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387 싸움과 장자권은 연관이 있음(2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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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상 싸움(신 20:1-20)과 장자권(신 21:15-17)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영적으로 말해서 싸움과 장자권은 연관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싸움을 통해서만 우리의 장자권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싸움을 통해 장자권을 보존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싸우지 않는다면 마치 에서가 그의 장자권을 잃는 것처럼 우리도 장자권을 잃게 될 것이다(히 12:16-17). 집이나 포도원이나 아내를 염려하거나 두렵기 때문에 싸우지 않는 자들은 승리를 나누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누릴 약탈물, 탈취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싸우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들의 장자권을 잃을 것이다. 우리의 장자권을 보존하기 위해 싸우는 데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 자신 안에는 싸울 힘이나 능력이 전혀 없다. 자신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싸움에서 승리하리라는 어떤 확신도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싸울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땅을 할당해 주셨지만,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들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


가장 두려운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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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요한계시록2:4 

 

 

 

기이하면서도 기이할 것이 없는 한 가지 사실은 ...

처음 사랑을 버린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에베소 사람들에게 여전히 많은 활동과 열심과 부지런함과 고난 받음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외적인 수고는 비록 여전하지만 목적은 이미 전과 같지 않다!

성도들의 위험은 바로 외적으로는 전에 주님을 사랑하던 습관은 있지만,

내면에서는 이미 처음에 주님을 사랑하던 마음을 잃은 것이다.

차라리 처음 사랑을 버린 후에는 처음의 일도 그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러하다면 자신의 실패를 보고 놀랄 것이며 타락한 것을 알고서 회개하고 회복될 것이다.

가장 위험한 것은 성도들이 주님의 빛 가운데 있지 않고

볼 수 있는 빛을 얻지 못하고서도 모든 일들이 전처럼 잘되고 있다고 여기고

영적인 생명 안에서 분명 주님과 간격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마음의 심히 깊은 곳에서 이미 주님과의 그 뜨거운 사랑의 교통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 자신에게 가장 두려운 한가지는 바로 우리의 일에서 항상 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기는 자들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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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심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시다(고전11:3).

하나님을 우리의 머리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이는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머리 되심 아래 있는 그리스도가 각 남자의 머리이심 

 

고린도전서11장은 이렇게 말한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는 스스로 각 남자의 머리인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머리 되심 아래서 각 남자의 머리이시다.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 있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임

 

각 남자의 머리가 그리스도이듯 "여자의 머리는 남자" 이다.

그러나 남자는 스스로 여자의 머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오직 자신을 그리스도의 머리 두심 아래 둘 때에만 머리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머리 되심 아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각 남자들 위에 머리이시다.

이와 같이 남자들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 있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여자의 머리가 되어야 한다.

머리 되심 아래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 위에 머리가 된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우리는 이것이 어떻게 세워졌는지에 대한 뛰어난 본을 본다.

사복음서는 그리스도가 항상 하나님의 머리 되심 아래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그분은 모든 제자들의 머리셨다.

그리스도는 결코 아버지에게서 독립하지 않았다.

요한복음 5장 50절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또한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들은 항상 하나님의 머리 되심 아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다른 사람들 위에 머리 되심을 행사하셨다.

예를 들어 그분은 베드로가 마치 자신이 머리인 양  행하며 독립적인 생명을 살 때마다 

베드로를 매우 엄격하게 다루셨다.

주님은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깨닫도록 하심으로 베드로를 바로잡아 주셨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머리 되심 아래 있었던 것처럼,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 있어야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시며,

하나님의 머리 되심 아래 있는 그리스도가 각 남자의 머리이심을 본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 있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이다.

 

                                                                    성경에서 본 현숙한 여인 

 



가을 국제 장로 집회 심화 훈련에 참석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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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2박3일동안 성경진리 사역원에서  455명의 성도들이 모여
오늘날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관한 내용을 대만 동역자 형제님을 통하여 교통해 주셨다.
지난 10월19일부터 2박3일동안 동말레이지아에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신성한 움직이심을 주제로
아시아에서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관한 특별한 교통을 가지신 것을 전달해 주셨다.
우리의 하나님은 여전히 움직이시고 계신다. 우리는 주님의 회복이기에 하나님의 움직이심 안에서 움직이어야 한다.
구약은 하나님의 움직이심의 역사였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통해 움직이셨다.
신약에서 그분의 성육신은 가장 큰 움직임이셨다. 그분의 부활과 승천안에서도 움직이셨다.
사도행전에서는 제한 없이 움직이셨다. 우리가 움직일때 눈이 열리게 된다.
이번에 네덜란드에서 53개의 국가에서 성도들이 10시간에서 15시간의 비행기를 타고 모였다.
하나님은 21세기에서도 움직이고 계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동참해야 한다.
1960년대에는 생계를 위해서 피난갔지만 이제는 복음을 위해 가야 한다. 타고난 사람은 움직이는 것을 좋아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느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1980년대에 선교사의 숫자가 미국 다음으로 한국이 많았다.
누가 아시아에 갈 것인가? 누가 주의 회복을 아시아에 가져 갈 것인가?
동남아 154개의 민족이 살고 있다. 그 곳에 주님의 회복이 높은 복음을 전파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날마다 오늘날의 하나님의 움직이심에 동참해야 한다.
세계의 역사는 다섯방면으로 변화 되고 있다. 1.구심점이 서양에서 동양으로바뀌고 있다.
2. 21세기 기독교의 중심이 서양세계에서 아시아 남미주 아프리카로 바뀌고 있다.
3.또한 과학이 발전하고 사람이 살기 좋을 수록 진리에 대한 보편적인 갈망이 일어나고 있다.
4.전통적인 기독교는 철저히 파산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수가 천이백만에서 팔백만으로 해마다 칠천명씩 교회를 떠나고 있다. 5.지금 지구는 지구촌이다. 그러므로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가 드림팀이 되어 몸의 길을 가야 한다.
1985년도이후 미군이 철수한 이후로 베트남에 사천명의 성도들이 있다.
아시아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1. 70억의 세계 인구중 삼분의 이가 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다.
2. 아시아지역 복음 전파가 가장 적다. 3. 아사아 지역이 주의 회복이 강력하다. 4. 아시아의 신흥국가가 높은 복음에 열려 있다.
5.아시아가 곡식이 휘어졌으므로 지금이 수확하기에 좋은 때이다. 6. 아시아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나라이다.
그러므로 아시아를 복음화, 진리화, 교회화 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가야 하는 가? 1. 기도가 강화되어야 한다.아시아에서의 주님의 움직이심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20여년전 러시아를 위해서 기도 한 결과 지금 200여개의 교회가 산출되었다.
2. 복음 확산을 위해 사람이 가야 한다. 몽골에 7개의 교회가 있다. 동역할 성도가 필요하다.
네팔,캄보디아,라오스, 베트남, 스리랑카, 방글라데쉬, 인도, 중동, 파키스탄등에 단기간이라도 가야 한다.
3. 재물이 가야 한다. 주님의 움직이심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한다. 후방에서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후에 하나님의 정하신 길에 대하여 남가주에서 사용한 파워 포인트를 보여주셨다.
어떻게 하나님의 정하신 길을 수행 할 것인가? 어떻게 교회 생활을 실행 할 것인가?
어떻게 집에서 교회 생활을 할 것인가를 교통해 주셨다.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세가지 중점은
진리를 모든 성도들 안으로, 교회생활을 가정안으로, 복음을 우리의 생활 안으로 가져가야 한다.
교회 생활을 가정에서 하는 것의 고려사항으로 몸이 유기체라면 모든 지체가 살아있어야 한다.
그들이 유능하든 유능하지 않든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집에서 교회 생활은 기도, 돌봄, 나눔, 열매맺음의 생활이지 집회가 아니다. 세포가 건강하면 몸이 건강해 진다.
리 형제님의 하나님의 정하신 길의 세 중점은
1.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2.집회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오라고 하는 것에서 가는 것으로 이것이 유기적인 실행이다.
무엇이 가정을 여는 것인가?
 먼저는 모이기 위하여 거실을 열고, 식사하기 위하여 주방을 열고, 같이 살기 위하여 침대방을 여는 것이다.
열린 가정의 기능은 무엇인가? 1. 기도(요16:24)  2. 돌봄(요17:13) 3. 나누어줌(요일1:4) 4. 열매 맺음(요15;11,8)
교회 생활의 80%가 집에서 모여야 한다.
고려해야 할 세가지 1.관념의 전환이 필요 2. 제도를 바꿈 3. 실행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으면, 우리는 축복을 받고 그리심산 위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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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라이프스타디

메세지 9


O.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충고와 경고의 말을

기꺼이 지킴으로써 축복을 받음

 

 11장 8절부터 25절까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충고와 경고의 말을 기꺼이 지키면, 축복을 받을 것임을 본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지킨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것이다.

 

1. 강성하여 약속된 땅에 들어가 그것을 얻음

 

2. 약속된 땅에서 그들의 날이 장구함

 

3. 하나님께서 그들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심

 

  오늘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인 우리에게 비는 그 영이시다. 하늘로부터의 그 영의 내리심 아래 우리는메마르지 않는다.

 

4. 모세의 말을 그들의 마음과 혼에 둠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혼 위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손목에 매어 표나 기호로 삼아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와 관련되는 모든 것과 우리의 표현인 모든 것들에 매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를 우리의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에 관해 말함으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그리스도로 점유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5. 여호와께서 그 모든 나라 백성들을 그들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들이 그 나라들의 땅을 소유함

 

 이 제 11장 8절부터 25절까지에 있는 축복들을 검토해보자. 이 축복들에는 강성하며 약속된 땅을 소유하도록 격려받는 것,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서와 그분의 임재 안에서 그 땅에서 우리의 날이 장구한 것, 하늘로부터의 물 주심을 받는 것,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을 견고히 붙드는 것 등이 포함된다. 주님을 견고히 붙잡고 그분의 길들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축복이다. 이 축복들 중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이다.

 

P. 모세가 축복과 저주를 이스라엘 자손 앞에 두고

       그들에게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당부함

 

 26 절부터 28절까지에서 모세는 ,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28 절에서 모세는 계속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한다. 우리가 축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느냐는 우리가 주님께 대하여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으면, 우리는 축복을 받고 그리심산 위에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저주를 받고 에발산 위에 있을 것이다.