점심 때 뭐 드시고 싶으세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오늘은 짜장면을 한 번 먹어 
볼까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은 어제는 짬뽕을 먹었기 때문에 오늘은 메뉴를 
바꿔본 것입니다. 이런 원함은 그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은 아님으로 시간과 
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에 가족들을 두고 단신으로 
월남한 분은 반 세기가 흘렀어도 죽기 전에 고향 땅 한 번 밟아 보는 것이 소원 
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온 원함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이 사람에겐 이런 기도응답을 
저 사람에겐 저런 기도 응답을 주시는 방식으로 반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마음 깊은 속에 있는 창세전부터 예정하셨던 갈망(뜻)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 상관없이 변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4-5을 읽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간절한 원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즉 성막으로 예표된 주님의 몸을 건축하길 원하시는 것이 
모세에게 주신 이러한 계시로도 입증되고 있습니다. 


5. 성막을 건축함(35-40장) 

성막에 대한 동일한 내용이 출애굽기에 세번 반복된 것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즉 처음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내용이 있고, 그 다음엔 모세가 
그 내용을 백성들에게 전달한 내용이 있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지시대로 각종 기명과 기구들을 만든 기록이 그것입니다. 

저 같으면 그냥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지시하신 내용만 자세히 적고 그 다음엔 
모세는 여호와께서 지시하신 내용대로 백성에게 전하였더라 라는 단 한 줄로 
요약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지시한 대로 다 이행했 
더라 라는 한 줄로 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일이 그 세세한 것들을 
다시 반복하여 기록케 하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성막 건축에 대한 인상을 제게 깊게 깊게 남겼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다만 시간가운데서 말하자면 우리는 바로의 압제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전인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교회생활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엡2:22). 
오 이 어떠한 인생의 목표요 의미입니까!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4)-인간관계


진리의 언덕 2014-01-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1191.html


'하나님의 경륜'(딤전1:4)이란 말은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제 마음을 적신 적이 많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을 사람에게 분배하여(요10:10, 엡3:8) 주님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는 이 거대한 우주적인 프로잭트(마16:18)에 아무 것도 아닌 
저 같은 자도 뭔가 할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나님의 경륜의 두 주인공은 당연히 '하나님' 그리고 '사람'입니다. 


1. 우선은 하나님과 사람 간의 수직적인 관계가 바로 서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선다는 말을 조금 더 풀어서 말하자면, 아침마다 '주님자신'을 우리의 참 
양식 (요6:57)으로 먹는 시간을 갖는 것이고, 매일의 생활에서는 바로 그 
아침에 주님먹은 그 힘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사는 실재를 갖는 
것입니다 (요6:57 하반절, 갈2:20). 

(예전에는 주님을 먹는다 또는 우리가 주님자신을 얻고 더 얻는다고 하면 
뭔가 모르게 불편해 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엊그저께 잠깐 기독교 
방송을 듣는데 한 목사님이 설교에서 요1:16의 '은혜위의 은혜'를 받는 구절을 
설명하시면서 여기서 은혜는 바로 주님자신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은혜 그러면 물질적인 복받는 것을 생각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주님자신이다. 여러분 중 물질적인 복을 마음껏 받는 것과 주님 
자신을 더 얻는 것 중 어느 것을 더 귀하게 생각하느냐고 성도들에게 질문했 
습니다. 저는 속으로 '와 이 분은 참으로 깨인 분이시구나'라고 생각을 했습 
니다. 에딘버러 직제문서라는 개신교 교리집에도 '은혜는 사람 안에 오신 
하나님 자신'이라는 취지의 정의를 내려 놓고 있습니다. 

제가 사람이 '주님자신' 얻는 문제를 놓고 이런 저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이 문제가 선명하게 계시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성취에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을 어느 날 눈이 열려 보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순간에도 주님자신과 무관하거나 '주님+ 알파'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자신의 증가'(골2:19)라는 이 비밀을 
밝히 보고 담대하게 전파해야 할 것입니다) 



2.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 인간관계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하나님의 사업은 쉽게 말해 '사람 비지니스'입니다 
(롬14:20). 그러므로 사람을 싫어 하거나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들을 
거북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이 일에 있어서 큰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요3:16) '사람을 사랑하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 만나는 것이 취미가 되도록 
습관을 키워갈 필요가 있습니다. 워치만 니 형제님은 '사람 만나는 것'이 
취미 중에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혼자서 방 구석에 틀어 박혀 하루 종일 책이나 읽고 놀라고 하면 그 
게 좋지 사람 만나서 함께 있는 것이 매우 거북스러웠던 사람들 중에 하나입 
니다. 우선은 만나면 할 말이 없어서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나는 '아' 라고 
하고 싶은데 막상 입을 열어 말하면 '어'가 나온 적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말이 헛 나오뿐 아니라 다리가 후들거리고 얼굴이 달라 올라 
사람 만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을 본 후 저의 이런 
옛사람의 기질을 뒤짚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도 뒤 짚고 있습니다.) 


아침에 읽은 마태 복음 18장은 전체가 왕국 안에서의 (인간) 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즉 주님은 '천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냐'는 제자들의 질문을 받으신 후 긴 답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님의 답변내용을 조금 깊이 살펴 볼 때 그 
핵심은 천국백성이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의 바른 태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륜은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주 안에서 온전하게 세우는 
것인데(골1:25-28) 주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마 18장 내용을 간략히 분석 요약해 보자면, 

1) 어린아이처럼 되라(2-4절) 
2) 남을 실족케 말라(5-9절) 
3) 남을 멸시(despise)치 말라(10-14절) 
4) 교회의 말을 들으라(15-20절) 
5) 제한없이 용서하라(21-35절) 가 될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단체가 있는데 그 구성원들이 참으로 
어린아이같이 단순하고, 서로 마음 상하게 함이 없고, 멸시함도 없으며, 
권위에 순종하고, 서로 미안하다고 하고 또 조건없이 용서한다면 그들이 
사는 곳이 바로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먼저는 내 가정 안에서,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소 그룹, 그 지방의 교회에서 
이런 무리들이 세워져 간다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 실제적인 적용에 있어서 보다 선명한 인상을 받도록 위 요점들 중 
몇 가지만 조금 더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1) 어린아이(little children)처럼 됨 

주님은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 
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절).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전14:20에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어린아이같이 되라고 하신 위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라는 것입니까? 이 문제는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진지하게 받을 때 참으로 우리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 본문과 유사한 개념을 전달하는 다른 성경 본문들로는 마19:14, 막10:15, 
눅18:17, 시131:2, 벧전2:2 등을 들수 있습니다. 이런 본문들을 묵상해 
볼 때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은 '너무 많은 것들이 이미 그 사람의 생각을 
점령하여 복잡하지 않은 것, 단순하고 순수한 것,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 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눅18:17 
각주1참조). 

세상 일도 어떤 것은 어설프게 알아 고집만 센 사람보다 차라리 그냥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자를 데려다가 제대로 가르쳐 주인의 의도에 맞게 일을 시키 
는 것이 더 나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 저것 이미 그려진 종이를 지우고 새로운 
그림을 그리느니 차라리 백지 위에 처음부터 다시 그리는 것이 나은 것과 
같습니다. 성경공부를 함께 해 보아도 이 단체 저 단체를 거치며 이런 저런 
지식과 체험을 가진 사람보다 아예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체계적으로 
핵심 진리를 가르쳐 영적 진보를 이루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때가 
많습니다. 이미 나이가 들어 자신의 주관이 확고하게 굳어진 중년이나 노년 
보다는 중고등부 학생 또는 대학생들이 훨씬 단순하고 순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2세들을 주목하는 것입니다. 

' 어린아이처럼 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심령이 가난한 자'(the poor in 
spirit)들 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마5:3).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천국을 소유하는 특징들이기 때문입니다. 

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낡아지고 복잡해 지는지요! 
오 우리 안에 얼마나 쉽게 높아지려는 야심과 교만이 스며들어 오는지! 
적어도 교회 안에서 위 제자들처럼 자신의 입지를 고려하고 지위를 추구하는 
사람은 어린아이같은 자는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 주님! 우리를 더 단순하게 하옵소서! 
이 공간을 드나드는 모든 이들이 다 어린아이와 같게 하옵소서! 


(2) 실족케 하지 않음 

주님은 실족케 하는 일(offences, offend)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라고 경고하십니다(마18:7). 
오! 우리 중에 누가 남을 실족케 하길 원하며 또 실족하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이 본인이나 주변에서 쉽게 생기곤 합니다. 

성경에서도 실족에 대한 언급이 다음과 같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그러므로 만일 식물(고기)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8:13).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10:32). 이 사역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아니하고(고후6:3).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않더냐(11:29) 그런즉 우리가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롬14:13). 무엇이든지 내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14:2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가두어(마13:41). 


많은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일을 소홀히 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 남을 실족케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참으로 
남을 세우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같이 되고,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그들처럼 되고, 약한 자들에게는 약한 자가 
되고,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고전9:20-22). 

그는 마치 여러 모양의 그릇에 담긴 물처럼 쟁반에 담기면 넓게 퍼졌고 
호리 병에 담기면 길게 쌓였고, 빨간 그릇에 담기면 빨간 그릇 안에 담긴 
물이 되었고 사기그릇엔 또 그 그릇 안에 담긴 물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그에게 아무런 저항이 없을 수 있게 된 것은 자기의 개성을 
살리거나 고유의 무엇을 고집하는 것은 남을 거치게 할 뿐임을 알았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밖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본질인 물로 마른 사람에게 
흘러들어가 그들의 참된 필요인 목마름을 채워주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때 방법과 절차와 형식과 체면과 자존심과 
자기 이익을 고려함으로 핵심을 놓치고 사람을 다치게 했던지요!! 

사람의 마음은 한 번 다치거나 상하면 원상회복이 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상처주었다면 회개하고 용서하면 된다 
는 생각으로 생긴대로 내키는 대로 말도 함부로 하고 아무렇게나 
사는 태도는 반드시 재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생활은 물론 
일반 사회생활에도 큰 어려움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밖에 '남을 멸시치 않음', '교회의 말을 들음' '남을 제한없이 용서함' 
등의 공과를 더 배우기 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되 자기 야심을 성취할 길이 보이지 않거나 
남에게 상처받은 것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함으로 실족합니다.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생명의 길을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 하차를 하거나 
뒤로 물러서 침륜에 빠지는 것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어쩌다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은 마18:23-35을 여러 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지체가 자신에 대해 가한 상처는 눈에 흙이 들어가더라도 도저히 
용서 못할 일일지 모르나 위 본문 내용에 의하면 '백 데나리온' 빚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마18:28). 그러나 그가 우리 주님에게 탕감 받은 빚은 '일만 
달란트'입니다(18:24). 이 둘의 차이는 자그마치 60만분지 1입니다. 6천배나 
6만배도 아니고 60만배입니다. 이처럼 천연적인 옛사람인 우리의 마음은 
좁습니다. 만일 이런 좁은 마음을 고수하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어느 형제를 
마음의 중심에서 용서치 않는다면 그는 하늘 아버지로부터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35절). 이런 사람은 아마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 그러나 남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배우기 어려운 공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오! 왕국의 표준은 얼마나 높은지요! 우리 모두가 우리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인해 이 표준에 이르기 원합니다(고후5:21).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3) -그림자와 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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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그림자 놀이'라는 것을 했습니다. 

밤에 희미한 조명을 배경으로 벽을 향하여 각종 손 모양을 해 보이면 
손 모양의 그림자가 개도 만들고 닭도 만들고 토끼도 만들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주로 그림자를 쳐다보며 신기하고 재미있어 했습니다. 
그러나 게 중엔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손재주 좋은 형들의 손 모양을 
유심히 바라보며 따라 하기도 했습니다. 

또 달 밤에 그림자 밟기 라는 것도 했습니다.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의 그림자를 쫒아가서 
밟는 놀이입니다. 이긴 사람은 이리 저리 도망 다니며 그림자를 안 밟히려고 
하고 술래(진 사람)는 그림자를 밟고 술래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며 쫒아다닙 
니다. 

위 두 가지는 다 실물이 움직이는대로 그림자가 따라 한다는 것이 공통된 
현상입니다. 


성경은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그림자에 해당되는 것이 있고 
또 그것의 실재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다른 말로 허상입니다. 
있는 것 같으나 막상 잡으면 아무 것도 없는 그런 것들... 솔로몬은 부귀와 
영화 높은 지위를 맛보았으나 결국 그 모든 것들이 다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헛된 것을 대치할만한 실재 또는 참 실물을 
발견하고 소유하지 않은 한 '헛된 바람을 잡는 것 같은' 그림자 밟기 놀이는 
여러 세대를 이어서 계속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임종시 인생의 
헛됨을 토로하는 어른들을 보면서도 자신도 그런 같은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뭔가에 홀리지 않고서야 다른 일에는 그리도 똑똑한 그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그림자들을 좇는 허무한 인생을 살리가 없습니다(엡2:1-3, 4:17-18). 


신약 서신서에서 '그림자'(shadow)를 언급한 곳이 몇 군데 있는데(골2:17, 
히8:5, 10:1) 저는 그 중에서 골로새서 2장에 있는 다음 부분을 깊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런 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which are 
the shadow of the things to come)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골2:16-19). 


위 말씀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 아닌 종교적인 의식들'을 대비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눈에 보이는 의식들이 그림자다 이렇게 뭉뜽거려 
말하지 않고, 먹고 마심, 절기, 월삭 등등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또는 유대교의 배경을 가진 회심한 주의 제자들이 구약의 율법이 
요구하는 각종 의식과 관련하여 혼동을 일으키고 있었기에 그런 밖의 행위들은 
안의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함을 바울은 말하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레위기 11장을 보면 먹을 수 있는 생물들 리스트가 주욱 열거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참된 먹거리는 그 그림자들의 
실재인 주님 자신입니다. 신약 도처에서 주님을 먹고 성령을 마시는 언급과 
사상들이 발견됩니다. 만일 누가 레위기 말씀을 지키려고 토끼나 사반 고기는 
안 먹고, 새김질하는 소고기는 먹으면서 정작 요한 복음 6장과 고전12장이 
말하는 생명의 떡이신 주님과 생수이신 성령을 먹고 마시는 것은 소홀히 한다면 
그는 그림자를 주목하고 실재는 놓치는 종교인인 확률이 높습니다. 

또는 레위기 23장이 말하는 각종 '절기'와 이에 더하여 소위 교회력에 있는 
사순절이니 고난주간이니 하며 특정 날을 지키면서 그 실재인 주님을 맛봄으로 
인한 즐거움을 잃어버렸다면 그 역시 그림자는 중요시하되 그 실재를 놓친 
자입니다. '월삭'(new moon)(민28:11)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어둠가운데 있다가 
빛이신 주님으로 돌이켜 새로운 시작을 갖는 것이 오늘 날 월삭을 참되게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안식일(레23:3)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장로교 모 교단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의 자녀였던 한 형제님은 주일성수하려고 
그 다음 주 월요일이 중요한 시험이라도 주징 자정을 넘기지 전까지는 시험 
공부를 할수 없었다고 간증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안식교단 
이외에도 안식일 준수(주일성수?) 교리가 적지 않은 분들에게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좋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참된 안식일 준수는 그분이 쉬신 것처럼(창2:3) 우리도 육체의 열심과 
노력을 그치고 영 안에서 안식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주는 참된 영적 실재는 
바로 완성과 안식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과 연합하여 한 영됨을 누릴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참된 안식을 맛볼 수 있습니다. 물론 육신 안에서는 '한 손 
마른 자'를 고치기도 하고 배고프면 밀이삭을 잘라 먹어도 가합니다. 오랫만에 
휴가를 맞이하여 낮잠도 자고 하고 싶은 것도 하며 싫컷 쉬어 보지만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좀이 쑤시고 지루해지며 도리어 안식이 깨지는 경우를 
우린 경험합니다. 참된 안식은 안식일의 실재이신 주님 안에서만 있습니다. 


이런 이해가 골 2:17이 말하는 그림자와 실재를 바로 푸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이 글 제목이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임으로 실제적인 몇 가지를 
언급해 보겠습니다. 



1. 안식교가 주장하는 안식일 준수 

물론 구약 성경에 안식일 준수에 대한 언급이 여러 군데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규례들은 참으로 그림자일 뿐이며 신약의 성도들도 
지켜야 할 실재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바로 위 본문 위에서 보듯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실 때 우리들의 죄와 죄들을 처리하셨을 뿐 아니라 
안식일 준수를 포함한 모든 의문에 쓴 증서들을 도말하셨기 때문입니다 
(Blotting out the hand-writing of ordinances)(14절). 

만일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안식일 준수(내지는 주일성수)를 하지 않으면 
불의하다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치료하신 주님이 먼저 불의한 자로 정죄 
되어야 마땅합니다(마12:9-14). 그러나 주님 자신은 영원토록 의로우신 분 
이십니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며 불의가 없으십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구약의 의식적인 율법인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면 
안식일외의 다른 모든 율법들도 엄격하게 지켜야 마땅합니다. 갈라디아서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3:10). 이어서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자가 없고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임을 말합니다. 


2. 신약 교회가 소위 교회력을 지키는 일 

언제부터인가 개신교 안에도 교회력이니 사순절이니 하는 말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교회력 개념 안에는 전통적인 의식인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오순절 등도 포함이 됩니다. 인터넷 검색에서 '교회력'이라는 검색어를 쳐 
넣어서 나온 다음과 같은 자료는 오늘 날 '특정한 날을 지키는' 소위 골2:16 
본문의 변종이 얼마나 신약 성도들 안에 만연되어 있는지를 알수 있습니 
다. (교회력 구글 검색)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것이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림자에 해당될 뿐입니다. 그림자를 붙들고 실재를 놓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는 대적의 고차원적인 수법입니다. 즉 엉뚱한 것에 
세월을 낭비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주목치 못하게 하는 전략입니다(엡5:16 
-21). 

위와 같이 성경이 '그림자'라고 판단한 것들을 붙들고 귀히 여기는 분들은 
최소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딤전 1:4)에 대해서 선명한 이해가 
크게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무엇입니까? 본문 문맥을 따라 설명하자면 
골2:19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마디와 힘줄에 
해당되는 지체들이 다른 성도들을 공급하고 연합케 하여 그들 각자 안에 
하나님의 증가로 인한 생명의 성장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 
안에서의 하나님의 증가(원문 참조)는 주님의 몸을 건축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바로 이 몸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이기 때문입니다(엡1:23). 


이러한 진리인식이 분명하다면 결코 그림자에 불과한 '대강절'이니 
'사순절'이니 하는 절기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지키고 안 지키고는 생명의 성숙을 통한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이라는 
하나님의 갈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실재는 
없는 그림자 밟기 놀이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오 주님 우리 모두의 마음 눈을 열어 주소서! 
당신의 기뻐하심이 무엇인지 참되게 보게 하시고 
모든 그림자에서 돌이켜 실재이신 주님자신만을 주목케 하소서! 

 



하나님의 경륜의 적용(2)- 씨뿌리는 자와 씨


진리의 언덕 2014-01-15 / 추천수 0 / 스크랩수 0 http://blog.chch.kr/7777/51188.html
어떤 책은 재미있게 읽긴 하지만 나와는 직접 관련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당장 내가 맞 부닥뜨린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읽는 것도 있습니다. 사용 설명서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성경을 읽되 남의 이야기처럼 읽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생활을 시작 한 이후로는 그 말씀들이 다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오늘 아침에 마태복음 13장을 읽었습니다. 
소위 씨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것이 들어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서의 핵심은 세 가지인데 씨뿌리는 자, 씨, 그리고 
밭으로 예표된 우리의 마음입니다. 



1. 씨 뿌리는 자 

마13:3은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대목은 비유입니다. 그러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참 내용은 
무엇입니까?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씨뿌리는 자'로 비유된 누군가가 
뭔가 모르지만 '씨'로 지칭된 뭔가를 뿌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의 '씨뿌리는 자'는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말씀은 말씀으로 푸는 것이 제일 정확한데, 37절에 의하면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주 예수님-라고 정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에서 주님자신이 씨뿌리는 자는 '인자'(the Son of Man)라고 
밝히셨으니 더 말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에 저는 여기서 더 전진된 묵상이 있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예수님 지상 사역시의 과거 사실만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승천 하신 이후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이 직접 복음의 씨를 
뿌리고 다니신다는 뉴스는 아직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구지비 사례를 끄집어 내자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고 하심으로 사울을 바울되도록 
회심시킨 이야기 정도가 생각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지금은 씨를 뿌리지 않으시는가? 

여기까지 묵상할 때 그렇지 않다 주님은 지금도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 사람들 안에서 씨를 뿌리고 계신다는 빛이 왔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누림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씨뿌리는 자'가 아니며 될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거나 철학과 윤리를 설파하는 
사람들도 복음 전도자로 간주되는 것은 지나친 것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오직 거듭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자신'만이 씨뿌릴 자격이 있으십니다. 

둘째는 복음을 증거하는 자는 자신의 복음 전파 경험이나 말 재주를 너무 
신뢰하지 말고 자신 안의 '씨뿌리는 자'로 하여금 씨를 뿌리시도록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앙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은 아니로되 주님과 하나된 자였고 자기가 아닌 
주님을 사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나는 심었고'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씨뿌리는 자'와 하나로 연합됨으로 '나는 심었고'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고전3:6). 


마가는 그의 복음서 4장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싹 (the blade)그 다음엔 이삭(the ear) 
그 다음엔 충실한 곡식(the full corn) 그 다음엔 추수가 있을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생명되신 그리스도가 점점 자라시고 
형태를 이뤄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날 어느 특별한 장소로 옮겨가는 
문제와는 다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성경을 수 차례 심지어 수십 차례 읽었다면서도 
이처럼 분명한 핵심을 놓치는 것일까요. 수건이 그 마음에 있는 채 성경을 
읽기 때문일 것입니다. 

은혜의 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천사들이 '영원한 복음'(계14:6)을 전하기 
전까지는 씨는 씨뿌리는 자와 연합된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 뿌려질 것입니다. 
즉 특별한 선교사나 전도사님들 목사님들 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성도들에 의해 뿌려질 것입니다(벧전2:9). 

이 일이 현재 택사스 주의 한 도시에서 현실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아침마다 이런 일이 미국 온 땅 심지어 전 세계에 까지 파급되기를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2. 씨 

씨부리는 자가 뿌리는 씨는 배추 씨나 오이 씨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물질 축복의 씨나 건강 축복의 씨도 아닙니다. 
이 씨는 성경 본문에 의하면 '천국의 말씀'(the word of kingdom) 
입니다(19절). 38절은 이 씨가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8:12는 '천국의 아들들'(the children of kingdom)이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씨는 예수 믿고 천당 간다거나 지옥에 안 간다는 씨와도 
많이 다릅니다. 또한 천국의 씨는 마음 밭에서 자라는 것을 함께 말해야 하고, 
씨가 자라지 못하도록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의 정체들이 함께 말해져야 합니다. 

예수 믿고 죽기만 하면 천국은 100 퍼센트 간다고 말하는 씨는 
여기서 말하는 천국의 말씀인 씨와는 완전히 다른 씨-다른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마7:21은 예수 믿고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엄중한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 대신에 이 말씀의 조건을 깊이 묵상하고 그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날 교계에도 씨뿌리는 자와 어느 정도 연합된 사람들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입에서 선포되는 씨가 '그 씨'인지는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싸가 다르면 다른 싹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뿌리는 그 씨가 마태복음 13:3에서 인자가 뿌리시던 그 
씨와 같은 종류의 씨인지를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본의 아니게 원수에게 쓰임받아 가라지를 뿌리는 짓을 
할 수 있습니다(25절). 여기서 원수 사탄도 자기가 직접 뿌린 경우 보다는 
그의 일군들을 동원하여 그리한 것입니다(고후11:15). 



3. 떨어지는 곳(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씨가 진짜인지 유사품인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곳에 떨어지는 가도 
열매 맺음에 있어서 큰 영향을 줍니다. 

이 천국의 말씀이 떨어지는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사람의 존재 안이고 더 정확히는 마음(heart)입니다(19절). 

왜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길가이고, 돌밭이고, 가시떨기이고 
또 어떤 이의 마음은 좋은 땅인지는 성경 본문에 잘 나와 있습니다 
(마13:19-23). 

오늘 날 마음을 처리하는 문제와 생명의 성숙을 복음과 함께 
전파하는 단체가 어디있습니까? 길가, 돌밭, 가시떨기 마음을 
처리하지 않고 주님 앞에 갈 때에 작은 상은 커녕 벌을 받고 
심지어 바깥 어두운 곳에 내 쫒겨 슬피울며 이를 갈 가능성도 
함께 말해주는 단체가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인들을 속량하여 죄를 사하시고 
거듭나게 하실 뿐 아니라 생명의 성숙을 통한 맏아들의 형상을 
본 받음까지를 포함한다(갈4:4-5, 엡1:5, 롬8:29)는 하나님의 경륜에 
눈 멀때 결코 완전한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불완전한 복음은 불 완전한 구원을 가져올 뿐입니다. 


장로교파 분들이 전하는 복음, 소위 구원파가 전하는 복음도 
나름대로 복음의 어느 부분을 포함하긴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3장 2-11까지에서 전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부족이 있습니다. 
특히 6절에서 말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복음은 상당 부분이 그냥 지나치거나 
그냥 문자로만 언급될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이 복음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취었던 진짜 완전한 복음입니다. 로마서 전체는 하나님의 복음을 
말하는 책이나 그 책 내용이 구속의 죄사함이나 거듭남만이 아니라 
개인의 영화롭게 됨(롬8:23)과 그리스도의 몸 안의 생활(롬12장)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내포합니다. 


이러한 천국복음(this gospel of the kingdom)이 모든 민족 온 세상에게 
전파되어야 끝이 올 것입니다(마24:14). 

(그럼에도 한국 신학계의 교통정리자를 자임하는 어떤 단체는 
바로 위 24:14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됨으로 이방인들에게 적용하면 
큰일나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 분들에겐 성경 66권이 다 그들의 성경이 
아닙니다.참으로 지금은 바른 진리 분별이 절실히 필요한 혼잡의 시대임에 
틀림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